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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하는 장애인의 금관예수이자, 세월호 의인으로 기억될 사람이여
[현장]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고 박종필 감독 영결식
등록일 [ 2017년07월31일 20시33분 ]

장애·빈민 운동에서부터 최근 세월호 참사까지, 20여 년 가까이 영상활동가로 든든하게 현장을 지킨 박종필 감독이 지난 28일 오후 4시 10분경 간암으로 강원도 강릉의 요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49세. 간암을 발견했을 땐 이미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해져 있는 상태였다. 지인들에게 인사할 틈도 없이 급작스레 세상을 뜬 그가 남긴 유언은 “미안하다”. 31일,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고 박종필 감독의 인권사회장 영결식이 진행됐다. 그 현장을 전한다.

 

고인의 형님인 박종석 씨가 영결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인사하고 있다.

# 31일, 이른 오전 :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죽음이 도둑처럼 다가와 그를 데려가 버렸다. 오랜 시간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었고,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에겐 닮고 싶은 선배이자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였던 사람. 장애인과 홈리스, 세월호 현장까지. 어둡고 외로운 현장에 앞서 달려갔던 사람. 고 박종필 감독. 사람들은 그에게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아침 8시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장례식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빈소 앞을 서성이던 한 사람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우리, 형이랑 마지막으로 사진 한 장 찍자. 영화제 끝나면 사진 찍었던 그때처럼. 그는 몇몇 사람에게 손짓했다. 지난 28일 저녁부터 3박 4일간 장례식장에 줄곧 머물며 호상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의 영정 앞에 상복 입은 사람들이 서거나 구부정하게 앉았다. 하얀 국화에 둘러싸인 채 영정 속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고, 그의 벗들이 충혈된 눈으로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31일 오전 8시 30분, 발인이 시작됐다. 고 박종필 감독의 장례는 인권사회장으로 치러졌다.
 

# 오전 8시 30분 발인 : ‘다큐인’으로 향하다

 

31일 아침 8시 30분, 발인이 시작됐다. 고인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는 종로구 계동에 있는 다큐인 사무실로 향했다. 그가 속했던 다큐인은 1998년 4월 결성된 독립다큐멘터리 제작 집단으로 “진실과 희망의 영상을 추구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사무실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 5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좁은 계단을 굽이쳐 도착한 5층 사무실 문엔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손수건이 걸려있었고, 사무실 내 정면 벽엔 “사람이 산다”, “망각과 기억”이라고 적힌 액자가 걸려있었다. 최근 다큐인에서 제작·연출한 다큐멘터리 제목들이다. 모두 안팎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창문 앞 탁자엔 그의 돌아옴을 기다린 듯, ‘박종필 감독 장애인권 3부작’ 비디오테이프와 카메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박 감독의 자리는 사무실 가장 안쪽이었다. 그와 세월호 선체 조사 기록을 함께했던 세월호 유가족 ‘지성아빠’ 문종택 씨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그곳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세월호 유가족 ‘지성아빠’ 문종택 씨가 다큐인 사무실 내 고 박종필 감독 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창문 앞 탁자, ‘박종필 감독 장애인권 3부작’ 비디오테이프와 카메라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 오전 9시 30분 : 그의 시작과 마지막이 있는 곳, 광화문

 

운구차는 다시 영결식이 열리는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광화문엔 그가 가장 애틋이 여겼던 이들이 있다. 1999년 평택 에바다 투쟁(에바다복지회 산하 농아인시설에서 발생한 비리·인권침해 사건)을 계기로 함께하게 된 장애인권운동 현장은 그의 고향이고 주활동지였다. 그 인연으로 그는 최근까지도 광화문역 지하보도에 있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농성장을 기록해오고 있었다. 또한, 그는 416연대 미디어위원회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목포신항에서 세월호 선체조사 작업을 기록했다. 몇 해 전부터 작업하는 것을 많이 힘들어했던 그는 세월호를 만난 후로 ‘세월호가 내게 남겨진 마지막 과제인지도 모른다’며 세월호 작업에서 많은 기운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자취를 쫓아 유가족들은 세월호 농성장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농성장을 찾았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농성장에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유가족들에게 박 감독의 ‘활약’을 이야기했다. “2012년 8월 21일에 경찰이랑 10시간 동안 싸워서 여기에 들어왔어요. 그때 박 감독이 찍은 영상이 우리 투쟁 알리는 데 큰 힘이 됐고요, ……농성 끝나는 거까지 박 감독이 찍어야 하는데….”

 

그러나 이제 그는 영정으로 돌아왔다.

 

고 박종필 감독 유가족들이 영결식 참석 전, 고인의 영정과 함께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농성장을 찾았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농성장에 영정으로 돌아온 고 박종필 감독. 그 곁에 송윤혁 감독이 함께 앉아있다.
 

# 오전 10시 영결식 : 투쟁하는 장애인의 금관예수이자 세월호의 의인으로 기억될 사람이여 

 

비가 기운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오전 10시,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고 박종필 감독의 인권사회장 영결식이 시작됐다. 세찬 비바람에도 400여 명의 인파가 자리를 지켰다.

 

“박종필의 카메라는 가볍게 스치는 영상이 아니라, 얼굴 여윈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있었습니다. 함께 있음으로, 나의 존재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박종필 감독의 카메라는 내가 찾아 헤매는 천국이, 죽음 저편 구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 딛고 살아가는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장애인운동의 현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공간에서, 세월호의 ‘망각과 기억’ 속에서, 차별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살만한 가치가 있고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기록해주었습니다. 그것이 박종필의 카메라이고 다큐였습니다. 그래서 박종필 감독은, 내게 금관예수입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박 대표에게 박 감독이 ‘금관예수’였듯, 박 감독에게 박 대표는 흔들릴 때 자신을 잡아준 든든한 기둥이었다. 박 감독은 ‘장애인운동은 이렇게 하는 거야’를 알리기 위해 박 대표의 삶을 꼭 다큐로 만들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결국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서로를 버팀목 삼아 20여 년을 함께 해왔는데, 한쪽이 떠나버리니 남은 이쪽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영결식이 진행되는 내내 박 대표는 떨어뜨린 고개를 위로 치켜드는 것을 힘들어했다.


영결식을 지켜보는 사람들

고 박종필 감독의 장례는 인권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전명선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박 감독이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 수습과 조사 과정 기록을 위해 416가족협의회 가족참관기록단에 합류한 것은 당시 박근혜 정부가 제대로 된 영상촬영을 거부했기 때문”이라면서 “박 감독은 정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한 의인으로서 세월호 가족과 함께 진실 규명을 위해 싸우다 ‘순직’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운영위원장은 고인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세월호 참사 책임자들 다 잡아넣고 천천히 오시라!”는 유언을 남겼다면서 “우리는 그를 잃었지만 그가 남긴 뜻을 더욱 크게 이어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류미례 감독은 박 감독을 길잡이 삼아 이 길을 걸어왔다며, 박 감독이 지성아빠에게 남긴 말을 유언 삼아 다시 이 길을 계속 뚜벅뚜벅 걸어가겠노라 말했다.

 

“기력이 다한 몸으로 박종필 감독님은 지성아버님께 말했습니다. ‘형, 우리는 뭐 하는 사람이지? 우리는 감동을 줘야 하는 사람이야.’ 종필 선배, 당신의 삶은 제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 역시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빈 자리가 너무 크지만 당신이 남긴 말과 당신이 남긴 영화로 이 슬픔을 견뎌보겠습니다.”

 

고인의 암 투병 내내 간병하며 마지막을 함께한 송윤혁 감독은 고인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했다. 송 감독은 고인과 함께 다큐인에서 활동하고 있다.

“감독님은 반차별, 장애인운동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그 운동 속에서 차별받던 사람이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 세상이 조금씩 바뀌어나가는 것을 보며 너무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세월호 가족분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세월호 아이들을 만나러 갈 수 있겠다, 만약 하늘나라가 있다면 거기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니,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지금쯤 송국현 동지(2014.4.16. 활동보조인이 없는 사이 화재로 사망)를 비롯해 세월호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촬영을 허락해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진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그 말씀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추모노래로 장애해방가를 부르는 민중가수 박준.
고 박종필 감독 영결식에 참석한 사람들
 

영결식 마지막, 민중가수 박준 씨가 추모노래를 불렀다. 박 씨는 “그가 평소 술 한 잔 마시고 부른 노래가 장애해방가였다고 한다”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장애인권 투쟁 현장에 늘 울려 퍼지던 노래, 장애해방가. 사람들은 주먹을 쥐고 울음을 삼키며 따라 불렀다. 그가 없을 내일이 두렵고 외로운 사람들이 그의 환한 웃음 앞에 국화를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헌화하고 있다.
 

# 정오, 헌화가 끝난 텅 빈 광화문 광장

 

헌화가 끝난 텅 빈 광장. 박경석 대표가 박종필 감독의 미소가 박힌 커다란 현수막 앞에 다시 섰다. 그 얼굴을 마주 보며 마이크를 쥐었다. 한 자 한 자, 글자에 뿌리를 박아내리 듯 힘주어 말했다. 그에게 전하는 편지였다.

 

“박.종.필. 감독은 내게 금관예수입니다. 나는 이 사회에서 거절당한 사람입니다. ‘경쟁과 효율’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이 사회에서 나는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의 하늘과 벌판은 얼어붙었고 나의 태양은 빛을 잃었습니다. 휠체어를 밀고 가야 하는 거리는 거대한 장벽이었습니다. 그 장벽에 갇혀 나는 너무 추웠고, 외로웠고, 어두웠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지하철로를 내려가 지하철을 막았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나를 태우지 못하는 버스를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한강대교를 6시간 기었습니다. 권력과 자본이 불평등하게 점유한 공간마다 점거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나와 같이 얼굴 여윈 사람들과 무엇인가를 찾아 헤맸습니다. 우리가 절규하는 그 자리에 주님은 없었고, 박종필 감독의 카메라가 있었습니다.
…종필 감독, 그거 알고 있지. 당신이 만든 ‘장애인이동권보고서-버스를 타자’는 장애인운동을 알리는 가슴 뛰게 만드는 교과서라는 것을요. 나보다 먼저 가서 너무 야속하고 아프지만, 편히 잘 쉬어요. 나의 금관예수.”

 

그는 오른팔을 번쩍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렇게 인사를 했다. 휠체어를 돌리고, 다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가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고인의 영정을 들고 그의 ‘동지’들이 있는 마석모란공원으로 향했다. 그 또한 휠체어를 밀고 마석으로 뒤따랐다.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고 박종필 감독, 2017년 7월 31일 마석 모란공원에 잠들다.

 

고 박종필 감독의 영정. 앞에 국화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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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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