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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버리고 짓밟은 삶, 그들의 역사를 복원해야 하는 이유
[부랑인 강제수용의 역사⑨] 연재를 마무리하며
등록일 [ 2017년08월24일 18시51분 ]

5.16도로 명칭 변경 운동이 외면하고 있는 것


올해 초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시내에서 친구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어딘가를 지나던 중 곳곳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게 보였다. 5.16도로 명칭을 변경할 것을 요구하는 지역 시민단체의 플래카드였다. 5.16도로는 제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인데, 일제강점기에 처음 개통되었고,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확장공사에 들어가 1969년 준공되었다. 그런데 이 도로명칭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기념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 오랫동안 제주도민들이 불편해 하던 차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명칭 변경 목소리가 더욱 커진 것이다.


플래카드 가득한 길을 빠져 나올 때쯤 택시기사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저거 5.16도로 이름 정말 빨리 바꿔야 돼.” 그 말에 옆 자리에 앉았던 친구가 아저씨의 ‘정치적 성향’(?)을 조금 더 알고 싶었던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대답했다. “아니, 안 그래? 저 도로를 누가 만들었는데? 깡패들이 만든 거 아니야.”


딱히 더 이어갈 말이 없어서 대화는 거기서 끊겼고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저씨가 했던 “깡패들이 만든 거 아니야.”라는 말이 계속 뒷맛을 씁쓸하게 했다. 나 또한 제주 시내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한 구석에 마련된 5.16도로 명칭 변경 서명판에 내 이름을 적고 왔지만, 박정희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취지에 동감하기에 서명한 것이지 ‘깡패들이 만든 도로’라는 오명을 지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서명한 것은 아니었다.


택시기사 아저씨의 말처럼 5.16도로는 전국 각지에서 부랑아, 깡패, 불순분자로 분류된 자들을 강제로 동원해 공사를 했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강원도 산간 지역, 충남 서산 등지의 간척사업 등에도 ‘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동원했다. 군사정부는 이들에 대한 ‘사회정화’를 단행함으로써 국가에 이바지하는 ‘산업전사’로 만들겠다고 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5.16도로의 이름은 불편해 하지만, 그 도로가 제주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 듯 하다. 그러나 누구도 그 도로를 만든 사람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의 ‘쓰레기’ 취급을 당했고, 제주에서 ‘버려졌다’. 5.16도로 이름을 바꾸자는 목소리 어디에도 제주에 강제로 끌려와 강제노역 당했던 이들의 지워진 삶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국가는 단 한 차례도 사과하지 않았다


1921년생인 김귀술 씨는 한국전쟁이 직후인 1954년경부터 서울역 근처의 중림시장에서 농수산물을 취급하는 점포의 점원으로 일했다. 1960년까지는 동생이 여러 차례 찾아올 정도로 가족과 왕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는 서로 바쁜 나머지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62년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에 이상한 편지가 날아왔다. ‘대한청소년개척단에서 개발한 농경지를 분양받아야 하는데 가족 중 한 사람의 도장을 지참하여 오라’는 내용이었다. 시장에서 일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형이 충남 서산의 개척단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김귀술의 동생 김○○은 1975년경 형과 함께 살고자 형의 사진을 가지고 개척단에 찾아갔다. 동네 사람들을 붙잡고 형을 아는지 물었다. 그러던 중 동네사람들 3명이 형의 사진을 보고 ‘남대문’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라며 알아보았다. 서울 남대문에서 잡혀왔다고 별명이 그렇게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형이 이미 죽었다고 했다. 개척단원 중 한 사람이 밤에 도망가다가 군인에게 잡혀 매를 맞는 것을 형이 그만 때리라며 말리자, 화가 난 군인이 그를 총으로 쏴 죽였다는 것이다. 동생은 형의 시신이라도 찾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서산청소년개척단 작업광경 (1962년) ⓒ국가기록원
 

노무현 정부 들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가 설치되자, 김막동 씨는 2006년 7월 31일 형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싶다며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이에 진화위는 당시 개척단원의 진술을 바탕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개척단원들의 증언은 이렇다. “부산 자갈치시장 하숙집에서 친구 6명과 잠을 자다가 해병대와 순경에 의해 수용됐다”, “부산에서 넝마주이 생활을 하다가 사복 입은 군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척단에 수용됐다”, “경찰에 의해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있다가 자신의 의사와 관련 없이 강제적으로 개척단에 수용됐다”.


보건사회부 자활지도계장으로서 1966년 6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개척단 업무를 담당했던 신○○도 “개척단의 경비 및 운영은 민○○ 단장이 자체적으로 운영하였고, 개척단에 수용된 대부분의 단원들은 배고프고 살기가 어렵고 강제적으로 수용되어 도망가는 단원이 있었으며 수시로 폭행과 인권유린 행위가 있었다고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4년 만에 진화위가 내놓은 결론은 다소 허무했다. ‘당시 개척단원 등의 진술을 종합하면 진실규명대상자 김귀술 또한 강제수용 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다만 군인의 총에 의해 사망하였다는 주장은 이를 입증한 진술 및 증거를 발견할 수가 없다.’ 이어 권고 사항을 통해, 개척단 운영에서 벌어진 인권침해에 대해 김귀술 등 가족들에게 사과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국가가 부랑인이라 낙인찍은 자들에게 가한 인권침해에 대해 실질적인 진상규명을 행한 거의 유일한 사례다. 그조차도 온전한 진상이 드러난 것도 아니고, 김귀술 등 가족들에게 사과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진화위의 권고는 이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2012년 5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생존자 한종선이 홀로 피켓 한 장을 들고 국회 앞에 섰다. 국가와 결탁한 사설 수용소에서 벌어진 엄청난 인권침해의 실상을 밝히고 국가가 사죄할 것을 요구했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피해자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집단진정도 제기했다. 그러나 인권위는 시효가 만료되었다며 각하결정을 내렸고, 특별법은 지난 정부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한 채 여전히 국회에 잠들어 있다.


“우리 피해자들은 문전박대 당했어요.”


이처럼 국가가 직접 내다 버리고, 짓밟고, 끝내 외면했던 이들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우리에겐 그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거나, 제주도 택시기사 아저씨의 말처럼 ‘깡패’라는 왜곡된 형상으로 박혀있을 뿐이다. 그도 아니면 1999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왕초’에서처럼 화려한 스펙터클에 갇혀 미화되는 방식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 중 어디에도 국가폭력을 문제 삼는 시각은 찾을 수 없다. 물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 문제가 처음 폭로되었을 때, 당시 야당으로서 전국 복지원 실태조사에 나섰던 신민당은 충남 연기군의 양지원, 대전 성지원 등 비슷한 인권침해 의혹이 제기되던 시설들에 대한 문제까지 거론하면서 국가가 부랑인 문제를 복지의 차원이 아니라 ‘안보’적인 문제로 처리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에 대한 처벌조차 솜방망이로 이뤄지면서, 지난 30년간 그런 문제의식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남대문에 살았을 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봤고 6월항쟁도 봤어요. 그때 우리도 뭔가를해보려고 했어요. 물론 아무것도 못했지만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그런 것과 우리 문제는 좀 다르잖아요. 우리 피해자들은 문제를 제기할 방법도 몰랐고 기회도 없었어요. 언론에 투서한 사람들도 모두 문전박대당했죠. 박종철은 그렇게 죽어서 열사가 되었는데 우리는 그 안에서 수백, 수천 명이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죽어갔는데도 이렇게 묻혔어요.” (『숫자가 된 사람들』, 오월의봄, 2015, 38쪽)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박경보 씨의 말이다. 87년으로부터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다. 그나마 피해 당사자들이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은 큰 변화다.


9회에 걸쳐 나갔던 ‘부랑인 강제수용의 역사’ 연재는 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예행연습이었다. 식민지 시기로부터,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1950년대의 혼란의 시기를 거치며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사회가 어떻게 도시의 가난한 자들을 ‘청소’하기 위한 정교한 폭력의 장치를 만들어 왔는지를 거칠게 살펴봤을 뿐이다.


9월부터 다시 시작할 연재를 통해서는 선감학원(仙甘學園) 피해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부터 1982년까지 경기도의 작은 섬 선감도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아이들을 잡아가둔 수용소, 선감학원. 그곳에서 살아남아 이제는 우리에게 증언자로 다시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한국 근대 역사의 가장 야만적인 국가폭력을 반성하고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 참고자료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9권 제3부 제2소위원회 사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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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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