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11월22일wed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뷰 펼침
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붙잡힘과 탈출의 반복 속에 살아온 소년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⑤-1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 선감학원·삼청교육대 피해자 한일영 씨
등록일 [ 2017년11월09일 15시01분 ]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지독하게 반복되는 꿈속에 있는 듯했다. 깨어나려고 몸부림치지만 여전히 꿈속이고, 꿈에서 깨어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꿈속인 상태. 꿈은 매번 목숨 걸고 탈출해야 살아남는 악몽이고, 꿈속에서 그는 누군가에게 이유도 모른 채 붙잡힌다. 고통을 버티다 때를 기다려 탈출하는데, 곧바로 다른 누군가에게 붙잡히고 만다. 다시 이를 악물고 탈출에 성공하지만, 그는 새로운 그물에 다시 걸리고 만다.


올해 쉰아홉인 한일영 씨는 야간에 일을 한다. 지난해 어느 날, 근무를 하다 쉬는 시간에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다 불현듯 ‘선감학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열일곱에 그곳에서 죽기 살기로 도망쳐 나온 뒤로 ‘선감학원’이라는 말을 들을 일이 없었다. 한 번도 그곳을 찾지 않았다. 그날 밤 그 단어가 생각난 것은 난데없었지만, 운명 같았다고 했다.


바로 다음날 그는 인터넷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해, 묻어두었던 시간들을 다시 마주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목숨 걸고 나왔던 데니까 감회가 새롭잖아요. 궁금하기도 하고, 옛날 건물들이 어떻게 있는지 되게 궁금하더라고요. 그런 호기심으로 왔던 거죠. 지금 하는 이런 일들을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고요.” 그는 선감도에서 탈출한 지 거의 사십년 만에 다시 선감도를 찾았다.


나는 그를 지난 5월 말 선감도에서 열린 선감학원 피해자 위령제에서 처음 만났다. 근무를 조정하고, 대전에서 온 그는 위령제 행렬의 선두에 있었다. 그는 선감도에서 탈출하다 죽은 아이들의 혼을 상징하는 종이를 들고 선감도 선착장에서부터 선감학원이 있던 자리까지 묵묵히 걸었다. 그날 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소년 시절 자신이 겪은 몇 차례의 붙잡힘과 탈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선감학원만이 아니라 삼청교육대에도 붙잡혀갔다 나왔다. 그 악몽 같은 사건들을 겪으며 청소년기를 다 보냈다. 나는 감히 어떤 말도 건네기가 어려웠다.


그는 지금도 탈출을 기획하는 사람 같았다. 유년의 기억 속으로 자주 붙들려 가는 듯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 힘이 부칠 때면 망각이라도 한 듯 떠오르지 않다가도 기억이 한 번씩 튀어오를 때면 여전한 울분에 휩싸였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좋지 못한 일들이 자신의 소년 시절과 연관돼 있다고 느낀다. 자신에게 피해의식이 있는 것 같다고 했지만, 내겐 당연한 일로 느껴졌다. 소년이 이유도 모른 채 겪은 일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국가로부터 반복해서 붙잡혀 탈출을 꿈꾸는 한 소년이 아직 여기 있다.

 

지난 5월 말, 선감학원 희생자 추모제에서 한일영 씨(오른쪽).

 

경기도 가평에서 어머니와 살던 열세 살 소년 한일영은 서울에 있는 작은 아버지 댁에 혼자 찾아가던 길이었다. 1969년경이었다. 어머니에게 차비를 받아 버스를 탔다. 마음씨 좋은 작은 아버지께 용돈을 받을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오후 두세 시쯤, 목적지인 서울 삼선교에 내려 작은 아버지댁을 향해 걷고 있는데, 누군가 그를 붙잡았다.


거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어요. 파출소에 있는 순경 같았어요. 워커 같은 거 신고 있었는데뭐랄까, 불심검문이라고 해야 하나. 저한테 ‘집 어디냐’ ‘어디 가냐’ 하면서 집 주소를 대라고 했어요. 나는 주소는 몰라서 모른다고 했어요. 가평에 살고 가평국민학교에 다닌다고 했는데, 자기네가 확인을 하려고 하면 학교에 연락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혼자서 왔다고 하니까 아예 믿지를 않았던 거 같아요. 내가 작은 아버지 집까지 같이 가보자고 했는데, 저를 파출소에 데리고 있다가 바로 응암동 아동보호소로 넘겼어요. 자기들도 할당이 있었는지 어쨌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아동보호소 가서 알고 보니까 다 그렇게 잡혀온다고 하더라고요. 껌팔이 하다가도 잡혀오고, 웬만큼 꾀죄죄하고 그러면.


그렇게 들어간 아동보호소에서 열 달 정도를 살았다. 하는 일 없이 정좌로 앉아 있다가 이유를 모른 채 얻어맞는 게 일상이었다. 보호소에서는 고참 아이와 신참 아이를 짝 지어주고, 도망가지 못하게 서로 감시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호소에서 경기도 배차가 있으니 경기도에 집이나 친인척 있는 사람은 모두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는 가평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그가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마산포(현 경기도 화성시 소재)였다. 함께 손을 들었던 스무 명 정도 되는 아이들 모두 이곳으로 옮겨졌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조그만 배로 갈아타고 어느 섬에 도착했다.


선감나루터부터 시작해서 개척사 밑에 공터까지 갔어요. 거기다 애들을 모아놓고 신고식인 건지 뭔지, 그때부터 엄청 두들겨 패고 난리더라고요. 경기도 배차한다고 속여 놓고 거기 다 데려온 거예요.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 돼서 씻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다음에 애들을 찢어서 방을 배치해주더라고요. 한 이틀 정도 됐을까? 집에 보내준다고 해서 왔는데 상황이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나는 개척사 담당 선생한테 순진하게, 선생이니까 얘기하면 되겠다 싶어서 얘기를 했어요. 집에 보내준다고 들었는데 왜 안 보내 주냐? 여기서 못 나간다는 건 다음날 다른 애들한테 들어서 알게 됐어요.


며칠 뒤에 사장한테 곡괭이 자루로 무진장 두들겨 맞았어요. 왜 선생한테 그런 소리를 했냐면서. 그렇게 맞고 나니까 너무 악질이다 싶어서, 저랑 같이 온 애 중에 한 명한테 사장 험담을 했어요. 사장 쟤 진짜 너무한다, 그렇게 얘기한 거죠. 근데 걔가 사장한테 잘 보이려고 내가 험담한 걸 일렀어요. 그 뒤로 사장이 나를 맨발에, 팬티바람으로 해가지고 두 시간씩 운동장에 세워놓는 거예요. 그렇게 이틀 되니까 발이 너무 가려웠어요. 발이 양쪽으로 퉁퉁 부었는데 한 달이 넘어가니까 왼발 전체가 시커멓게 죽어가는 거예요. 안티푸라민인가 그것만 발라주고 별거 없었어요. 지금으로 치면 아홉시 뉴스 감이겠지만. 허구한 날 죽고 하니까 그 사람들도 면역이 돼서 그런지 별일 아닌 것처럼 하더라고요. 한 쪽 발가락 끝에서부터 고름이 나기 시작하더라고. 그제야 먹는 약을 줬는데 발가락에서 고름이 계속 나더라고요. 내가 운이 좋아서 다행이지 잘못하면 발을 잘라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의 발가락 몇 개는 살점이 잘려나가고 뭉툭해져버렸다. 집에 돌아간다고 기대했던 아이들은 오늘 하루 두들겨 맞지 않고 살아남는 게 일과가 됐다. 선감학원에서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매일같이 농사일을 시키고 할당량을 채우게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또 두들겨 맞았다.

 

박태원 경기도지사(재임기간 1964 ~ 1968)가 선감학원을 방문해 원생들 일부를 사열하고 있다. (사진제공: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농사에 관한 건 웬만한 건 다했어요. 힘든 일이 계절별로 달라요. 보리밭이 되게 넓은 게 있었어요. 추운데 양말도 없이 고무신 하나 신고. 바람도 엄청 차가워요. 그 넓은 데를 어린애들이 매야 하죠. 또 추수할 때는 되게 따가운데 낫으로 다 베야 했어요. 허구한 날 일하고 빠따 맞고 하다보니까, 집에 간다는 건 이미 꿈이 깬 거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덜 맞을까, 어떻게 하면 일을 덜 힘들게 할까. 건초를 베라고 하면 논밭, 산이고 다 다니면서 매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정량을 다 베서 갖다 바칠까, 이런 생각에 급급했어요.


꼴바, 꼴통바가지라고 정말 악독한 양반이 있는데, 그 양반 관사가 양잠하는 건물 뒤쪽으로 있었어요. 꼴바는 아들 둘에 딸 하나랑 같이 살았어요. 거기는 물이 없어서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어요. 콩쥐팥쥐에 나오듯이 장독 항아리에 어린 아이들이 물을 떠 나르는 일을 했어요. 식수만 하는 게 아니라 씻고 그런 물도 다… 나는 관사 당번만 하면 좋은데, 다른 애들 일할 때도 일하고, 다른 애들 씻고 쉬고 그럴 때도 관사 일을 해야 했어요. 나는 지지리 복도 없었어요. 그런 선생을 만나서 이중삼중으로 힘들었어요.
 

저는 이용과여서 짬나면 이발도 했어요. 이용은 아직도 생생한 게 있는데 ‘이용은 전 인류에 공헌하는 동적인 자연의 예술이요. 이용사는 이를 실천하는 예술가이다’ 이걸 외우라고 해서 외웠어요. 안 하면 두들겨 맞으니까 외워진 거예요. 찍히지 않으려고요.

 
밤만 되면 곡괭이 자루 끌고 다니면서 단체 빠따를 쳤어요. 누구 하나가 잘못했다 하면 전체 빠따니까. 점호할 때 빠따 질질 끌고 내려오는 소리가 나고, 퍽퍽 거려요. 골고루 맞고 내려오는 거야. 매도 먼저 맞으면 나은데, 분명히 나도 맞을 건데, 하필이면 우리는 입구쪽이어서 저 끝에서부터 고통 소리, 막 퍽퍽 거리면서 맞는 소리를 들어야 했어. 그것도 원상폭격해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거야. 어떤 애가 도망갔다 그러면, 오늘밤에 또 곡소리 나는구나 생각하죠.


집에 가고 싶은 게 최고의 꿈이었어요. 그 꿈도 결국에는 내가 능력이 됐을 때 꿀 수 있는 게 여기의 꿈이야, 선감학원의 꿈. 내가 능력이 안 되는데 꿈을 꾸면 불행해져요. 수영도 못 하는데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불행해지지. 먼저 도망 나갔다가 도로 돌아온 애들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같이 도망 갈 때 옆에서 같이 수영 치면 안 된다, 누구 하나 힘 떨어지고 하면 서로 붙잡고 그러다가 다 죽는다, 또 물 들어올 때 맨 꼭대기서부터 시작해갖고 넘어가라. 우리는 개구리수영 하는 건데 이거 속도가 되게 안 나와요. 끝에서부터 하게 되면 거기 끝은 유속이 세다 보니까 거기서 조금이라도 멈칫거리면 먼 바다로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빠져 죽어가지고 재수 좋으면 뭍으로 떠밀려 나와서 여기 묻히는 거고, 재수 없으면 그냥 끝나는 거예요. 여기서는 뭍으로 안 떠밀려왔으니까 살아서 갔구나 생각하는 거지만. 도중에 죽었을지도 모르는 많은 애들이 있어요.


세월호도 보면 아직 못 찾은 사람 많잖아요. 그 부모들 보면 이제, 죽은 걸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았으면 하는 심정이잖아요. 운 좋게, 죽었지만 그 와중에 떠밀려 와서 여기라도 묻힌 거고요. 떠밀려서 먼 바다로 가는 애들이 많았을 거예요. 여기선 어떻게 처리했을지 모르겠지만 도망가다 죽어서 여기 묻었네 이렇게는 절대 안 할 거예요. 병사로 처리하거나 했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진상을) 밝힐 수가 없는 거야. 지네들이 이 핑계 저 핑계 대서 그랬다고 하면 우리가 밝힐 길이 없는 거지. 제발 다 살아서 다 도망갔길 바라지만. 근처 섬으로 떠밀려간 애들은 누가 건져오면 여기다 묻었지만 아주 먼 데로 나가서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인 거지… 가장 불행한 희생자가 걔네들 아닌가 해요.


저는 여기 들어올 땐 수영할 줄도 몰랐어요. 여기 앞에 염전이 있었고 염전 옆에 저수지가 있었어요. 바닷물 들어왔을 때 수문을 닫아놓으면 물이 남아 있잖아요. 우리가 여기서 유일하게 배운 건 수영이에요. 수영 배운 건 빠삐용처럼 하려고 계획한 거였어요. 중요한 건 수영만 잘하면 되는 건 아니고, 여러 가지 고난이 있었어요.


여기서 집에 가야한다는 꿈은 한동안 다 차단돼 있었죠. 꿈이라는 거는요, 언제 꿈이 생기냐면요. 수영을 배우고 물 때도 알고 하면서 능력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꾸게 되는 거더라고요. 이 부근 섬사람들은 (시체가) 떠밀려오면 다 여기서 도망가다가 떠밀려온 애들이라고 선감학원에 알려줘요. 그러면 거기 가서 데리고 오고 이러는데 퉁퉁 불어터지고 상처가 많았어요. (시체를) 고기들이 뜯어먹고 한 거를 저는 직접 보기도 했어요.


저는 한 번 만에 탈출 성공했어요. 두 번 했다가는 저 세상 가야지. 세 명이 탈출했어요. 나무 위에 올라가서 물 빠지면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맨날 올라가 있는 건 아니어서, 밑에서 뭐하는 거 보고선 그 틈에 물 때 맞춰서 나갔어요. 멀리서 산 위에서 봤을 때는 물 다 빠지고 나면 나오는 뱃고랑이 되게 좁아보였어요. 근데 거기까지 나가는데도 힘이 다 빠졌어요. 뻘이니까 걸어서 나가다가는 절반도 못 나가서 힘 빠져서 죽는 거고, 물 들어오면 끝나니까. 우리는 엎드려 가지고 팔로 스키 타듯이 막 밀고 나갔어요. 그러면 빠지지는 않으니까. 근데 이건 평지 얘기고, 또 가다보면 고랑이 또 있어요. 앞에 가보니까 무진장 먼 거예요. 힘 다 빠졌잖아요, 팔이고 뭐고. 애들이 그래서 죽는 거예요. 그때 같이 가던 한 명이 포기하고 울면서 ‘야 너네들은 죽지 말고 꼭 성공해라’ 그러는 거예요. 겁먹어 가지고. 직접 앞에 가보니 무진장 머니까 자신이 없었던 거지. 그래서 다시 돌아갔는데 걔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소년 한일영과 친구는 선감도 탈출에 성공한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이웃 섬인 어섬에 도착한 그들을 섬 주민들이 맞았다. 굴 양식 일로 살아가는 동네라 섬 주민들은 바닷가에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두 소년이 수영해서 오는 걸 멀리서부터 지켜보고 있다가 그들이 뭍에 이르자 다가왔다.


나는 거기서 붙잡힐 거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붙잡혔어요. 그 사람들 입장에선 우리를 보는 사람이 임자예요, 완전 심 봤다지. 우리는 공짜로 쓸 수 있는 머슴 아니면 노예였어요. 주민 하나가 나를 앉혀놓고 자기 집에 가서 있을래? 선감원으로 도로 돌아갈래? 협박을 하는 거예요. 저는 당연히 있는다고 그러죠. 목숨 걸고 간신히 탈출해 나왔으니까.


소년들은 강도 높은 굴 양식에 부려졌다. 굴을 지게에다 한가득 실어 나르고, 종일 그 굴을 깠다. 선감학원에서 같이 탈출해 나온 친구와는 만날 수 없었다. 또 다른 아이들도 있었지만, 주민들은 이 아이들이 서로 만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선감학원 선생들이 없어진 아이들을 찾아 어섬까지 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주민들은 아이들을 숨겼다. 소년 한일영은 어섬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번째 탈출을 기획했다.


마산포 하고 어섬 사이에 주민들이 만들어놓은 다리가 있었어요. 물 빠지면 그게 드러나서 안전하게 나갈 수가 있었어. 그렇지만 동네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애들이 그쪽으로는 못 다니게 했어요. 그쪽으로 갔다간 작살이 나. 동네 사람들이 담합이 돼있어. 그런 거 생각하면 그 사람들도 진짜 나쁜 사람들이에요. 나는 거의 1년 다 돼서 탈출했는데, 어섬은 1년에 한번 산신제를 열어요. 섬 자체 내에서 마을이 똘똘 뭉쳐서요. 주민들은 온 식구가 다 산으로 올라가더라고요. 그때 마침 물 빠져서 다리가 나와서 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무지무지 뛰었어요. 그때가 열여덟. 초등학교 5학년에 붙잡혀 가가지고 열여덟이 돼서 나온 거예요.

 

선감도에서 바라본 마산포 방향의 바닷가. 현재는 바다의 상당 부분이 간척사업으로 매립되어 과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다음 연재 기사 이어 보기 : 삼청교육대-징역살이-보호관찰...국가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올려 0 내려 0
김유미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삼청교육대-징역살이-보호관찰...국가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기억이 말을 건다. 겁이 난다고, 너무 서럽고 억울하다고
내 이름은 오광석, 나는 누구입니까
죽음의 바다를 건너 인천으로...다시 반복된 거리의 삶
고아에게 가해진 폭력의 기억...‘죄수들에게도 그렇게는 안 할 거야’
세상과의 불화를 끝내기 위해 걸은 500Km...‘이제 꽃길만 걸어요!’
국가, 수렁에 빠진 소년들을 삼키다
바다를 두 번 건너 죽음의 섬에서 탈출하다
다시 만난 가족...그러나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인천 바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년, 고기잡이배에 던져지다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삼청교육대-징역살이-보호관찰...국가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2017-11-15 11:08:32)
기억이 말을 건다. 겁이 난다고, 너무 서럽고 억울하다고 (2017-10-28 17:24:33)
Disabled People News Leader 비마이너 정기 후원하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더보기
비마이너는 사회를 제대로 보기 위한 ‘지도꾸러미’ 같아요
비마이너는 인권의 최일선에서 '싸우는 언론'입니다
비마이너 기자의 포부, “사골국 끓여드릴게요”
비마이너는 높은 해상도의 렌즈로 세상을 정확히 보여주죠
비마이너는 현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언론이죠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아서 좋아요”
비마이너는 소수자의 시민권을 옹호하는 언론
우리 사회가 공유할 더 큰 가치를 위해, 비마이너를 읽고 후원합니다
기자에게 비마이너는, ‘나침판’이에요
“소수자를 차별하는 가장 무서운 방법은 그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거예요”


Beminor SNS 비마이너 페이스북비마이너 트위터비마이너 텔레그램
기고 칼럼 기자칼럼

기고 작은이미지
1년에 단 한 번뿐인 시험을 치르는 사람, 여기에도 있...
이른 아침, 낯선 교문 앞에서 떡이나 음료를 나눠주며 열...

친절한 거절을 거절하고 싶다
가족들이 던지는 물건, 그게 날 부르는 ...
당신이 아는 그 ‘청소년’은 없다
포토그룹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