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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초리들의 감옥'을 살다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⑥-2
김창호 씨의 이야기, 두번째
등록일 [ 2017년12월01일 17시45분 ]

>> 지난 연재기사 먼저 보기 (▶어떤 사람의 유년, 선감학원에서 삼청교육대까지)

 

형제복지원 폐쇄

 

형제복지원 내 직업보도 훈련소 (사진출처 : 형제복지원 화보집)


원생들은 낮에는 자신을 가두는 감옥을 제 손으로 쌓았고, 밤에는 목숨을 걸고 그 감옥을 탈출했다. 선감학원에선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 위를 달려 바다를 건너고, 형제원에선 화장실의 똥통을 밟고 탈출해 산을 넘었다. 김창호의 세계는 늘 그런 곳이었지만 그는 탈출할 마음 같은 건 먹지 않았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밤, 해방은 벼락같이 찾아왔다.

 

1986년 12월, 사냥을 갔던 한 검사가 우연히 울주군에 있던 형제원의 작업장 현장을 보게 되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인부 수십 명이 산속에서 산을 개간하는데 큰 몽둥이를 든 경비와 사나운 개들이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검사는 한눈에 그것이 중대한 범죄 현장이라는 것을 알아챘고 조용히 내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1987년 1월, 검찰과 경찰이 형제복지원을 급습했다. 원장의 방에는 은행에나 있을 만한 대형 금고가 있었고 그 안에는 한화 20억에 달러와 엔화가 가득했다.
 

“잔업을 하고 있는데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검찰 쪽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형제복지원은 폐쇄되고 여러분들은 다 내보낼 겁니다.” 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방송으로 예배를 보는데 목사가 박인근 원장한테 온 편지를 읽어줬습니다. 박인근이 자기는 아무 잘못 없다고 쓴 내용이었습니다.”


원장의 주장 혹은 원장의 바람과 달리, 원장은 그날 ‘외환관리법 위반’ 등으로 전격적으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형제원에서는 계속해서 사망사건이 일어났고 두 달 후 울주군 농장에서 원생 한명이 사망하고 35명이 집단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언론은 연일 대서특필했고 세상이 들썩거렸다. 밝혀진 바로만 513명이 죽었고 대부분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일부 시신은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팔려갔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세간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정치권의 비호 속에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박인근 원장은 2년 6개월의 가벼운 형을 받는 것에 그쳤다. 그리고 수사가 진행되는 4개월 동안 원생 3천여 명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석방되었다.


“원장이 구속된 후에 한 달 정도 지났을까. 50명씩 불러다 놓고 면담을 했습니다. 내 옆에 있던 친구한테 물어보더라고요. 나가면 갈 데 있습니까. 그 친구가 대답하기를,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천지요, 했습니다. 내 차례가 됐습니다. 부모형제도 없는데 어디로 갈 겁니까, 하길래, 나도 그 친구 따라했습니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내가 갈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형제원 나왔는데 한 친구가 “창호야, 서면 가자” 했습니다. 서면이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갔습니다. 갔더니만, 와… 형제원 식구들이 거기 다 와 있더라고요. 대한극장 앞 지하도 분수대에 형제원 식구들이 아주 바글바글했습니다.”


“당장 먹고살 방법이 없었습니다. 일을 하려고 해도 주민등록 자체가 안 되어 있으니까 갈 데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어딜 가든 주민등록등본, 호적등본을 떼 오라고 했습니다. 돈이 있으면 여관에서 자고 돈이 없으면 심야다방에서 잤습니다. 천오백원만 주면 잘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사고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고아원에만 살았으니까 세상을 잘 모르지만 85년도나 86년도에 형제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바깥 사회를 좀 알지 않습니까. 걔들이 가자는 대로, 하자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리랑치기를 했습니다. 서면에는 나이트클럽이나 룸살롱이 많았어요. 술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 옆구리를 공격하면 힘을 못 씁니다. 그리고 지갑을 터는 겁니다. 절도죠. 얼마 안 해보고 금방 잡혔습니다. 부산구치소에 갔더니만, 와… 거기 절반은 형제원 식구들이었습니다.”


이 말을 할 때 김창호의 눈앞엔 그날의 구치소 풍경이 선한 듯했다. 반가움인지 어이없음인지 알 수 없는 묘하게 들뜬 말투였다. 지하도 분수대에서 해방감과 설렘, 이상한 불안과 긴장을 공유했던 그들은 불과 몇 개월 만에 범죄자가 되어 구치소에서 만났다. 때는 1987년이었고, 김창호는 스무 살이었다. 한국사회가 가장 뜨거운 한 시절을 통과하는 사이 가난했던 소년들이 도착한 스무 살의 풍경은 삭막하고 위태로웠다.


“초범이라 집행유예로 풀려 나와서 부산 초읍에 있는 중국집에 취직을 했어요. 사장님이 참 잘해주셨습니다. 내 사정을 듣더니 주민등록증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기억을 더듬어서 꽃동산 보육원이 있던 평택 진위면사무소에 찾아갔어요. 형제원 오기 전에 그곳에 있었으니까 거기 가면 내 기록이 남아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보육원은 장애인시설로 바뀌어 있었고 내 기록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다시 형제원이 있던 부산 주례로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도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형제원은 나를 부랑아라고 잡아갔으니까 기록이 없는 게 당연했습니다. 돈은 다 떨어졌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고, 죽겠더라고요. 결국 포기하고 돌아왔습니다.
몇 개월 지나서 사장님이 다시 얘길 하셨어요. 이번엔 평택시청에 가보라면서. 그래서 또 시청에 찾아가서 내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꽃동산 보육원에 있었던 건 확실한데 나는 기록을 못 찾겠다, 당신들이 좀 찾아 달라, 그러고는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부산 식당으로 서류가 왔더라고요. 본적을 꽃동산 보육원이 있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으로 해서. 사실 나는 내 나이를 잘 몰랐는데, 거기에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1968년생이라고.”


“중국집 사장님이 참 잘해주셨는데 몇 개월 후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 뒤에 신발공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공장은 못 다니겠더라고요. 적응이 안 됩니다. 몇 개월도 못 버티고 나왔습니다. 사람들 눈초리가 이상한 것 같아서 자꾸 눈치를 보게 돼요. 실제로는 그런 게 아닌데, 기분이 자꾸 그래요. 공장에 취직하면 호적등본은 기본적으로 떼 오라고 합니다. 떼어 보면 사람들은 다 가족이 나오는데 나는 달랑 혼자만 있잖아요. 그럼 고아인 게 뻔하지 않습니까. 작은 식당 같으면 주인한테 사정을 다 말하지만 공장 같은 곳은 사람이 많으니까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형제원에서 나왔다고 하면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차라리 교도소에서 왔다고 하는 편이 더 나았어요. 고아라는 이야기도 안하고, 형제원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안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늘 조마조마하고. 나한텐 너무 안 맞았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하고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김창호와 인터뷰하던 날 카페에서 받아온 책 <오두막>에는 교도소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 겪는 삼중고가 나온다. 김창호가 실제 교도소 생활을 한 것은 이보다는 뒤의 일이지만, 책에서 말하는 출소자의 어려움은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 같은 강제 수용소에서 성장한 김창호의 어려움을 설명하기에도 꼭 맞는 듯 보였다. 삼중고란 첫째가 사회적 편견과 차별, 둘째가 신체적 질병, 셋째가 알코올중독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적 질병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사회적 관계 맺기에 취약한데, 이유는 이들이 오직 교도소의 논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교도소는 죄질이나 수형, 경력, 주먹, 나이 등에 따라 서열이 명확하게 정해지고 만사는 서열로 굴러간다. 하지만 사회생활에서는 역할이나 능력, 외모, 취향, 규범, 명분 등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을 염두에 두고 처신해야 하는데, 일반인은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이것이 출소자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질 정도로 까다로운 과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출소자들은 회사에 취직해도 한 달도 못 견디고 나오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들에게 사회는 ‘감옥 바깥의 감옥’이다. 교도소가 눈에 보이는 벽으로 이들을 가둔다면 사회는 보이지 않는 벽으로 이들을 가둔다. 김창호의 표현에 의하면 바로 ‘눈초리들의 감옥’인 것이다.


“껌팔이,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일을 했습니다. 껌 같은 건 내가 슈퍼에서 사서 100원, 200원에 팔면 되는 거니까. 신문은 본사에 가서 50부씩 받아다가 버스 안에서 팔았습니다. 오전에는 조선일보를 팔고 오후에는 부산일보를 팔았습니다. 그런 사람들 지내는 숙소가 따로 있어서 거기에서 지냈고요. 창원에서 ‘설비’ 하는 친구가 있어서 그 일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온수 설비도 하고 변기나 하수구도 뚫고요. 그렇게 살면서 아리랑치기를 했습니다. 두 번째 걸렸을 땐 상습이라고 8개월 형을 받았는데, 그때가 아직 첫 번째 받은 형의 집행유예 기간이 안 끝났을 때라서, 앞에 받았던 형까지 1년을 더 살았습니다.”


오두막 공동체


김창호는 세 번 교도소에 갔다. 김해교도소, 진주교도소, 청송교도소. 다 합쳐서 3년을 살았다. 마지막 청송교도소에서 나온 것은 2001년 12월 27일. 나오자마자 친구에게 연락해 “그곳으로 가도 되느냐” 물었지만 “지금은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자꾸만 손을 벌리는 그를 친구들은 부담스러워했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오래 전 형제원에서 나왔을 때처럼 찾아갈 사람도 고단한 몸을 누일 집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갱생보호소에 찾아갔다. 규율과 통제가 싫어 내키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 이상 기운 넘치는 20대가 아니었다. 형제복지원에서 다친 허리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통증이 심해졌다. 출소자들끼리 자주 싸움이 벌어지는 보호소의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평생의 인연이 될 한 사람을 만났다.


“갱생보호소에 자원봉사 오신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분이 저를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려고 했어요. 좋은 데가 있으면 데려가고, 맛있는 거 먹을 일이 있으면 데려갔습니다. 교회에 데려다주고 끝나면 밥 먹고 다시 갱생보호소에 태워주셨어요. 목사님은 저처럼 갈 곳 없는 출소자들 몇 명하고 같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갱생보호소를 나와서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공동체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어요. 출소자, 알코올 중독자, 그리고 (원양어선 같은) 배 탔던 사람들이요. 서로 마음이 잘 안 맞고 술 취하면 싸움도 많이 나서 그 생활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목사님이 잘 조율해줬습니다.”


김창호가 말하는 이 공동체가 바로 지금 합천에 자리 잡은 오두막 공동체로 이어졌다. 2002년의 이 만남에 대해 공동체의 대표 이재용 목사는 그의 책 <오두막>에서 이렇게 썼다. “그가 좀 더 어렸을 때, 그의 죄질이 좀 더 낮았을 때 만나지 못해 안타까웠다.” 실은 나는 이 공동체에 대한 어떤 혐의를 버리지 못한 상태였는데,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시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문장을 읽고 곧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저 하나의 문장일 뿐이었는데 거기엔 김창호에 대한 애틋함과 진심어린 안타까움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썼다.

 

“창호가 바라는 것은 그저 평범한 삶이었다. 돈을 벌어 자립하고 결혼도 하고 싶어 했다. 지인에게 부탁해 섬유회사에 취직시켰다. 하지만 반년을 채우지 못했다. 일하는데 필요한 기술을 금세 배웠지만 일하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많은 돈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돈을 관리하는 법도 몰랐다. 대개 출소자들이 그러하듯 돈은 독이 되어 버렸다. 우리 부부는 이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창호와 함께 생활하며 돌보았다. 창호의 월급을 대신 관리하여 몇 년 후에는 그의 이름으로 17평의 임대아파트를 장만해주었다. 하지만 창호는 그 아파트에 들어가 살기 싫어했다.
“그 큰 아파트에 혼자 살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아요.”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더 이상은 아파트에 들어가라고 권하지 못했다. 창호의 불안은 쉬이 달래기 어려웠다. 다음 끼니를 언제 먹을지 알 수 없었던 기억이 몸에 새겨져 있어 자주 폭식을 했다. 또 수시로 박탈감과 무력감에 화가 나서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충동으로 이어지면 그걸 참아내느라 눈알이 시뻘게질 정도였다.”


김창호 씨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이야기를 담은 책 <오두막> 공동체를 만난 후 김창호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돌보기도 하고 처지가 어려운 이웃에게 쌀을 사서 보내주기도 하며 공동체의 든든한 일꾼이 되었다. 그러나 공동체는 출소자 집단이라는 이유로 여러 차례 동네에서 배척을 당했다. 농사를 지어 자립하기 위해 울진의 시골 마을에 너른 땅을 사서 들어갔을 때, 처음엔 반기던 주민들도 그들이 출소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눈빛이 변하고 마을에서 나가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 후 경주로 이사하기 위해 계약까지 했지만 이번에도 주민들의 반대로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김창호의 인생엔 고아, 형제복지원 출신에 이어 범죄자라는 낙인까지 더해졌다. ‘눈초리들의 감옥’은 이제 실제로도 위력을 발휘해 그를 동네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했다. 


2006년 공동체는 합천 쌍백면의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쫓겨난 사람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구조적인 가난과 도시의 편의와 경쟁, 효율과 속도가 만들어낸 병폐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대안적인 삶을 모색했다. 처음엔 출소자들만 있었지만 그 후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 가족들, 그리고 공동체의 지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해, 현재는 열여섯 가구를 이루었다. 그들은 장애든, 범죄 경력이든, 알코올 중독이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며 모두 각자의 방, 각자의 집을 갖고, 일체의 프로그램이 없이 밥과 예배만 함께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


김창호와 함께 마을길을 걷는 동안 드문드문 집이 나타날 때마다 김창호는 나에게 그 집 사람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어느 노부부는 김창호에게 집수리를 도와 달라 했고 그는 인터뷰가 끝난 후 들르겠다고 약속했다. 진주에서 인터뷰를 하던 날에도 합천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와, “저녁에 고기를 구워먹으려는데 네가 눈에 밟혀서 먹을 수가 없다”며 빨리 돌아오라 했다. 그는 이곳에서 일방적으로 눈초리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이웃들과 따스한 눈길을 주고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2012년 가을, 김창호는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 이 산골짜기에서 공동체 식구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살면서 제일 기뻤던 게 결혼해서 집사람과 함께 사는 겁니다. 나는 내가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습니다. 다른 공동체하고 교류하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집사람은 정신 장애가 있지만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장인, 장모님이 저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넉넉하고 여유 있는 사람한테 딸을 보내고 싶은데 나는 쥐뿔도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예뻐하세요. 집사람 몸이 안 좋은데 같이 잘 사니까요.” 


부부는 이 마을의 초입, 가장 아래쪽에 컨테이너 한 칸을 얻어 지낸다.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지만, 컨테이너 집의 특성 상 여름과 겨울나기가 어려워 그때는 진주에 가서 산다. 진주의 집은 방이 두 개 딸린 빌라 집이어서 컨테이너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부부는 ‘집’ 보다 ‘이웃’과 ‘공동체’가 더 절실한 사람들이었다. 김창호의 아내 역시 자신이 나고 자란 진주보다 합천의 공동체가 더 편하다고 말했다. 컨테이너 집도 그녀의 친정집에서 500만원을 들여 마련해준 것이었다. 


“시골이 도시보다 좋습니다. 집사람이 낯선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게 힘들어요. 부산에 아파트에서도 살아 봤는데 윗집에서 쿵쿵 소리 나는 걸 무서워했습니다. 하지만 여기는 해치려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습니다. 저도 아무도 모르는 사람 속에서 살기 싫었고요.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게, 저한테도 집사람한테도 더 좋습니다.
공동체 식구들이 알코올 중독, 전과자, 이런 사람들인데, 도시에선 유혹이 너무 많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편의점 있잖아요. 술 먹고 싶으면 참을 수가 없거든요. 여기에선 잡생각이 안 납니다. 예전에는 화가 나면 나쁜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목사님 못 만났으면 나는 또 친구들 불러내서 나쁜 짓 하고 교도소에 가 있을 겁니다. 공동체 식구들을 만나고선 자꾸 선한 마음이 들어요. 16년 됐는데 그 동안 나쁜 생각은 안 들었습니다. 이분들 봐서라도 그러면 안 되겠더라고요.“


피해보상 받고 싶습니다.


“선감학원에 있었던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를 않고 살았습니다. 선감도 나오면서 “이제 선감도는 나하고 완전 끝이다”, “내 인생에 없다” 그랬습니다. 주민등록 할 때도 선감학원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하기 싫었습니다. 형제원 식구들(피해자 모임)한테도 얘기 안 했어요. 그게… 신경이 좀 쓰였습니다. 쟤는 뭐하는 놈인데 선감학원도 가고 형제원도 갔냐고 할까봐. 혹시나 안 좋게 이야기할까봐. 말을 안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이걸 밝히는 이유는 피해보상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선감도하고 형제원에서 살았던 거 합치면 한 11년 정도 됩니다. 아무리 부모 없이 살았다고 해도, 11년이면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닙니까. 거기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더 잘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진상을 규명해서 우리 누명도 좀 벗었으면 좋겠습니다. 죄 없이 잡혀간 거, 쓰레기 취급 받은 거, 11년이나 노역하고 보상도 못 받은 거, 생각하면 너무 억울합니다. 혼자 살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지금은 밥을 먹을래도 숟가락을 두 개 올려야 하니까, 돈은 없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


그는 자신의 고통이나 상처를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비밀 많은 삶을 살아왔고, 예상컨대 자신의 삶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불쾌해할 만큼 꼬치꼬치 캐물었던 나의 질문 과정은 삭제하고 그의 대답만 이어서 붙이고 재배치한 이 글은 인터뷰 과정에서의 이상한 긴장과 오해, 어긋남 같은 것들을 담지 못했다. 때문에 그것이 의미하는 어떤 진실들은 누락되었다. 진실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극단적인 경험은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지만, 그는 극단적 세계에서 유년의 일상 전체를 보냈고 그 안에서 성장하고 언어를 배웠다. 언어가 사회적 약속임을 절실히 느꼈다. 나에겐 ‘극단’이 그에겐 ‘일상’이었으므로, 우리의 언어는 그 기준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김창호의 마지막 이야기, 그러니까 그가 형제원 피해자 모임에서조차 선감학원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를 듣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아득해졌다. 되짚어보면 그는 처음부터 “선감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살았다”고 여러 차례 말했었다. 주민등록을 하기 위해 자신의 기원을 증명해야 했던 때조차도 4년 간 살았던 선감학원이 아니라 고작 몇 개월을 지냈던 꽃동산 보육원으로 찾아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나의 충격은 그가 형제원 피해자 모임 같은, 추측컨대 그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안전하고, 심지어 매우 적절해보이기까지 한 관계 안에서조차 예외 없이 그 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이었다.
“쟤는 뭐하는 놈인데 선감학원도 가고 형제원도 갔냐고 할까봐. 혹시나 안 좋게 이야기 할까봐.”
그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은 종이에 손을 베인 것 같이 시리고 쓰라린 표정이었다. 무뚝뚝하고 거친 ‘경상도 사나이’ 같았던 그가 그 순간 24시간 주변 경계를 늦출 수 없어서 서서 자는, 혹은 눈 뜨고 자는 초식동물처럼 느껴졌다. 고단해보였다.


한 달 동안 김창호의 녹취록을 붙들고 씨름하는 동안 산골짜기 카페에서 만났던 여성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을 돌았다.
“모든 게 내 뜻대로 될 때, 그땐 신이 필요하지 않아요.”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에겐 신이 필요하다, 가 될까. 아니면 최선을 다했으므로 이젠 신에게 맡긴다, 가 될까. 발달장애인 아들이 있는 그녀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지 그녀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말은 이상한 위로와 평화를 주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냉대와 박대의 눈초리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던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처럼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시원한 커피를 내려주고 따뜻한 인사를 건네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발악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그들은 서로를 만나 한 몸을 이루고 서로에게 신이 되어 주었다. 


김창호는 고아였다.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했지만 국가는 그를 강제 수용해 때리고 착취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그를 고아라고 업신여겼고, 사회에선 형제원 출신이라고 쓰레기 취급했다. 가난과 박탈감, 트라우마로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범죄를 저질렀고 다시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혀 동네에서 배척당했다. 오두막 공동체는 김창호처럼 학대당하고 냉대 받고 배척당한 사람들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오두막 공동체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두막 공동체 내에 있는 작은 카페의 풍경.


특히 오두막 공동체의 일상에 대해 쓴 아래의 글을 보면서는, 우리 사회가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 문제의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넘어 피해생존자들의 고통과 불안, 트라우마를 어떤 태도로 끌어안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들을 ‘선도’하거나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각자에게 그들 몫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 실은 국가와 사회가 가난한 그들로부터 빼앗은 자리를 되돌려주려는 노력인 것이다.  

 

“공동체의 하루는 지극히 평범하다. 그저 먹고 자고 싸고 일하고 쉬는 일상의 반복이다. 그 일상을 여럿이 함께 나눌 뿐이다. 명망 있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도, 악명 높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별 수 없이 일상을 산다.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이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불행으로, 또 누군가는 다행으로 여길 수 있다.
오두막의 일상은 축복이다. 오두막에는 걱정과 염려 탓에 잠들지 못하던 사람, 불안을 달래지 못해 밤낮 화장실만 들락거리던 사람, 악착같이 경쟁하느라 탈진한 사람, 걸핏하면 화가 치밀어 누군가를 욕하고 때려야만 하던 사람, 술을 끊지 못해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사람, 원인 모를 증상 탓에 끊임없이 고통에 시달리면서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사정은 각양각색이지만 오두막에 오고 나서는 모두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전혀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의 일상을 마치 천상의 하루처럼 소중히 여긴다.” (<오두막> 중에서)

 

끝으로 김창호가 정말로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말해 주었음을 강조하고 싶다. 용기를 내어 이야기해준 김창호에게 응원과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한편 그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들으려는 사람들이 있어 가능했다. 형제복지원 대책위원회가 있어 그가 형제복지원의 경험을 말할 수 있었듯이, 선감학원 대책위원회가 있어 37년 만에 그가 선감학원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출소자의 어려움을 껴안으려는 오두막 공동체가 있었으므로 그가 자신의 과거 사실을 솔직히 말할 수 있었다. 국가에 의해 유년의 시간을 통째로 유린당한 소년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했는지에 대한 귀한 증언이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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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뉴스]
죽음의 섬 선감도를 탈출한 소년들, 국회에서 ‘진상규명’을 외치다
삼청교육대-징역살이-보호관찰...국가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붙잡힘과 탈출의 반복 속에 살아온 소년
기억이 말을 건다. 겁이 난다고, 너무 서럽고 억울하다고
내 이름은 오광석, 나는 누구입니까
죽음의 바다를 건너 인천으로...다시 반복된 거리의 삶
고아에게 가해진 폭력의 기억...‘죄수들에게도 그렇게는 안 할 거야’
세상과의 불화를 끝내기 위해 걸은 500Km...‘이제 꽃길만 걸어요!’
국가, 수렁에 빠진 소년들을 삼키다
바다를 두 번 건너 죽음의 섬에서 탈출하다
다시 만난 가족...그러나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인천 바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년, 고기잡이배에 던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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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의 유년, 선감학원에서 형제복지원까지 (2017-11-29 10: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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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단 한 번뿐인 시험을 치르는 사람, 여기에도 있...
이른 아침, 낯선 교문 앞에서 떡이나 음료를 나눠주며 열...

친절한 거절을 거절하고 싶다
가족들이 던지는 물건, 그게 날 부르는 ...
당신이 아는 그 ‘청소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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