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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부랑자 단속 등장... ‘청년들을 모다 부랑쟈로 잡는다’
[기획연재 - 부랑인 강제수용의 역사②] 일제강점기 초반, '경찰범처벌규칙'의 제정
등록일 [ 2017년07월17일 11시16분 ]


북간도 우리 '신흥학우본'에 게재하얏으되 일인이 쟉년 6월로 12월까지 여슷달 동안에 경셩에셔 부랑쟈로 5백명을 잡앗고 요사이에 또 경셩에셔 다슈의 부랑쟈를 잡앗스며 평양 대구 방면에셔는 일부러 부랑쟈 슈색을 죵사하야 어지간한 청년은 모다 부랑쟈로 잡음으로 졂은 사람의 행동이 심히 곤난하다하며 젼국 내에 쓸만한 청년은 모다 부랑쟈로 잡힐터이더라.

- 신한민보, 「모다 부랑쟈로 잡는다」, 1918.05.02


신한민보, 「모다 부랑쟈로 잡는다」, 1918.05.02 ⓒ국립중앙도서관

일제에 의해 폭력적으로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에는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그 중 특히 심각한 문제는 농촌의 곤궁한 삶에서 이탈해 도시로 또는 국경을 넘어 이주하는 빈민 문제였다. 1910년대에는 '토지조사사업'이 1920년대에는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된 결과 조선에서는 지주 중심의 토지집중이 강화되어 직접생산자인 농민 대부분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 농업노동자로 전락했다.


그러나 1910년대에는 이에 대한 정확한 조사 자체가 없었다. 다만 1916년 도시 지역만을 대상으로 수행된 ‘걸식 및 부랑자 취체에 관한 조사’가 있었다. 취체(取締), 즉 부랑자에 대한 단속과 통제를 목적으로 한 제한적인 조사였는데, 이 조사는 조선의 걸식 총수 10,554명, 부랑자 4,803명으로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1927년부터 1934년에 걸쳐 수행된 조사에서는 조선의 걸식 및 부랑자 수가 매해 5만 명을 넘어서는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이 숫자조차도 상시적으로 거리에서 배회하는 부랑자들만을 조사한 것이고 춘궁기나 재해시에 배회하는 잠정적 부랑자 수는 제외된 것이어서 실제 규모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총독부는 초기부터 이들 부랑자에 대한 구호정책을 소홀히하고 경찰의 단속 위주 정책으로 대응했다. 1912년 3월 25일 총독부령으로 발포된 「경찰범처벌규칙」이 대표적인 제도로(해방 후 1954년에 제정되는 「경범죄처벌법」의 모태가 된다), 이는 행려병자나 정신병자, 기아, 미아, 일정한 주거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 등 거리를 부랑하면서 사회질서를 크게 해치는 자를 30일 미만의 구류나 30원 미만의 과료에 처하도록 했다.


그런데 「경찰범처벌규칙」에서는 단지 부랑 행위만을 단속한 것이 아니었다. 이 규칙의 제재 대상 항목은 총 87개에 달하는데, 여기에는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불온한 문서·도서·시가의 게시·반포·낭독 또는 방음을 한 자’, ‘이유 없이 관공서의 소환에 응하지 아니한 자’, ‘부정한 목적으로 사람을 은닉한 자’ 등도 포함된다. 즉, 총독부의 식민통치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제재 수단으로서 이 제도가 활용된 것이다.


앞에 인용한 신한민보 기사가 그런 양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부랑자’라는 것은 총독부 권력의 시선으로 볼 때 불편한 대상에게 자의적으로 갖다 붙이는 낙인에 불과했다. 부랑자 단속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도시 청년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고 사소한 행동마저 스스로 검열케 하는 규제장치가 바로 「경찰범처벌규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태에 대해 독립운동가 계봉우(1880~1959)는 다음과 같이 한탄조로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삼일운동(3·1운동, 1919)이 일어나기 오 년 전의 일이었다. 바로 그때에 서울 및 각 지방 도시에서 조선인 부랑자 취체라하는 흉악한 수단으로써 (...) 그 검거한 상태를 본다면 비교적 신지식을 소유한 자, 학생 또는 재산가로서 공공사업에 유기한 자, 총독 정치에 대한 불평자, 그 전의 사회계에 출입하던 자, 관공서의 기부금 강요를 거절한 자, 전래 영업을 빼앗기고 생활할 길이 없어서 부모처자를 양치 못하고 생업을 구하기 위하여 사방으로 방황하는 자, 이런 사람들을 전부 부랑자라 하여 (소위 범죄자 중에 부랑자도 있지마는) 징역에 처하였다. 이것은 숨기지 못할 사실이매, 저 놈의 헌병경찰이 우리의 민족 전체를 고향으로부터 축출함이 아니면 박멸하려는 수단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라도 달리는 더 해석 할 수 없는 일이다.

- 계봉우, 「꿈속의 꿈 (하)」


경찰에 의한 부랑자 취체 관련 기사. 부랑자를 '사회의 해충'으로 표현하고, 이들에 대한 '대청결'을 실시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매일신보, 1915.06.22 ⓒ한국언론진흥재단 뉴스라이브러리)

사실 부랑자 단속 법령을 이처럼 자의적으로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사례는 서구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관행적으로 유지되어온 부랑법은 일선 경찰의 재량적 판단에 의해 공산주의자 등 일련의 저항분자를 단속하는 수단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히피, 성소수자, 흑인 등 일련의 소수자 집단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이시도어 에델만(Isidore Edelman)이라는 사회주의 활동가는 1949년 로스앤젤레스의 한 광장에서 연설 도중 ‘방종(dissolute)’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부랑죄로 체포되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플로리다주의 잭슨빌이라는 도시에서 친구들과 밤에 길을 걷던 파파크리스토우(Papachristou)라는 흑인 여성은 "멋대로 돌아다닌다(Prowling by auto)"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두 사건은 미국 민권운동과 개혁적 법률가들이 부랑법 개혁을 위해 뛰어들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에 도입된 부랑자 단속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일제가 조선에 이러한 부랑법을 이식하면서 일본 본토와는 전혀 다른 법 집행 관행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 형사소송의 특징은 수사절차상의 강제처분권이 예심판사에게 집중되어 수사기관인 검찰이나 사법경찰관에게는 현행범 등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독자적인 강제수사권이 인정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본에서 정한 최소한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법관에 의한 강제수사권 통제라는 근대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이 철저하게 배제됐고, 경죄사건에 대해서는 검사의 공소제기와 법원의 재판을 기다리지 않고 경찰이 바로 즉결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경찰범처벌규칙」은 이처럼 경찰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전제로 도입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이 규칙에 따른 즉결사건 처단인원이 한 해 최대 2만 5천여 명에 달하게 된다.


즉결사건 처단인원 (경찰범처벌규칙) 

연도 징역 금고 벌금 구류 과료 태형 기타 총계
1915
1920
1925
1930
1935
1940
-
-
-
-
-
-
-
-
-
-
-
-
-
11
10
-
-
-
3,067
 6,244
 9,195
15,993
16,286
13,417
7,194
6,758
9,479
8,753
8,545
3,566
1,243
61
-
-
-
-
129
189
1,112
363
64
-
11,634
13,263
19,796
25,109
24,895
16,983

*자료: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10-1942 ‘경찰’ 편 (김철수, 1995에서 재인용)



이처럼 일제강점기 초반의 부랑자 단속은 강압적 식민통치를 위한 제재 수단이었지만, 제재의 방식 중 가장 가혹한 것이라 해봐야 구류 또는 과료 정도였고, 그 목적도 사회 전반의 치안 확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후반기에 들어 수탈이 더욱 심화되고 도시빈민이 급증하자 정책이 겨냥하는 대상 또한 빈민에게 초점이 맞춰졌고, 이들을 바라보는 권력의 시선 또한 갈수록 차가워졌다. 괴짜 같은 삶을 즐기며 1920년대 경성 빈민들에 대한 르포르타주를 썼던 일본인 기자 아카마 기후(赤間騎風)는 당시 부랑아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움집이든 뭐든 자기 집이라고 정해진 곳에 살면서 넝마를 주워 가족이 입에 풀칠을 하는 자는 또 그렇다 쳐도, 부모형제도 친척도 없이 그야말로 들판의 한 그루 삼나무 바라에 꺾여 거지가 된 자는 눈 가는 데 있는 나쁜 동료의 꼬임을 받아 넝마주이가 되고,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나쁜 쪽으로 지혜를 더욱 연마해 간다. 저물녘의 거리를 어슬렁거리거나 축제 때 인파 속으로 스며들어 ‘뭐 떨어뜨린 물건이나 없을까’하고 매의 눈으로 노리고 다닌다. 대청소 때는 집집을 배회하면서 사람들이 방심하는 틈을 노렸다가 슬쩍해서는 달아난다. 엄청나게 큰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만, 살금살금 털어가는 상습범이나 그들은 깍정이 패 ‘절도단’인 것이다.”

- 아카마 기후, 『대지를 보라』, 62쪽


즉, 그가 보기에 조선의 부랑아는 애초 그 기질이 ‘좀도둑’에 불과한 자들이었다. 식민지배자들(더 나아가서는 친일, 민족주의 가릴 것 없이 조선의 엘리트들까지도)에게 부랑아는 ‘부모와 집을 잃고 떠도는 아이’라는 객관적인 의미를 넘어서 그 자체로 ‘불량아’였고, 그들의 삶은 곧 ‘소년범죄’로 연결될 소지가 다분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신문지상에는 부랑아의 해악을 폭로하는 기사가 끊임없이 실렸다. 부랑아는 단지 경제적 빈곤 때문에 출현한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고, 부랑아 자신이 애초에 가진 ‘불량성’과 그 ‘불량성’의 전파가 문제라고 여겨졌다. “불량소년의 절대 다수는 일상 종유(從遊)하는 그 동료 중 불량자의 감언이설적 유인” 때문이며 “1인의 불량소년을 그대로 방임한다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격증하야 필경 그 사회는 불량군(不良群)으로써 충만”(동아일보, 1938.09.17)될 것이라는 언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인식은 결국 부랑자 단속이 단순한 과료나 구류 처분을 넘어 장기적인 시설수용과 교화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이 땅에 최초의 부랑아 강제수용소인 감화원(感化院)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다음 연재에 계속)

 
 


*참고문헌


- 강만길(1987). 『일제시대 빈민 생활사 연구』, 창비
- 김철수(1995). 「일제식민지 시대 치안관계법규의 형성과 적용에 관한 연구」, 한국사회학 제29집
- 예지숙(2015). 「일제시기 조선에서 부랑자의 출현과 행정당국의 대책」, 사회와역사 107
- 정긍식(1994). 「조선총독부 연구: 사법제도 운용의 실상」, 역사비평 26호
- 조경희(2011). 「‘온정’과 ‘교화’의 식민주의 ―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회구제사업과 그 임계」, 역사문제연구 25
- 赤間騎風(아카마 기후)(2016). 『대지를 보라』, 서호철 옮김, 아모르문디
- Risa Goluboff(2016). 『Vagrant Nation: Police Power, Constitutional Change, and the Making of the 1960s』,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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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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