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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문턱 앞에서 좌절하는 HIV/AIDS 감염인들
교통사고 등 심각한 상황에서도 치료 거부, 차별적 치료 관행 존재해
등록일 [ 2016년12월13일 20시55분 ]

2013년 치질 수술을 위해 병원에 갔다. 혈액 검사를 하고 바로 마취를 했다. 누워 있는데 방을 폐쇄하자느니 소독하자느니 설왕설래하는데, 설마 나에 대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고 20분가량 있었다. 의사가 와서 “여기선 힘들 것 같다. 정확하진 않지만 HIV에 감염된 것 같다.”라며 국립중앙의료원으로 가라고 했다. 처음 HIV 양성 판정을 받아 청천벽력 같은 상태라 왜 수술을 못했는지 따지질 못했고, 마취가 풀릴 때까지 병실에 누워 있어야 했다. 부끄러움 때문에 병원 근처에도 다니지 않다가, 나중에 진료비 내역을 보니 치료도 못한 상태에서 입원료와 마취료가 정산되어 있어서 화가 났다. - 치질 수술 거부당한 ㅅ 씨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감염인,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 환자들은 단지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병원에서 치료 거부를 당하는 일이 잦다. 치료를 받더라도 감염 예방을 명목으로 비감염인과는 다른 차별적인 대우를 겪기도 한다. 치료 거부를 당하더라도 감염인들이 대응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아래 KNP+)는 감염인 치료 거부 사례를 모아 13일 서울 마포구 인권중심사람에서 발표했다.
 

13일 인권중심사람에서 열린 HIV/AIDS 감염인 진료거부 차별 사례 발표회에서 권미란 활동가가 실제 사례들을 발표하는 모습.

만연한 HIV 감염인 차별, 감염인 스스로도 차별 내면화 심각해

KNP+는 올 한해 치료 거부를 겪은 감염인 11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감염인들은 교통사고, 신장투석, 맹장염 수술 등 급박한 치료를 비롯해 치질, 물리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차별을 겪고 있었다.
 

심층 인터뷰에 따르면 감염인들은 대체로 오랜 치료제 복용으로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당사자들도 이러한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HIV 감염인도 일반적인 감염 예방 대책을 시행하면 된다는 것이 의학계의 정설이다. 그러나 병원 측은 감염인 치료를 위한 전문성이 부족하다거나 별도의 소독 방식, 치료 기구가 필요하다는 등 잘못된 근거로 치료를 거부했다. 작은 병·의원뿐 아니라 감염내과가 있는 종합병원조차 협진 과정에서 치료 거부가 일어났다.

2015년 교통사고를 당했다. 구급차에 실려서 인근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가게 됐다. 간호사가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이 있느냐”고 물어서, 에이즈 치료약을 오래 복용했고 타인에게 전염될 위험성이 희박하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다음날 아침 의사가 “다른 병원으로 가야 되겠다”라고 했다. 보호자도 없고 몸 이곳저곳 붕대를 감싸고 있는 상태에서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싶어 “우리 같은 사람은 병원에서 치료도 못 받는 거냐”라고 물었다. 의사는 “에이즈 감염인 환자와 일반 병실을 다른 환자와 같이 쓰면 소문이 나서 병원 망한다”라고 말했다. - 교통사고 치료 거부당한 ㄷ 씨


2015년 3월 배가 아파서 119를 불렀다. 오후 11시경 근처에 있는 종합병원에 도착해 맹장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료진이 옆에 있는 남편에게 따로 먹는 약이 있느냐 물어서, 에이즈 약을 4~5년간 먹어왔다고 말했다. 의료진이 “여기서 수술하면 청소도 하고 소독도 해야 해서 번거로우니 다니던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상황에서 별다른 대책이 없었던 터라, 남편은 진통제 링겔을 맞고 있는 나를 데리고 직접 차를 운전해 국립중앙의료원으로 갔다. 거기서도 바로 수술이 이뤄지지 않아 새벽 5시가 되어서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 맹장수술 거부당한 ㅈ 씨


설령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더라도, 감염인이라는 것 자체가 낙인이 되곤 했다. 장염 때문에 올해 8월 종합병원에 입원했던 ㅊ 씨는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남들과 다른 파란색 식판을 썼다. 체온계, 혈압계, 청진기도 따로 바구니에 담아서 줬다. 병원 측은 침상이나 링겔 등에 혈액조심이라고 기재하는 등 감염 사실이 드러날 수 있는 표시도 공공연하게 했다.
 

심지어 치료 과정에서 HIV 감염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적지향을 밝히는 경우도 있었다. 2014년 HIV 확진 판정을 받은 ㄹ 씨는 항문 콘딜로마 때문에 집 근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당시 의사는 ㄹ 씨에게 “당신 게이냐”, “남자랑 했느냐” 등을 물었고, 어머니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콘딜로마를 “동성애자들만 걸리는 병”이라고 말했다.
 

2015년 10월경 보라매병원이 HIV감염인 치과진료를 이유로 진료용 의자, 파티션 등에 비닐을 씌워놓은 모습. ⓒ권미란

이에 감염인들은 간단한 치료를 받을 때 차별에 대한 우려 때문에 감염 사실을 숨기려 했다. 때때로 자신이 감염인으로서 겪는 차별에 체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ㅈ 씨는 “스스로 숨기기 급급하고 주위에 알린 사람도 없다. 병원이 차별 안하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감내해야지 생각한다”라고 토로했다.
 

이날 사례를 발표한 권미란 ‘에이즈환자 건강권 보장과 국립요양병원 마련을 위한 대책위원회’ 활동가는 “별다른 상황 설명을 듣지 못한 채 HIV 양성 결과가 치료 거부로 이어지면 감염인들은 HIV를 수치스러운 병으로 내면화한다”라며 “감염인들은 병원의 처우를 자신의 인격과 동일시하고, 차별을 받아도 ‘나는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병원에 따질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라고 우려했다.

아울러 감염인들은 병원을 선택해 자신이 원하는 치료를 받을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될 수밖에 없었다. 중대한 치료가 필요한 감염인들은 거주지와 가까운 병원에는 못 가고, 대신 감염내과가 있는 종합병원, 혹은 서울 국립중앙의료원이나 경찰병원 등 국립병원을 이용했다.
 

15년 넘게 다니던 대학병원에서 신장투석을 거부해 2시간 이상 걸리는 국립중앙의료원까지 이틀에 한 번 신장투석을 받으러 다니는 ㄴ 씨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국립 병원에만 (감염인 치료를) 맡겨두지 말고 최소한 상급 병원에서는 언제든 (치료) 할 수 있도록 분위기 조성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소망을 밝혔다.

이렇듯 감염인들이 겪고 있는 치료 거부, 차별 상황이 심각하지만, 이를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은 마땅치 않다. KNP+ 등 감염인 인권단체들은 2008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와 국가 사법기관에 11건의 차별 진정, 고소고발을 진행했다. 그러나 구제 결정이 나온 것은 2011년 신촌세브란스 병원 고관절 치환술 거부 사례 등에 대한 인권위 권고 3건, 2015년 서울시립보라매병원의 치과진료 차별 사례에 대한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의 시정 권고 등 4건에 불과했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서 신장 투석을 거부당한 HIV 감염인 당사자가 "15년 다니던 병원 에이즈 환자라고 신장투석 거부, 어디로 가란 말인가?"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감염인 의료 차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러한 사례를 근거로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의료 거부와 차별을 해결할 방안를 제시했다. 권 활동가는 “3차 병원이나 국공립 병원에서도 감염인 차별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들을 관리하는 질병관리본부는 손 놓고 있다. 구제를 의뢰하면 개인이 직접 고소하라는 식”이라며 “그나마 인권위는 2011년 이후 차별 구제 권고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법원에서 차별 구제 판결이 나온 경우가 없다. 이용하기 쉽고 강제력이 있는 차별 구제 수단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KNP+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김대희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의료인의 입장에서 감염인 차별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HIV 치료제의 발달로 감염이 만성화되면서, 감염인들이 큰 병원의 감염내과로 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라며 “감염내과 30여 곳에서 감염인을 전담해서 진료하다보니, 나머지 의료인들은 감염인들을 보기 어렵다. 감염인들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감염인들을 무서워하거나 차별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김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는 의료인이 HIV 감염에 대해 배웠는데도 모른다고 생각해왔지만,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의료계 자체를 적극적으로 고쳐가야 할 필요가 있다”라며 “치료 거부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거나 HIV 감염에 대해 재교육, 홍보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의료인들이 감염인과 자주 만나는 의사들과 협업을 활성화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인규 대한에이즈예방협회 사무국장도 “현행 의료법은 진료를 거부하면 고작 징역 1년이나 벌금 500만 원 수준밖에 안 된다. 그마저도 판례에서 진료거부가 인정된 적이 별로 많지 않았다”라며 감염인 의료 거부에 대한 처벌을 강조했다.

아울러 이 사무국장은 “2010년부터 정부의 에이즈 홍보, 교육 예산이 15억 원에서 6억 원으로 줄었고, 공익광고도 2012년을 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교육도 수도권 중심으로만 이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정부의 적극적인 HIV/AIDS 교육, 홍보 확대를 주문했다.
 

KNP+가 HIV/AIDS 감염인 진료 거부 사례를 13일 인권중심사람에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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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홍식 기자 redspirits@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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