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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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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바다를 건너 인천으로...다시 반복된 거리의 삶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③-2
이대준 씨의 이야기
등록일 [ 2017년10월14일 11시33분 ]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고아에게 가해진 폭력의 기억...'죄수들에게도 그렇게는 안 할 거야')

 

도망의 대가, 감금


마산포 앞에 보면 엇섬이라고 있어요. 우리는 빨간섬이라고 불렀어요. 작은 섬이에요. 그런데 거기도 부락민들이 살아요. 그 마을 사람들이 도망가는 아이들을 숨겨 줘요. 그러고 나서 그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켜요. 거기서도 엄청 때리죠. 만약 말 안 들으면 다시 선감학원에 보낸다고 그러고. 마을 사람들이 도망가는 아이들을 잡아다 선감학원에 보내주면 밀가루 한 포대씩 받았어요. 그 때 당시 밀가루 한포대가 얼마나 비쌌는데.


내가 한번은 친구 5명하고 마산포 쪽으로 도망을 쳤어요. 실패하면 돌아와서 옷을 입고 다시 몰래 들어가서 자고 있자 해서, 옷을 비닐에다 싸서 갯벌에다가 묻어놓고 헤엄을 쳤어요. 근데 가다보니 물이 막 들어와서 더 이상 가도 가도 끝이 없어. 파도는 치지 물살이 빙빙빙 돌지, 도저히 안되겠어서 다시 돌아왔는데 옷을 묻어놓은 위치는 벌써 물이 들어와서 잠겨버린 거예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선감도로 다시 와서는, 지금 공동묘지 있는 자리의 그 산을 넘어서 밤에 숙소까지 엄청 뛰었어요. 그런데 밤에 인원파악을 다 해놓은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 눈 뜨자마자 불려가서는, 식량창고라는 데가 있어요. 지금 경기창작센터 커피마시고 그러던 데 앞에 식량창고가 있었어요. 그 식량창고에다 우리를 가둬 놨다고요. 3일 동안이나. 감금을 당한 거죠.

 

지난 5월 27일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서 열린 선감학원 희생자 추모제.


둘레가 다 바다니까 죽기 아니면 살기죠. 만약에 오늘 빠따 맞을 일이 생겼다 그러면 조바심이 더 생겨서, ‘에이 씨, 도망이나 가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서는 도망 나와도 그 사람 없었던 사람이라고 지워도 모르는 거야. 내가 지난번에 방송 보니까 죽은 사람들 사망신고 냈다고 그러던데, 그런 게 어딨어? 매장 신고절차도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바다에서 죽은 아이의 시체를 찾으면, 그걸 어디 보관하는데도 없어요. 거기엔 딸랑 의무실 하나밖에 없었어요. 시체를 찾아도 어디로 끌고 갈 데가 없는 거야. 바깥에서 누가 들어올 사람이 있겠어요? 하루에 배가 한번 밖에 안와요.


거기에도 경찰이 항시 대기하고 있기는 했어요. 선감학원 원장 관사에 순경이 자는 방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 사람한테는 보고를 했는지 안했는지 몰라도... 우리가 봤을 때는 시체를 찾으면 공동묘지로 가져와서 묻는다든가, 산으로 끌고 와서 바로 묻는 거야. 그런데 조사도 안 해요. 시체가 도망간 직후 바로 나타나는 건 아니에요. 2-3일 아니면 어떤 때는 일주일 후에도 나타나요. 안 보이면 성공했구나, 하는 거고, 시체가 떠오르면 우리가 꺼내가지고 바로 묻는데, 신고가 어딨어요. 지금 생각하면 검안, 검시도 다 해야 하는데, 아니면 하다 못해 대부도에서 의사라도 와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는 거야. 학교에서 나랑 같은 반이었던 여명구*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죽었어.

 

*여명구의 죽음에 대해서는 선감학원에서 가장 오랫동안(22년) 생활한 김춘근 씨의 증언에서도 언급된다. 김 씨 또한 여명구가 바다로 도망치다가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탈출, 그리고 다시 거리의 삶


마지막으로 도망을 시도했을 때에는 대부도 쪽으로 갔어요. 밤 12시 넘어서 도망을 쳐서는 산을 넘었고, 그러면 선재라는 곳이 나와요. 선재까지 가니까 큰 쌀을 실은 배가 한 척 있더라고. 그 때 우리가 선감도에서 뱀을 잡아다 동네 주민들한테 팔아서 모은 돈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돈 주면서 우리 좀 도망시켜 달라고 했지. 한편으로는 ‘저 사람들 우리 잡아다가 다시 신고하는 거 아닌가’하는 걱정도 했지만, 용기내서 했어요. 그랬더니 뱃사람들이 들어오래. 마침 밥 먹었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안 먹었다니까 하얀 쌀밥을 주는데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어요. 만날 꽁보리밥만 먹다가.


아침 10시가 넘어서 배가 움직이더니 인천으로 왔어요. 나는 수원이 고향이라고 했잖아요. 같이 도망 나온 애들 2명은 인천이고. 나는 인천 길을 모르니까 나는 수원으로 가겠다 했지. 나중에 친구들이 인천에서 수원으로 놀러와서 같이 인천으로 가자고 했지. 그래서 애들하고 같이 생활을 했어요.

 

인천 율목동에 보면 BBS**라고 있어요. 청소년 센터. 구두닦이 같은 거 하는 아이들 관리하는. 이것도 사실 인천시에서 관할하는 거지. 거기에 선감도 출신들도 많이 있었고. 낮에는 구두닦이 일하고, 저녁에 들어오고. 여기에도 사무국장이 있어서 아침 저녁 조회를 다 해요. 그런데 나는 또 그런 게 (선감학원에서의 생활과 다르지 않아) 싫어서 거기도 안 들어갔어요. 그래도 거기는 때리고 그러는 건 없었죠.

 

**1904년 미국 뉴욕시 법원의 서기인 어네스트 쿨터(Eanest Coulter)가 법정에 서는 많은 아이들을 보면서, 돌봐줄 수 있는 어른들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자원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이 기원이다. 비슷한 시기 여성들로 구성된 Ladies of Charity와 함께 결합되어 ‘큰형, 큰자매맺기운동(BBBS America)'로 발전했다. 우리나라에는 1962년 12월 설립되어 1964년 4월 18일 내무부 사단법인 허가를 받고, 청소년 비행예방 활동 등을 펼쳤다. (사단법인 한국 BBS 중앙연맹 홈페이지 참조. http://www.bbskorea.or.kr)

 

그래서 우리는 그냥 한데서 자고 밥도 얻어먹고 다녔어요. 스무 살 넘어서도 깡통 차고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하루에 한 끼 먹고. 그러다가 빈집에서 한 30명이 자고 있었는데 경찰이 들이닥친 거예요. 빈집이니까 우리가 거기서 며칠을 잤거든요. 그런데 수상히 여긴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를 했나 봐요. 그래서 결국 경찰이 우리를 구월동에 있는 선인원***으로 보내버린 거예요. 선인원이라는 곳도 완전 감옥이에요. 거긴 개인이 운영한 곳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악랄한 곳이에요.


선인원에 3일 동안 있다가 다시 선감도로 보내졌어요. 선인원에서는 이미 조회를 다 해가지고 우리가 선감도 출신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어요.

 

***1968년 9월 2일 인천광역시 남구 옥련동에 부랑인 수용시설을 개원한 서천재단이 1973년 1월 10일 ‘인천시립 선인원 설치조례’에 의거해 위탁 운영한 부랑인 시설이다. 서천재단은 현재까지 노인요양병원, 정신요양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인천사회복지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서천재단’ 관련 부분 참조. http://welpiahistory.or.kr/agency_his.html?code=2197)

 

그렇게 선감도로 다시 가서 두 달을 더 있었는데, ‘쎄모’라는 별명을 가진 선생한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어요. ‘쎄모’ 선생은 때리는 걸로 아주 유명했어요. 주일에 교회 안 간 사람 순시 돌면서 두들겨 패기도 하고. 하여간 그런데, 이제 우리도 머리가 굵어졌고 그래서 두 번째에는 아예 여객선 타고 떳떳하게 도망 나왔어요. 이제 어떻게 하면 나올 수 있는지 아니까 아예 여객선 표를 끊어가지고.

 

이대준 씨가 자신의 선감도에서의 생활상을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나 퇴학시킨 선생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어요”


두 번째 나와서는 그냥 인천으로 갔어요. 남의 집 식당에서 일을 좀 했는데 주인아저씨가 “너는 주민등록도 없냐? 주소가 어디고 어디서 태어났는지 그런 것도 몰라?” 그러는 거예요. 21살이 될 때까지 그런 걸 만들어야 하는지도 몰랐거든요. 그때서야 출생증명을 떼러 선감학원에 다시 갔죠. 그때는 성인이 됐으니까 잡지도 않더라고요.


그렇게 다시 인천으로 나와 살면서, 길바닥 생활도 해보고 또 뱃일도 해보고, 이후에는 어떻게 운전학원 강사 자격증을 따서 17년 정도 일을 했어요. 지금은 그거 그만두고 버스 운전 하고 있고요. 버스 운전 한지는 5년 됐어요. 우리 동료 중에는 사회 나와서 악착같이 벌어서 좀 사는 사람도 있지만, 술에 찌들어 살다가 죽은 친구들도 많아요. 그런거 보면 참... 학교도 못 다닌 사람도 있는데, 따지고 보면 그 선감학원에서 막은 거잖아요. 나도 건빵 한번 훔쳐 먹은 죄로 배움의 길이 막힌 거고. 도망 안 간 사람이라 해도 뭐 좋은데 보내줬겠어요? 기껏해야 다른 고아원에 보내준 정도지. 방송에도 보니까 증거도 없다고 그러고. 이건 뭐가 (문제가) 있으니까 기록을 다 없애버린 거 아니겠어요?


내가 얼마 전에는 우리 애들하고 사위까지 같이 해서 선감도에 같이 데려가고 그랬어요. 내가 이런데서 고생을 하고 살았다 얘기해주려고. 그 때는 옛날 기억만 가지고 찾아가서 (우리가 생활하던) 공간을 못 찾았는데, 여러 사람들하고 같이 다녀오고 나서 이제 정확히 알았으니까 언제 애들 데리고 다시 가봐야지.


애들은 내 이야기 들으면 책 한권 내라고 해요. 마음 같아서는 정말 내고 싶지. 어쨌든 이걸 정말 잘 해가지고 진실을 더 밝혀야 해요. 못 찾은 시체들도 산을 뒤져서라도 다 찾아야 돼요. 진짜, 농담 아냐.


나는 가끔 우리 애들한테도 얘기해요. 나 퇴학시킨 선생 얼굴 좀 한번 보고 싶다고. 그때는 공부를 하려고 노력도 엄청 했어요. 선생이 칠판에 뭘 쓰면 내 필기가 더 앞서서 쫓아가고 그랬어요. 국민교육헌장도 내가 제일 빨리 외웠고. 그런데 그것도 다 옛날 얘기지 뭐. 제일 중요한 건 배움의 기회를 빼앗은 것, 그거에 대해 사과를 받아야 해요. 그리고 보상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도망 나오다가, 또 맞아서 죽은 사람들... 그들이 묻혀 있는 위치라도 어떻게 찾아내서 한 데 모아 국가가 위령제도 드리고. 난 진짜 그걸 해줬으면 좋겠어요. 이게 다 국가 공무원들이 저지른 일이니까요.

 

박태원 경기도지사(재임기간 1964 ~ 1968)가 선감학원을 방문해 원생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제공 :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필자 후기


이대준 씨의 이야기 첫 번째 기사가 나가고 난 후, 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이 연재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피해자들의 구술기록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냐고. 이에 대해 미리 준비해놓은 대답이 없어 잠시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냥 ‘잘 모르겠다’라고 답하며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 질문은 타인의 고통이 담긴 이야기를 전하는 내 글쓰기의 출발점이 어디냐고 묻는 것이었기에,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질문에 대한 성실한 답변을 하고 싶었다.


고민을 하다 문득 5년 전 읽었던 사당동 판자촌 지역 주민 연구를 다룬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을 읽고 내가 남긴 메모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빈곤한 사람들은 자기 삶에 대한 서사를 만들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 속에서 1년 전 또는 10년 전의 삶을 떠올리고, 이를 통해 자기 삶을 반추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삶이 불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빈곤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즉 자기 역사를 잃어버리면서 자기 주체성도 상실해버리는 데에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메모를 다시 읽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체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자기 삶에 대한 서사를 만든다 말할 수 있는가. ‘자기 삶의 반추’와 ‘미래의 계획’은 또 무엇인가. 이런 말들 속에 왠지 모를 도덕적 가치판단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아 못내 불편하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계속 말을 하고 있고, (설령 그것이 지식인과 중산층의 지적 수준에 미달한다 할지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서사를 갖추고 있음에도, 오히려 그들을 마주하는 이들이 그 이야기를 ‘듣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이 말하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들었던 생각 또한 그랬다. 그들의 말이 때로는 시간의 맥락을 건너뛰어 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고, 무슨 말인지 한번 들어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매번 어릴 적 기억 속에 흐릿해져가고 있는 상처의 파편을 끄집어내어 온전히 전달하고자 부단히 애썼다. 그런데 왜 그것은 서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것이 서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지식인의 경박한 편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한편, 이 작업 도중에 생긴 나의 고민거리 중 하나는 고통의 경험을 말하는 그들의 모습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대준 씨가 바로 그랬다. 출퇴근길에 만나는 여느 버스기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인천의 버스기사 아저씨. 높은 목소리 톤에 경쾌한 말씨를 가진 그는 얼마 전부터 나이에 걸맞지 않게(?) 페이스북도 시작했다. 그렇게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얼굴을 가진 그가 말하는 어둡디 어두운 과거는 지금 그의 모습과 쉽게 매치되지 않았다.


이대준 씨는 자신의 피해경험을 이처럼 길게 말해 본 경험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직 입을 떼지도 못한 폭력의 이야기는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리는 그 고통의 크기를 가늠이나 할 수 있는가. 또한 그것이 우리네 평범한 일상과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가끔씩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정신요양시설, 장애인거주시설에서의 학대와 인권침해 사건을 접하면서, 많은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TV에 비치는 그런 장면은 여전히 머나먼 이국땅의 총격전처럼 이질적이고 우리와는 동떨어져 있는 일로 그려진다. 어떤 면에서 그런 보도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일상과 폭력으로 점철된 고립된 시설의 분리를 확인시켜주는 ‘안도감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선감학원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폭력의 흔적이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짙게 배어있는지 새삼 확인하게 된다.


다시 친구의 질문으로 돌아와 본다. 어쩌면 이 구술기록 작업의 출발은 글 쓰는 사람의 한낱 공명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업을 계속 할수록 내가 상처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폭력의 역사가 남긴 상처에 예민해질 때, 다가올 폭력의 예감에 더 단호하게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예민하면서 동시에 단호해지기’, 이 연재를 통해서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면서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픈 약속이기도 하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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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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