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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교육대-징역살이-보호관찰...국가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⑤-2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 선감학원·삼청교육대 피해자 한일영 씨
등록일 [ 2017년11월15일 11시08분 ]

>>지난 연재기사 먼저 보기 (▶붙잡힘과 탈출의 반복 속에 살아온 소년)

 

 

섬에서 도망쳐 나온 소년은 걷고 또 걸어 도시로 나왔다. 거기서 기차에 몸을 싣고 또 무작정 걸어걸어 어머니가 있는 가평 집까지 찾아 갔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예전에 혼자 집을 나온 그날처럼, 다시 가평에서 서울 삼선교 작은 아버지댁까지 찾아가게 된다. 가족들은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와는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어렵게 만난 어머니는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했다.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그는 새 삶을 준비하며 일을 배우러 다녔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니, 기술이라도 배워야겠다 싶었다. 이곳저곳 일자리를 알아보다 괜찮은 물산 회사를 알게 됐다. 프레스, 선반 짜기 같은 일을 배워가며 다녔는데, 얼마 가지 않아 또 일이 벌어졌다. 여름휴가를 받아서,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뚝섬유원지에 있는 수영장으로 물놀이를 간 날이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를 믿고 아이들 보호자 역할을 부탁했다. 아주머니들이 싸준 김밥까지 챙겨 나온 터였다. 하지만 그날 그는 또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고 만다.

 

나도 물놀이 갔으니까 즐거울 거 아닙니까. 그래서 선감학원에서 배워갖고 나온 개구리수영을 하면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경찰 같은 사람이 와서 저를 밖으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그 근처 파출소에 가서 조금 앉아 있다가 성동경찰서로 보내졌어요. 왜 그러는지 몰랐어요. 성동경찰서는 사람이 한 삼십 명 모여 있었는데, 버스에 막 잡아 태우더라고요. 한 경찰서마다 할당량이 있었대요. 무조건 그거 맞춰야 되니까 아무나 붙잡아가고 그러는 거지. 그래서 삼청교육대를 가게 된 거예요. B급 분류 받아서.

 

삼청교육대는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사회정화’를 목표로 군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이다. 당시 계엄 사령부는 폭력배가 난무하고 사회질서가 혼란하다며 폭력배 등 사회악이 일소된 새 시대를 만들겠다고 했다. 계엄사령부의 ‘계엄포고 13호’에 따라 군과 경찰이 투입돼 1980년 8월부터 1981년 1월까지 총 6만755명이 법관의 영장 발부 없이 검거됐다(2006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삼청교육대사건 진상조사보고서).

 

‘개전의 정이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불건전한 생활 영위자 중 현행범과 재범 우려자, 사회풍토 문란사범, 사회질서 저해사범 등’이 그 검거대상으로, 검거된 이들은 군·경·검 합심제에 의해 A~D 등급 분류 심사를 받았다. A급은 군사재판 또는 검찰 인계, B급은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 C급은 순화교육 후 사회복귀, D급은 훈방조치가 이뤄졌다. B등급을 받은 한일영 씨와 같은 순화교육 대상자들은 유격체조, 기초 장애물 극복, 공수 접지훈련과 같은 고된 체력훈련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구타와 육체적 고통을 주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1988년 국방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삼청교육대 현장사망자가 52명, 후유증에 의한 사망자가 397명, 정신장애 등의 상해를 입은 인원이 2678명으로 나타났다. 또한 검거된 이들 가운데 35.9%가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과는 달리 전과사실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삼청교육대 훈련 모습 (사진제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생산자 : 경향신문)
 

삼청교육대 가자마자, 처음에 군기 잡느라 그러는 건지 기관총인지 공포탄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총을 막 쏴댔어요. 빨간 모자 쓴 조교들이 우리를 엎드리게 하고선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이리 뛰어 저리 뛰어, 워카발로 밟아가면서 정신없이 막 시켰어요. 거기엔 어린 학생도 있었고 육십 넘은 사람도 있고 그랬는데 똑같이... 근 한 시간 정도를 그러는데 너무 억울한 거죠. 나는 그때 삼청교육대라는 걸 몰랐어요. 나는 벌떡 일어나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왜 죄 없는 사람들을 매질하고 구타를 하냐 하면서 막 따졌어요. 그랬더니 그때부터 찍혀서 쉬는 시간에 나를 열외 시켜서 더 심한 걸 시켰어요. 지옥탕이라고 웅덩이를 둥그렇게 파놓은 게 있어요. 화장실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빙 둘러서 소변보는 장소거든요. 물과 오줌과 진흙으로 범벅돼 있어요. 거기에 사람들을 들어가게 하고는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막 시켜요. 이게 단체로 할 때는 워낙 사람이 많으니까 한번씩 하고선 빨리 나오게끔 해요. 근데 나한테는 십분 내내 거기서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하는 거죠. 조교들이 얼굴을 쑤셔 박아놓고 그걸 시켜요. 그러면 숨을 쉬어야 할 것 아닙니까. 범벅된 게 숨 막히니까 먹게 돼요. 몇 번씩 삼키게 되고.

 

하여튼 그렇게 고달프게 생활하다가 한 달 되니까 절반을 추려내더라고요. 나는 죄 짓고 들어온 게 아니니까 이제 내보내겠지 했는데, 근로봉사로 넘어가더라고요. 근로봉사를 한두 달 있었나, 그랬어요. 근데 진짜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애, 사람이 사는 게 아니야. 선감원에서 무진장 맞고 지옥 같았다 그랬잖아요. 근데 거기는 그 몇 배로. 눈만 뜨면 훈련 받고, 또 남들 쉴 때 쉬지도 못하게 하고, 사람이 살 수가 있나요. 그래서 생각했던 게 탈출을 해야 되겠다.

 

거기서 늘 교육하는 게 있어요. 산에 발목지뢰를 뿌려놓은 게 있대요. 그걸 밟으면 발목 나가가지고 다 죽는다, 그랬어요. 나는 뭘 보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냐면 어느 날부터 소변, 보고 대변보는 걸 숲 안에 2미터까지 들어가서 봐도 된다고 허가가 됐어요. 한번 쓱 들어가서 딱 앉아 있는데, 서 있을 땐 울창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앉아서 이렇게 보니까 산등성이니 뭐니 훤히 보여요. 누가 다니는지도 보이고, 총구가 왔다갔다 움직이는 것도 보였어요. 지네들이 발목지뢰 있으니까 들어가면 죽는다, 이렇게 교육을 해놓고 자기들은 다 왔다갔다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들어가도 괜찮겠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유일한 희망으로, 쉴 때 보면 한 시간에 한 번 정도 멀리서 기적소리가 나요. 은은하게 들렸어요. 군인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휴가 받아서 열차 타고 나갔는데 신탄진역에 가서 누구를 만나고 왔다 그래요. 그래서 저쪽, 소리 나는 쪽이 기차역이구나 했어요. 소리만 들어도 되게 가슴이 아파서 빨리 집에 가야겠다고 했어요.

 

그때 생각은 여기도 죄 짓고 들어온 게 아니니까 탈출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작전을 막 세웠어요. 걸리면 죽는 거예요. 도망간다는 건 여기도 선감학원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 되는 거예요. 지뢰를 밟든 총살을 당하든 잡혀서 맞아 죽든. 그래서 무조건 성공을 해야 되는 거예요. 마침 아침 일찍 나와서 점호 한 번 하고 점심시간까지 같이 다 섞여 있는 날이었어요. 중대, 소대 나누지 않고 다 섞여 있었어요. 점심시간까지는 어쨌든 시간이 있는 거예요. 그때까지는 어쨌든 멀리 도망가야 해요. 낮은 포복, 높은 포복 거기서 배운 거 다 써먹어가지고 도망을 나왔어요. 그거 정말 유용하더라고요.

 

도망쳐서 멀리 산에 올라가서 보니까 제가 부대 세 군데를 통과해서 나왔어요. 오로지 소리 나는 쪽으로 가야지만 길을 안 잃어버린다고 생각해서 그 소리 따라서 신탄진역까지 나왔어요. 보니까 군인들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보이고 해서, 안 되겠더라고요. 밤까지 기다렸어요. 게다가 티켓도 없잖아요. 입은 옷도 군복이고 하니까. 반대 방향으로 낮은 포복으로 가서 간신히 기차에 올라탔어요. 화장실에 있었는데, 기차가 출발할 때 덜커덩 하잖아요. 열차들이 서로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달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아 이제 집에 간다 하면서 꿈에 부풀었어요. 근데 다음역이 되니까 안내방송 나오더라고요. 군부대 사정으로 열차 잠시 서겠다, 불편하시더라도 양해 해달라고. 그 소리 듣자마자 내려가지고 도망을 가야 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발이 떨어지지가 않아요. 조금 있으니까 착착착 링 돌아가는 소리를 내면서 두 명이 오는 거예요. 제발 그냥 돌아가기를 바랐는데, 바랄 걸 바랐어야겠죠. 제일 먼저 뒤지는 데가 화장실일 거 아니겠습니까. 문이 딱 열리는 순간 앞이 깜깜하다고 하는 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니가 한일영이냐 까놓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 군복에다가 올빼미 남바까지 있는데. 끌고 내려가더니 짚차 태워서 헌병대로 갔어요. 나는 삼청교육대로 가는 줄 알고 ‘나는 죽었다’ 차라리 내가 죽자 하면서 혓바닥을 확 깨물었어요.

 

그는 많은 피를 쏟았지만 죽지 않고 살았다. 헌병대 군인들이 그를 치료하고, 흰 쌀밥과 고기반찬을 내왔다. 그는 한 그릇을 먹고 더 먹었다. 삼청교육대에선 조교들에게 찍혀 짬밥을 먹었었다. 다음날 헌병대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그를 불렀다.

 

거기 왜 들어갔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이러저러 하게, 아무 죄 없이 들어갔다 했더니, 자기들이 교육 받은 건 그런 게 아니라고 했어요. 사회에서 엄청난 불량배들이라고 교육받았다는 거예요. 조교들이 그렇게 심하게 하는 것도 그래서라고 하면서 이해하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자기가 나를 생각해서 얘기하는 거라며 선택할 기회를 줬어요. 다시 있던 데로 보내주랴, 아니면 A급으로 분류돼서 재판을 받을 거냐. 나는 진짜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이제 살았다. 괜히 하는 소리만 아니기를 바랐죠. 재판 받겠다고 했어요. 진짜 억울하잖아요, 제가. 그래서 재판 받으면 다 밝혀지고 무죄로 풀려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좁은 생각이었어요. 전두환이 시킨 일을 갖다가 뒤집을 수 없다는 거를 그때는 몰랐어요. 순수한 마음에... 그래서 재판을 받는다고 하고 A급으로 분류되겠다고 했어요.

 

한일영 씨는 B급에서 A급으로 어차피 짓지도 않은 죄, 등급을 올리기로 했다. 그는 그저 이곳을 하루 빨리 벗어나 집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군에서도 한 씨의 죄목을 정하기가 어려웠는지, 그를 민간인이 있는 일반 교도소에 보냈다가 다시 육군단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어렵게 생긴 재판의 기회에서 한일영 씨는 징역 1년형을 선고받는다. 무죄를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한일영 씨는 억울한 마음에 항소하지만, 항소는 기각된다. 그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고, 공주교도소로 이감돼 재판을 받았다. 상고도 기각돼 버리고 그는 1년형을 다 채운 뒤 풀려났다. 하지만 그렇게 끝이 아니었다.

 

내가 기가 막힌 건 그 후에 나와서도 요시찰이라고, 항상 요주의 인물이라고 해서 파출소에서 나왔어요. 프레스니, 선반이니 전에 배운 걸로 시다라도 해보려고 공장에 들어갔었는데, 파출소에서 한 달에 한두 번씩 나오는 거예요. 항상 감시 대상자였어요. 어디 이동할 때마다 신고해야 되고.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직장까지 찾아와서 그러니까. 그때 당시엔 삼청교육 하면, 지금도 나이 먹은 사람들은 그러던데, 전두환이 삼청교육 잘 만들어놨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탓하는 게 아니라, 그때 조중동 언론에서 전두환이한테 너도 나도 충성하느라고 그렇게 했으니까. 뉴스 틀면 그렇게 나왔으니까 국민들이 거기 세뇌 당해가지고 그런 게 많죠. 실제로는 그게 아닌데. 죄 없는 사람들 끌고 가서 자기네 정치하는 데 반기드는 사람들을 저기 하는 목적으로 쓴 거 같아요. 과거사진상규명위에서도 밝혔지만 전두환이 대통령 되려는 목적으로 자기가 잘한다는 걸 뭔가 보여줘야 하니까 우리를 희생시킨 거예요. 광주 일도 있었잖아요. 이슈는 이슈로 막아야 된다는 차원에서 싹 덮어버린 거죠. 광주 사태 한창 말 많고 할 때 삼청교육으로 싹 덮어버렸어요. 뉴스 틀면 맨날 우리들 삼청교육대 얘기만 나오고.

 

어찌됐든 이후에 2차, 3차 피해가 계속 되는 건데, 직장 들어가도 금방 쫓겨나오고... 직장생활이라는 걸 아주 할 수 없게 했어요.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무슨 나랑 철천지원수라도 진 것처럼 그렇게 해버리더라고요. 그 후로는 내가 얘기를 안 했어요. 가슴 아픈 일이 너무 많고 해서 얘기를 안 해요. 얘기를 하면 또 날 손가락질할 사람도 많고 해서 얘기를 안 해요.

 

정상적으로 일할 수 없게 조직적으로 다 막아놓고 낙인을 찍어놓은 거죠. 배운 것도 없고 한데, 취직은 할 수 없고. 나이도 먹고 돈은 벌어야 하고. 한동안 노가다를 하기도 했어요. 질통 지고 5층, 6층 다 다니고 했는데 무릎이 시큰거려서 도저히 하지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보니까 사람이 자포자기가 되더라고요. 내가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걸 느끼고, 국가에 대한 원망이라든가 그런 게 많이 있는 거죠. 내가 자살시도도 몇 번씩 했어요. 모진 게 목숨이라고, 선감학원에서도 도망 나와서 살았고, 삼청교육대에서도 나와서 살았잖아요. 살았는데, 나는 버텨 나가지 못하겠고... 그래서 자살시도 했다가 실패하고, 막 살게 되고 그랬을 때가 있었어요. 살아가는 자체가, 삶 자체가 너무 억울하고...

 

지난 5월 27일 선감도에서 열린 선감학원 희생자 추모제에서 원생들이 암매장된 터에 이들을 추모하는 종이인형이 세워져 있다.

 

다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면, 기억과 원망은 사치였다. 무엇이든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선감학원 출신인 친구와 함께 생활하며 넝마주이를 하며 지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마음과 잘 살고 싶다는 마음 사이를 여전히 오가며, 때때로 느끼게 되는 망각이라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냈다.

 

일부러 굳이 잊어버리려고 노력한 건 솔직히 없어요. 국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너네는 빨리 잊어버려라.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빈곤하게 만들어놨어요. 하루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한테는 마음의 상처 이런 거 사치예요. 살아가는 자체가 고달프잖아요.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 매진하다 보면 다른 건 다 잊어져요. 국가가 그건 기가 막히게 해놨어. 아주 빈곤하게 만들어서 이런 거 저런 거 생각 못하게 한 거예요. 먹고 살기 바쁘고 거기 집중해 살다보니까 자동적으로 잊혀지잖아요.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까, 나는?

 

삼청교육대 갔다가 징역까지 살고 나왔을 때가 80년대고 내가 58년생이니까 20대 초반이죠. 아동이었을 때는 선감학교에서 망쳐 버렸고, 성인이 되어서는 삼청교육 때문에, 또 거기서 도망 나왔다는 이유로 징역 1년까지 받아서 나왔던 거고. 삼청교육대 나와서는 삼청교육대 갔다왔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혀서 어디 취직도 못하고. 취직도 못해서 넝마 하고 사는 것 자체가 어디 정상적인 삶입니까.

 

그는 오랫동안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냈다. 가진 게 없고,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의 삶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건, 대전으로 거주지를 옮겨 지내던 중 교회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부터다.

 

대전에서 처를 만나고, 처로 인해서 새 삶을 얻어서 산 거예요. 우리 처는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알아요. 사람이 그런 게 있잖아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하는 것처럼... 속에 쌓인 게 있는데, 누군가한테는 억울한 거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얘기할 데가 없는 거죠. 누군가 우리 약자의 편에서 대변해준다거나 목소리 내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사람이 없더라고요. 다른 사람한테 얘기한 건 우리 처가 처음이죠. 많이 망설였는데, 처하고 뉴스 같은 거 같이 보다 보면 어디서 인권 학대 했다던가 그런 게 나오잖아요. 그런 거 보다 보면 자꾸 기억이 나요. 나는 더 심한 거를 당했는데 싶고.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처하고 사니까 행복해서 그런가, 자꾸 생각이 나더라고요.

 

뉴스 보다가 얼떨결에 옛날이야기가 나왔는데, 처가 계속 꼬치꼬치 묻고 집요하더라고요. 그러다보니까 첨엔 여기까지 말했다가 다음엔 여기까지 말했다가 삼청교육대까지 얘기하고, 결국 다 얘기하게 됐죠. 처음엔 많이 울었어요. 믿기지도 않았겠지. 그러더니 나중에는 처가 애들한테 이것도 교육이다, 너희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희가 알아야 된다 하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당신이 무슨 죄 짓고 갔냐? 당신이 죄를 짓고 갔다고 하면 나는 애들한테 얘기 못 한다, 솔직히. 그렇지만 당신은 피해자다. 그렇기 때문에 애들도 알아야 된다, 그랬어요.

 

지금 진상규명 활동 하는 게 잘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받은 상처에 대해 배상이 이뤄져서 돈을 받고 우리 애들이 그 돈을 쓴다고 생각하면, 더 비참해할지도 모르겠어요. 애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빠의 어린 시절부터 젊은 시절 그리고 지금까지 걸린 일이잖아요. 한동안 삼청교육이니 선감학원이니 다 잊고 살았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과거사 청산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이게 국가에서 지시 사항이 있으니까 다 따라했던 거고, 어찌됐든 실타래는 국가가 풀어야 하는 거죠. 거기에 맞는 배상이라고 할까? 그런 걸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선감학원 문제도 그렇고 삼청교육대 문제도. 돈을 바라고 그런 것보다 마음의 상처를 씻는 길일 수 있어요. 이미 상처는 받은 거지만, 사고 처리에서도 보면 사고 친 사람이 합의 좀 보자 하면서 사과하고 돈 가지고 오고 그렇게 합의 보면서 끝내잖아요. 말로만 해서 끝낸다는 건 별 의미도 없는 거고. 국가가 잘못한 거를 시인하고, 제대로 사과를 하고. 국가가 잘못한 게 있다면 국고가 텅텅 비더라도 해결하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정신으로 나가야 하는데, (국가는) 아주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려고 했던 것 같아요.

 

지난 정부의 일이지만 현 정부에서 국가 차원에서 배상을 하든 어떻게 하든, 우리 상처를 완전히 아물게 해달라는 거예요. 혹시 백의 하나라도 국가에서 피해자들을 위해서 양심껏 과거사를 청산한다면, 교과서에도 올리고 할 거 아닙니까? 청산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역사에 올리고 그런 건 챙피한 거 아닙니까. 국가를 위해서도 그렇고 앞으로 배워야 할 애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꼭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꼭 해결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토대장정'이 마무리되는 날인 지난 9월 27일, 한일영 씨(사진 왼쪽)도 이 자리에 함께해 선감학원 피해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한일영 씨를 다시 만난 건 청와대 앞에서였다. 그날은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이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부산에서 출발해 22일간의 도보 행진 끝에 서울에 도착한 날이었다. 한일영 씨는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 모임 속에 있었다. 행진 일정에 함께하기 위해 야간 근무를 조정하고 왔다고 했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과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들이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하라’는 내용의 깃발을 들고 광화문을 지나 청와대까지 뒤섞여 행진했다. 선감학원을 탈출한 소년들과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여전히 다독여지지 않은 상처를 안고,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죽기 살기로 탈출해, 지금껏 살아온 ‘소년 한일영’은 이제 예순을 앞두고 있다. 울분과 억울함에 짓눌려 살아오던 그가 이제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세상을 향해 말을 건다. 우리가 가진 기억이라는 게, 어차피 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한평생 버리지 못한 것이라면, 이 따가운 기억과 함께 살 수 있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 게 더 나은 삶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청하고 국가의 ‘사과’를 요청한다. 우리가 이 소년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 소년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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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미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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