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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에서 불어온 복음의 메시지, “이 나라의 희망은 가난뱅이 뿐이오”
‘판자촌 예수’ 정일우 신부의 삶을 담은 다큐 <내친구 정일우>
등록일 [ 2017년11월14일 13시59분 ]

지난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오 마이 파파>는 ‘청빈’과 ‘봉사’의 삶을 살았다고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 알로이시오 신부의 삶을 다루고 있다. 알로이시오 신부(1930~1992)는 전쟁의 여파로 고아가 넘쳐나던 1957년 한국에 들어와 ‘소년의 집’을 만들고 이후 세계 곳곳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시설을 운영하는데 한 평생을 바쳤다.


나는 알로이시오 신부의 삶과 이 다큐의 카메라 시선 속에서 ‘가난은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가’라는 궁금증을 갖고 다큐를 감상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해 흔히 말하는 ‘사랑’, ‘봉사’, ‘헌신’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우선 알로이시오 신부의 유지를 따라 ‘소년의 집’ 사업을 이어 나가고 있는 수녀들의 말을 들어보자.


“창설 신부님(알로이시오)의 정신에 의해서, 우리 바뇌 성모님이 주보 성모님이시잖아요. 성모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가 직접 찾아가면서 진짜 가난한 이들이 어디에 있는가,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진짜 가난한 아이들을 찾아서 도움을 주는 거죠.”


다큐에서 수차례 강조되고 있듯이, 알로이시오와 그를 따르는 수녀들의 신앙과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진짜’ 가난을 찾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진짜’ 가난이라는 말을 선별적 복지 담론에서 말하는 ‘가짜 빈곤 선별’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여기서의 ‘진짜’라는 말은 그저 하느님의 사랑이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대상으로 ‘가난’을 지칭하기 위한 수사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덜 가난’한 사람보다 ‘더 가난’한 사람 속에서 실현되었을 때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그 위대함을 드러낸다. 이를 위해 하느님 사랑의 전달자는 자신의 안락과 즐거움을 버리고 더 없는 헌신과 봉사를 실천하고자 한다. 그래서 알로이시오 신부의 유지를 이어받아 운영되는 멕시코 과달라하라 소년의 집은 고작 16명의 수녀가 2천명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브라질 상파울루의 마리아 초등학교에서는 수녀들이 아이들의 옷과 먹을거리를 직접 만들어주며 ‘어머니의 사랑’을 베풀고 있다.


이것이 가난구제사업의 적절하고 합리적인 방식인지를 따져 묻는 것이 이 글의 관심사는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묻고자 하는 것은, 이 다큐 속에서 가난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무엇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없다는 점이다. 가난한 자는 오로지 자신의 불행함을 증언하는 자이거나, 신부님의 사랑과 헌신에 의해 구원받아 그들의 은혜를 입증하는 자들로 그려질 뿐이다. 더불어 과달라하라 소년의 집 정원이 690명에 불과한데 타지에서도 지원자가 몰려 대기자가 속출하는 현상은 멕시코 공교육의 열악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들의 사랑의 드높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알로이시오 신부의 가경자(可敬者, 로마 가톨릭교회의 시복 후보자에게 주어지는 존칭) 선포식 장면을 그의 은혜를 입증하는 피날레로 장식한다. 결국 알로이시오는 가난을 경유하여 드높은 영광의 자리로 올라갔지만, 낮은 자리의 가난 곁에 영원히 머무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


물론 가난에 대한 이런 식의 묘사는 우리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천주교가 운영하는 대규모 장애인거주시설 ‘꽃동네’의 표어는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이다. 그런데 이 문장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될 때 강조되는 것은 사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이다. 빈자가 절망을 극복하고 스스로 일어설 힘을 되찾는 문장이 아닌 것이다. 이 비대칭 관계 속에서 가난은 주님의 은총 앞에 한없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일그러지고, 타자의 구원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 비주체적인 대상으로 전락한다.


얼마 전 꽃동네는 충북 음성군에 무연고자 봉안당 시설을 마련하면서 그 이름을 꽃동네를 오랫동안 지원한 정진석 추기경의 이름을 따서 ‘추기경정진석센터’라 했다.(▶관련기사: “‘추기경 정진석 센터’라 쓰고 ‘봉안당’이라 읽는다”) 지난달 23일 열린 센터 축복식 행사도 정진석 추기경에 대한 찬사로만 가득 찼다. 의탁할 데 없이 스러진 사람들을 모시기 위한 자리가 결국 추기경 한 사람만을 드높이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반대로 이곳에 묻히게 될 6만기의 무연고 시신들은 영원히 익명의 비존재로 흩어진다.

 

'내친구 정일우' 예고편의 한 장면


반면,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내친구 정일우>의 주인공, 정일우 신부(1935~2014)의 삶을 들여다보면 가난에 대한 전혀 다른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단지 그가 가난구제사업을 넘어 빈민들과 함께 투쟁하는 삶을 살았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정일우 신부의 삶에서 드러나는 가난을 대하는 태도는 여타 성직자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1960년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존 빈센트 데일리(John Vincent Daly, 1998년 한국인으로 귀화해 ‘정일우’로 개명)는 미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엄혹했던 군사독재 치하에서 그는 강의를 듣던 학생들이 데모로 잡혀가면 항의의 표시로 단식을 하고 서울 한복판에서 일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돌연 “복음을 입으로만 살아왔다”고 자각하고, 교수직을 버린 채 청계천 빈민들의 공동체 속에 뛰어든다.


이 다큐에서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장면은, 김동원 감독과 정일우 신부의 첫 만남의 계기이기도 한 상계동 철거민들의 투쟁 장면이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진행된 서울 달동네 강제철거에 상계동 주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오는 포클레인에 그들의 보금자리는 허망하게 무너진다. 그러나 다시는 일어설 힘이 없어 보이기만 했던 이 ‘가난뱅이’들은 다시 무너진 집터 위에 초라한 천막을 세우고 함께 기도한다. 기도하는 한 남자는 눈물에 콧물까지 범벅이 되어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그리고 기도가 끝난 후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낡아빠진 모포자락을 함께 덮고 깔깔대며 담소를 나누고, 또 다시 험난한 내일을 준비한다. 이 전쟁 같은 일상 속에서 진행된 미사에서 정일우 신부는 주민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의 희망은 가난뱅이 뿐이에요.”


물론 이 말을 하기에 앞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교육받은 사람, 돈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이 이 나라를 올바르게 잡아야지. 그런데 안 하기 때문에 절대로 안하기 때문에”라는 조건이 붙어 있어서 조금은 상투적인 말로 들리기는 한다. 하지만 “이 나라의 희망은 가난뱅이”, “가난뱅이가 교회를 구원할 것”이라는 말이 전하는 메시지는 지금까지 성직자들이 가난을 향해 ‘복음의 이름으로’ 전했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앞서 <오 마이 파파>에서는 가난한 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외치는 장면이 없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불행함을 증언하는 자이거나 신부님의 위대한 사랑에 의해 구휼 받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내친구 정일우>에 등장하는 정일우의 ‘친구들’은 거침없이 날 것 그대로의 자기 목소리를 드러낸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부수러 오는 포클레인에 직접 올라 멈춰 세우거나, 철거가 끝나 모든 것을 잃은 한 여성은 웃통을 벗어던지며 용역깡패들에게 고함을 쳐댄다. 폐허가 된 집터에 주저앉아 울부짖는 할머니는 오히려 의연한 목소리로 “어디 다 뺏어가 봐라. 우리에겐 하늘이 지붕이다.”라고 댓거리 한다.


정일우의 가난뱅이 친구들은 애초에 누군가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무너진 담벼락을 딛고 스스로 희망을 일궈내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이들 역시 서로 다투고 상처받고 반목하는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의 유일한 실체적 형상이 바로 ‘인간’이라면, 복음 또한 인간 외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악다구니 치는 인간 속에, 삶터를 지키려 발버둥치는 인간 속에 복음의 유일한 희망이 있다. 정일우 신부는 판자촌 사람들 속에 부대껴 살면서 이 단순하고도 묵직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실천했다. 외진 동네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시설을 만드는 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지금 살고 있는 땅에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그들과 놀고 술 마시고 노래 불렀다. 그래서일까? 그는 뭇 성직자들처럼 ‘주님 곁’으로 가겠다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제 소망은 죽기 전에 인간 되고 싶은 거에요. 다른 것이 없어요.”라 말한다.


많은 이들이 정일우 신부를 ‘판자촌 예수’라 부른다. 이는 사실 그가 누구보다 진솔한 인간으로 살다 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밭일을 하다가 힘들면 “에이고, 한잔 해야지”를 말하고, 마을 사람들과 고스톱을 치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코쟁이’라 놀리니 삐치는 사람. 그런 평범한 일상을 나누며 상처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희망을 만드는 공동체를 꿈꿨던 사람.


<내친구 정일우>의 엔딩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49재를 치르는 날의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오 마이 파파>에서 알로이시오 신부가 가경자로 선포되는 장면처럼 위엄 있고 성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의 영정사진을 들고 춤을 추며, 평소 그가 좋아하던 노래 ‘노란샤스의 사나이’를 부른다. 그는 그렇게 본인이 소망하던 바대로 이승을 떠나고도 영원한 ‘인간’으로 남았다.


<내친구 정일우>는 오늘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모든 종교인들의 무례함에 던지는 하나의 물음표다. 구휼과 시혜의 언어로 가난한 자의 입을 빼앗고 결국은 ‘종교인’이라는 허상 속에서 자신만을 드높이고자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이 낮은 데라 칭한 ‘가난’이 사실은 모든 복음이 샘솟는 자리임을, 구원의 희망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알고 있는가? 이런 ‘가난’ 앞에 종교는 한 없이 낮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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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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