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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모든 사람의 평등을 믿는다” 장애난민 미르의 아버지, 칼리드
파키스탄 탄압받던 발로치 민족독립운동가에서 난민, 그리고 장애 부모로
“거창한 이유는 없다. 나는 다만 모두 동의한 가치가 왜 실현되지 않는지 물을 뿐”
등록일 [ 2017년11월16일 18시39분 ]

큰아들의 출산을 불과 며칠 앞두고, 아이의 아버지는 파키스탄 군인의 손에 붙잡혀 눈이 가려진 채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고문을 당했다. 고문하던 자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그에게 술과 마약을 먹였다. 혹시 모를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아내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남편을 찾아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남편의 친척만 일곱 명이 파키스탄군에 의해 살해당했고, 사촌 2명은 실종되었다.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절망의 시간이었다. 결국, 아내는 남편을 찾지 못한 채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태어난 지 3일 후 심한 황달 증세를 보였고, 미진한 조치로 인해 뇌병변 장애를 갖게 되었다. 아이의 이름은 미르, 우르두어로 ‘지도자'라는 뜻이다.

 

학교 셔틀버스에서 미르(가운데)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 칼리드(아래).
 

미르의 아버지 칼리드는 살아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파키스탄 정부에 대항해 발로치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칼리드는 발로치민족운동(Baloch National Movement, 아래 BNM)에서 활동했다. 칼리드의 아버지, 그러니까 미르의 할아버지는 부유한 사업가였다. 덕분에 칼리드는 말레이시아에서 대학을 다니고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여행을 할수록, 그의 시선은 자신의 고향을 향해 깊어졌다. ‘우리는 왜 이렇게 못 살까.’ 의문을 따라가던 그는 발로치 민족을 향한 차별을 마주 보게 되었다.

 

"발로치스탄에 매장된 자원으로 파키스탄 경제가 굴러가는데, 정작 발로치인들은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 발로치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일자리를 구하기조차 쉽지 않다. 미르가 장애인이 된 것도, 발로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발로치스탄에 제대로 된 병원이 없었고, 큰 병원은 비쌌다."

 

파키스탄의 탄압은 강경했다. 발로치 민족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사라졌다. 부당한 죽음은 칼리드와 다른 발로치인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2006년 8월 31일, 파키스탄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했던 칼리드는 왼쪽 허벅지에 정부군이 쏜 총을 세 발이나 맞았다.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지만, 아직도 불편하다.

 

파키스탄 경찰은 시위조사 최초사건보고서에서 집회참여를 독려한 외부 사람으로 칼리드의 이름을 거론했고, 그에 대한 체포 명령도 떨어졌다. 그는 결국 붙잡혀 고문을 당해야 했다. 고문에서 풀려난 이후, 그는 가명을 쓰고 거처를 수시로 옮겼다. 그의 가족들 역시 정보원들을 피해 ‘개구리처럼' 친척 집을 전전했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곧 벽에 부딪혔다.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자기 생각을 표현할 줄 아는, 총명한 발로치인들’을 ‘솎아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하면서, 나한테 ‘독립운동을 그만하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뭘 잘못했지? 나는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아무 죄도 없이 ‘발로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무시당하고, 죽었다. 그만둘 수 없었다."

 

한국에서도 발로치스탄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칼리드. 사진제공 칼리드

 

칼리드는 언어 감각이 좋았다. 모어인 우르두어는 물론, 대학을 다녔던 말레이어와 아랍어에 영어까지 그는 빠르게 습득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그는 한국어능력시험을 준비했다.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그는 한국에 들어왔다. 합법적 입국을 위해 비자를 수개월씩 기다려야 하는 유럽이나 북미보다는 빠르게 몸을 옮길 수 있는 한국이 적격이었다. 그렇게 그는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그러면서도 자신이 믿는 세계를 떠나지 않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그의 한국 방문은 두 번째였다. 2001년, 그는 부산 사상구에서 취업해 1년간 일을 한 적이 있었다. 2009년, 두 번째 입국 후 그가 일한 곳은 경남의 어느 어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국에 돈을 벌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곧 일을 그만두고 난민신청을 위해 부산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았다.

 

파키스탄에서 늘 등 바로 뒤에서 죽음의 손끝을 느껴왔기에, 그는 난민으로 쉽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11년, 신청 후 2년이 지나고서야 법무부는 그의 난민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정상적으로' 발급받은 여권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파키스탄에서 겪은 일 역시 진위를 의심받았다.

 

"그때는 내가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다. 난민신청소송을 진행했던 변호사와의 의사소통에서 문제가 많았고, 이 때문에 나의 진술을 ‘신빙성이 없다'라고 했다. 여권은 내가 민족운동을 하기 전에 만든 것이었고, BNM 활동을 할 때는 가명을 사용했다. 여권을 발급받아 한국에 무사히 입국하면 내가 당한 일이 없어지나?"

 

그는 곧 항소를 제기했다. 이번에는 우르두어와 한국어를 모두 잘하는 인도인 친구의 통역이 있었다. 그리고 난민신청 후 5년이 지난 2014년, 드디어 그는 난민 인정 증명서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5년은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난민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한국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 도움을 요청할 생각을 못 했다. 5년의 세월을 그는 홀로 버텨야 했다. 말도, 문화도 다른 한국에서 5년간 매일의 불안감과 싸워야 했다. 그 사이에 당뇨가 생겼고, 까맣던 머리도 하얗게 세어 버렸다.

 

칼리드가 난민으로 인정되고 이듬해 4월, 칼리드의 아내인 나디아와 큰아들 미르, 둘째 딸 자바드가 입국했다. 그가 가장 기뻤던 것은 미르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 왔을 때, 미르는 9살이었다. 그래서 미르는 아직도 파키스탄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파키스탄에서의 삶이 어땠는지 물었을 때, 미르는 어두운 얼굴 위로 뿔을 만들더니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미르에게도 발로치인들의 죽음은 생생한 경험이었다. 친척과 이웃들의 죽음이 교육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보다 더욱 가까이 있는 곳이었다.

 

발로치스탄에 살 때, 미르는 집 바깥으로 거의 나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근육이 퇴행해 점점 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파키스탄에는 농맹학교 외에는 특수학교가 없어,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온 후, 미르는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다. 학교 이야기를 물었을 때 미르는 팔을 크게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나디아는 그게 ‘너무 행복하다’라는 표현이라고 했다. 미르는 다리에도 근육이 붙어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곧잘 걷고 뛴다. 얼마 전에는 부산 장애인학생체육대회에서 달리기와 태권도로 각각 금메달, 은메달을 받아오기도 했다.

 

미르가 부산 장애학생체육대회에서 받은 메달들이 방 한쪽 벽면에 걸려있다.
 

난민 인정 이후 한국에서 자신의 자리를 안정적으로 잡은 것 같아 보이지만, 칼리드의 투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나디아는 1월 출산 예정이다. 그가 병원에 입원하고 나면, 미르의 등하교와 신변처리는 칼리드의 몫이 된다. 미르는 걸을 수는 있지만 혼자서 밥을 먹거나, 씻거나, 화장실에는 가지 못한다. 지적장애도 있기 때문에 학교 셔틀버스를 타러 가는 길까지 혼자 갈 수도 없다. 미르 말고도 둘 더 있는 아이들과 출산 직후 아내 역시 보살펴야 한다. 의지할 가족이나 친구가 없는 칼리드는 이 모든 일을 혼자 해야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길을 찾았고, 미르가 장애등급을 받으면 적어도 등하교 지원은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칼리드는 미르의 장애인 등록 신청을 위해 장애진단서까지 받았다. 의사는 뇌병변 1급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미르는 등록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 사상구청은 장애인복지법 제32조의2 제1항에 따라 장애등록 허용자격이 재외국민, 외국국적동포, 한국영주권자, 그리고 결혼이민자만으로 구분되고 있기 때문에 난민인 미르는 등록 자격이 없다고 했다.

 

칼리드가 난민으로 인정되었을 때, 그가 받은 ‘난민 인정자 처우 안내문'에는 “난민 인정자는 대한민국 국민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을 받음”이라고 써있었다. 실제로 칼리드는 고문 후유증으로 일을 할 수 없어 기초생활보장 수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복지법은 왜인지 ‘사회보장'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칼리드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에서 다시 한번 더 소송을 진행하게 되었다. 미르가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은 자신이 ‘발로치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칼리드는 또다시 난민이라는 이유로 미르가 차별받게 둘 수 없었다.

 


 

"첫 재판에서 놀랍게도 법원은 사상구의 말이 맞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분명 한국 법에 (난민이 국민과 동등한 사회보장을 받는다고) 되어 있는데, 왜 정부 기관이 자기 법을 안 지키나? 그래서 항소했고, 법원은 미르도 장애인등록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난민 인정자는 교육기본법상 난민 인정자 적용에 대한 별도의 규정 없이도 난민법 제33조에 의하여 대한민국 국민과 동일하게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받고 있으므로 난민법 제30조, 제31조를 일반규정 또는 선언적 규정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장애인복지법 제32조의 2는 사회보장기본법 제8조에 규정된 ‘관계 법령'에 해당하므로 위 규정에도 불구하고 난민 인정자는 난민법 제30조, 제31조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과 동일하게 장애인 등록을 할 수 있다고 해석함이 타당하다. (부산고등법원 2017.10.27. 판결문 중)”

 

*난민법 제30조(난민인정자의 처우) ① 대한민국에 체류하는 난민 인정자는 다른 법률에도 불구하고 난민협약에 따른 처우를 받는다.

*난민법 제31조(사회보장) 난민으로 인정되어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사회보장기본법」 제8조 등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민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을 받는다.

 

2심에서 승소했지만, 미르가 바로 장애인 등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복지부 관계자는 “부산고법에서 장애인등록거부 취소판결은 났지만 아직 장애인등록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라며 “이후 미르를 지원할 방법을 사상구에서 관례에 따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부산고법의 판결이 “사상구의 행정조치에 대한 판결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난민법 30조와 31조가 ‘선언적 규정이 아니’라고 법원이 판단했다고 해서 그 즉시 모든 사회보장법에 적용되는 것은 어렵다”라며 “어쨌든 예산이 드는 문제이고, 어느 국가든 자국민을 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사회적 합의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현재 난민의 장애인등록을 가능케 하는 장애인복지법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가 있으므로, 이 법안이 통과된 후에야 ‘합법적인’ 등록이 가능하다고도 말했다. 법원은 장애인 등록이 미르의 권리라고 했지만, 이 판단이 정부에 온전히 가닿고 있지는 않다. 미르의 권리는 판결문 안에 갇힌 채 유보되어 있다.

 

칼리드의 지난 15년은 차별과 부당함에 저항하는 궤적이었다. 파키스탄에서는 ‘2등 시민’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았고, 난민 심사를 받을 때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거짓말쟁이’라는 의심을 받아야 했다. 오롯한 혼자의 힘으로 난민 인정을 받고 나서도, ‘난민’에 대한 차별이 아들에게 이어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어지는 언덕에 숨 가빠하지 않았다. 자신의 싸움에 대한 거창한 수식도 없다. 그는 그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을 발굴하기 위해 부조리의 땅을 묵묵히 파고들어 갈 뿐이다.

 

"유엔헌장에서는 ‘모든 사람은 인종, 종교, 문화, 국적에 상관없이 평등하다’고 말한다. 파키스탄도, 한국도, 여기에 동의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왜 그렇지 못한가? 나는 그저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칼리드’라는 이름의 뜻은 ‘영원’이다. 이름처럼 그는 끝없이 솟아나는 저항의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정의’에 대한 칼리드의 신뢰가 그저 낙관적 희망으로 흩어져버리지 않는 땅이, 한국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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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별 기자 hbchoi1216@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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