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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수렁에 빠진 소년들을 삼키다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②-2
김성민 씨의 이야기
등록일 [ 2017년09월22일 19시07분 ]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바다를 두 번 건너 죽음의 섬에서 탈출하다)


영주에서 학원을 그만두고 올라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 조그마한 집을 샀었어요. 여자를 만나서 결혼생활을 한 2년 했나. 교회에서 일을 했어요. 차도 운전하고. 보통 ‘관리 집사’라고 하죠. 집 샀을 때 진 빚이 있었는데 그 돈을 교회에서 빌려서 메꿨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목사님하고 부딪쳤어요. 쉬는 날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불만을 이야기했죠. “목사님, 우리도 쉬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안 된다는 거예요. 그때 목사님하고 틀어져서 일을 그만뒀어요. 그 후에 빚을 갚고 어쩌고 하느라고 아내하고도 다툼이 생겼어요. 내가 고집을 안 꺾으니까, 아내는 나를 말려보려고 이혼하자고 했던 거 같은데, 그게 진짜가 돼버렸죠.


집을 팔려고 내놨는데 압류가 돼있어서 집이 안 나가더라고요. 결국 경매로 넘어가버렸어요. 경매라고 해봐야 400만원 정도였어요. 은행에 매달 얼마씩 갚아나가는 거, 액수도 크지도 않았는데. 집이 그렇게 넘어가고 모든 게 없어졌어요. 그 후엔 대리운전 같은 걸 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몸이 안 좋아져서 일을 못하다 보니 수급자가 됐죠. 작년에 화장실에서 목욕하다 미끄러졌어요.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1번 척추가 완전 으스러졌어요. 다리는 그 전부터 아팠고요. 누가 싸움하는 걸 말린 적이 있는데 그때 힘쓰면서 고관절이 틀어졌나 봐요. 장애등록을 할 정도는 아닌데 일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에요.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이젠 저 혼자예요.


그 또래 아이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선감학원에서 학교라도 보내줬다면 덜 억울했을 거 같아요. 처음에 들어갔을 때 ‘선감학원’이란 말을 듣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며칠 생활해보니까 ‘학원’이 아니거든요. 거기서 가르쳐준 건 ‘선감학원가’ 밖에 없어요. “솟는다 붉은 해가 우리 머리 위에로, 선감도 푸른 섬에 가득 찼다 햇빛이.” 그 노래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어릴 때 배운 노래라 그런지 기억이 나요. 열세 살에 선감학원에 잡혀가서 김 메고 모내기 하고 누에를 쳤어요. 일하는 것보다 맞는 게 더 힘들었어요. 일이야 아무리 힘들어도 끝나고 쉬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건 견디기 힘들었어요. 맞는 데 이유가 없었어요. 한 아이가 오줌을 싸면 단체기합이에요. 내가 싼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1956년 선감학원 건물 신축 및 재개원 후 시찰단이 방문한 모습 ⓒ경기창작센터


그래도 제일 억울한 건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거예요. 물론 집이 어려워서 학교 다니기 힘들었겠지만 집에 있을 땐 하다 못 해 천자문이라도 공부할 수 있었거든요. 친척들이 있었으니까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신경 써줬을 것 같아요. 학교는 못 가더라도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를 하지 않았을까.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요. 살면서 나한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나 혹은 주변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쓰다 보면 해결이 되는 때가 있어요. 이 정도 지능이 있는데 공부를 좀 했다면 사는 게 지금과는 좀 다르지 않았을까.


선감학원에서 정규 교육만 받게 해줬더라면 피해자 신고도 안 했을 거예요. 선감학원에서 초등학교 다녔던 몇 명이 있었는데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그 부분이 제일 억울해요. 공부해야 될 시기에 선감학원에 잡혀가서는 공부도 못한 거. 선감학원 탈출해서는 선감학원에서 말하는 진짜 부랑아가 됐어요. 스물한 살까지 객지 생활하면서 나이 몇 살 많은 형들한테 만날 얻어맞으면서 살았어요. 나쁜 기억은 되도록 잊고 살고 싶은데 어릴 때 기억이라 뼛속까지 남아있어서 안 없어지죠. 객지생활하면서 워낙 험하게 살아서 눈물 같은 건 다 말라서 없어진 줄 알았는데 선감학원 이야기를 할 땐 참는다고 애쓰는데도 눈물이 나요.


선감도에 잡혀갔을 때가 열세 살이었어요. 요즘 그 또래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하물며 선감학원엔 나보다 더 어린 애들도 있어요. 여덟 살, 아홉 살, 그런 쪼끄만 애들. 그런 애들이 집에 가겠다고 울다가 얻어터지는 걸 하루 이틀 본 게 아니에요. 때리는 것도 따귀 정도 때리는 게 아니라 엎드려뻗쳐 시켜서는 엉덩이를 때리죠. 어떤 아이는 퍼렇게 멍이 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살이 터졌어요. 그러면 며칠 동안 앉지도 못하고 고생을 해요. 지금 그 또래 꼬마들을 보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저 어린 것들이 그렇게 맞았다고 생각하면 한 번씩 불쑥 분노가 치밀어요.


저처럼 고통스러운 기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상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평생 삶의 방향이 바뀌었어요. 돌아갈 수가 없잖아요. 버스 한 번 잘못 타서 조금 돌아오는 것하고는 전혀 다르잖아요. 열차에서 장사하면서 정말 많이 맞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보다 더 억울한 게 선감학원 들어간 거예요. 열차에서 장사했던 건 그래도 내가 뭔가 얻으려고 하다가 얻어맞은 거니까 그나마 덜 억울한데 선감학원은 그렇지 않잖아요. 내 뜻이 전혀 개입된 게 아니잖아요.


나중에 대구에서 우연히 선감학원에서 탈출하던 날 경비를 섰던 사람을 만났어요. 그날 저를 못 잡았으니 자기들도 혼이 날 게 무섭잖아요. 그래서 그 길로 그 사람도 도망을 쳤다고 하더라고요. 저보다 네 살 정도 위의 형이었는데 대구에서 버스 운전을 하고 있었어요. 말로는 “덕분에 도망 잘 쳤다”고 하더라고요.

 

지난 5월 27일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서 열린 선감학원 희생자 추모제. 이곳이 선감학원의 원생들이 섬에 잡혀와 처음 도착한 선착장 자리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가만 생각해보니까… 갯벌엔 수렁이 많거든요. 물이 샘물처럼 올라오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 있어요. 거기에 한 번 발이 빠지면 계속 빠져요. 못 빠져 나와요. 그 상태에서 바닷물이 들어오면 죽는 거죠. 거기서 죽은 애들은 다 그래서 죽었을 거예요. 수렁에 빠져서. 서해안에 물 들어오는 속도는 지금의 내가 봐도 무서울 정도로 무지하게 빨라요. 나도, 그 사람도, 그때 그렇게 살아서 나온 걸 생각하면 운이 좋은 건데… 뒤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경찰이 어떻게 그랬냐 말이에요…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도 아닌데… 어째서 경찰이 그 어린 아이들을 그런 곳에 붙잡아 넣고, 어떻게 경기도가 운영하고 국가가 관리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단 말이에요…


(이상 김성민 씨 구술 기록)


*필자 후기


도망치는 소년들을 생각한다. 수렁에 빠진 소년들의 발 위로 시시각각 바닷물이 차오를 때, 겁에 질린 소년들의 눈에 비친 검은 바다를 상상한다. 끝내 바다가 삼켜버린 소년들의 시신은 형편없이 망가져있었다고 했다. 살았을 적 소년들의 몸을 선감학원이 그토록 잔혹하게 빨아 먹었던 것처럼 소라와 낙지 같은 보드라운 것들은 죽은 소년의 몸에 붙어 눈구멍부터 파먹었다고 했다.


수렁에 빠져 죽지 않은, 다행히 살아서 잡힌 소년들을 생각한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은 소년에게 또 다른 소년이 다가와 “이번엔 나랑 같이 갈래?”라고 묻는 순간을 생각한다. 훌쩍훌쩍 울던 소년이 대번에 울음을 멈추고 “그러자” 하는 얼굴을 상상하면 이번엔 내가 그만 울고 말 것 같다. 죽음을 무릅썼다고 말하지만, 정작 죽음이 뭔지도 몰랐을 소년들의 필사의 헤엄을 상상한다.


두 번의 바다를 건너 이제 배를 탈 일만 남은 소년들에게서 30원씩을 빼앗는 사내의 얼굴을 상상한다. 그는 정말 선감도에서 나온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내는 그곳에서 일하며 선감학원에서 도망친 소년들을 여럿 보았을 것이며, 그들을 협박해 제 생활에 보탬이 되는 방법을 익혔을 것이다. 겁에 질린 소년들을 내려다 볼 사내의 얼굴을 생각하면 나는 또 울고 싶다. 


대전역 보일러실을 상상한다. 죽을 만큼 얻어터지고 있는 소년과 그 소년을 두들겨 패는 좀 더 나이 많은 소년들을. 피투성이가 된 소년이 눈을 부릅뜨고 돌멩이를 잡는 순간의 살기, 혹은 무시무시한 생기를 상상한다. 그 시대는 대체 어떤 시대이기에 가난을 살아내는 일이 이토록 참혹한가. 그것은 그 시대의 끄트머리(1979년)에 태어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의 세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이 내 옆 도처에 있지 않은가. 바로 노인들, 그러니까 우리의 부모들 말이다. 


개인적으로 내게 김성민 씨를 만났던 2017년 겨울은 무척 공교로웠다. 그 즈음 경남 진주에서는 한국전쟁 때 학살된 민간인의 유해 발굴 작업이 있었는데, 한 골짜기에만 무려 700여구의 유골이 묻혀있다고 했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다닥다닥 총소리가 산을 울렸고, 고랑에선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고 했다. 그들을 살해한 것은 군인과 경찰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국민보도연맹 사건’인데, 새삼스러울 것 없는 역사적 사실이 그토록 낯설고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그곳이 바로 내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만 존재하던 전쟁이 유년의 구체적 공간 위에 포개어지자 나는 몸서리를 쳤다. 국가란, 전쟁이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가. 그 해 나의 할아버지는 인민군 무리에 휩쓸려 사라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내 고향에선 흔한 일이었다.


그 즈음엔 또 평택 대추리에서 쫓겨난 노인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은 바다를 메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간척사업’이란 것이었는데, 막상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기가 막혀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가래로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갯벌 위에 모를 심었다고 했다. 소금 끼 때문에 모는 금세 빨갛게 타버리기 일쑤였다. 일 년에도 몇 번씩 다시 모를 심는 수고를 수년간 반복한 끝에 갯벌은 비옥한 논이 되었고, 그들은 그 땅 위에서 최고의 쌀을 거두기 시작했다. 바다가 육지가 되고 갯벌에서 쌀이 났다니, 국가는 진정 신(神)인가, 생각했다가 문득 아득해졌다. 그 땅은 그 질펀하고 소금 끼 가득한 땅이라도 필요했던, 가진 것이라곤 몸뚱어리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한 평 한 평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2007년, 노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났고 거기엔 미군기지가 들어섰다.


그리고 2017년 2월, 박근혜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시위에 분노한 노인들이 광화문에 쏟아져 나왔다. 전쟁의 폐허 위에 가난을 극복하며 자신들이 건설한 조국에 좌익 빨갱이가 들끓고 있다 목청을 높이는 그들의 머리 위에서 수천 수백 개의 태극기가 휘날렸다. 저 태극기들. 대추리에서 군인과 경찰들에 의해 피투성이가 되어 쫓겨나오던 노인들이 부서진 마을회관에서 고이고이 챙겨 나온 것도 바로 저 태극기라고 했다. 저 세대에게 국가란 대체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 겨울,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돌멩이를 들었지.” 아버지도 술에 취하면 그 말을 자주 했었다. “동네에서 싸움이 붙으면 상대는 형님도 데려오고 아버지도 데려오는데, 나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아버지에겐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못한 당신이 청춘을 다 바쳐 번 돈으로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고 서울에도 보냈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그 뒤를 따르던 말은 늘 저렇듯 세상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이었다. 아버지는 가난으로부터 오래 전에 벗어났으면서도 여전히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가난에 대한 불안과 강박 같은 것에 사로잡힌 사람 같았는데, 그 겨울, 나는 평생 아버지를 쫓던 공포의 실체를 본 것 같았다. 가난, 배고픔, 전쟁, 이념, 국가에 대해 그 세대는 나와는 전혀 다른, 아니, 나에겐 없는 어떤 감각을 갖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김성민 씨와의 인터뷰가 끝났을 때는 마침 저녁시간이었다. 그가 나에게 밥을 사겠다고 했다. 가족 없이 살면 밥 먹을 때가 가장 적적한 법인데, 반가운 손님이 찾아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우리는 프랜차이즈 식당에 마주앉아 동태탕을 먹었다. “젊은 사람이 이런 옛날이야기도 잘 들어주어 고맙다”며 그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볼 때, 나는 한 번도 아버지와 이렇게 마주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얻어맞는 소년이었을까. 아니면 소년을 때리는 더 큰 소년이었을까. 어쩌면 소년들의 것을 빼앗는 사내는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어쩐지 두려워졌고, 내가 누리고 있는 대부분의 일상이 그의 평생 노동 위에서 구축되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이르면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공부를 했다면 그렇게 못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아버지도 자주 그렇게 말했다.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아니더라도 때때로 아버지는 그게 정말로 궁금한 사람처럼 혼잣말을 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잘하던 못하던 16년간 공부를 했던 나로선 그것이 궁금하다는 게 대체 어떤 느낌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70년을 살면서 아버지가 해보지 않은 것, 그래서 자신이 그걸 잘하는지 못하는지 궁금한 것들엔 또 무엇이 있을까. 나를 있게 한 어떤 세대와 그들이 살아낸 어떤 세상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아득하게 깨달았던 그 겨울, 내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건 그 세대가 무서운 속도로 저물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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