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12월12일tue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뷰 펼침
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어떤 사람의 유년, 선감학원에서 형제복지원까지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⑥-1
김창호 씨의 이야기, 첫번째
등록일 [ 2017년11월29일 10시37분 ]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김창호는 2017년 6월 국회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증언대회에 참석했다가 선감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선감학원이라면 김창호가 형제복지원에 들어가기 전에 4년 동안 있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선감학원을 나오던 1980년 이후 한 번도 입 밖으로 말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김창호는 어렵게 입을 뗐다. “나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37년 만이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이자 선감학원의 피해생존자인 그를 만나기 위해 합천으로 갔다. 터미널로 마중 나온 김창호는 키가 작고 마른 체구의 사내였다. 그의 옆에는 트럭을 운전해 함께 온 사내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김창호는 그를 ‘공동체 식구’라고 소개했다. 시골사람들답게 두 사람 모두 얼굴이 까맸다. 무뚝뚝한 두 사내와 읍내에서 냉면을 먹었다. “어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인가요?” 물었더니 김창호가 “출소자들이 함께 삽니다”하고 대답했다.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내가 조금 놀라자, 그가 동료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출소자 아닙니다”라고 했고, 동료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트럭을 타고 30분 쯤 달려 도착한 그들의 보금자리는 생각보다 더 외진 산골짜기에 있었다. 한 집에 남자 여럿이 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열여섯 가구가 각자의 형편대로 집을 짓고 산다고 했다. 완만하게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따라 드문드문 집들이 나타났는데, 컨테이너 한 칸짜리 집도 있었고, 제법 근사한 마당이 있는 집도 있었다. 커피 한 잔 하자며 트럭이 우리를 내려준 곳은 그 길의 끝에 있는 어떤 가건물 앞이었다. 비닐하우스에 차광막을 덮어씌운 집이었다.

 

마을회관 같은 것이려니, 별 생각 없이 들어섰다가 깜짝 놀랐다. 산골짜기에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수준급의 실력자가 직접 그린 그림과 공들여 만든 소품들로 세련되게 꾸민 ‘진짜’ 카페였다. 어안이 벙벙해져 잠시 '얼음'이 되었다. 서울말을 쓰는 중년의 여성이 상냥하게 나를 맞이했다. 그녀가 핸드 드립으로 내려준 커피를 받아 마시면서도 연신 눈알을 굴리며 카페를 훑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영화 속 주인공이 환상의 공간 속에 들어간 것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김창호의 동료가 “종교가 있느냐” 묻는 순간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결국 그것이었나.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가 카페의 여성에게 ‘당신이 얘기 좀 해봐’ 하는 것 같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긴장했다. 그녀가 웃으며 다가와 “결혼했냐” 물었다. 했다고 대답하자, 이번엔 “아이가 있느냐” 물었고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 아직은 괜찮아요.” 그녀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들이 합세해 본격적으로 전도를 해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던 순간이어서, 그녀의 말에 나는 또 한 번 멍해졌다.


“내 한 몸 건강해서 힘껏 일하면 모든 게 내 뜻대로 될 때, 그땐 신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 말엔 어딘가 깊은 슬픔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나는 대번에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커피 값을 냈더니 그녀가 책을 한 권 주었다. 이 공동체의 대표가 쓴 <오두막>이라는 책이었는데, 책 속엔 김창호에 대한 내용도 있다며 그녀가 책장을 열어 보여주었다. 김창호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오두막. 그것이 이 공동체의 이름이었다. 영어로 Shelter, 피난처라는 뜻이라고 했다.

 

김창호 씨가 살고 있는 공동체 내에 있는 작은 카페 안의 풍경.


인터뷰를 하기 위해 카페를 나와 ‘성전’(예배당으로 쓰는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몇 명의 젊은 남성과 마주쳤다. 김창호는 그들에게 지적 장애가 있으며, 카페에서 본 여성은 저 남성 중 한 명의 어머니라고 일러주었다.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했다. 성전에 도착하니 공동체의 대표인 목사님 부부가 아까의 그 장애 청년들과 함께 성전을 수리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나른한, 그러나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낯선 시골 풍경이었다.
 

김창호는 이 공동체에 컨테이너 집을 짓고 산다.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의 진주에 집이 따로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합천 공동체에서 보낸다고 했다. 인터뷰는 합천 공동체에서 한 차례, 진주 그의 집에서 또 한 차례 이루어졌다. 


*  *  *


김창호는 고아였다. 몇 군데의 보육원을 거쳐 선감학원으로 보내졌다. 김창호가 선감학원에 들어간 나이는 아홉 살로 추정된다. 선감학원에 대한 기억은 많지도 않고 또렷하지도 않다. ‘아홉 살인가 열 살’에 들어갔고, ‘열두 살인가 열세 살’에 나왔고, ‘4년 정도’ 있었다. 그가 숫자를 말하는 방식은 대개 이런 식이었고, 아귀가 잘 맞지 않았으며, 두 번의 인터뷰 과정에서 전혀 다른 숫자로 바뀌기도 했다. 특히 나이에 대한 그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스물 몇 살 때’ 주민등록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출생 연도에 대한 기록을 처음 받아 보았다는 그는 자신의 출생연도를 여전히 자신과 분리된 어떤 것처럼 말했다. “내가 1968년생인 건 어떻게 아느냐면” 같은 표현은 그 자체로도 매우 어색하지만, 더욱 이상한 점은 그가 출생연도를 알고 난 후에도 알기 전의 나이를 거꾸로 계산해 “그때 내가 스무 살이었는데”라고 말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때의 나이를 잘 모른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서류 한 장을 들고 와서는 “내가 당신의 아들이다”라고 주장하는 청년 앞에 선 어떤 남자처럼. 순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도리도 없는 어떤 존재를 대하듯이.
 

그것은 김창호가 자신의 형제복지원 번호 ‘80-376’을 말할 때와는 분명 달랐다. 김창호는 선감학원에서 나온 후 몇 개월 뒤 형제원에 잡혀갔다. 80-376은 형제복지원이 1980년에 입소한 원생들에게 붙이는 일련번호였다. 김창호는 그 숫자의 탄생을 ‘겪었고’ 그것과 함께 7년을 ‘살았다’. 그런 그는 선감학원에 대해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인터뷰 내내 난색을 표하면서도, “선감학원은 1980년에 폐쇄되었고(공식적인 기록으로 선감학원은 1982년에 폐쇄되었다.) 내가 그 섬을 나온 것도 그 해였다”는 사실만큼은 선명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80-376이라는 번호가 마치 그가 선감학원에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유일한 증표 같았다.

 

선감학원


“처음부터 가족이 없었어요. 세 살 때인가, 어떤 아동보육원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2년 정도 있다가 성심보육원으로 갔습니다. 그게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거기서 내가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우니까 선감학원으로 전원 보냈어요. 아홉 살인가 열 살인가, 초등학교 들어갔을 때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감학원에서 4년 정도 살다가 폐쇄될 때 나왔습니다. 그때 나이는 잘 모르겠습니다. 집사람 통해서 선감학원에 대한 기사를 찾아 봤는데, 1982년에 폐쇄되었다고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제 기억엔 1980년입니다. 제가 폐쇄될 때 나왔거든요. 그리고 그 해에 바로 형제복지원으로 잡혀갔습니다. 거기서 제 번호가 80-376이었습니다. 다른 건 다 헷갈려도 그거 하나는 확실하거든요.”

 

선감학원 내 원생들이 일을 하던 축사. 1976년 자료사진. (사진제공 :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노상 엎드려뻗쳐 해서 빳따를 맞았죠. 하도 맞으니까 멍이 들어도 면역이 돼서 아픈 줄도 몰랐습니다. 나처럼 단체생활을 많이 하다보면 금방 꿈이 깨집니다. 빨리 꿈을 깨야 합니다. 보육원도 단체생활이거든요. 단체생활은 다 자기하기 나름입니다. 어떻게 하면 맞고 어떻게 하면 안 맞는지, 돌아가는 거 보면서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개 맞듯이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때라 아이들하고 놀았던 기억이 더 많이 납니다. 방에서 아이들끼리 장난치고 그랬던 거. 여름에는 저수지에 가서 놀았습니다. 바다에 물이 빠지면 바지락도 잡으러 다녔습니다. 제일 기억나는 건 담배를 배웠던 거. 중학생 나이의 형들이 불러서는 “피워 봐” 했는데,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때리니까 안 피울 수 없습니다. 처음엔 괴로워서 죽는 줄 알았는데 나중엔 익숙해져서 꽁초를 주워서 폈습니다. 선감도엔 눈이 많이 왔습니다. 눈 오면 우리가 빗자루 들고 나가서 마을까지 한참 눈을 쓸면서 갔습니다. 그렇게 마을에 갈 때마다 꽁초를 주워서 폈습니다.”


“보육원에서 생활할 땐 그래도 자유가 있었습니다. 선감학원도 자유시간이 없었던 건 아닌데, 일을 많이 시켰습니다. 누에, 염전, 농사, 모내기 같은 일을 했습니다. 누에를 할 때가 특히 힘들었습니다. 뽕잎이 떨어지면 밤이고 새벽이고 얄짤 없었습니다. 언제든 따러 갑니다. 그땐 그게 뭐하는 건지도 몰랐습니다. 누에가 고치가 된다는 것도 몰랐고, 거기서 실을 뽑는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시키는 일만 했을 뿐입니다.”


“먹는 게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그래도 마지막 2-3년은 좀 괜찮아졌는데 선감학원은 정말 너무 심했었습니다. 다른 보육원은 후원물품으로 과자 같은 것도 들어왔었는데, 선감학원은 섬이라 그랬는지 그런 게 일체 없었습니다.”


“‘보육원’이라는 글자 들어간 곳과 그렇지 않은 데가 좀 다르구나. ‘선감학원’, ‘형제원’ 이런 데는 다 ‘원’자만 들어가죠. ‘아동보육원’, ‘성심보육원’ 이런 데는 다 ‘보육원’ 자가 들어가잖아요. ‘보육원’자 안 들어간 데는 다 이상하죠. 내가 커서 가만 따져보니까 그걸 느꼈어요.”


그는 선감학원을 설명하기 위해 형제복지원을 비교하기도 하고, 일반 보육원을 설명할 땐 “선감학원 보단 좀 낫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곳들은 모두 격리와 통제, 폭력에 의해 운영되는 곳이었다. 김창호에게 선감학원은 어느 날 갑자기 빨려 들어가듯 떨어진 4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그가 자란 세상의 연장, ‘말썽을 피워’ 가게 된 ‘좀 다른’ 곳이었다.


탈출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바닷물이 빠질 때 친구들과 나가서 갯벌을 바라본 적은 있었다. 김창호는 갯벌이 무서웠다. 썰물이 되어 갯벌이 훤히 드러날 때에도 물이 빠지지 않는 곳(갯골)이 있었다. 그게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수영을 전혀 못했고, 물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그러니 선감학원이 폐쇄되지 않았다면 그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을 것이다. 해방의 날은 갑자기 찾아왔다. ‘형제복지원 때와는 딴판으로 조용하게’ 왔다.  

 

경기도 관계자 선감학원 시찰 모습. 이날에만 원생들에게 특별히 말끔한 옷을 차려입혔다. 1976년 자료사진. (사진제공 :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선감학원 폐쇄


“그 섬을 나오는 날에도 선감학원이 폐쇄된다는 건 몰랐습니다. 어느 날 유람선 같은 큰 배를 타고 나왔습니다. 그 배에 150명에서 200명 정도 탔던 것 같습니다. 경기도청에 도착하니까 도청 직원 같은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선감학원은 폐쇄되고 너희는 고아원으로 뿔뿔이 흩어질 거다. 고아원에서 우리를 데려가려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원생들의 이름을 한명씩 불렀습니다.”


“평택에 있는 꽃동산 보육원으로 갔습니다. 두세 명이 같이 갔어요. 우리는 붕 떠 있었습니다. 섬 바깥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습니다. 보육원 원생이 80명 정도 됐을까. 한 방에 일곱 명 정도 있었어요. 선감학원엔 남자들밖에 없었는데 거기에는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선감도에 비하면 천국이었습니다. 토요일마다 미군들이 와서 과자를 나눠줬습니다. 형제원에서처럼 반납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먹게 해줬습니다.”


지옥에서 돌아온 김창호에겐 원생들 몫의 과자를 빼앗지 않고 먹게 해주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었다. 그러나 천국에서 소년이 한 일이란 동네를 돌아다니며 고철을 줍는 일이었다. 김창호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선감학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같은 학년 아이들과 수준이 맞지 않아서”라고 기억했다. “보육원에서 학교에 보내주지 않은 건가요?”하고 내가 묻자, 그가 “그런 건 나는 모르죠”라고 대답했다. “보내달라고 말해본 적 있나요?” 하고 다시 묻자, 그가 대번에 손사래를 치며 “아니오” 했다. 그 세계는 그런 걸 묻거나 요구하는 곳이 아니라는 듯 “안 보내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합니다” 했다.


“보육원을 계속 도망쳤습니다. 밖에 나가면 뭐 좋은 거라도 있을까 싶어서. 나는 고아원, 선감학원, 이런 데만 갇혀 살았으니까 바깥을 잘 모르잖아요. 안 겪어본 사람들은 그런 마음 모릅니다. 나가면 반겨줄 사람도 없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전혀 개념이 없습니다. 그냥 평택역이나 송탄역을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잠은 대합실에서 자고요. 가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음료수 하나씩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하루 이틀 만에 잡혔어요. 보육원 차가 와서 우릴 잡아갔습니다. 선감학원처럼 심하게 때리진 않으니까 계속 도망을 치는 겁니다. 세 번 도망치고 잡혔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돈을 모아서 기차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깡통을 줍기 시작했습니다. 만이천원인가, 천이백원인가, 깡통을 팔아서 기차표를 샀습니다. 어린 생각에 큰 도시로 가야 안 잡힐 것 같았어요. 그런데 왠지 서울에 가면 또 잡힐 것 같아서, 제일 멀리 간다고 간 곳이 부산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


“부산에 도착해서 자갈치 시장으로 갔습니다. 거기 가면 일자리가 있을까 했습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부랑인 선도’라고 쓰인 차에 붙잡혔습니다. 형제원 차였는데 냉동차였습니다. 형제원은 시장에서 팔고 버리는 생선대가리, 시래기 같은 것들을 수거해서 원생들 먹는 반찬하고 국을 만들었습니다. 그 차에 우리가 걸린 겁니다. 생선대가리들하고 같이 차에 실려서 바로 끌려갔습니다.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아, 여긴 심상치 않은 곳이다!’ 하는 생각이 딱 들었습니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습니다. 옷을 싹 갈아입고 번호를 붙여주고 죄수처럼 사진을 찍었습니다. 내 번호는 80-376번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눈칫밥 먹으면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어도 형제원은 감당이 안 됐습니다. 갓난아기부터 팔십 먹은 노인까지 있었어요. 그때 한 이삼천 명 있었나. 여긴 도대체 뭐하는 곳이지? 앞이 캄캄했습니다.”


열세 살의 소년 앞에 또다시 지옥문이 열린 순간이었다. 한 번을 겪어도 엄청난 일이 한 사람의 인생 위에 두 번 일어난다는 건, 부모 없는 가난한 소년이 살아내야 했던 세계가 그만큼 위험했음을 말해준다. 부산 형제복지원은 박인근 원장이 운영한 국내 최대 부랑아·부랑인 수용소였다. 경찰과 공무원이 합동으로 ‘부랑인’을 단속했을 뿐 아니라 형제복지원 자체적으로도 단속을 실시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선감학원이 ‘소년’을 대상으로 한 수용소였던 것과 달리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수용되어 있었던 형제복지원은 말 그대로 ‘형기 없는 감옥’이었다. 김창호의 ‘수감 생활’은 이 감옥이 폐쇄될 때야 끝났다.

 

형제복지원이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부랑아를 수용하고 있는 장면. (사진출처 : 형제복지원 화보집)


김창호에게는 이 감옥을 벗어날 기회가 있었다. 형제원에 들어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 부산 노포동에 있던 ‘희락원’(보육원)으로 전원을 가게 된 일이었다. 보육원에선 초등학교도 보내주었는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싸움이 붙었던 날, 보육원에 돌아와 담배를 피다 걸렸고, 이 일로 김창호는 다시 형제원으로 돌려보내졌다.


김창호는 인터뷰 내내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슬펐다’거나 ‘무서웠다’ 같은 표현도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표정이나 뉘앙스로도 그의 마음은 잘 읽히지 않았다. 지옥을 벗어날 기회를 놓쳐버린 이 일에 대해 말할 때도 그랬다. 그의 마음이 궁금해서 “그때 희락원에 계속 있었다면 많은 게 달라졌겠네요” 하자, 그가 대번에 “당연하죠. 당연하죠. 학교도 다녔을 테고”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다시, “그럼 그때 사고 친 걸 후회하지 않으세요?” 하고 물었다. 나는 소년이 놓쳐버린, 그러나 애타게 잡고 싶었던 어떤 꿈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오. 후회는 안 합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마음이 잡힐 것 같았는데 금세 놓쳐버린 느낌이었다.
“나랑은 안 맞았습니다.”  
이 말을 하는 김창호의 입안에 쓴 것이 가득한 표정이었으므로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면 나는 아마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답답하게도 나는 ‘전혀’ 그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이 어떻게 맞지 않으면 지옥을 벗어날 기회를 놓쳐버리고도 후회하지 않게 되나. 한참 동안 말이 없는 그에게 기어이 물었다. 

"뭐가 그렇게 안 맞았습니까."

김창호가 내 눈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고아원에서 왔다고 하면 많이 무시했습니다. 나는 누가 나를 무시하면 못 참습니다.”
나는 조금 아득해졌다. 질문하면 할수록 그가 살아온 세상에 대해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만 드러났다. 생각해보면 대단히 특별한 말이 아닌데, (드라마나 영화에 많이 나오니까!) 그는 순순히 열어 보여주지를 않고, 나는 기어이 그것을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보고 만 그의 상처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고, 그는 그 상처를 또 숨기고. 나는 마치 그가 희락원을 걷어차고 형제원을 선택하기라도 한 듯 물었지만 김창호는 아무것도 선택한 적 없었다. 그저 눈앞에 닥쳐온 어떤 멸시를 참지 못했던 것일 뿐.  

 

형제복지원 내의 신축 수용시설을 짓는데 원생들이 동원되어 노역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 : 형제복지원 화보집)


“형제원으로 돌아갔을 때는 81년이었는데 건물을 한창 새로 짓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형제원 총무가 오더니 “희락원에서 온 애가 누고?” 했습니다. 나라고 하니까 나를 ‘새마음 소대’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새마음 소대는 근신 소대였습니다. 제일 힘든 곳이었습니다. 형제원에서 사고치는 사람들은 다 그곳으로 보냈어요. 집 지을 때 쌓는 흙 블록을 찍어내는 일을 했습니다. 그걸 몇 년 했습니다. 형제원 사진 보면 알겠지만 엄청 큽니다. 3천명이 그 안에 있었는데 그 사람들 자는 숙소에, 식당에, 교회가 다 따로 있었습니다. 그걸 우리 손으로 다 지었습니다.”


“일이 많은 날은 ‘만보 뛰기’란 걸 시켰습니다. 선착순 달리기 같은 겁니다. 우리 소대가 60명이었는데 그 사람들한테 다 번호를 매깁니다. 그리고는 걸어서 5분~10분 되는 거리를 짐을 지고 뛰게 만듭니다. 도착하면 다시 번호를 체크합니다. 늦게 들어온 10명은 빳따를 맞거나 기합을 받습니다. 그리고 또 만보 뛰기를 합니다. 형제원은 모든 게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게 완전히 몸에 배여 있습니다.”


“자갈 깨는 소대가 있었습니다. 형제원 뒤에 냉정산이라고 돌산이 있는데 거길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립니다. 돌이 분사되면 우리가 그걸 운동장까지 지고 와서 일일이 망치로 깨서 자갈로 만듭니다. 형제원에 대한 영화가 있거든요. 『종점』, 『탄생』 두 편 있습니다. 부랑인들이 형제원에서 살면서 교화되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어느 날 영화 촬영하는 사람들이 자갈 깨는 소대를 직접 보러 왔었답니다. 그때 배우들한테 원장이 그랬대요. “우리 원생들은 하루에 만원씩 받고 일합니다.” 우리는 그때 정말 그 돈을 받는 줄 알고 좋아했습니다. 내가 거기서 블록 찍는 일을 81년부터 85년까지인가 했습니다. 4년이면 그게 얼맙니까. 그런데 87년에 폐쇄되고 나올 때 12만원인가 받았습니다.”

 

 

(다음 연재 기사 이어 보기 : ▶'눈초리들의 감옥'을 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올려 0 내려 0
홍은전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인권위 “형제복지원 특별법안 조속히 제정해야” 국회에 의견 표명
삼청교육대-징역살이-보호관찰...국가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붙잡힘과 탈출의 반복 속에 살아온 소년
기억이 말을 건다. 겁이 난다고, 너무 서럽고 억울하다고
내 이름은 오광석, 나는 누구입니까
죽음의 바다를 건너 인천으로...다시 반복된 거리의 삶
고아에게 가해진 폭력의 기억...‘죄수들에게도 그렇게는 안 할 거야’
세상과의 불화를 끝내기 위해 걸은 500Km...‘이제 꽃길만 걸어요!’
국가, 수렁에 빠진 소년들을 삼키다
바다를 두 번 건너 죽음의 섬에서 탈출하다
다시 만난 가족...그러나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인천 바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년, 고기잡이배에 던져지다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눈초리들의 감옥'을 살다 (2017-12-01 17:45:38)
삼청교육대-징역살이-보호관찰...국가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2017-11-15 11:08:32)
Disabled People News Leader 비마이너 정기 후원하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더보기
Beminor SNS 비마이너 페이스북비마이너 트위터비마이너 텔레그램
기고 칼럼 기자칼럼

기고 작은이미지
1년에 단 한 번뿐인 시험을 치르는 사람, 여기에도 있...
이른 아침, 낯선 교문 앞에서 떡이나 음료를 나눠주며 열...

친절한 거절을 거절하고 싶다
가족들이 던지는 물건, 그게 날 부르는 ...
당신이 아는 그 ‘청소년’은 없다
포토그룹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