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11월24일fri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뷰 펼침
HOME 뉴스홈 > 뉴스 > 인터뷰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광화문 농성장, 우리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5일 중단 예정된 광화문 농성, 환호와 우려 뒤섞인 반응 속
5년의 시간 내내 광화문을 지켜온 한명희 집행위원을 만나다
등록일 [ 2017년09월02일 20시28분 ]

2012년 8월 21일부터 시작된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이 시작된지 5년하고 보름을 더 넘긴 9월 5일 중단된다. 농성장 중단 소식을 바라보는 감정은 ‘고단한 투쟁이 마무리 되었다'라는 안도감과 ‘국가가 드디어 농성장의 외침에 응답했다’라는 기쁨, 그리고 ‘아직 확답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른 결정이 아닌가'라는 우려가 뒤섞여 있다. 우리는 광화문 농성 중단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 힌트는 농성장과 가장 긴밀히 연결되어온 사람들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명희 광화문 공동행동 집행위원.
 

농성장의 일상이 우리의 무기였다

 

늘 자신의 확고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패셔니스타, 또각또각 끊어지는 말투가 단호하면서도 결국 특유의 웃음소리로 문장이 마무리되는 사람. 광화문 농성장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챙기면서 대규모 투쟁을 기획하고 기자회견이나 투쟁의 현장에서 늘 필요한 물건을 한아름 안고 있는 사람, 한명희 광화문 공동행동 집행위원.


한 씨는 2010년 1월부터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상근을 했다. 대학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다 선배를 따라 장애인 활동보조를 거쳐, 노들장애인야학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한 씨는 '광화문 농성 공동집행위원회'에 '파견'되었다.


이전에도 노들야학이 소속되어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1주일 정도 진행되는 짧은 형태의 농성 투쟁을 자주 해왔기 때문에, 한 씨의 예상 역시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길어야 일주일 할 줄 알았던 농성은 1800일을 훌쩍 넘겼다. 그 1800일의 시간동안, 한 씨는 매주 월요일 공동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여하고, 24시간 돌아가는 농성장의 스케줄을 조정하고, 농성장에 쓰레기통을 비우고, 정수기 물을 갈았다.


"2012년 8월에, '앞으로 5년 동안 월요일마다 회의할 테니까 나오세요'했으면 '5년간 노들야학 상근을 할지도 모르겠는데요'라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돌아보니 5년간 농성장 집행위원으로 있으면서 진짜 별 일을 다 했네요."


지난 5년간, 광화문 농성장은 단 한 해도 '조용한' 적이 없었다. 박근혜 정부의 장애인 복지 정책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에 '뻥튀기 아저씨'를 모시기도 하고, 중증장애인 수십여명과 함께 4박5일간 전국을 순회하는 '차차차'(차별을 걷어차는 부릉부릉 자동차)라는 행사를 진행하고, 광화문 인근에 있는 여러 농성장들과 수시로 모여 연대 문화제를 진행했다. 그러나 땅 위에서 시끄러운 행사들이 진행되는 바로 그 순간에도, 광화문 지하 농성장에서는 일상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상을 채운 것은 260여개 연대단위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묵묵히 서명대 뒤에 앉아 시민들에게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의 필요성을 알리고, 이로써 연대의 영역을 확장해갔다.


"사실 농성장이 생기기 전에는 운동진영에서도 장애등급제나 부양의무제의 문제를 잘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엔 각계 운동진영에서 적폐 청산 과제로 늘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철폐가 나와요. 이런 변화를 보면서 힘을 많이 받지요. 이렇게 알릴 수 있었던 거점이 바로 광화문 농성장이었다고 봐요."


"이번에 보건복지부와의 합의 사항이 바로 농성을 중단하는 거였어요. '불법 점유'의 공간이었음에도 이 공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여기에 5년의 시간을 오로지 우리만의 힘으로 지켜온 것이 아주 큰 무기가 된 것이죠. 무언가를 열망하며 버텨온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힘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5년의 동력은 일상의 처참함이었다

 

광화문 농성장 설치 과정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활동가들.

하지만 농성 초기에는 농성을 언제까지 할 것인지 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18대 대선 당시 모든 후보들로부터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약속 받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선과 함께 이 약속들을 잊은 것 같았다. 대답도 없는 상대와 얼마나 기약 없는 싸움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농성을 접고 다른 형태의 투쟁을 이어가자'는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활동보조인이 없는 동안 화재로 목숨을 잃은 김주영의 영정이 들어서고, 장애등급제 피해자 송국현과 오지석이 잇따라 사망하고, 광화문 농성장 머리위로 세월호 농성장이 들어서자 ‘농성 중단론'은 쏙 들어갔다. 사람들은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물수록, 절망이 깊어져 갈수록 더욱 단단하게 서로의 손을 잡았다. 곧 광화문 농성장은 '물러설 수 없는 전선'이 되었다. 그것은 한 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5년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역설적으로 그 5년의 매일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농성이 끝나는걸 보고야 말겠다라는 욕심이 생겼어요, 저한테. 이건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랬을 것 같은데. 너무 처참하니까, 대답이 돌아오는 것도 받아들여지는 것도 없으니까 더 사람들이 분노하고 모이고 싸웠어요."


5년의 시간동안 많은 투쟁들이 ‘장례투쟁’이었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피해자의 영정이 하나 둘 농성장을 채웠고 남은 사람들은 영정을 들고 싸워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 누군가 앰프를 빌려오고, 공간을 마련하고, 선전물을 만들어야 했다.


“워낙 바쁘게 돌아가니까 슬퍼만 하고 있을 겨를이 없어요. 다음 발언자 챙기고 마이크 건전지 챙기느라 정신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딱 끝나고 나면, 일하는 중에는 그냥 넘겼던 사람들의 슬퍼하는 모습, 무너지는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있는 거예요. 아주 강하게. 그러면 이런 강한 잔상을 한참 곱씹게 되는 거죠. 사람이 산다는 건 정말 어려움이 많은 거구나. 서로가 채워줘야 할, 외로운 부분이 많은 거구나, 하고.”

 

우리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농성장이 슬픔과 무력감만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아니었다. 한 씨는 “광화문역이 원래 위험하다고 셔터 다 내리고 난 후에도 불을 전부 켜놨었는데 이제는 우리 농성장 쪽만 불을 꺼준다. 야간사수 하는 사람들 자라고. 이런 것도 너무 재밌지 않나"라며 껄껄 웃었다.


"좋은 일이 많았어요. 차차차 할 때인데, 저희가 쌍차 해고노동자 농성장 ‘와락'에서 잔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저희가 잘 먹고 잘 자고 간다고 10만 원을 드렸는데 와락에서 후원금으로 20만 원 주셔서 되게 뻘쭘해했던 기억도 있고요. 세월호 농성장 유가족 분들이 지나가다가 중증장애인들끼리 농성장 지키고 있는데 정수기 물이 없으니까 물통 갈아주고 가시고. 박근혜 퇴진 집회 한창일때 박사모 사람들이 오물 던지고 가고 욕하고 하니까 사람들이 되게 많이 격려해주고, 한달음에 달려와주고.”


"저는 만약에 야학 활동만 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장애계에서 활동 못 했을거예요. 슬프기만한 기억이 아니라 되게 재밌는 기억도 쌓여가고, 이런 것들이 단단해지면 넘어설 수 있겠다 싶었어요. 문득 삐죽 튀어나오는 사람들의 외롭고 슬픈 기억도 어쨌든 우리가 가져가야 하는 거니까, 억울하거나 사무치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한 씨는 농성장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집행위원으로 일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농성장 운영을 조율해왔다. 5년을 24시간 지킨다는 것은 분명 예삿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열정이 있었던 사람들도 반복의 누적에는 느슨해지기 마련이고 불만도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불만이 쌓여도 그만두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이 힘들다 귀찮다 하는데 그러면서도 언뜻언뜻 농성장에 대한 애정이 엿보일 때가 있거든요. 농성장이 ‘빵꾸'났다고 전화했더니 ‘양말만 신으면 돼'라며 전화를 뚝 끊고 달려가거나, 교대 시간에 다음 사수 단위가 늦었을 때 먼저 가라고 해도 ‘어떻게 그러냐 우리 농성장을 지켜야지'라며 자기 시간을 쪼개서 기다리는 경우도 있고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구나 하는 신뢰가 있으니 수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재미있게 넘어가면 될까를 생각하게 돼요.”


한 씨는 ‘계획이 잘 실현되는 것'보다 ‘사람들이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광화문 농성장 5년의 시간이 그에게 들려준 목소리라고 전했다.


“노원에서 그린라이트 선전전을 할 때였는데, 앰프도 없고 선전물도 없이 하게 된 거예요. 진짜 사람만 딱 있던 상황이었죠. 급하게 하드보드지랑 매직 사와서 구호 쓰고 생목으로 구호 외치면서 그린라이트를 했어요. 그때 당시에는 많이 난감했는데 돌아보니 이것도 너무 재밌는 기억인 거예요. 결국 뭔가 잘 안 풀리고 없어도 그냥 여기 있는 이 사람들과 ‘같이' 잘 하면 된다는 걸, 전 지난 5년간 배우게 됐어요.”


"장례 투쟁도 마찬가지예요. 투쟁은 분명 중요하고 슬퍼할 시간도 있어야 하죠. 일을 같이 나눠 하면서 서로가 슬퍼할 시간을, 틈을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게 '같이' 한다는 것의 힘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지지고 볶고 하면서도. 계속 ‘같이’ 하게 되는거죠."

 

지난 25일 박능후 복지부 장관이 농성장을 찾아 추모하고 있는 모습
 

농성은 중단되지만, 농성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농성 중단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던 자리는 박능후 복지부 장관이 농성장을 찾은 지난 8월 25일이었다. 당시 ‘기분이 어떻냐'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이 눈시울을 붉혔다. 아쉬움이나 분노, 기쁨이나 슬픔으로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눈물이었다.


“박 장관이 농성장 방문했을 때, 사실 우리가 뭐 장관 오라고 농성한 것도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벅찬 감정을 느꼈던 것은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 기어이 해냈다, 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좀 맥이 풀리는 것도 있었죠. 정권이 어떤 성향을 가졌느냐에 따라 장관이 방문하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인거구나, 하고요. 정말 박근혜 정권 때는 이게 절대 안 될 일 같았거든요.”


농성을 중단한다는 것, 익숙해진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이 주는 무게감을 사람들은 서서히 실감하고 있다. 한 씨 역시 마찬가지이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완전 폐지가 확실히 선언되고 난 후 접는 게 아니니까 아쉬움이 많이 있죠. 그래서 많이들 울더라구요. 하하하. 근데 이해 돼요. 저도 아쉽거든요. 단지 투쟁의 성과가 아쉬워서는 아니고, 농성장에서의 기억들, 거기서 맺은 인연들, 힘들었던 순간, 좋았던 순간이 막 뒤섞여서요. 정든 집 이사 갈 때 처럼요. 하지만 지금이 적기였던거 같아요.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의 시기인 것 같고, 우리의 투쟁은 어쨌건 앞으로도 계속 될 테니까요.”


“우리가 울며 겨자먹기로 억지로, 아니면 물리적으로 탄압 받아서 강제적으로 닫게 된게 아니잖아요. 시작도 우리가 끝도 우리가 선택하고, 그 사이의 모든 날을 우리가 직접 채워왔고요. 그래서 다들 너무 아쉬워하지 말고, 이 큰 한 챕터를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우리가 받았던 힘과 기억들을 잘 가지고 앞으로 뭐든 할 수 있을거 같아요.”


한 씨는 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감각을 확신하고 있었다. 구둣발 소리가 전철 소리만큼 크게 울리는 농성장에서 맞이하는 아침, 갈아도 갈아도 볼 때마다 비어있는 정수기 물통, 광화문역 편의점 사장님이 건네줬던 음료수, 아무도 없는 광화문역의 밤에 홀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간 커다란 화장실의 적막함에 관한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모두 광화문 농성장이기 때문이다.

 

빈곤철폐의 날에 행진 중인 한명희 집행위원. ©박누리 노들야학 교사

올려 0 내려 0
최한별 기자 hbchoi1216@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장애등급제 폐지 논의할 민관협의체 구성 윤곽 드러나
광화문 농성장과의 ‘뜨거운 안녕’-농성장 마지막 날의 표정들
광화문 농성 5년, 장애인 복지의 ‘구체제’ 무너뜨릴 ‘종자돈’을 얻었다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광화문 농성 5년, 장애인 복지의 ‘구체제’ 무너뜨릴 ‘종자돈’을 얻었다 (2017-09-04 18:06:14)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하는 좌충우돌 일상, 꼭 보여드리고 싶어요 (2017-08-07 12:15:39)
Disabled People News Leader 비마이너 정기 후원하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더보기
비마이너는 사회를 제대로 보기 위한 ‘지도꾸러미’ 같아요
비마이너는 인권의 최일선에서 '싸우는 언론'입니다
비마이너 기자의 포부, “사골국 끓여드릴게요”
비마이너는 높은 해상도의 렌즈로 세상을 정확히 보여주죠
비마이너는 현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언론이죠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아서 좋아요”
비마이너는 소수자의 시민권을 옹호하는 언론
우리 사회가 공유할 더 큰 가치를 위해, 비마이너를 읽고 후원합니다
기자에게 비마이너는, ‘나침판’이에요
“소수자를 차별하는 가장 무서운 방법은 그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거예요”


Beminor SNS 비마이너 페이스북비마이너 트위터비마이너 텔레그램
기고 칼럼 기자칼럼

기고 작은이미지
1년에 단 한 번뿐인 시험을 치르는 사람, 여기에도 있...
이른 아침, 낯선 교문 앞에서 떡이나 음료를 나눠주며 열...

친절한 거절을 거절하고 싶다
가족들이 던지는 물건, 그게 날 부르는 ...
당신이 아는 그 ‘청소년’은 없다
포토그룹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