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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두 번 건너 죽음의 섬에서 탈출하다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②-1
김성민 씨의 이야기
등록일 [ 2017년09월20일 18시21분 ]

소년의 부모는 빚을 지고 피신을 다녔다. 소년이 열세 살 되던 해인 1963년, 가족은 평택의 어느 개울가 옆에 다 허물어져가는 집을 짓고 살았다. 돈을 벌 재주가 없는 소년에게 집에서 구두 통을 하나 만들어주었다. 소년은 그것을 들고 나와 구두를 닦았다. 쉽지 않은 그 시간도 오래가지 못했다. 3일째 되던 날 경찰에게 붙들려 선감학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내가 김성민 씨(가명)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그로부터 54년이 흐른 2017년 2월이었다. 내 손엔 그가 경기도청에 찾아가 직접 쓴 ‘선감학원 피해자 신고서’가 들려 있었다. 1951년생인 김성민 씨는 1963년 경찰에게 끌려가 강제로 선감학원에 입소되었고 2년 후 탈출했다고 적혀 있었다. 어디서 인터뷰를 하는 게 편하겠느냐고 내가 묻자 그가 자신의 집이 좋다고 대답했다. 그 연배의 노인들처럼 까페 같은 공간이 익숙지 않은가 보다 생각한 것도 잠시, 그가 주소를 불러주며 “어플 보면서 찾아올 수 있죠?” 라고 말해 나는 그가 그 연배답지 않게 스마트하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붉은 벽돌의 다세대주택이 늘어서 있는 서울 중화동의 한적한 동네 1층에 그의 집이 있었다. 혼자 사는 살림은 단출했고 집안은 조금 어두웠지만 단정하고 따뜻했다.

 
짧은 소개를 마친 후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이 선감도를 탈출하던 밤의 이야기였음은 그의 말을 한참 더 듣고 난 후에야 알았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모르지만 뭔가 이야기해야한다는 의무감에 떠밀린 사람처럼 그는 허겁지겁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그가 갑자기 이야기를 멈추었다. 갯벌을 건너다가 경비들에게 붙잡힌 그가 원생들에게 ‘다구리’(집단 구타)를 당했던 순간에서였다. 가슴 속에서 왈칵 게워져 나온 뜨거운 것을 다시 삼켜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는 결국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힘들게 살아서…… 눈물이 다 말라버린 줄 알았어요.”

 

아이처럼 우는 노인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랐다.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쳐다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떤 기억은 정말 뼛속에 각인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열다섯 살 소년은 어디에 숨어있다 52년의 세월을 뚫고 이렇듯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잊힌 줄 알았던 소년을 불러낸 것이 후회스러웠는지 김성민 씨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괜한 짓을 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인터뷰를 단념하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붙들 듯 그가 이내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야.”

 

그는 이 문장을 지팡이 삼아 ‘끄응’하고 일어서듯 말했다. 그리고는 한층 차분해진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실컷 두드려 맞은 열다섯의 소년이 눈물을 쓱쓱 훔치고선 다시 힘차게 갯벌을 헤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래는 김성민 씨 구술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탈출, 바다를 두 번 건너다


두어 번 도망치다가 붙잡혔어요. 갯벌 건너가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발이 푹푹 빠지는 데다 사방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도망치는 모습이 다 보이잖아요. 도망가는 족족 잡히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잡히면 엄청 맞죠. 한 사(舍)에 방이 여러 개 있고 그 앞에 복도가 있었어요. 도망가다 잡힌 아이가 있으면 원생들을 복도 양 옆에 주욱 늘어서게 해요. 그리고는 그 애가 지나가면 무조건 때리라고 하는 거예요. 잡힌 애한테는 그 복도를 몇 번 왕복하라고 시켜요. 팔로 얼굴 앞을 가리고 몸을 잔뜩 움츠리고 지나가면, 보통 아이들은 때리는 척만 하지 그렇게 세게 못 때리는데 방장이나 사장은, 그것도 조그만 권력이니까, 앞에서 발로 들고 차버려요. 그러면 뒤로 나자빠지죠. 한 번도 통과하기 어려워요. 그걸 일명 ‘다구리’(집단 구타)라고 하죠.

 

1970년 선감학원 기록 사진 (사진제공 :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어느 날 한 친구가 도망가다가 잡혀서 다구리를 맞고 누워있었어요. 걔는 세 번째쯤 잡혔던 것 같아요. 잔뜩 맞아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어요. 내가 다가가서 “이번에는 나랑 도망갈래?” 하니까, 그렇게 맞고서도 대번에 ‘그러자’고 해요. 그래서 일단 밖으로 나왔죠. 제가 있었던 곳은 성심사(원생들이 거주하던 건물의 이름. 성심사, 일심사, 합심사 등이 있었다.)였는데, 그 앞에 작은 길이 나 있었고, 그 아래 커다란 하수구가 있었어요.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흘렀어요. 눈에 띌까봐 일단 그 안에 숨긴 했는데 아카시아가 잔뜩 있어서 더는 들어갈 수는 없었어요.


조금 있으니까 위에서 “야, 누구 누구 없어졌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경비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경비들도 다 원생이에요. 나이가 네다섯 살 더 많은 원생들. 어린 나이에도 생각해보니, 경비들이 다 모여서 사방으로 배치되어 흩어지기 시작하면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겠더라고요.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서, 아카시아 나무 가시에 찔리면서도 앞으로 막 밀고 나갔어요. 잡혀서 맞는 게 더 무서운 일이니까요. 그렇게 얼마쯤 헤치고 가니까 하수구 끝에 갯벌이 쭉 펼쳐져있었어요.


갯벌을 한참 힘을 써서 걸어갔어요. 다행히 경비들이 쫓아오진 않았어요. 그리고 바다를 헤엄쳤죠. 물때 같은 것도 계산 없이 나왔는데 다행히 물이 빠졌을 때였어요. 그런데 물살이 셌어요. 그 바다가 제 기억으로는 100미터, 혹은 150미터 정도 거리가 아닌가 싶어요. 가까운 거리처럼 보이는데도 그것 건너기가 그렇게 힘들었어요. 닿을 듯 안 닿고 닿을 듯 안 닿고. 대부도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래 지점에 도착했더라고요. 물살에 휩쓸려 그만큼 떠내려간 거죠.


헤엄칠 때 바닷물에 옷이 다 떠내려가서 둘 다 발가벗고 있었어요. 어느 집에 널려 있던 빨래를 걷어서 입었어요. 이제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숨을 좀 돌릴 수 있었죠. 그랬더니 슬슬 배가 고프더라고요. 고구마나 토마토 같은 걸 따서 먹으면서 갔어요. 고구마를 캐면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아주 작았어요. 토마토도 아직 익지 않은 파란 것들이 매달려 있었고요. 아마도 5월쯤이지 않을까 싶어요.

 

인천으로 나가는 배가 대부도엔 없고 선재도에 있다고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대부도 끝까지 가서 다시 선재도로 헤엄쳐 가야 했어요. 낮에는 밭이나 숲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살살 움직였어요. 주민들한테 붙잡힐까 무서워서 많이씩은 못 갔어요. 도망친 애들을 잡아다 주면 주민들한테 밀가루 한 부대씩을 줬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순진해서 그랬는지, 아무리 ‘부랑아’라고 해도 그 작은 아이들이 질이 나쁘면 또 얼마나 나쁠 거라고, 무조건 잡아다 줬어요. 저는 도망칠 때마다 경비들한테 붙들렸었지만 주민들한테 잡혀오는 아이들도 많았어요.


대부도를 가로질러 가는 데 일주일 정도 걸렸어요. 똑바로 간다고 갔는데 모르겠어요. 똑바로 갔는지, 지그재그로 갔는지. 대부도 끝에 도착하니까 바다 건너에 선재도가 보이더라고요. 헤엄쳐 건너기는 그 바다가 더 힘들었어요. 물살이 더 셌어요. 죽었다는 아이들은 그래서 죽었을 거예요. 도망가다 죽은 애들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대부도에서 선재도로 넘어갔을 때 눈앞에 보이던 그곳이 아니라 한참 아래쪽에 닿았어요. 뭍에 닿았을 때는 몸에 힘이 다 빠져서 조금도 못 움직일 정도로 지쳐있었으니까. 조금만 더 힘이 빠졌더라면 그대로 떠내려갔겠죠. 그럼 죽는 거죠. 저는 물귀신이란 소릴 들을 만큼 수영을 잘 했거든요.


선재도는 선감도보다 더 작게 느껴졌어요. 같이 도망친 아이가 어디서 구했는지 천 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 오백 원을 나 쓰라고 줬어요. 그 돈을 쥐고 선착장에 갔어요. 인천 가는 큰 배가 거기에 바로 닿는 게 아니라 작은 배를 내려서 사람들을 태우고 갔어요. 그런데 선재도 선착장에서 표를 파는 사람이 선감도에서 나온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요. 자기는 선감도에서 나온 사람이라고요. 딱 걸린 거죠. 그때 뱃삯이 30원이었는데, 그 사람이 자기한테 30원씩을 주면 통과시켜 주겠다고 했어요. 두 명이서 배표 사려고 갖고 있던 돈 60원을 그 사람한테 주면서 우리를 좀 봐 달라고 빌었어요. 뱃삯은 따로 지불하고요. 그래서 무사히 배를 탈 수 있었어요. 당시 30원이 어느 정도였냐면, 육지로 나와서 그 돈으로 반바지를 사서 입었어요. 그렇게 그 섬을 빠져나와서 2년 만에 평택으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집을 찾으니까 없더라고요.

 

현재 선감도 선착장 앞 바다의 모습.


선감학원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객지 생활


그때부터 객지생활을 했어요. 선감학원에서 말하던 진짜 부랑아가 된 거죠. 열차에서 장사를 했어요. 흔히들 ‘잡상인’이라고 부르는 그런 일이죠. 그런데 그 생활이 되게 험해요. 왕초가 있어요. 물건 팔아서 번 돈은 전부 왕초에게 갖다 바쳐야 돼요. 열아홉 살 정도가 돼야 풀어줘요. 그때부터는 자기 돈벌이를 할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왕초가 주는 거나 받아먹어야 돼요. 그런데 왕초 입장에선 군기를 잡아야 아이들이 자기 말을 듣고 돈을 벌어다 주잖아요. 그러니까 엄청 때리는 거예요. 선감학원에서는 주로 ‘빳다’를 맞았다면 여기는 더 험했어요. 깡통을 바닥에 놓고는 아이를 번쩍 들어서 거기다 메다꽂아요. 깡통 위로 떨어지면 엄청 고통스럽죠. 대신 누가 해코지 하면 왕초가 지켜주는데 그게 안심이 된다기보다는 자기 왕초한테 맞는 게 더 무섭고 힘들죠. 


한 번은 발등에 금이 갔던 것 같아요. 기차역에서 장사할 때인데, 열차가 정차하면 들어가서 물건을 팔았어요.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내려야 하는데 한 개라도 더 팔려다보면 어느 정도 속도가 날 때까지 버티는 거예요. 그리고는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려요. 그쪽 은어로 ‘도비노리’라고 해요. 그런데 그날은 기차에 속도가 너무 붙어버린 거예요. 왕초가 빨리 내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기차를 쫓아오는데 내릴 수가 있어야죠. 결국 못 내렸어요. 다음 역에 가서 내렸더니 왕초가 택시를 타고 쫓아왔더라고요. 그런데 그냥 온 게 아니라 양쪽 주머니에 몽돌을 하나씩 넣어 왔더라고요. 그걸로 내 발등을 내려찍었어요. 한 달 동안 기어 다녔어요. 금이 갔던지 부러졌던지 그랬던 것 같아요. 나이가 어릴 때니까 그나마 빨리 나은 거겠죠. 


제가 술을 전혀 못 먹는데 객지 생활할 땐 그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술까지 먹었다면 폐인이 됐을 거예요. 그 생활이 워낙 험했으니까. 지금은 없어졌던데, 대전역에 가면 보일러실이 있었어요. 석탄가루가 잔뜩 쌓여있었는데 거기서 3시간 정도를 얻어맞았어요. 이유도 없어요. 그냥 군기 잡는 거예요. 이렇게 맞다간 죽겠다 싶더라고요. 옆에 있던 돌멩이를 잡았어요. 그러고는 때리고 돌아서는 왕초 뒤통수를 찍어버렸어요. 그런데 그게 설게 찍어져서 더 맞았어요. 흠씬 얻어맞고 나서 한 번 더 찍었어요. 그 후부터는 안 맞았어요. 장사하느라 경부선도 타고 호남선도 탔는데, 저놈은 건드리면 고약하다는 소문이 나는 바람에. 체구가 작고 힘이 없는 사람일수록 싸울 때는 더 무서워요. 힘이 세면 주먹으로 할 텐데, 주먹으론 안 되니까 다른 방법을 강구하죠. 어떻게 보면 그때 생활이 더 힘들었는데…… 그 원인이 선감학원에 있으니까요. 그런 생활하느라고 몸이 많이 곯았지 싶어요.

 

지난 5월 27일 열린 선감학원 위령제. 죽은 아이들이 묻혀 있는 야산에 아이들을 상징하는 종이 인형이 세워져 있다.


거짓말, 그리고 때를 놓쳐버린 배움의 기회


열차에서 장사하고 지내던 때인데 문득 고양시 일산역 근처에 사촌이 살았던 게 기억이 났어요. 거기 가서 가족을 찾았어요. 스물한 살 때였죠. 열세 살에 헤어져서 9년만이었죠. 고양군 지도면 강매리라는 곳에 살고 계셨는데, 빚을 져서 쫓겨 다니느라 형편없이 살고 계셨어요. 제가 돈을 벌어야 됐죠.


취직하려고 신문 광고 보면서 한 40군데 쯤 찾아가 봤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학력이 전혀 없으니까 가는 곳마다 안 된다는 거예요. 언젠가는 대나무 돗자리를 파는 곳이었는데, 돗자리를 들고 나가서 그냥 팔아 오면 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학력을 따지더라고요. 얼떨결에 ○○고등학교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랬는데 그 정도 나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나중엔 화가 나더라고요. 그 길로 헌책방에 가서 중학교 책 몇 가지를 사서 혼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기초가 있어야 알죠. 더군다나 영어는 더 어렵고. 어떤 때는 두세 시간밖에 못 자가면서 한 1년 애를 썼던 거 같아요. 검정고시를 보려고 했던 건데 나중엔 방향이 좀 이상하게 흘렀어요.


그 뒤에 어떻게 하다가 학습지를 배달하고 영업하는 일을 했어요. 공부를 하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니까요. 그때는 집집마다 돌면서 “학습지 보세요” 하면, 작은 동네에서도 100여부가 모집이 되던 그런 시절이었어요. 동네에 학습지 운영소가 있어서 거기에 갖다 주면 돈을 줬어요. 그때에도 내가 공부를 하려고 책을 계속 들고 다녔는데, 그것 때문에 학부형들이 저를 재수생으로 오해했어요. 나이가 스물한 살인데 중학교 책을 들고 다니기 부끄러워서 하얀 종이로 포장을 해서 들고 다녔거든요. 한 어머니가 쌍둥이 아이들을 가르쳐달라고 하기에 내가 시간 없어서 안 된다고 피했는데도, “그러지 말고 해주세요, 내일부터 보낼 게요” 하더니 다음날 진짜 아이들을 보낸 거예요. 그때 쌍둥이가 5학년이었어요.


오늘은 약속 있어 안 되니 내일부터 와라, 해놓고는 서점에 가서 6학년 전과를 샀어요. 밤새 공부해선 애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때 그 일이 잘 안 됐어야 했는데… 그 애들이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공부를 했는데 다 잘 안 되다가 나한테 와서 성적이 많이 올랐어요. 그 바람에 다른 애들까지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한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때 애들을 가르칠 게 아니라 힘들더라도 내 공부를 했었어야 하는데… 늦은 게 아니었는데 그땐 굉장히 늦었다고 생각했었어요. 이미 ‘선생님’으로 살고 있으니까 검정고시도 못 본 게 소문날까봐 무서웠어요. 저는 초등학교도 못 나왔기 때문에 초등 검정고시부터 봐야 하거든요. 그런데 내 나이가 있으니까 검시를 보러 가면 ‘만학도가 꿈을 이뤘다’는 식으로 꼭 신문에 나올 것 같더라고요. 결국 때를 놓쳤어요.


학습지 관련된 일을 주로 했어요. ‘일일 공부’라고 하는데, 오늘은 국어 학습지가 나오고 내일은 산수, 모레는 사회, 이렇게. 애들이 공부해서 문제를 풀면 그걸 걷어다가 채점해서 다시 갖다 주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그 분야의 일을 할 기회가 많았어요. 마흔쯤 됐을 때에는 어떤 분이 같이 손잡고 일해 보자 해서 경북 영주에서 수학강사를 한 적이 있었어요. 중학생 전문 학원이었어요. 수학반이 이미 A, B반이 있었는데, C반을 하나 더 만들기로 하고 제가 갔어요. 교실은 넓은데 처음엔 학생들이 없었죠. 1학년 수업에 2명, 2학년 수업에 3명, 3학년 수업에 2명, 이런 식이었어요. 그런데 열흘 정도가 지나니까 교실이 꽉 찼어요. 게다가 다른 교실에 있던 의자까지 옮겨와야 할 판이었어요. 내 수업이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서 A, B반 수강생들까지 다 내 수업으로 온 거였죠.


20대, 30대 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되게 힘들었어요. 이를테면 역사 과목에서 고구려 연개소문이 나왔다고 해봐요. 교과서에서는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요. 그런데 그거 하나 제대로 설명하려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해야 하나 몰라요. 잠도 안자고 대여섯 시간 동안 책을 보면서 정리해야 돼요. 그런데 막상 설명하면 5분도 채 안 걸리죠. 설명하고 나면 허망해요. 그때는 힘들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시간이 지나고 영주에 가서 일을 해보니까 헛고생만 한 건 아니었어요. 그만큼 노하우가 쌓였더라고요. 그런데 수강생들이 나한테 몰리니까 원장은 그게 싫었나 봐요. 원장하고 내가 수강료를 50%씩 나눠 갖는 구조였거든요. 하루는 원장이 나한테 ‘너무 튀게는 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내 수업에 학생이 더 늘지 않게 하라는 말이었는데 그럼 발전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나중엔 성남에 있는 어느 유명학원에서 강사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학력은 없지만 경험은 많다고 했더니 시강을 해보래요. 10분도 안 되게 했는데 대번에 손잡고 내일부터 나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학원은 어떤 게 있냐면, 강사가 이름이 알려질 만하면 경쟁 학원에서 그 사람 결점을 캐내서 공격을 하거든요. 학원 쪽에서 나를 돌려보내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연락을 해서는 채용을 취소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후론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더 이상 못했어요. 학력에 대한 스트레스가 두고두고 나를 따라다녔어요. 공부를 했다면 잘하진 못해도 기본은 했을 것 같은데… 그걸 못하고 넘어온 게 너무 억울하죠.


(다음 연재 기사 이어 보기 : ▶국가, 수렁에 빠진 소년들을 삼키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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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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