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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도 없는 수인(囚人)의 삶, 부랑인 강제수용의 역사
[기획연재 - 부랑인 강제수용의 역사①] 연재를 시작하며
등록일 [ 2017년07월10일 13시27분 ]

10여 년 인권운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공중전화를 걸지 모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몇 십 년씩 감옥살이한 초장기수들이 그 한 부류였고, 청송보호감호소 출소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또 하나는 양지마을이라는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장기간 수용되었던 이들이었다. (...)
하지만, 이들 두 부류의 인간에게는 크나 큰 간극이 존재한다. 한쪽은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사상과 신념을 이유로 오랜 동안 갇혀 있었다. 장기수들은 재판이나 법적인 절차를 걸쳐서 수감되었고, 법적으로는 국가권력이 직접 관할하는 교도소에서 수감된 것이었다. 그것이 부당하든 조작되었던 것이든, 인권침해의 요소가 곳곳에 넘쳐 있다고 해도 형식적으로 그것은 국가권력이 법을 집행한 결과였으며, 그들의 석방도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의 행사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지마을과 같은 곳에서 십 년 넘게 감금되어 있던 이들은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나 사상이 없었다. (...) 시설 수용자들에게는 체포영장이나 법적인 재판 절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곳에 제 발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재판도 없이 마치 무기수처럼 언제나 끝날지 모르는 징역 아닌 징역을 사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가혹한 노역이 따르게 되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잔인한 폭력구조 속에서 오로지 목숨을 연명해 가는 흡사 현대판 노예들과도 닮은 존재였다.

- 박래군, 「사회복지시설 수용자의 인권에 관한 단상」, 진보평론 4호, 2000


위 글은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17년 전 사회복지시설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하면서 가졌던 고민을 정리하며 썼던 글의 한 토막이다. 그가 글에서 언급한 두 경우 모두 끔찍한 국가폭력의 참상들이지만, 이를 대하는 국가의 태도는 분명히 다른 점이 존재한다. 비전향 장기수 또는 소위 ‘사상범’을 향해 가했던 국가의 폭력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조작이 적지 않지만) 어쨌든 최소한의 법적 합리성은 확보하려 했다. 죄목이 분명했고, 수감 기간이 정해져 있었으며, (비록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긴 하더라도) 언젠가 자유의 몸이 되리란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복지시설에 수용된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에서는 그와 같은 합리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들에겐 죄목이 부여되지 않았고, 수감 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언젠가 자유의 몸이 되리란 기대를 가지는 것조차 불가능한, 말 그대로 노예의 삶이 강요된 것이다.


박래군은 비록 양지마을이라는 한 사례를 가지고 이 화두를 꺼내들었지만, 사실 이는 한국의 부랑인 문제, 복지시설 문제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매우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진 문제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거리의 부랑아를 단속해 ‘감화원(感化院)’이라는 시설에 강제수용할 수 있도록 한 근거법령이었던 「조선감화령」(1923)을 보면 단지 아래와 같은 이유로 감화원에 입원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1. 연령 8세 이상 18세 미만의 자로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 행동을 할 우려가 있고 적당한 친권을 행사하는 자가 없는 자
2. 18세 미만의 자로 친권자 또는 후견인이 입원을 출원한 자
3. 재판소의 허가를 거쳐 징계장에 들어 갈 자


또한, 박정희 군사정권 당시인 1975년 제정되어 형제복지원의 부랑인 단속 및 수용을 정당화했던 「내무부 훈령 410호」(정식 명칭은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에서는 단속 대상 부랑인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정류소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부랑인

그렇다면 「조선감화령」에서 말하는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 행동을 할 우려”가 있는 자는 정확히 누구인가? 전체 8조로 구성되어 있는 이 법령에서 이에 대한 자세한 정의는 찾아볼 수 없다. 「내무부 훈령 410호」에서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행위는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몇 분 이상 그 곳에 머물러 돌아다녀야 ‘배회’한다 말할 수 있으며, 정확히 어떤 행위를 해야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 저해’한다 말할 수 있는가? 훈령을 아무리 찾아봐도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부산 형제복지원 부랑아 단속 차량 운영 모습 (사진출처 : 형제복지원 운영 화보집)

 

이런 규정상의 모호성은 이 규정을 집행하는 일선 경찰력에게 막강한 재량권을 부여하게 된다. 이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숱하게 증언했듯이 그것은 ‘길에서 적당히 허름한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무조건 잡아 가두는 식’이었다. 일명 ‘후리가리’라 불리는 경찰의 실적 위주 일제단속을 법 자체가 조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은 범죄를 이유로 잡혀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속영장도 없었고 재판도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잡혀야 했는가? 왜 기약 없는 수용생활을 견뎌야만 했는가?


많은 경우 부랑인 강제수용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거리의 부랑인이 곧 ‘예비 범죄자’이기 때문에 사회의 안전 확보를 위해 이들을 수용한 것이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이다. 이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단지 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다는 판단만으로 수용이 불가피하다는 주장, 마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연상시키는 이런 주장은 법의 언어로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말은 권력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누군가가 ‘유사시’에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해칠 위험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언제든지 ‘부랑인’이라는 주홍글씨가 붙은 채 국가에 의해 포획될 수 있다는, 일종의 ‘항상적 계엄령’의 언어다. 이러한 부랑인 강제수용의 문제는 87년 민주항쟁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정국 현안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른바 부산 형제복지원, 대전 양지원·성지원사태를 계기로 터져나온 부랑인 수용소를 둘러싼 파문은 이 사회가 갖고 있는 온갖 모순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사건발단에서부터 지금에 이르는 사건처리 과정에서 바로 이 사회의 전반적인 모순구조와의 뗄 수 없는 밀접한 상호관련을 밀도 있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사태는 거의 동시에 표출되어 정국의 전개방향마저 바꾸어 놓았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도 깊은 내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인권말살의 현장, 부랑인 수용소」, 월간 『말』, 1987년 3월호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오늘날, 이 문제는 한국사회의 중요한 민주주의의 현안으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간간히 공중파 방송의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통해 자극적인 인권침해 사례들이 폭로되는 수준으로, 잊혀질만하면 꺼내드는 단순한 가십 정도로만 취급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단지 청산과 화해의 대상으로서 ‘과거사’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문제임을, 우리는 대구시립희망원 사건을 통해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 국가폭력의 구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담론이 우리에게는 없다. 부랑인을 가두었던 수용소는 전쟁 중에 만들어졌던 포로수용소와 다르다. 부랑인 수용소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오히려 더 늘어났다. 그러니 ‘국가 간 전쟁’의 담론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처럼 특정한 소수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국 내에 함께 살았던 국민 중 일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니 ‘민족’의 담론으로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자국 내 국민 중 가장 약한 일부를 겨냥한 이 폭력의 기원과 구조는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왜 우리사회는 이런 폭력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는 것인가?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 만들어져 해방 후 1982년에야 폐쇄되었다. 사진은 1956년 선감학원 건물 신축 후 시찰단 방문 장면 ⓒ경기창작센터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조금 긴 여정을 떠나고자 한다. 부랑인 강제수용은 한국이 식민지배, 한국전쟁, 그리고 근대화라는 굴곡진 역사를 거치며 마주해야 했던 핵심적인 모순 중 하나였다. 이 연재는 이 모순의 역사를 우회하지 않고 하나하나 짚어나갈 것이다. 지금껏 그저 우리 사회의 주변인들의 문제라고 치부되었던 부랑인을 향한 폭력의 역사를 직시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설수용의 적폐를 넘어서기 위한 또 하나의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이 연재는 우선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1950년대에 걸친 한국의 근대국가형성기의 부랑인 대책의 실상을 들여다보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후에는 일제강점기인 1942년부터 해방 후 1982년까지 선감도라는 작은 섬(현재 경기도 안산시 대부면 소재)에 존재했던 부랑아 수용소 ‘선감학원(仙甘學園)’에서 참혹한 어린시절을 겪었던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을 전할 것이다. 연재는 매주 한 번씩 비마이너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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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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