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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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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에게 가해진 폭력의 기억...‘죄수들에게도 그렇게는 안 할 거야’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③-1
이대준 씨의 이야기
등록일 [ 2017년10월10일 18시35분 ]

이대준 씨는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직업도 버스 기사. 선글라스를 끼고 운전대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버스에 꼭 한번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그림이다. 그는 체구도 가볍고 목소리도 경쾌했다. 그가 운전하는 버스에 꼭 한번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겨울, 선감역사박물관 개소식에서 그를 처음 보게 되었다. 이날 여러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그는 한 명의 생존자로서 마이크를 잡고 자신이 이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아픔을 입말로 풀어냈다. 그의 말씨에는 슬픔의 흔적이 그리 엿보이진 않았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어쩌면 한 없이 무거울 수도 있을 이야기를, 그를 통해서라면 제삼자인 내가 조금은 부담감을 덜고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실제로 그랬고, 나중에 식사를 함께하면서도 그랬다. 아들 뻘 되는 기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도록 다른 선감학원 동료들을 소개시켜주는데도 적극적이었다. 그 덕분에 이번 선감학원 취재에 여러 생존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고아’였다. 부모의 얼굴도 모른다고 했다. 본인의 인생 이야기도 고아원으로부터 시작된다. 고아라는 말이 그저 단어 뜻풀이대로 부모 없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그 자체를 홀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임을 그의 이야기를 통해 새삼 이해하게 된다. ‘홀로 헤쳐나감’, 이것은 그저 낭만적이기만 한 단어가 아니다. 단순히 그에게 가해진 폭력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20대 초반에까지 가해진 구속받는 삶의 연쇄 구조가 너무나 선명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15번에 걸친 탈출 시도를 했다. 첫 번째 탈출 이후에는 또 다시 잡혀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거리에서 빌어먹는 삶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긍정적이고 활달한 성격’이라 자부했다. 정말 그래 보였다. 그러나 그 팍팍한 시간을 견뎌오는 동안 그의 안에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의 퇴적층이 쌓였을지 나는 전혀 가늠할 수 없다.


아마도 그 자신도 이 상처와 온전히 이별하지 못했기에 최근에 가족들까지 데리고 선감도를 다시 찾았던 것이리라. 그가 온전히 이 아픈 기억들과 화해할 수 있도록, 그의 이야기에 모두가 귀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아래는 이대준 씨 구술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대준 씨.


내 고향이 원래는 수원이에요. ‘정화원’인지 ‘정아원’인지 이름이 정확치는 않은데, 고아원에서 살았어요. 내가 거기서 영화초등학교를 아마도 2학년까지 다녔어요. 2학년을 다 마치지는 못하고. 부모님은 얼굴도 몰라요.


고아원에서도 많이 때리고 그러니까 도망을 많이 다녔어요. 그래서 수원시청에서 우리를 몇 번 잡아다가 다시 집어넣고 그런 적이 있어요. 그러다가 이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선감도라는 곳에 집어넣게 된 거죠. 그 때 수원에서 10명 정도가 같이 들어왔는데, 같은 고아원 동료는 나랑 또 한 명이 더 있었죠. 그 때가 아마 66년도인가 그럴거에요. 내 생년월일이 58년 10월 7일생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게 선감학원에서 대강 지어준 거라고. 아마 내가 이거보다는 2년 정도 나이가 더 많을거에요. 왜냐면 고아원에서 친구랑 같이 도망 나올 때 우리 나이를 줄여서 말하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선감학원에서 ‘너 몇 살이냐’ 물어보길래 그렇게 대답했더니 그때부터 그냥 그렇게 되어 버린거야.


수원에서 마산포를 거쳐 섬에 들어갔는데, 들어가는 날부터 방을 배정받자마자 엄청 맞았어요. 내가 거기서 9년을 있었는데, 도망을 치려고 시도를 15번은 했을거에요 아마.


배가 고파 훔쳐 먹은 건빵, 국민학교 5학년에서 멈춰버린 배움


거기서는 항상 배가 고팠어요. 반찬도 만날 새우젓하고, 무 같은 걸 심어서 짠지를 만들어 줬어요. 새우젓도 구대기가 끓어서 도저히 못 먹어요. 호박도 큼직하게 잘라서 익지도 않은 걸주고. 그래서 내가 사회 나와서도 젓갈 종류랑 호박을 잘 안 먹어요. 옛날 생각이 너무 나가지고.


생식도 엄청 많이 먹었어요. 무 같은 것도 그냥 먹고, 고구마도 그냥 먹고. 논에 가면 벼가 있잖아요. 벼를 손으로 훑어다가 바닥에다 놓고 신발로 막 비비면 껍질이 어느 정도 까져요. 그럼 그걸 손에다 놓고 호호 불어서 입에 털어 넣는다구요. 생쌀을. 옛날에는 선감학원에서 관리하는 방앗간이 있었어요. 마을사람들도 거기 와서 방아 찧고 그랬거든요. 나도 그 방앗간에서 일하고 그랬지만, 쌀을 이만큼씩 주머니에 담아가지고, 생쌀을 엄청 먹었어요.


수원에서 국민학교를 2학년까지 다니다 말았으니까 선감도 들어가서 2학년부터 다시 다녔어요. 같이 들어온 내 친구는 1학년부터 다니고. 그래도 내가 공부를 좀 해서 계속 반장을 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급식으로 건빵이 나왔어요. 학교엔 건빵 창고가 있었어요. 원생들은 배고파서 건빵을 많이 훔쳐 먹었어요. 나도 몇 번 그랬었지. 그러다가 5학년 때 건빵 훔치다가 걸렸는데, 퇴학을 당했어요. 그 전에는 몇 대 맞고 말았는데, 아예 퇴학을 시켰다고요.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내가 배울 수 있는 길이 막히잖아요. 내가 여기서 나왔을 때가 스무 살이 다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학교 선생들도 우리가 고아원 얘들이니까 퇴학을 시킨 거라고. 일반 가정 얘들이면 퇴학을 못 시켰을 텐데.


학교에 보내는 것도 원생 10명이 있으면 그나마도 2-3명밖에 안 보냈어요. 연령이 비슷한 아이인데도 누구는 학교를 보내고, 누구는 축산부, 누구는 양잠반에 보내서 일시키고, 또 누구는 선생 관사 당번 일 하고. 학교도 점심 정도면 다 끝나는데, 돌아오면 또 일하러 가야해요. 점심시간에 집합을 해가지고 인원파악을 하고, 밭으로 일하러 가는 거지. 선생들이 마치 죄수들 감시하듯 따라붙어요. 가만히 생각하면 이건 고아원도 아니고 그냥 수용소야.


그리고 겨울에는 나무 해 와서 땔깜 써야지. 나중에는 연탄이 들어오기는 했는데, 42공탄 연탄 봤어요?


[어렸을 때는 봤던 것 같은데. (가슴둘레보다 작은 원을 그리며) 이런 거? - 면담자]


그건 19공탄이지. 42공탄은 더 커. (가슴둘레 두 배 정도 크기를 손 모양으로 그리며) 그거를 우리 10살 때, 바닷가에서 배가 들어와요. 배가 엄청 커서 선착장에 못 대니까 이만한 각목을 두 개 깔아요. (선착장과 배를) 오가는 판이에요. 배에서 나갈 때는 연탄을 들고 줄 서서 나가니까 출렁출렁 한다고. 사람이 박자를 맞추며 걸어도 순간 발 조정이 틀려서 엇박자가 생기면 바다에 빠져버린다고. 거기서 죽지는 않아. 그래도 아주 높아요. 어린 애들이 연탄을 안고 떨어지는 거야. 그걸 들고 숙소까지 (리어카나 다른 운반 수단도 없이) 그대로 옮겼어요. 들고 가다가 연탄이 부서지면 또 엄청 맞았지.


“죄수들에게도 그렇게는 안 할 거야”


거기는 사실상 맞으러 들어간 거지. 보통 단체기합을 많이 준다고. 조개껍질 같은 거 많이 깔아놓고, 거기다 대가리 박고 일어나면 머리에 막 박혀가지고 나와요. 내가 거기서 9년을 어떻게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루에 빠따 5대 이상 안 맞으면 잠이 안 올 정도에요. 맞을 꼬투리는 항상 있어요. 복장 검사. 취침 때 옷하고 비품 검사. 옷을 잘못 꿰었다 그러면 또 맞고. 그리고 애들이니까 흙 만지고 그러면 손이 더러워지는데, 그걸 매일 검사하는 거예요. 씻을 데도 별로 없는데. 그냥 얼음 깨서 찬물에 손을 씻는 거예요. 그럼 손에 피가 막 나지. 하여튼 군대에서 하는 내무검열이라는 거, 우리는 직무검열이라고 했거든요. 그날은 좌우지간 말도 못하죠. 특히 복도가 시멘트로 되어 있는데도 있었지만, 성심사 같은 데는 복도가 마루에요. 그 마룻바닥을 탁탁 쳐서 먼지가 살짝 나왔다 그러면 또 엄청 맞는 거예요. 그걸 또 초를 막 칠해서 걸레로 광을 내라고 해요. 상상을 해봐요. 그 조그만 애들이 매 안 맞으려고...

 

선감학원 원생들이 생활하던 기숙사 건물 일부는 현재 그대로 남아 있다. 이대준 씨가 그 건물을 가리키며 당시 생활상을 설명하고 있다.


주로 때리는 사람은 사장이나 방장이고, 선생이 직접 때리는 거는 주로 조회시간이죠. 군대를 가도 간부보다 직속상관이 더 무서운 거잖아요. 내가 니들 때문에 위에서 깨졌다 이러면서. 그게 더 무서운 거야. 내가 처음 들어가던 날, 사장을 하던 강○○이라는 사람한테 성추행도 당했어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 때 권투중계를 하고 있어서 확실히 기억이 나.


목욕도 어떻게 하냐면, 가마솥이 큰 거 하나 있어요. 지금 보면 숙소가 조그맣게 보이지만 그 때에는 한 방에 25-30명씩 있었어요. 한 사 안에 방이 5, 6개 있었어요. 그런데 목욕탕이 가마솥이야 그냥. 거기다가 물지게 지어서 길어야 돼. 수돗물이고 그런 게 없잖아요. 당번이 다 있으니까, 지하수를 지게로 길어다가. 그걸 불로 다 떼 가지고 목욕하고.

 

나는 주로 양잠반에서 일했는데, 누에 키우는 일이 안에서만 일하니까 편할 것 같지만 그 양이 엄청나다고요. 잠도 못자고 두 시간마다 일어나서 누에 밥을 줘야 해요. 그렇게 안하면 누에들이 예민해서 다 죽어요. 온도도 다 맞아야 하고. 비오는 날에도 뽕을 다 따 와가지고 그걸 말려야 해요. 뽕을 넣고 말리는 지하실이 따로 있어요. 거기에 너무 오래 넣으면 썩어버려서 선풍기를 틀어서 말리는데, 이슬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으면 누에들이 먹고 설사를 하니까. 처음에 들어올 때는 누에가 요만해(손으로 작은 상자 모양을 그려 보임). 불개미 같이 생긴 게 2만 마리가 들어가 있는데, 거기에 뽕을 갖다 놓으면 누에들이 사사삭 먹는 소리가 마치 비가 오는 것처럼 들려요. 그걸 대나무로 해가지고 층층이 놓는다고. 그게 엄청나게 커요. 그 누에 키우는 창고 크기가 우리 숙소, 한 사(舍)만해요.

 

1976년 경기도 관계자가 선감학원 시찰을 하면서 누에창고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내 친구 중에 축산부에 있던 친구도 있는데, 걔네들은 학교에도 안 보내고 그런 거 시켰다고요. 그런 부에 들어가지 않은 애들은 밭일 하면서, 양배추, 무, 배추, 고추 이런 걸 엄청 심었고요. 밭도 얼마나 큰지. 죄수들에게도 그렇게는 안할 거야. 거기서 일한다고 해서 돈을 줘요? 죄수들은 일당이라도 있지. 이건 보호도 아니고 운동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부려먹은 거 아니야. 완전 노예지. 우리가 일한 게 다 어디로 들어갔는지는 몰라요. 우리한테 주는 건 하나도 없어요. 좋은 거 들어오면, 하다못해 (외부에서) 고기라도 지원 들어오면 우리는 고깃국에 국물만 있지 고기가 어딨어요? 좋은 거는 다 선생들 관사로 들어가는 거지.


9년 동안 거기 있으면서 외부로 나가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에요. 소풍을 가도 그냥 선감도 내의 조그만 산으로 갔어요. 그래도 내가 글짓기대회 나가려고 인천까지 나와 본 적은 있어요.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있는 곳. 학교에서 대회를 나건 거지만 어쨌든 선감학원에서 보내준 거기도 하죠. 원생들은 도망간다고 잘 안 내보내는데. 그런데 거기서도 또 도망 갈까봐 신발을 한 짝은 검정고무신, 다른 한 짝은 밤색인가? 그걸 신겼어요. 도망 갈까봐 신발을 짝짝이로 줬다고요.


장마가 지나간 뒤, 산에는 죽은 아이들을 시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도 다들 어떻게든 기를 쓰고 도망가려고 했어요. 나는 15번이나 도망치려고 했다니까요. 밤에는 대부도 쪽으로 가면 좀 걸을 수가 있어요. 밤에 물이 완전히 빠지면 살짝만 수영치면 넘어갈 수 있어요. 마산포 쪽은 물살이 엄청 세서 쉽지 않아요. 물살이 세서 거기서 원생들이 많이 죽었어요. 게다가 거기는 해군 빠찌도 있었어요. 빠지라는 게 뭐냐면 물 위에 해군 기지가 있는 거에요. 바다 한 가운데. 혹시 간첩선이 넘어오지 않나 보려고. 거기서 밤에 라이트를 막 비추고 그러는데, 그 불빛에 잡히면 걸려 들어가는 거에요. 거기서 군인들이 얼마나 때리는지.

 

그런데 아이들을, 방송에 많이 나오는 그 공동묘지 자리에만 묻은 게 아니에요. 바닷가에서 올라와서 바로 산으로 가져가 버려요. 공동묘지로 가는 게 아니고. 뽕밭 쪽으로 보면 산이 엄청 높은데, 거기다 시체를, 옛날엔 관짝 그런 것도 없잖아요. 가마니에다 둘둘 말아서... 도망가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은 퉁퉁 불어가지고 소라, 낙지 이런 게 다 붙어 있어요.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한지. 거기다 빨간 소독약을 그냥 뿌리는 거에요, 냄새난다고. 한 번은 장마가 크게 온 뒤에 뽕 따러 올라가다보니까 시체가 다 드러나 있는 거예요. 아이들 시신을 얼마나 아무렇게나 내버렸는지.


그런 아이들을 내가 직접 묻기도 했어요. 선생이 준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고무장갑만 봐도 그 때 생각이 나고. 소독약 냄새만 맡아도 그렇고. 그래서 내가 지금도 병원 입원하는 것도 싫어해요.


(다음 연재 기사 이어 보기 : ▶죽음의 바다를 건너 인천으로...다시 반복된 거리의 삶)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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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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