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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말을 건다. 겁이 난다고, 너무 서럽고 억울하다고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④-2
오광석 씨 이야기
등록일 [ 2017년10월28일 17시24분 ]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내 이름은 오광석, 나는 누구입니까)
 


“단 하루도 온전하게, 솔직하게 산 적이 없어요”


선감학원을 나온 뒤 광석은 가족을 찾고자 했다. 선감학원 입소 전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남편을 피해 광석과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했고, 외할아버지는 천안에서 이발소를 했다. 그는 외갓집에 가려고 홀로 기차를 탔다가 길을 잃어 파출소에 잡혔다. 스무 살 넘어 어른이 된 광석은 기억을 더듬어 외할아버지 이발소가 있는 천안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작은아버지를 만났지만 외면당했다.


어른이 된 광석은 새소망의집에서 나온 후 웨이터 생활을 1년쯤 하다 금형(金型, 금속으로 만든 거푸집) 만드는 일을 15년 가량 했다. 호적상 고아라는 이유로 군대는 면제됐다. “가정 갖는 게 소원”이었던 그는 스물한 살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그러나 그만 “욕심을 부려” 2011년경 이혼해 지금은 혼자 산다. 6년 전 마지막으로 봤던 큰 아이가 올해로 스물넷 되었을 것이다. 자식들은 아내와 살고 있다.


이혼 후, 그는 많은 걸 잃고 고시원에 들어가 살았다. 일도 안 하고 라면으로 연명하며 자살을 생각했다. 그러다 고시원에서 스물일곱 살 아가씨를 알게 됐다. 밤에 일하러 다니길래 “노래방 다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젊은 사람들 가는 퓨전 음식점에서 일하면서 집에 돈 부쳐주는 가장 역할을 하며” 살고 있더란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삿짐 일은 거칠고 힘들지만 스트레스 풀기에 좋았다. 1년 전부턴 헬스도 시작했다. 선감학원에서의 모진 폭력으로 척추가 좋지 않아 근육으로 허리 잡아주고자 시작한 운동이었다. 잘 하던 이삿짐 일을 그만둔 것은 선감학원 소식을 들으면서부터다. 그때부터 이유 없이 온몸이 아프면서 더는 일을 나갈 수 없었고 살도 4kg가량 빠졌다.


선감학원 이야기는 누구한테도 할 수 없었다. 아내에게조차 말해 본 적 없다. 


“살면서 단 하루도 온전하게 산 적은 없어요. 솔직하게 산 적은 없어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고. (중략) 어떤 사람한테 이 말(선감학원)을 했다가 건너서 들었는데, 저런 뻥쟁이 같은 놈이 있나. 저 또라이 아냐, 이런 소리도 들은 적 있어요. 그 후로는 말 안 해.”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했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엔 선감학원에서 지낸 친구들이 몇 있다. 종종 만나나 선감학원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 한 친구는 페인트칠 일을 하고, 파주에서 고깃집 하던 친구는 일이 잘 되지 않더니 나중에야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감학원에도 다시 가본 적 없다. 그냥 가기가 싫었다. 다만 근처에는 한 번 가봤다. 오래 전, 그저 바지락 칼국수를 먹고 싶어서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선감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오광석 씨.


[오광석의 목소리] : 여기 이 안에, 아직도 ‘쓴 뿌리’가 남아있어요


- 선감학원에서 입게 된 신체적·정신적인 상처, 피해가 있으신가요?


많죠. 제가 스스로 고쳤죠. 많이 고쳤고. 뭐냐면은 잔인함 같은 것. 사실 지금도 겁이 좀 없어요. 어렸을 때 그렇게 했기 때문에 덩치 크고 그러면 사람들 겁내잖아요. 전 겁을 안 먹어요 지금도. 깡다구 같은게 아직 있어요. 그게 좋은 쪽으로 발전을 했죠. 제가 가정 생활에 대해서는 모르잖아요. 그걸 모르니깐 그런 걸 스스로 배운 거예요. 예절 같은 것을 스스로 배워서 윗사람을 함부로 하지 않는 그런 것.


- ‘사람이 사람에게 함부로 대한다,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게 광석님께 중요한 것 같아요. 그게 어떠한 의미인가요? 함부로 대한다는 게 얼마나, 어느 정도의 무게로 잔인하게 느껴지시는지.


뿌리죠. 뿌리. 쓴 뿌리. 깊이 백혀 있죠. 아마 거기 있었던 분들 다 그런 게 있을 거예요. 내 친구 중에 몇 년 전에 자살한 애가 있어요. 그 친구가 도망가다가 잡혀 왔는데 한겨울에, 옷을 다 벗기고 물을 짝 끼얹어가지고 때리는 거예요. 그 얼마나 아프겠어요.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그런 광경을 보면 끔찍하다고 느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나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보게 되는 거예요. 국가가 저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명치를 손으로 만지며) 이 안에도 아직 이 ‘쓴 뿌리’가 남아있어요. 제가 교회를 다니거든요. 기도하면서 없애려고 하는데도 간혹 욱하는 그게 나와요. 왜냐면 그만큼 겁 없이 싸우고 그랬기 때문에.


보통 저 같은 인간 보면 눈빛이 다 날카로워요. 그런데 솔직히 마음은 여리거든요. 진짜 여리거든요. 저는 취재를 마치고 나서 무슨 생각을 하면은 택시를 상봉역까지 같이 타고 가서 기자님 데려드리고 가는.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해요. 다 똑같을 거예요. 그런 배려를 좀 많이 하고. 대신 용납이 안 되는 거는 다 잘라요. 잔인하다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그러는 것들이 아니고 남한테 인자 하도 짓밟히다 보니깐 지지 않으려는 그런 성분이 그렇죠. 그게 인자 너무 꽉꽉 막혀있으니깐 어디 가서 풀지를 못하니깐.


- 선감학원이라는 어린 시절 경험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세요?


특공대보다 더 심한 곳이죠. 군대를 아예 갔다 온 거나 마찬가지니깐. 저는 지금 무인도에 던져도 혼자 살 자신 있어요. 그 정도로 정신이 강하다고 그럴까. 한편으로는 되게 게을러지는 면도 있지만. 두 가지가 이렇게 공존하는 거 같아요. 그걸 많이 깨고 깨고 하면서 일을 하거든요. 이번에 (선감학원 사건이) 사회에 밝혀지면 완전히 변화가 되겠죠, 제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는 몰라도 아마 ‘너무 좋게’(강조) 변할 거 같애요. 저 자신이. 제가 분수에 안 맞지만 혼자 돈을 좀 벌면은 길거리에 다니면서 어려운 사람들한테 돈 좀 주고 이렇게 다니고 싶은 그런 꿈이 있어요. 아니면 뭐 크리스마스이브 때 다들 노는데 경비원들은 추운 데서 이렇게 있잖아요. 그러면 커피통 이만한 걸 사가지구 믹스를 타서 컵 들고 다니면서 한 잔씩 전하는 거. 그런 것도 하고 싶고. 그런 마음으로. 남들이 안 하는 거. 그런 것들.


- 다른 사람들 돌보는 일 말이죠?


그렇죠. 돌본다는 것보다 도와주고 싶은, 그런 것들이 좀 있어요.


- 이번 위령제 때 선감학원 다시 간다면 어떨 거 같으세요? (첫 인터뷰는 올해 5월 27일에 열린 선감학원 위령제 2주 전에 이뤄졌다)


가면은 인자 잊었던 것들이 좀 생각이 나겠죠. 보상 문제를 떠나서, 정말 이걸 빨리 밝혀내서, 이런 게 있었다(는 걸 알리고), 다시는 이런 시설이 없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뿐이에요. 이유 없이 고아가 된 것도 서러운데… 저는 항상 고마운 게 뭐냐면 그래도 이렇게 똑바로 살았, 저기 한 게, 참 고마워요. 그런데도 속으로 단 하루도 솔직하게 산 적이 없어요. 안 그러면 사람이 건방져지고, (선감학원 때의) 기억들이 나면서, 너무 용감해지고(웃음)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자제를 해야죠.


- 솔직하게 살면 어떤 이들이 일어날 거 같아요?


솔직하다면요? 남 많이 이용하죠. 머리 있으니깐. 다 이용을 하죠. 무지 많아요. 그런데 그래선 안 되는 거죠. 어렸을 때 머리가, 공부 쪽이 아니라 그런 쪽으로 튄 것 같애요. 거기서 나온 분들 중에 싸움 못 하는 분들 없을 걸요. 싸움 다 잘해요. 진짜 잘해요. 하.


- 살다가 문득문득 선감학원이 떠오르는 때가 있어요?


간혹 생각나요.


- 어떤 게 생각나세요?


맞는 거. 그리고 수영 쳐 도망가다 얼어 죽은 사람들.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것들. 그리고 매 맞아 죽은 거. 소문으로 들었지만, 매 맞아 죽은 거. 고런 것들 간혹 기억나요.


- 보상 중요하죠. 대체 왜 그랬는지 그에 대해서도 밝혀야 하고.


(목소리가 조금 커지며) 이유가 없잖아요.


- 국가책임인 게 명확하게 드러나야 하고요.


네. 그렇죠 (침묵) 그 안에서 되게 슬픈 게 있었는데 기억이 전혀 안 나요.

 

*          *          *

 

첫 인터뷰는 그렇게 끝났다. 이후 그는 선감학원 사건 진상규명과 관련한 자리에 꾸준히 모습을 비추었다. 경기도의회에서 열린 선감학원 사건 진상조사 및 지원방안을 위한 학술회의에도, 선감도에서 열린 위령제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을 만나고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피해생존자 모임에서 그는 ‘막둥이’였다. 최근 그에겐 새로운 명함도 생겼다. 명함엔 ‘선감학원 생존자 아동 국가폭력 피해자 협의회 - 부천지회, 홍보부장 오광석’이라고 새겨져 있다. 명함 뒷장엔 위령제 때 사진이 있다. 사진 속 공간은 선감학원에서 사망한 원생들이 암매장된 곳이다. 선감학원에서 탈출하기 위해 도망쳤던 아이들이 죽어서 떠내려오면 원생과 직원이 아이들을 마대 자루에 둘둘 말아 비석도 없이 그곳에 묻었다.


내가 기억하는 나와 서류 속 내가 다릅니다


지난 14일 토요일 오전, 그가 선감학원 원아대장을 들고 부천에서 서울까지 찾아왔다. 원아대장에 있는 흐릿한 흑백 사진 속엔 빡빡머리의 어린 광석이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아대장에 적힌 그의 본적지는 경기도 인천시로 아버지 이름은 ‘오창석’이다. 어머니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머니 성은 ‘김 씨’라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원아대장 두 번째 페이지엔 지장이 찍혀있는데 어른 손가락 크기다. 누구의 것일까.


“부랑성으로 6살 때부터 집을 나와서 앵벌이 및 구걸을 하며 서울역 등지에서 3년여 동안 지내던 중 단속되어 아동보호소에서 4년 동안 있다가 전원되어옴.” 원아대장에 쓰인 그의 입원경로다.


조사자 소견엔 “귀가를 원함으로 교화 후 연고자를 찾아줌이 좋겠음”이라고 쓰여 있다. “교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가 낮게 읊조렸다. 원아대장에 따르면, 67년 8월 15일생인 그는 73년 7월 10일에 부랑을 시작해 80년 7월 29일 선감학원에 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광석은 선감학원 창조 5반으로 배정된다. 그해 2학기엔 선감국민학교 4학년에 편입된다. 1년 후인 81년 9월 16일, 부천 새소망 소년의 집으로 전원된다.


그가 부천 동초등학교에서 떼온 생활기록부에도 “고아원생으로 80. 9. 1자 전입된 어린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엔 김창희 선감학원 ‘학원장’이 그의 ‘부(父)’로 되어 있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그는 선감학원에 3년이 아닌, 1년 있었다. 76년 혹은 77년 때인 국민학교 1학년 경 선감학원에 들어가 ‘박정희 총 맞아 죽던’ 79년 가을에 나왔다는 그의 기억과 다른 것이다.

 

오광석 씨의 선감학원 원아대장.


"(내 기억과) 전혀 안 맞잖아."


기억과 기록을 대조한 광석은 당황해했다.


"그런데 내 기억으로는 거기서 겨울을 몇 번을 났어요. 3년 동안 구걸했다는 것도 말이 안 돼요. 실제 나와서 한두 달은 헤맸겠죠. 길 잃어버리면 한 자리에 안 있잖아요.“
 

그는 만날 때마다 되풀이하던, 서울시립아동보호소를 거쳐 배를 타고 선감도로 들어와 박정희가 총 맞아 죽은 79년 선감도 나온 이야기를 압축해 말하며 자신의 기억을 붙잡았다.


그가 ‘73년 7월 10일’ 부랑을 시작했다는 것, 서울역 등지에서 ‘3년여간’ 앵벌이와 구걸을 했다는 것과 같은 자세한 날짜와 연수를 선감학원에서 알 수는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가 80년 여름 선감학원에 들어와 이듬해 가을 선감학원을 나왔다는 입·퇴원에 대한 기록만은 이 종이 서류를 믿을 수밖에 없다.


기억이 말을 건다. 겁이 난다고, 너무 서럽고 억울하다고


그는 그날 작은 수첩에 그린 몇 개의 그림을 보여줬다. 지난 5월 첫 인터뷰한 날, 집으로 돌아가 2시간 동안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검은색 볼펜으로 그려진 그림은 단순하고 거칠었으나 정확했다. 머리몸통팔다리로 표현된 원생들은 늘 행렬을 맞춘 집단으로 표현됐고, 그 곁에 있는 공무원들 손엔 곡괭이자루가 들려있었다.


긴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원생들. 1줄에 8명씩, 총 32명이 앉아 있다. 그 앞엔 사각형 급식판이 놓여 있고 급식판 안엔 커다란 네모 두 개와 작은 네모 세 개가 그려져 있다. 밥, 국, 반찬 칸이다.


32명의 원생을 그리기 위해 같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렸을 그를 생각한다. 네모를 그리고, 더 작은 네모를 그리고, 그 안에 또 더 작은 네모를 그렸을 그를 생각한다. 그림 그리고 남은 공간엔 머릿속 기억들을 글로 옮겨 적는 그를 생각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림 속 32명의 원생 중 그는 누구일까. 오뎅 속 구더기를 대수롭지 않게 치워내곤 꾸역꾸역 밥을 삼켰을 오광석은.


눈 내리는 겨울, 바닷가에서 연탄을 나르던 기억에 대한 그림도 있다. 어김없이 공무원의 손엔 곡괭이 자루가 들려있다. 또 다른 그림은 사무실로 추정되는 공간. 공무원이 “8살 남자아기”를 향해 곡괭이 자루를 하늘 위로 치켜들었다. 그림 하단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이곳은 사무실 복도 구석. 이유는 없다. 단지 군기 목적일까. 아니면 뭐지 짜증이 난다. 여기 그림 집에 글 채우기가 겁이 난다. 왜일까.”

 

오광석 씨가 선감학원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직접 그린 그림 1. (그림 설명 : "어느 눈 내리는 한 섬에서 한 겨울에 어린 아기가 자기 몸무게와 맞먹는 구공탄을 나르고 있다. 혹시나 연탄을 떨어뜨리면 공무원이 와 사정없이 팬다. 이유는 사람 아기보다 연탄이 먼저이니까. // 아침부터 오후까지 구공탄 작업은 계속된다. 저녁에 가면, 밥이라곤 3-4번 뜨면 밥알이 보이질 않는다. 잠바라도 있으면 추위라도 덜한텐데 말이다. 배고프고, 춥고, 아침에 매맞은 자리는 너무도 아프다. (...)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 (...) 너무 서럽다.")
오광석 씨가 선감학원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직접 그린 그림 2. (그림 설명 : "아침 먹기 전 인원 점검을 한다. 한 사람이라도 없을 시 바로 원산폭격이다. 땅바닥은 굴껍질이 깔려 있다. 땅에 머리박은 상태에서 공무원이 말한다. 좌로 두번 우로 두번.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자리에서 일어나면 머리 중앙 부분에서 피가 흐른다. 머리에 굴껍질이 박힌채 말이다.")

오광석 씨가 선감학원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직접 그린 그림 3. (그림 설명 : "한 아이가 헤엄쳐 대부도로 탈출시도에 성공을 한다. // 주민은 밤새 원생을 달래고 밥을 먹이고 재운다. 그 사이 공무원에게 신고를 한다. 밀가루 두 푸대를 받기 위해서 말이다. 한 소년은 다시 공무원에 잡혀 다시 선감학언으로 끌려간다. // 도망갔다가 잡혀온 아이를 겨울에 옷을 다 벗기고 양동이에 찬물을 받아 아이에게 끼얹은다. 너무도 (...) 국가 공무원은 곡갱이자루 같은 걸로 (...) 사정없이 때린다. 무섭다. 살점이 찢어진다. 울고 싶다.")


기억들이 현재의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겁이 난다고, 그리고 나는 왜 그곳에 있었어야 했는지, 너무 서럽고 억울하다고. 곡괭이 자루를 시멘트 바닥에 ‘꽝’ 하게 부딪히던 소리, 이내 그것을 바닥에 질질 끌고 다가올 때 오싹해지던 내 등골. 마당으로 끌려 나와 한 대 맞고 개구리처럼 짝 뻗었던 그 날 밤. 그곳의 소리, 냄새, 근육의 감각. 몸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기억들과 함께 살아왔던 거다.


나는 누구입니까


기억은 ‘불확실하다’지만, 자신의 존재 증명을 해줄 이가 한 사람도 없을 때, 그는 자신의 기억만을 믿을 수밖에 없다. 기억조차 거짓이라면 ‘나’는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첫 만남에서도 스케치북에 글을 써왔다. 인터뷰를 마친 그 날 밤엔 작은 수첩에 두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이후엔 자신의 기록을 찾으러 다녔다. 부천 동초등학교에 가서 생활기록부를 떼고(4시간 동안 서류 더미에서 본인이 직접 찾았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기록을 찾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사방팔방 뒤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찾지 못한 그 날 밤, 그는 내게 전화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서울특별시 꿈나무마을을 찾아갔지만 성과 없이 돌아와야 했다. 이후에 그는 경기도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해서 선감학원 원아대장을 받아냈다. 기억을 바탕으로 기록을 찾아 나섰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세계에 내던져진다. 사람은 가족 속에서 자라 학교에 다니고 사람을 만나며 사회적 존재로서 성장한다. 출생신고를 통해 공적 존재로서의 기록을 남긴다. 학교 생활기록부엔 그의 활동이 기록되며 만 17세가 되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된다. 공적 기록은 일종에 그가 이 사회에 존재했음을 드러내는 증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존재가 설명되는 건 아니다.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공적 서류에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그가 좋아하는 것들, 그만의 개성, 취향, 독특성. 이러한 것을 형성하려면 사람은 사회적 공간에 노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랑아시설이라 불린 선감학원은 그러한 것을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여기선 생년월일조차 거짓으로 꾸며졌다(광석의 기억에 따르면, 어느 계절 좋아하느냐의 물음에 여름이라고 답하니 직원이 ‘광복절’을 생일로 지어줬다고 한다. 실제 원아대장에 기록된 생일도 67년 8월 15일이다). 그곳은 낮과 밤과 계절의 변화만 느낄 수 있을 뿐, 모든 시간이 멈춘 곳이었다. 반복된 일상은 폭력으로 채워졌다. 이곳은 부랑아라는 딱지를 붙인 뒤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을 삭제하고 오직 종으로서의 인간만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후의 생을 이어가야 했고, 이어갔다. 오광석처럼. 그래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시간이 멈춘 그때의 기록이 더욱 갈급한지 모른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했다. 그리하여, 존재 증명의 기록을 그토록 찾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기억과 다르다.


“이게(서류) 맞는 게 하나도 없어요.....뭐라고 해야 하나. ....... (침묵) 말이 안 되는 거 같아요. (허탈한 듯 웃음) 뭘로 말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때의 나를 증언해줄 가족도 없고 선생도 없고 친구도 없다. 나에 대한 기억은 나만이 갖고 있다. 그런데 생(生)에 구멍이 생겨 버렸다. 내 존재의 시원을 찾아가는 그 길이 너무 매섭고, 두렵고, 춥다. 나는 누구인가.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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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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