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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불화를 끝내기 위해 걸은 500Km...‘이제 꽃길만 걸어요!’
길 위에서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 다시 길 위에 서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국토대장정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하다
등록일 [ 2017년10월02일 16시34분 ]

길 위에 있었다는 이유로 잡혀간 사람들이 있다. 하굣길에 파출소 앞을 지나다가, 기차역 앞을 배회하다가,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자다가…. 그들은 걸어다녔다는 이유로 위험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단속차량에 태워져 단단한 성벽 안에 가둬졌다. 그들은 길 위에서 자유를 빼앗겼다.


어느 문필가의 말처럼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에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숨을 쉬는 것, 심장이 뛰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걷는 일이다. 출발과 도착, 그리고 길 위에서 마주치는 온갖 경험과 우연히 떠오르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육체노동. 그래서 걷는다는 것은 곧 자유의 시작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그 자유의 시작점에서부터 국가와 그 대리자인 경찰에 의해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이다. 길에서 자유를 빼앗긴 그들이 다시 자유를 찾기 위해 길 위에 섰다. 그리고 무작정 걸었다. 9월 6일부터 27일까지 총 22일간, 부산에서부터 서울 한 가운데 청와대까지. 매일 매일의 도착 목표지점은 시청, 군청, 면사무소 등으로 잡았다. 30여 년 전까지 그들의 자유의 발이 걸려 넘어진 곳, 국가권력을 대행하던 그곳에서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국토대장정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괜히 마음이 설랬다. 그동안 그들을 가두었던 어떠한 속박도 거부한 채 걷는 이 자유의 순례길에 함께하고 싶었다. 이 역사적인 발걸음에 함께하며 보고 듣고 기록하고 알리는 일에 함께하고 싶은, 일종의 공명심과도 같은 마음이 몸을 재촉했다. 그래서 페이스북을 통해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의 한종선 대표에게 최소한 이틀은 함께 걷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미적대다 보니 어느 새 한 번의 기회가 날아갔다. 마음이 급해졌다. 결국 뒤늦게 안산에 도착하는 20일차, 그리고 청와대에 도착하는 마지막 날에야 그들을 맞이하고 함께 걸을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했던 이틀간의 동행의 기억을 글로 옮겨보고자 한다. 한종선 대표가 자주 하는 말처럼 증언자이자 기억자로 서고, 그래서 결국 이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할 사람은 피해당사자 자신이지만, 그들의 곁에서 보고 들은 것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전하는 임무 또한 동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에게 부여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27일 오후 3시, 광화문에서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는 형제복지원 국토대장정의 마지막 행렬.


9월 25일, 선감학원 피해생존자와의 만남


5시쯤이면 도착한다던 국토대장정 팀이 예정시각보다 빨리 4시에 안산시청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행히 일찍 나선 덕분에 4시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안산 중앙역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 안산시청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다. 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이다. 일주일 전 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의 국토대장정 일정을 말씀드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간담회 자리를 가져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드렸을 때는 반응이 좀 덤덤했기에 몇 분 안 오실 줄 알았는데, 대충 훑어봐도 10명은 넘게 오신 것 같았다.


두 장의 플래카드도 준비해 오셨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하라”, “안산시는 선감학원 사망자 명단 공개하라” 대부분 5,60대 남성이고 주로 인천에 거주하시는 분들이다. 안산까지 오는데 적어도 1시간 이상은 걸렸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내어주신 마음에 주제넘게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쩌면 이 자리에 온 그들의 마음은 나와는 또 다를 터였다. 그들 또한 고아라는 이유로, 먹고 살기 위해 구두통을 짊어맸다는 이유로, ‘부랑아’라는 낙인이 박힌 채 섬에 가둬졌다. 살아온 시대가 다르고 몸이 가둬졌던 공간도 달랐지만, 그들 또한 길에서 자유를 빼앗겼다. 그들에게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을 만나는 일은 단순한 연대가 아니었으리라.


4시를 조금 넘겨 국토대장정 팀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 시청 정문으로 나가 그들을 맞이한다. 선두에서 깃발을 들고 걸어오던 이가 힘차게 외친다. “아자! 다 왔다!”


“우리는 오늘 안산에서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분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연대보다는 직접적인 피해생존자와 교류하고 싶었습니다. 직접적인 아픔을 아는 사람만이 우리의 아픔도 알아 줄 거라 생각합니다. 형제복지원 만이 아닌 모든 피해자들도 우리처럼 할 수 있습니다. 꿈을 가지고 서로 교류도 하고 마음을 함께 나눕시다.”

 

안산시청 로비 앞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국토대장정 기자회견.


국토대장정 첫날부터 함께 걸어 온 박순이 씨가 짧은 기자회견에 이렇게 말했다. 이들이 걸어오는 동안 대구에서 희망원대책위를 만나기도 했지만, 희망원의 직접적인 피해당사자를 만나지는 못했다. 여러 사람들의 발언 속에서 그것에 대한 못내 아쉬운 마음이 느껴졌다. 이제 긴 순례의 끝나가는 시점에, 단순히 ‘연대하는 시민’이 아닌 ‘당사자 동료’를 만나게 된 반가움이 묻어났다.


안산 상록수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마련해준 공간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한 시간 가량 간담회가 진행됐다. 각자가 자신의 사건을 알리고 진상규명하기 위해 분투해온 과정을 공유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순이 씨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죄가 없는데도 주민번호가 아닌 수용번호가 매겨져 있었어요. 그것도 부랑아 수용번호로 되어 있었어요.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수용변호를 매겨 가둔다는 게…. 저는 초등학교 3학년 올라갈 때 잡혀갔어요. 가방끈도 짧은데,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린 아이 인생을 짓밟아 버렸잖아요. 선감도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잡혀가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 있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 마음 너무나 잘 안다는 듯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김성환 씨가 화답했다. “우리는 한참 자라날 나이 때, 너는 꿈이 뭐냐? 뭐가 되고 싶어?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잖아요.” 그리고 바로 이어 지금 옛 선감학원 터 주변의 상황을 전하며 답답함을 토로한다. 2010년부터 선감도에 자리잡은 경기창작센터 주변에 선감역사박물관을 지어 선감학원에서 벌어진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주변에 전혀 무관한 단체들이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모습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유년기를 집어삼킨 잔인한 땅이지만, 꼭 그만큼 자신들의 힘으로 일궈왔던 땅이기에 그곳에 자신들의 역사를 새기는 것으로부터 치유와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에 비하면 선감학원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부산시 주례동 형제복지원 옛 터에는 빼곡히 아파트가 세워져 있다. 형제복지원의 폭력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고 반성하기 위한 어떠한 건물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그 아파트 근처를 지날 때마다 욕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한종선 대표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이렇게 말한다.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지켜야 해요. 그런데 우리에겐 흔적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한 번 잊혀졌던 사람입니다. (…) 내가 힘이 없는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힘이 있다!’ 힘 센 사람이 지나가는 힘 약한 사람을 때리고 있다고 해봐요. 힘없는 사람이 두들겨 맞는 그 순간은 힘이 없지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상식적으로 봤을 때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두들겨 패는 사람 비난하겠죠. 우리는 힘이 없지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힘을 준단 말이죠. 마찬가지로 형제복지원 사건, 이제 남아있는 건물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기억 속에는 또렷하게 남아 있어요. 그래서 형제복지원 모형을 만들어서라도 알려 나가야 해요.”


이날 함께한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대부분 6, 70년대에 수용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반면,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주로 80년대 피해자들이었다. 이처럼 한 세대 정도의 격차가 있지만 이들이 말로 드러낸 것 이상으로 이미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같은 ‘피해생존자’라는 이름으로. 20일의 긴 도보행진으로 피부는 까매졌지만, 눈빛은 더 없이 상기되어 있던 한종선 대표가 간담회를 마치고 단체사진을 찍으며 이렇게 구호를 선창했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와 선감학원 피해생존자가 함께 찍은 단체사진.


9월 27일, 마지막 날의 발걸음


아침 8시, 광명시청에서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 내가 사는 집에서 광명시청까지는 지하철로 1시간이 넘게 걸린다. 넉넉히 6시에 일어나 출발했지만, 제 시각에 도착하지 못해 8시를 조금 넘겨 광명시청에 도착했다. 멀리 도보행렬의 꼬리가 보였다. 서둘러 뛰어가 도보에 합류했다. 행렬 뒤쪽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던 최승우 씨가 몸피씨와 깃발을 챙겨주셨다. 가는 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첫날 출발할 때도 이렇게 비가 왔다고 했다. 마지막 날 발걸음에 딱 알맞은 반가운 비였다.


대열의 앞 쪽으로 가 한종선 대표에게 인사했다. 마지막 날에야 도보에 함께하게 된 민망함에 멋쩍게 몸은 좀 괜찮은지 물었더니, “안 괜찮아요. 뭘 그런 걸 물어봐. 기자의 질문에 날카로움이 없네.”라는 핀잔만 들었다.


사람들의 발을 보았다. 운동화보다는 단촐한 단화를 신은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주로 첫날부터 걸었던 사람들이었다. 오래 걸은 탓에 발이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 처음에는 양말을 신고 걸었는지 발목 아래쪽은 하얗고 종아리 쪽은 까맸다. 발뒷꿈치로 여러 겹의 반창고가 보였다. 반창고 하나가 벗겨져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정말 ‘씩씩하게’ 걸었다.


대열 선두 쪽에서 김창호 씨를 만났다. 그는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 모두를 경험한 피해자다. 8살 무렵 선감학원에 들어가 12~13살 정도까지 있다가 선감학원이 폐쇄될 무렵 평택에 있는 꽃동산보육원으로 전원됐다. 보육원에서 몇 차례 도망을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형제복지원 단속차에 걸려 89-***이라는 수용번호를 받았다. 어느 정도 성장했던 나이에 잡혀갔던 곳이라 형제복지원에서의 기억은 생생하지만, 선감학원에서의 기억은 별로 남아있는 게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선감학원 피해자모임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기억의 창고 깊은 곳에 묻어뒀던 선감학원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지난 6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증언대회에 김창호 씨도 참여했다. 이날 2부 토론회에서는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이 참여해 형제복지원과 유사한 사건인 선감학원 사건을 소개하는 발언을 했다. 정 소장의 발언을 듣고 그가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도 저 선감도에 있었는데.”


뒷풀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곧 비마이너의 선감학원 기획취재에 함께 하고 있는 홍은전 선생님이 직접 그가 살고 있는 합천에 내려가 인터뷰하도록 연결했다. 그 때 연락을 주고받은 뒤로 두 달 만에 그를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는 밤차를 타고 광명에 올라와 마지막 날 일정에 함께하고 있다고 했다. 잠이 안와 소주를 몇 잔 마시고 잤는데 마누라가 안 깨워줬으면 못 올라올 뻔 했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그에게 오늘 마지막 도착지인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 선감학원 피해자들도 오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춘근이 형님도 오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이틀 전 간담회 때도 오셨으니 별 일 없으시면 오실 거라 답했다.


김춘근 씨는 61년도에 선감학원에 잡혀와 22년을 그곳에서 생활하며 나중에는 직원으로까지 일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선감학원 출신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김창호 씨 또한 다른 사람은 하나도 기억 안 나지만, 춘근이 형님만은 기억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춘근이 형님한테만 인사 드리면 돼.”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간 끝에,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외치는 자리에서 둘은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기분이 어떠시냐 물었더니 그저 ‘허허’하고 웃으신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국토대장정 마지막 날.


광명에서 국회를 거쳐 신촌을 가로지르고, 부지런히 걸은 끝에 오후 2시를 조금 넘겨 광화문에 도착했다. 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과 연대하는 시민들이 그들을 반겼다. 힘을 주는 사람들이 더해진 만큼, 그 전보다 크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며 청와대로 향했다.


청와대 앞에서의 외침, “이제 우리 모두 꽃길만 걸어요.”


청운동 주민센터를 돌아 청와대 분수대로 향하려던 순간, 청와대 주변을 경호하던 경찰들이 행진 대열을 둘러쌌다. 문재인 정부 들어 청와대 사랑채 가는 길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반 시민들에게 언제나 개방된 공간이 됐다. 그런데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향하던 대열을 경찰이 막아선 것이다.


‘깃발’ 때문이었다. 청와대 바로 앞은 집회와 시위가 금지된 구역이니 깃발을 내리고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적폐청산을 하겠다고 공언한 문재인 정부에게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아 달라고 마지막 호소를 하러 가는 길에 자신들의 외침이 적힌 작은 깃발 하나 들지 못한다는 게 피해자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제가요, 경찰들한테 트라우마가 너무 많아요. 이렇게 갇혀 있는 거 너무 싫어요. 제발 좀 길을 터주세요.”
“문 안 열어줄라면 그냥 죽어버려. 어차피 30년을 죽어 살았는데.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똑같애.”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걸어왔는데, 이 깃발을 내리고 가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죽을 각오로 여기에 왔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가 청와대 앞 길목을 가로막은 경찰에게 길을 터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피해자들의 울음 섞인 외침이 터져나왔다. 극단적인 말도 들리자 주위에서 달려와 울먹이는 그들을 다독인다. 상황은 곧 정리되었다. 맨 앞에 걸어가는 한 사람만 깃발을 드는 것으로 경찰과 합의를 봤다. 고작 그 깃발 하나 드는 것 때문에, 한 때 자신의 인생을 짓눌러버린 경찰에 또 다시 가로막혔던 김대우 씨는 청와대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국토대장정 올라오는 내내) 경찰의 호위(교통정리)도 저는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경찰만 보면 울화가 치밉니다. 종선이가 저를 다독이지 않았다면 정말…. 종선이 말을 믿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께 제가 진짜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 안에서 당한 거 글로 쓰나 말로 하나 우리의 심정을 알겠습니까? 저희와 면담을 좀 해주십시오. 이제부터는 열심히 살아갈 날만 남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부탁드립니다.”


그들의 첫 출발의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 피해생존자모임의 누군가는 다리 위에 올라가겠다고, 또 누군가는 단식 투쟁을 하겠다고 말해왔다. 길에서 자유를 빼앗긴 이후 지금까지 세상과 불화해야만 했던 자신들이 또 다시 극단적인 방식만을 생각하는 게 안타까웠던 한종선 대표는 몇몇이서 하기로 얘기되던 국토대장정을 다 함께 하는 것으로 하자고 총회에 안건을 올려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렇게 22일의 여정을 시작했고 마침내 청와대 앞에 선 것이다.


국토대장정 참가자들은 이후 청와대 사회혁신수석 등과 면담을 하고, 정부가 과거사 문제 해결에 나서는 과정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에도 노력하겠다는 답을 얻었다. 그리고 정부의 구체적인 대책이 나온다면, 대통령과의 면담도 잡아보겠다는 대답도 들었다.


어쩌면 그 전과 지금 달라진 것이라곤 청와대 관계자와 면담을 했다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눈이 바라보는 시선이 오직 ‘정부’만을 향하는 것이라면 달라진 것이 없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부가 만들어서 국민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다. 무고한 우리의 동료시민이 길에서 자유를 빼앗겼다는 사실, 그래서 한 인생이 무참히 짓밟혔다는 사실, 그래서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남았지만 산목숨도 사회로부터 버려진 채 세월을 버텨온 것이란 사실, 그것이 명백한 ‘진실’이다. 그 빼앗길 수 없는 진실을, 길을 걸으며 동료시민들과 나눴고, 가족과도 같은 선감학원 피해생존자와 다시금 확인했다. 그렇게 한 때 버려졌던 그들은 이제 비로소 당당한 이 사회의 주체로 우뚝 일어서고 있다.

 

국토대장정을 마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이 꽃을 선물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에스키모 사회에는 화가 난 사람이 똑바로 걸어감으로써 화를 푸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화가 풀린 지점을 지팡이로 표시함으로써 분노의 강도나 분노가 지속된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도 세상과의 불화를 끝내기 위해 걸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약 500Km. 그것이 그들 마음속에 쌓인 분노의 강도와 시간이다. 이제 그들도 돌아가 자신의 지팡이로 마지막 표식을 남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청와대 앞에서 ‘진실의 힘’ 활동가들로부터 꽃을 선물 받고 함께 외쳤다. “이제 우리 모두 꽃길만 걸어요!” 이제 국가가 진정한 사과와 명예회복에 나서야 한다. 그래서 그들 손에 쥔 꽃으로 마지막 표식을 남길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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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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