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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오광석, 나는 누구입니까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④-1
오광석 씨 이야기
등록일 [ 2017년10월25일 13시37분 ]

그를 처음 만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던 지난 6월 초, 그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그는 자신의 과거 기록을 찾고 있다고 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의 기록을 찾고 싶은데 그곳으로 가는 길 좀 알아봐 줄 수 있나요? 아무리 찾아도 인터넷에 안 나와서 연락드렸어요.”


그는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가는 길이 나오지 않는다며 곤혹스러워했고, 이런 부탁으로 연락하고 싶지 않았는데 연락드리게 되었다며 무척 미안해했다.


그는 얼마 전 초등학교에 가서 생활기록부를 받아왔다고 했다. 그 학교는 그가 선감학원에서 옮겨간 부천 ‘새소망 소년의 집’에서 다녔던 초등학교로 생활기록부에는 4학년 때부터 6학년 졸업 때까지의 기록이 있었다. 그는 그 이전의 기록을 찾고 싶어 했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에 서울시립아동보호소를 검색해봤다.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확인해보니 서울시립아동보호소는 ‘서울특별시 꿈나무마을’로 바뀌어 있었다. 서울시가 1975년 민간사회단체인 마리아수녀회에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시설과 운영권 전부를 위탁하게 되면서 이후 서울시립소년의집이라는 이름을 거쳐 현재의 서울특별시 꿈나무마을이 됐다. 그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자, 그는 그곳의 위치를 물으며 당장 가겠다고 했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백련산로14길 20-11. 그곳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지하철역에서 꿈나무마을로 걸어가는 길, 그는 옛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시키며 ‘서울시립아동보호소’ 가는 길을 더듬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곳에 그가 찾는 ‘오광석’은 없었다. 동명이인만이 있었다.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서류 속 오광석은 ‘가출 아동’으로 79년도에 15살의 나이로 입소해 곧바로 연고자가 인도해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분명 그는 아니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대여섯 살쯤에 이곳에 왔다. 

 

오광석 씨는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있었던 자신의 기록을 찾기 위해 직접 발품을 팔아 뛰어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오광섭, 오강석, 강석이, 오강섭, 오광식… 담당자에게 요청해 어린 나이의 그가 불렸을지도 모를 이름들로 검색을 했다. 하지만 그로 추정되는 인물은 없었다. 그는 손으로 직접 아동카드를 찾으면 안 되냐고 거듭 물었다. 하지만 담당자는 개인정보보호법때문에 직접 찾는 것은 곤란하다는 기색을 표했다.


“마지막에 내가 어디서 왔다, 하는 걸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서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그가 간절함을 토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담당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다른 루트로 찾아본다던가…”라고 말을 애써 돌렸다. 그렇게 결국, 빈손으로 나왔다.


얼마 후 그가 새로운 직장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올해 5월 처음 만났을 당시 그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쉬고 있었다. 이삿짐 나르는 일을 할 정도로 건강했던 그는 올해 선감학원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선 그때부터 온몸이 아프더니 앓아눕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도 그만두었다. 하지만 두 달여간 일을 쉬니 먹고 살길이 막막해져 다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일이었지만 넉 달 후 그는 직장에서 잘렸다. 일을 다시 구하는 동안 그는 선감학원 피해자대책위 활동에 참여하고, 틈틈이 자신의 기록을 찾으러 다녔다. 그는 경기도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하여 선감학원 원아대장을 받아내고 청와대에 탄원서를 넣었다. 그가 자신의 원아대장을 전해주러 왔던 지난 10월 14일, 그 전날은 그가 새로 구한 직장에 첫 출근한 날이었다. 함께 밥을 먹으며 새 직장에 관한 이야길 나눴다. 그러나 다음 주 그가 또다시 일을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초조함과 불안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났다.


- 쉰한 살의 사내가 스케치북에 글을 써왔다


올해 5월 중순, 그가 사는 부천의 한 카페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인터넷에서 선감학원을 검색하던 중 비마이너를 알게 됐다며 만나고 싶다고 거듭 전화해왔다. 무의식적으로 ‘남루한 중년 남성’의 모습을 상상했던 나는, 거기서 한참 빗나간 그의 외모를 마주하곤 조금 놀랐다. 그는 샛노랗게 탈색한 머리에 크지 않은 키이지만 잘 관리된 근육질의 몸을 갖고 있었다.


카페에 앉자마자 그는 “간단하게 써놓은 게 있어요”라며 스케치북을 펼쳤다. 8절 스케치북 두 장에 걸쳐 매직으로 쓴 글이었다.


“박정희 정권 때 어린 나이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일명 양아치 차라는 차에 끌려가게 되었읍니다. 멀정이 어머니가 있고. 여동생이 있는대도 또한 어린 간난아이 동생도. 있었는대 전 길거리에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고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보금자리라고 간 곳이 어린이집. 일명 서울소년의집 안에 있는 갱생원이였읍니다. 거기서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 후 한참 후에 이유 없이 배를 타고 선감도라는 섬에 오게 된 것입니다. 다른 기억은 없고 배고프고, 매 맞고, 일하고 훈련받고. 등등입니다.”

 


그의 나이 올해로 쉰하나. 주민등록증 나이로는 마흔여덟이다.


배고파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어린 오광석을 이름 모를 탑차(일명 양아치차량)가 낚아챘다. 그는 그 길로 서울 소년의 집에 끌려갔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곳에서 유치원을 다니다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어느 날, 소년의집 안쪽에 있는 갱생원에 들어가게 됐다. 거기선 학교도 보내지 않았다. 이후 소년의집에서 일곱여덟 명의 아이들과 선감도로 보내졌다. 그는 선감학원에 대해 말할 때면 유독 "그런 기억이 나요", "제 기억으로는"이라는 말을 앞뒤에 덧붙였다.


이 글은 그 날로부터 “배고프고, 매 맞고, 일하고 훈련받”는 게 전부였던, 선감학원을 경유한 한 사람의 기억과 존재 증명에 대한 이야기다.


- 머리에 처박힌 굴 껍데기, 너무 매섭던 바닷바람


그곳에선 새벽처럼 일어나야 했다. 새벽 5~6시경에 일어나면 "산꼭대기 정도에 있는" 사무실 앞까지 선착순 집합을 했다. 늦게 가면 맨 뒤에서부터 빠따를 맞았다. 꼭 허벅지만 때렸다. 엉덩이보다 허벅지가 더 아프기 때문이다. 인원 점검하다가 한 사람이라도 없어지면 바로 원산폭격에 들어갔다. 머리 처박은 땅바닥엔 굴 껍데기가 깔려있었다. 좌로 두 번. 우로 두 번. 그 위에서 작은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다 보면 머리에 굴 껍떼기가 박혀 피가 났다.


그리고 해산. 내려가서 아침밥을 먹는다. 학교 갈 아이들은 학교 가고, 학교 가지 않는 아이들은 남아서 일을 했다. 광석은 다행히 학교 가는 아이였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선감국민학교에서 1~3학년까지 다녔다. 학교 갈 때도 원생들은 줄을 맞춰 갔다. 학교에 가면 선감학원엔 없는 또래 여자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나이에도 여자아이들을 보면 설렜다.


학교 끝나고 돌아온 아이들은 일을 했다. 밭매고 땅 파고 겨울이면 육지에서 배달된 연탄을 날랐다. 배와 선착장 사이에 판자를 대고 그 위를 왔다 갔다 하며 42공탄 연탄을 날랐다. 걸을 때마다 판자가 출렁였다. 간혹 떨어지는 아이도 있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다만 직원들에게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맞았다. 어린아이들은 자기 몸무게만 한 42공탄을 들고 언덕을 넘어 연탄 창고까지 날랐다. 연탄을 실어 나를 별도의 운반수단은 없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연탄 배달은 오후까지 계속됐다. 추위를 막을 잠바도 신발도 없이 종일 바닷바람을 맞으며 연탄 나르는 일은 너무 춥고 배고픈 일이었다.


극심한 허기는 마치 또 하나의 장기(臟器)처럼 늘 배에 붙어있었다. 덩치 큰 식당 아주머니가 한 분 있었는데 그는 쓰레기 치우고 오물 치우던 삽으로 밥을 뒤졌다. 밥은 서너 번 수저 뜨면 사라졌고 반찬은 짠 단무지에 콩자반 10알, 멸치가 주로 나왔다. 오뎅이 나오면 잘 나오는 거였다. 그런데 그 오뎅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구더기였다.


광석은 고픈 배를 채우러 산을 돌아다녔다. 뱀을 잡으면 머리는 자르고 껍질은 벗겨 창자를 뺀 뒤 구워 먹었다. 물방개를 잡아 연탄불에 구워 먹기도 했고 잠자리를 생으로 먹기도 했다. 나름 “고단백질”이었다. 산도라지, 칡뿌리, 냉이 등 산에 있는 것 중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다 먹었다. 겨울이 되면 바닷가에 가서 ‘쇼팅’(기름덩어리)을 주워 밥에다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기도 했다. 맛있었다.


“제일 힘들었던 건 뭐냐면 배고픈 거, 춥고, 여러 가지가 복잡한 거. 그런 것들이죠. 자유가 없었던 거. 자유가 있어도 그 안에 못 들어오면 조금만 늦으면 비상이 걸리니깐. 자기 전에 군대식으로 인원 전원 보고를 해요. 줄 맞춰서 하나둘셋, 틀리면 다시. 틀리면 맞고. 그건 매일 해요. 왜냐면 도망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도망갔다가 잡혀 오면 맞는 거예요. 죽도록. 옷 다 벗기고 물 뿌려가지고 때린다고.”

 

박태원 경기도지사(재임기간 1964 ~ 1968)가 선감학원을 방문해 원생들이 식사하는 식당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제공 :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 줄빠따, 다구리, 전쟁… 우리는 서로 때리고 또 맞아야 했다 


도망가다 잡혀도 죽도록 맞았지만, 사실 폭력은 일상이었다. 한겨울에 자다가 연탄불이 꺼지면 방장은 원생들을 사정없이 팼다. 방장, 사장은 원생 중 힘세고 윗분들에게 잘 보인 이들이 맡았다. 그러나 방장, 사장이 아닌 원생들도 그 안에서 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었다.


일렬로 원생들을 엎드려뻗쳐 시킨 뒤 원생이 원생을 때리는 ‘줄빠따’라는 게 있었다. 원생 열 명이 누워있으면 맨 앞 원생이 일어나 아홉 명의 원생을 때린 뒤 맨 뒤로 가서 엎드린다. 그다음 원생이 일어나 또 아홉 명의 원생을 때린 뒤 맨 뒤로 가서 엎드린다. 맨 첫 번째로 때린 사람의 순서가 되면 줄빠따는 끝난다. 이불 뒤집어씌운 한 사람에게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때리는 ‘다구리’도 있었다. 그 안에서 폭력은 원생이 원생을 때리는 구조로 작동했다. 


어느 날 밤, 개척사와 창조사 사장들은 아무 이유 없이 원생 간에 패싸움을 시키기도 했다. 이른바 “전쟁”이다.


“사장끼리 합의가 되면 그렇게 밤새도록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들은 터치를 안 해요. 그날 잠 못 자요. 그냥 우당탕하면서 싸우는 거예요. 이유 없이. 나이가 어리다 보니깐 그때 당시 기억이 흐릿한데 좀, 기억이 나는 게, 칫솔로 머리를 했는데(찍었는데) 이만큼이 들어갔어요. 때렸는데. (-상대방 머리에요?) 네. 그런데 웃어요. 싸우면서. 그러면서 싸우는 거예요. 좀 약간 잔인하죠.”


원생과 원생들 간의 관계는 어땠을까. “좋은 건 없어요”라고 그는 건조하게 답했다. 온종일 같이 밥 먹고 자며 일상을 함께했지만 그는 “나한테 잘해줬던 축산부 박○○ 그 사람 외에는 얼굴이 기억이 잘 안 나요”라고 말했다. 마치 몸통은 있지만 얼굴은 새까맣게 칠해진 사진들처럼. “얼굴들이 기억이 안 나요. 그게 희한한 거예요. (중략) 이름도 알 필요도 없었을 것 같아요.”


“배고프고, 매 맞고, 일하고 훈련받”는 게 일상이었던 그곳에서 광석은 크게 앓아 인천 기독병원에 한달쯤 입원한 적이 있다. 선감학원에 있었던 시간 동안 유일하게 ‘섬 밖’으로 나온 때이다. 하지만 선생이 24시간 지키고 있어 도망갈 수 없었다. 광석은 그 후에도 선감도 바깥으로 도망갈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도망가다가 물에 떠내려와서 얼어 죽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 박정희가 총 맞아 죽던 79년 가을, 드디어 섬을 벗어났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박정희가 총 맞아 죽던 79년 가을에 모범생으로” 선감학원에서 부천 새소망소년의 집으로 전원 됐다. 경기도가 폐쇄를 염두에 두고 원생들을 점차 줄여나가던 시기였다. 경기도는 선감학원을 민간에 위탁하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자 70년대 말부터 원생들을 육지의 고아원에 보내는 방식으로 인원을 줄여나갔다. 선감학원은 82년도에 폐쇄됐다.


그는 새소망의집을 “천국”이라고 했다. 새소망의집은 따뜻했고, 먹을 게 풍부했으며, 선생님들은 “천사”처럼 다정했다. 그곳에서 용돈이란 것도 처음 받아봤다. 도착한 첫날,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샤워를 했다. 그날 밤, 선감학원으로 되돌아가는 악몽을 꿨다. “악—” 소리 지르며 깨어난 광석을 선배가 토닥이며 안아줬다. 그 선배 또한 선감학원에서 나온 원생이었다. 악몽은 일주일 동안 계속됐다. 생일이면 생일파티도 해주던 그곳은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시설이었다. 천국 같은 그곳에서 광석은 고등학교까지 무사히 다닐 수 있었다.


“개인후원자도 따로 있었고, 양자로도 삼고. 친구 중에 미국에 입양 간 애도 있고. 잘 된 애들 많아요.”


한국전쟁 때 전쟁고아를 위해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새소망의집은 최근까지 월드선교회유지재단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수십 년간 시설 내 공금 횡령과 후원금 부정 사용 등이 있었고, 원생들 간의 성폭행, 폭력 등 시설 내 문제가 대대적으로 터지면서 올해 2월 폐쇄됐다.

 

 

(다음 연재 기사 이어보기 : ▶기억이 말을 건다. 겁이 난다고, 너무 서럽고 억울하다고)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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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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