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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가족...그러나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①-2
김춘근, 그의 22년을 기록하다
등록일 [ 2017년09월14일 11시46분 ]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하인천 바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년, 고기잡이배에 던져지다)

 

2016년 7월 27일 KBS <추적 60분>에서 방송한 ‘유골은 무엇을 말하는가, 선감학원의 진실’ 편에서는 8살 정도 된 어린 아이의 유골을 발굴했다. 선감도의 한 야산의 나무를 베어내고 더듬더듬 아이가 묻혔으리라 추정되는 지점을 찾아 흙을 걷어냈다. 그러자 조그마한 꽃신과 함께 뼛조각 몇 점이 드러났다.


그 덕분에 1962년 서울 길음시장 인근에서 할머니 손을 놓쳐 길을 잃고 헤매다 선감학원에 들어오게 된 허일용 씨는, 함께 원생으로 들어온 쌍둥이 형을 50여년 만에 유골로나마 다시 만나게 되었다. 허일용 씨는 형이 왜 죽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배가 고파 담요를 뜯어먹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날 뿐이다.


그 유골이 묻힌 자리를 기억해 낸 사람이 바로 김춘근 씨다. 그는 허일용 씨의 쌍둥이 형 허일동의 시신을 직접 묻었던 일을 기억해냈다. 선감학원에서는 죽은 아이들을 동료 원생들이 직접 묻었다고 한다. 섬을 탈출하려다 바닷물에 빠져 죽은 아이, 저수지에 빠져 죽은 아이, 맞아 죽은 아이, 굶어 죽은 아이…. 물을 흠뻑 먹어 무거워진 동료의 시신을 안고 십대의 아이들이 산을 올랐다. 그렇게 봉분도 없는 무덤들이 쌓이고 쌓여 산 전체가 커다란 무덤이 됐다.

 

김춘근 씨가 선감학원 원생들이 묻혀 있는 우물재산을 둘러보고 있다.
 

22년간 섬에서 생활하는 동안 김춘근 씨는 자신의 손으로만 5명의 아이들을 묻었다고 했다. 겉보기에 그는 이처럼 참혹한 시간을 견뎌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사람 좋게 웃었고,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였다. 젊은 시절 자전거를 타다 떨어져 뇌진탕 사고를 당한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어디 가서 손금을 봐도 내가 명은 길다네.”라며 엷은 미소를 띠기도 했다.


이런 그의 성격을 증언이라도 하듯 선감학원 피해자 모임의 동료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온갖 폭력이 난무한 그곳에서 김춘근 씨도 방장, 사장을 했고, 이후엔 직원으로까지 있으면서 아이들을 관리했다. 그러나 누구를 만나도 그에 대해 하는 말은 같았다. “춘근이 형은 애들 안 때렸지. 춘근이 형만큼 우리한테 잘 해준 사람이 없어.”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함께 한 선감학원 동료들만큼은 그를 환대의 마음으로 기억하지만, 좋게 말하면 사람 좋고, 나쁘게 말하면 약지 못했던 그에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선생이라는 자가 새벽 1시에 자는 아이 머리를 밟더라


- 71년부터 원생 신분에서 벗어나서 취사반장도 하시고 관리자 역할을 시작하셨는데, 그 때에는 급여를 받으셨어요?
“그 때 당시 8천 원인가? 월급으로 받은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 1년도 못 받았을 거야. 그것도 뭐 내 힘으로 된 것도 아니고, 선생들이 “춘근이도 이제 노임 줘야 하지 않냐” 그래서 준 게 8천 원. 그 때 당시 8천 원이면 크기는 컸지.”


70년도 기준 물가로 40kg 쌀 한가마가 2880원이었다. 8000원이면 쌀 세 가마 값에 조금 못 미친다. 매달 8000원을 1년 동안 받은 것이 그의 22년에 대한 유일한 대가였다.


선감도 내에는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에 선감학원 원생들도 의무적으로 예배 보러 가야 했다. 그 교회의 목사 아들도 선감학원 직원으로 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선감학원 원장 홍○○ 씨와 인척 관계였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서 고무신짝 하나가 사라졌다. 목사 아들은 원생들 짓이라며 신발을 찾아내라고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김춘근 씨는 원생 출신으로서 그 일이 그렇게 억울할 수 없었다.


고무신짝이 하나 없어졌으면 없어졌나 하고 그냥 말아야 할 거 아니야? 그걸 찾아내라고…. 내가 화가 나서 그 놈한테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어요. “너 목사 아들 내가 두고 본다. 내가 그 신발을 악착같이 찾아가지고 네 면상에다 던지겠다.” 근데 그 신발을 찾았어요. 개장 안에 들어가 있더라고. 개장 안에. 에휴.


고무신짝 물어간 강아지에게 돌아가야 할 비난까지 다 뒤집어 써야 했던 원생들은 사람 이하의 존재였다. 그는 직원이 되어서도 마주해야 하는 그런 모습을 견디기 어려웠다. 어느 날 밤엔 화를 참지 못하고 선생에게 주먹을 날렸다.


내가 취사반장으로 있을 때인데. 나는 (이제 직원이니까) 동네 나가 놀다 와도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었어요. 근데 새벽 1시쯤이었어. 누가 원생 아이의 머리통을 밟고 있는 거야. 잘 보니까 숙직 서는 선생이었어. 창문으로 쳐다봤더니 신발을 신고 들어와서 자는 아이 머리통을 밟고 있는 거야. (화가 나서) 내가 뛰어 들어가서 그 선생을 주먹으로 까버렸어요. 그 때 나는 선생이고 뭐고 없었으니까. “야 네가 선생이냐? 네가 숙직을 서면 섰지 왜 자는 애 머리통을 들이 밟아? 이 상놈의 새끼야!”하면서. 그때 카메라가 있었으면 그런 걸 찍어놨어야 하는데.
그리고 날 밝고 나서 원장을 찾아갔어요. “저 선생 내쫓으시오.” 내가 봤으니 그 놈도 발뺌을 못하지. 원장이 사직서 쓰라 그러더라고. 그런데 그 선생이 딱 버티는 거야.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경기도 아동과로 찾아갔어요. 결국 그 선생은 다른 데로 갔는데. 나는 선생들하고 친하게 안 놀았어요. 나는 애들 편이지.


‘나는 애들 편’이라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74년경 가출 한 채 청량리 인근에서 신문팔이를 하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를 거쳐 선감학원으로 끌려 온 이성영 씨(가명)는 어느 날 그에게 인천의 집 주소를 알려주면서 인천에 나갈 일이 있으면 어머니를 한 번만 찾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러겠다고 약속했고, 약속은 실현됐다. 아들이 선감학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 씨의 어머니가 선감학원에 찾아와 아들을 데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씨가 선감도에 끌려 온 지 4년만의 일이다. 그렇게라도 나갈 수 있었던 이 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였다.


배가 고프고 농사일이 힘이 들어 원장 관사를 찾아가 ‘데모’를 한 일도 더러 있었다. 선감학원 개교기념일이면 도지사를 따라 찾아오는 도청 공무원들에게 애원도 해봤다. 그러고 나면 반찬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지옥 같은 섬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실상 그들은 이 사회의 지워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선감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그림. 김춘근 씨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았다.


살아 있는 자의 사망신고


그는 선감도 해안초소에서 방위 근무를 마치고, 선감학원에서 소개해준 여성과 73년도에 결혼했다. 그녀도 고아였다. 청량리에 있는 여성직업보도기술학원에 있던 여성이었다. 결혼 후 한 동안은 선감도에서 살았다. 그런데 70년대 말부터 정부는 각종 사업소를 통폐합하거나 민간에 위탁해 수고로운 일들을 털어내고자 했다. 이즈음에 서울시립아동보호소도 마리아수녀회에 운영권이 넘어갔다. 선감학원도 민간위탁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선감학원은 위탁받아 운영하려는 이가 나타나지 않아 결국 폐쇄됐다. 결국 그도 선감도를 떠나 수원으로 나오게 되었다.


22년의 섬 생활이 그에게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중에 가진 돈이라고는 월세방 얻을 돈이 전부였다. 그나마 선감학원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사람이 수원시청 청소과장으로 나가 있어 그 밑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정생활은 안정치 못했다. 자신이 일하러 나간 동안 밖으로 도는 듯 보였던 아내와 갈등이 지속됐고, 결국 85년도에 이혼을 했다. 이혼 후 두 아이를 키우면서 호떡장사도 하고 페인트공 일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부모님을 다시 만난 건 사실 원생으로 있을 끝 무렵이었다. 선감학원에서 나이가 어느 정도 찬 사람들은 도민증을 만들라면서 잠시 외출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도 자신의 호적을 찾으러 인천의 큰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하지만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이미 가족들은 충남 당진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었다. 결국 또 배를 타고 당진까지 찾아갔다. 그를 맞이한 사람은 계모였다. 낯선 어머니에게 “내 호적이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물었더니, 이미 사망신고를 냈다는 믿기 힘든 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기록을 잃어버린 그는 결국 현재까지 ‘경기도 부천군 대부면 선감리’를 본적으로 두고 살고 있다. 하인천 바다 앞을 거닐던 12살 소년 김춘근은 죽은 사람이 되어버렸고, 강제로 섬에 끌려가 22년을 버틴 ‘출생지 미상’의 한 남자만 남았다. 그는 현재까지 가족들과 단절된 채 살고 있다.


기억의 복원을 통한 ‘인간 선언’


많은 선감학원 원생들이 지옥 같은 섬을 탈출하기 위해 갯벌을 넘고, 바다를 건넜다. 그것은 모험이었다. 더러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성공하더라도 다시 잡혀오기 일쑤였고, 갑자기 불어난 바닷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김춘근 씨는 수영도 곧 잘 했지만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선감학원에 강제로 끌려가지 않았다면 자신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볼 법 한데, 그런 질문에는 “나는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라며 고개를 젓는다. 마치 자신에게는 다른 삶의 가능성이 애초에 없었던 듯 말하는 것 같아 듣는 쪽이 도리어 무안해지고 만다.


“우리가 집안이 화목하게 잘 살았으면 모르겠는데 이미 파탄이 나고 그랬으니까 중심을 못 잡은 거 아니에요.” 이런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매번 곱씹고 또 곱씹어 보았다. 그는 자신의 어릴 적 삶이 가난하고 불안정했기에 그렇게 납치되듯 섬에 끌려가 온갖 비참을 견뎌야 하는 게 정말 숙명이라 생각하는 걸까? 이런 의문까지 떠오르자 선감학원 자체보다 오히려 ‘숙명’이라는 말 자체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김춘근 씨(사진 오른쪽)가 선감역사발물관에 전시된 옛 원생 동복을 매만지며 동료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녹취록을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면서, 그의 말을 그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다거나, ‘숙명’ 같은 단어로 간편히 정리해버린 나의 해석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선감학원 출신 동료들과 함께 경기도청이며 안산시청이며 쫓아다니면서 민원을 제기했다. 지금도 힘들게 살고 있는 생존자들이 먹고 살 수 있게 지원을 해달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억울하게 죽어 암매장된 원생들의 묘지 정비를 시에서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 덕분에 그나마 현재 선감학원 옛 터에 자리 잡은 경기창작센터 한 가운데에 추모비가 세워졌고, 지난해부터 매년 5월 말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올해 1월 21일에는 경기창작센터 뒤편에 선감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경기창작센터에 입주해 활동하는 자우녕 작가가 김춘근 씨의 22년의 기억을 복원해 컨테이너 3동에 전시실을 꾸몄다. 선감학원 원생들이 일할 때 쓰던 물지게, 원생들을 구타할 때 사용하던 몽둥이와 곡갱이, 밥그릇과 호롱불, 그 당시 입던 동복과 하복까지,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전시실에 들어갈 것들을 구입하는데 자우녕 작가와 함께 그가 발품을 팔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기억이 담겨 있는 선감도이지만, 이곳에서의 22년은 어쩌면 그의 어린시절과 청년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는 그 22년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이 섬을 방문하는 이들과 나누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 22년은 사실 부모님이 자신을 사망신고하고, 한국사회가 이 땅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렸던 시간이다. 그가 다시 그때의 기억을 꺼내놓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자,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렸던 이 사회를 향해 다시금 스스로를 인간으로 선언하는 행위이다.


기억을 복원하고 공유하기, 이것은 22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는커녕, 가장 적극적이고 당당한 ‘인간 선언’의 행위가 아닐까? 김춘근 씨의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이 ‘인간 선언’에 화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선감학원 폐쇄 후 35년 동안 침묵하고 외면했던 한국사회를 향해 그가 던지는 질문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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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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