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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의 거리를 누비던 가난뱅이들, 일소되어야 할 ‘구악’이 되다
[부랑인 강제수용의 역사⑧] 혁명에 대한 반동과 도시하층민의 악마화
등록일 [ 2017년08월20일 15시59분 ]

 

이때 청년 몇이 달려오며 이들을 급히 제지하였다.
「우리는 파괴를 위하여 데모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요!」
학생데모대원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부수던 측은 그게 아니었다.
「우리가 낸 세금이란 말야. 제놈들 이따위 차타고 다니라 세금을 낸 줄 아나. 그러니까 상관 없단 말야.」
「그렇다고 부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오. 곧 이것은 우리의 재산인 동시에 국가의 재산이란 말이요. 타고 다닌 놈이 나뿐 놈이지 이 차를 때려 부숴서 그래 어떻게 하잔 말이요? 더욱이 이 속엔 외국인 차들이 있지 않나 말이요. 외국인에 대한 우리의 위신을 생각해야 될게 아니요.」
「외국인이고 뭐고 말야. 원조물자 가져다 놓곤 고관들과 끼고 자기네끼리 다 해먹었지 우리한테 손바닥 만한 밀가루 떡 하나 줬나 말야. 얻어먹었다는 건 먹다 담배 꽁치가 기어 나오는 꿀꿀이 죽 뿐이 아니었냔 말야.」
「그러나 그러한 화풀이를 하자고 우리가 데모를 하는 건 아니란 말요.」
「제기랄! 그럼 요담 누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를 공으로 먹고 살게 해준다던가? 배고픈 놈에겐 감정밖에 남을게 없단 말야.」

- 오상원, 「무명기」, 思想界 100호, 1961년 11월


혁명은 기존 사회의 위계를 뒤집고자 한다. 낡은 것에 대한 불만은 변화에 대한 열정으로 폭발한다. 그러나 변화를 향한 강한 충동은 그에 대한 반작용을 피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거의 모든 혁명이 ‘반동(reaction)’과 마주하게 되는 이유다.


1960년 4·19는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시민’이라는 주체가 등장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역사책에 기록된 것처럼 3·15부정선거 규탄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구호가 전부였던 것은 아니다. 활자화되어 유포됐던 담론 이면엔 더 복잡한 정념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4·19 직후 나온 오상원의 소설 「무명기」의 한 대목은 그 복잡했던 군중들의 감정의 양상을 캐치하고 있다. 위 인용문에서는 “감정밖에 남을 게 없는” 배고픈 놈과 “외국인에 대한 우리의 위신”까지 염려하는 ‘이성적인’ 학생데모대원 간의 갈등이 엿보인다. 어쩌면 이 갈등이 변화와 반동 사이의 길목에 선 혁명의 향배를 결정짓는 사안이었을 것이다.

 

4.19혁명 데모대의 모습 ⓒ4.19혁명기념도서관

대학생의 ‘고귀한 희생’, 몰지각한 자들의 ‘파괴폭동’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서울시내 가두 행진과 정치깡패들의 테러, 분노한 전국의 대학생과 시민을 역사의 현장으로 호출한 4월 19일 ‘피의 화요일’, 그리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이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4·19의 핵심이다. 이 때 대학생은 숭고한 희생을 바쳐 민주주의를 쟁취한 주역으로 표상된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후인 60년 6월 1일 정국 수습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곽상훈 민의원 의장은 “4.19학생들의 고귀한 희생”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이제 (4·19혁명의) 뒷수습과 그 목적한 방향으로 향해”가야 할 이 시점에 “일부 몰지각한 사람과 학생들이 배후에 불순한 사주를 받아 평화롭고 정당한 의사를 표시하는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각처에서 파괴폭행이 나오는 사례가 많고”라며 시국을 개탄했다. 곽 의장은 이러한 자들을 “4·19의 신성한 희생을 이용해가지고 그 그늘을 이용해 가지고해서 이 국가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자들이라며, 이런 자들을 “속속 검거해서 엄단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불법천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몰지각하며 불순하고, 게다가 파괴폭행까지 일삼는 이들이란, 정확히 4월 혁명 초기부터 존재했지만 혁명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고 여겨진, 고학생, 신문팔이, 구두닦이, 껌팔이, 넝마주이 등 도시하층민들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이승만 하야 이후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데모’를 멈추지 않았다. 일례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4월 26일, 일부 과격 시위대는 부통령 이기붕의 집을 습격해 불을 지르려 했으나 대학생들이 이를 제지했다. 이 광경을 본 한 언론사 기자는 “대학생의 지성이 없었던들 이번 혁명의 사태는 무지한 파괴로 끝맺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대학생을 한껏 치켜 올렸다.


갈등은 이른바 ‘혁명원흉’에 대한 재판에서 다수의 책임자가 무죄 또는 경미한 처벌을 받은데 대해 유족회가 반발하는 과정에서 정점을 찍었다. ‘4·19 발포명령 사건’의 책임자인 유충렬 전 서울시경국장에게는 사형, 시경경비과장 백남규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지만, 그들의 ‘윗선’에게는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졌다. 이에 60년 10월 11일, 4월혁명유족회 등은 오전 9시부터 민의원 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오후 들어 유족들과 민의원 대표단이 회동으로 협의를 마무리지려는 순간, 일군의 불청객들이 난입했다. 해산을 거부하고 계속 농성을 유지하겠다고 밝힌 7~80여 명의 무리들은 “부상자나 유가족만 국민이냐! 우리도 곽상훈 의장의 사과를 들어야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민의원 의사당에 난입하는가 하면 10만 환 상당의 정문 유리창과 5만 환 상당의 문짝 네 장을 파손했다. 이 사건으로 8명이 그날 바로 구속수감됐다. 이날 구속된 사람들의 면면은 이렇다. 고등학생, 시계수리공, 무직자, 운전기사, 구두닦기, 행상인. 나이도 대부분 10대 후반이었고, 33살의 운전기사가 제일 연장자였다. 언론은 이들을 “데모에 편승하여 난동을 부린 불량배”라고 표현하며 대학생과 구분지었다.


그런데 정말 대학생들의 희생은 ‘고귀한’ 것이고, 도시하층민의 행동은 ‘파괴 폭동’이기만 한 것이었을까? 공식 기록이 전하는 느낌은 이와 다르다. 4월 혁명 당시 사망자 수 통계를 봐도 전체 사망자 186명 중 대학생은 22명인데 반해, 하층노동자(61명), 무직자(33명)는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4월 혁명을 촉발한 3월 마산시위에서도 272명의 부상자 중 무직자가 152명으로 절반을 넘었다. ‘고귀한 희생’을 말할 것 같으면, 이들이 가장 값비싼 희생을 치렀다.


물론 대학생들과 도시하층민의 시위 양태는 많이 달랐다. 대학생들은 4월 26일 이후부터 스스로 혁명의 주체로 자임하고 ‘질서회복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학교별로 조를 짜서 거리 청소, 질서 확보 활동을 벌이는 한편, 성난 시위 군중을 진정시켜 해산시키기도 했다. 반면, 도시하층민들은 그간 쌓여온 자신들의 응분을 가로등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당시의 밤거리를 휘저으며 터뜨렸다. 그것은 대학생들이 외쳤던 ‘자유민주주의’ 또는 ‘신생활운동’이라는 말로 담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언어로 정확히 표현되지는 못했지만, 극심한 빈곤과 생활고에 짓눌려 있던 이들의 분노는 결코 이승만 하야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거리 시위는 혁명도 무엇도 아니고, 그저 무지하고 불순한 자들이 정치의 장에 ‘난입’한 ‘폭동’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미국 대통령 환영 위해 ‘부랑아’를 청소하다


그런 의미에서 4·19는 이승만과 자유당 집권 세력을 몰아내는 ‘혁명’이기도 했지만, 도시하층민에 대한 대학생과 지식인 등의 중산층적 공포의 감정이 표면화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사실 당시 대학생이라고 해서 경제적으로 나을 게 별로 없는 상태였다. 1958년 초 대학 졸업을 앞둔 학생 17,329명 중 1만4천여 명은 군입대하였고, 나머지 여학생 2천여 명을 제외한 2천여 명 가까운 학생들의 취직은 상당히 곤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조선일보, 1958.01.24). 따라서 대학생은 경제면으로나 외관상으로나 다른 하층민과 쉽게 구분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나마 이 두 집단을 구분할 수 있는 수단은 대학생의 교복과 하층민의 남루한 옷차림이었다. 언론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평화적 시위를 했고, 남루한 옷을 입은 도시빈민들은 파괴 행위를 일삼았던 것으로 묘사하며 두 집단을 갈랐다. 대학생들 스스로도 이런 분할에 동조했다. 1962년 4월혁명 2주년을 기념하여 한 잡지에서 진행한 대학생 좌담회에서 한 학생은 “4·19 전에 민생고의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이 하류층이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4·19를 원망하는 실정”이었다고 비난조로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사람들은 부패한 법망을 이용하여 오히려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들은 대개가 쓰고 버린 외제 분갑이나 크림통을 수집해서 가짜 외국산 화장품 행상을 하면서 살던 토막촌 사람들로서 오히려 4·19를 저주했습니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 말은 대학생들이 내세운 명랑하고 건전한 ‘자유민주주의’에 하층민의 삶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대학생들은 문화적인 코드를 기준으로 자신들을 도시 하층민과 차별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차별화의 시도는 공권력에 의한 부랑인 단속을 선제적으로 요청하는 욕망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농후한 것이었다. 이에 부응하듯, 4·19이후 부랑아 단속이 급격하게 늘어난다. 1960년 8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립아동보호소의 부랑아 수용 실적은 이미 그 시점에 전년도 부랑아 수용 후 전원조치 인원(700명)을 넘어섰으며 이 중 80% 이상이 4․19이후 잡혀온 인원이었다고 한다. 특히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을 앞두고 있던 6월 9일 단속에서는 한번에 561명의 부랑아가 아동보호소에 잡혀 들어왔다고 한다(경향신문, 1960.08.24). 이는 '4․19 의거 학생대책위원회'가 자진해서 관계당국과 협의하여 ‘아이크환영준비 학생위원회’(‘아이크’는 아이젠하워의 애칭)를 구성한 것과 대조적인 현상이다.


정치깡패, 용공분자, 부정축재자...그리고 ‘부랑아’


역설적이지만, 5․16쿠데타는 4․19 이후 1년간의 대중적인 불안의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동원하면서 ‘혁명정신’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혁명재판’을 통해 ‘희생양 만들기’를 단행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유당 정권 하에서 악명을 떨쳤지만 1958년 이후에는 뒤웅박 신세가 되어 4․19때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정치깡패 이정재를 단죄한 것이다. 그는 가슴에 ‘이정재’ 이름 석자 써붙이고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라는 플랑과 함께 시내를 돌며 조리돌림을 당한 뒤, 61년 10월 19일 사형 당했다.


이정재는 이른바 ‘혁명정부’가 지목한 구악(舊惡)의 상징이었다. 구악에는 대한민국이 산업사회로 돌진하기 위해 미리 척결되어야 할 것들이 자의적으로 지목되었고, 여기에는 정치깡패와 용공분자, 부정축재자는 물론이고 거리의 부랑아들도 포함됐다.

 

5.16쿠데타 이후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단속, 수용된 부랑아들(1961년) ⓒ국가기록원

"새나라의 건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땅에 뿌리박힌 모든 구악을 일소해야만 했습니다.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던 거리의 깡패와 미풍양속을 어지럽히는 불량배, 그리고 국민의 기본권을 빼앗고 자신의 영달만을 노리던 부정선거 관련자와 사리사욕으로 나라의 재산을 좀 먹던 부정축재자, 그런가 하면 공산마수에 휩싸여 날뛴 용공분자 등 이러한 모든 악의 요소들에 법과 정의의 철주가 내려졌던 것입니다. ... 그리고 악의 구렁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던 부랑아들이 혁명정부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5.16 1주년들 뒤돌아 보다」, 1962 (e영상역사관 영상자료 나레이션)


그리하여 60년대 이후 부랑아들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아동보호소로, 고아원으로, 소년원으로,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청소’되어 떠나갔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지워졌고, 우리의 기억과 기록에서도 지워졌다. 그리고 꼭 그만큼 가난한 거리의 사람들에게 가해진 국가폭력에 대한 이 사회의 무감각도 깊어졌다.

 

 

* 참고문헌

- 제4대 국회 회의록, 「치안유지 대책에 대한 국회 및 정부 연석회의」, 1960.6.1.
- 천정환 외(2005), 『혁명과 웃음 - 김승옥의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을 통해 본 4.19 혁명의 가을』, 앨피
- 이승원(2009), 「‘하위주체’와 4월 혁명 ― ‘하위주체’의 참여형태를 통해 본 민주화에 대한 반성」, 『기억과 전망』20호
- 오제연(2014), 「4월혁명의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들 ― 고학생과 도시하층민」, 『역사비평』106호
- 김미란(2010). 「‘젊은 사자들’의 혁명과 증발되어버린 ‘그/녀들’ - 4월혁명의 재현 방식과 배제의 수사학」, 여성문학연구 23호
- 프레시안,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역사학자 서중석 인터뷰), 201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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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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