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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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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삶, 나머지 인간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⑦-1
김성환 씨의 이야기, 첫 번째
등록일 [ 2017년12월29일 14시27분 ]

누군가 ‘해일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느냐’고 했다. 그러나 조개에게도 삶이 있다. 그는 조개였다. 커다란 해일이 일었고 그는 그 해일에 수차례 이리저리 휩쓸려 많이 부서졌으나 자신의 삶이기에, 그렇게 파도에 실려 살아왔다. 이것은 볼품없는 그 조개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깐 이것은, 해일의 시간을 경험한 자의 증언으로 해일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성환은 1956년생이다. 그는 열세 살인 1968년, 경기도 선감학원에 처음 끌려갔다. 이후에도 그는 두 번 더 선감학원에 잡혀갔으며, 성인이 된 후엔 삼청교육대를 지나 15년간 교도소에 복역(청송교도소 수감 포함)했다. 어린 시절 헤어진 그의 형은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가 삼청교육대에서 그와 조우한다. 한국 현대사에 등장한 사건 속에 익명으로 기록된 숫자들이 그였고, 그의 형이었다.

 

성환아, 일어나.


형이 깨웠다. 열차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열차에서 내리려고 보니 신발이 없어졌다.


너 신발 어디 갔어?


형이 어디선가 앵벌이 해서 모은 돈으로 사준 예쁜 새 신이었다. 서울역에서 내리자마자 신발을 찾으러 뛰었다.


이 거지새끼들!


잡혔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단속반이다. 신발 찾으러 같이 헤매던 친구와 함께 파출소로 끌려갔다. 친구를 두고 도망쳤지만 이내 곧 잡혔다. 그렇게 아동보호소에 또다시 갇혔다. 소문 듣고 찾아온 형은 나와 함께 갇히는 걸 택했다.


서너 살 무렵, 부모는 헤어지며 어머니는 형을, 아버지는 나를 꿰찼다. 아버지는 서대문구의 한 영아원에 나를 맡겼다. 시설 생활의 시작이었다. 형을 다시 만난 곳도 시설이었다. 형이 먼저 날 알아봤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강동구 천호동 애지보육원, 길 위 혹은 기차. 우린 정처 없이 흘렀고, 갇힐 때마다 탈주했다. 이유도 모른 채 늘 어딘가로부터 달아났고, 몸을 숨겼다. 우릴 도와준 이의 물건을 훔쳐 고픈 배를 채웠다. 부끄러움은 굶주림 앞에 무력했다. 기차를 타고 전국을 헤매다 도착한 곳은 다시 아동보호소. 또다시 탈주를 계획했다. 내일모레 용산역 앞에서 만나자. 형과 약속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랑아 수용 현장 (1961년, 사진출처 : 국가기록원)
 

그러나 도망을 약속한 날, 난 선감학원으로 이감됐다. 1968년 7월 31일이었다.


머리 빡빡 민 어린 코흘리개 수백 명이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어찌나 코를 닦았는지 소매는 늘 누렇게 빤딱빤딱했다. 우린 하나의 그림자처럼 같은 시간에 밥 먹고 일하고 잠들고 처맞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무신이 사라지는 날이 있다. 조회 전, 얼른 다른 아이 고무신을 훔쳐 빨갛게 달아오른 연탄집게로 표시를 해서 내 신발인 양 신었다. 신발을 잃어버리면 빠따를 맞았다. 어쩔 수 없다. 나 대신 네가 맞는 것은 네가 어리버리하기 때문이다. 이 간교한 생존 법칙을 일찍 깨달아버렸다.  


시키는 일은 열심히 비효율적으로 했다. 호미로 뿌리까지 뽑으면 정해진 시간 내에 풀을 다 벨 수 없다. 위에만 쥐어뜯어도 보기엔 깨끗하니 잘 쥐어뜯는다. 여름 퇴비 만들 때도 일반 풀로는 무게를 맞출 수 없으니 베어낸 갈대 위에 돌을 얹어 위장했다. 무게를 맞추지 못해도 맞고 걸려도 맞으니 운에 걸어본다. 맞기 전엔 두려웠고 맞고 나면 안도가 됐다. 


선감도는 섬이었다. 육지와 섬 사이의 물이 빠지는 시간이 있다. 그 물처럼 나도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도망가자.


국민학교 4학년 어느 겨울 이른 아침이었다. 친구 셋이 물 빠진 갯벌 위를 안개처럼 걸었다. 뒤돌아보니 여덟 명의 아이들이 더 따라오고 있었다.


2월의 갯벌은 얼음장만큼 차가웠다. 마산포를 향해 가던 중 물이 차오르자 뒤따라오던 아이들은 겁에 질려 되돌아갔다.


수영해서 가자.


도착한 곳은 마산포가 아닌 털섬. 산으로 숨어 들어가 셋이 꼭 껴안고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산에서 내려와 마을 주민들에게 밥 좀 달라고 하니 그 새끼들이 밥은커녕 경찰서에 신고했다. 다시 밀물처럼 끌려들어 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서로를 때렸다. 탈출에 대한 벌이었다. 굴 껍데기 깔린 운동장에서 엎드려 있는 열 명의 아이를 한 사람이 때리는 일을 돌아가면서 했다. 그 다음엔 서로를 마주 보고 서로의 뺨을 한 대씩 때렸다. 내가 때리면 네가 맞고, 네가 때리면 내가 맞고. 이상했다. 난 이렇게 세게 안 때린 거 같은데. 점점 화가 났다. 올라 붙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볼이 시뻘게졌다. 오른손이 아플 때쯤이면 왼손을 치켜들어 때렸다. 전날만 해도 함께 도주를 계획했는데 오늘 우린 죽일 듯이 서로의 뺨을 휘갈기고 있었다.

 

지난 5월 27일 열린 선감학원 희생자 추모제.


그곳에서 선감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부중학교를 갔다. 중학교는 선감도에서 배 타고 대부도로 나가야 있다. 73년 8월 10일, 방학 중 학교 소집일이었다. 대부도 선착장에 인천에서 온 여객선이 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걸 타야 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잽싸게 올라탔다. 돈도, 표도 없었다. 학생, 표 어딨어? 검표원이 물었다.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뒤에 우리 할머니한테 있어요.


첫 번째 탈출이었다. 인천에 도착했지만 갈 곳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서울 가면 형이 있지 않을까. 형을 꼭 찾고 싶었다. 형을 찾아 헤매다 다시 인천으로 흘러들어왔다. 인천에서 선감학원에서 함께 생활했던 이들을 만났다. 도망쳐 나온 아이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나도 그 무리에 뒤섞였다.


밥 좀 주세요.


동네마다 문을 두드려 구멍가게에서 얻은 비닐봉지를 벌렸다. 밥과 김치가 비닐봉지 안에서 섞이고 뭉쳤다. 쉰밥 던져줄 때면 화가 났다. 그냥 버리지 이걸 왜 거지한테 줘? 그놈의 쉰밥이 들어와 섞이는 바람에 김치까지 못 먹게 됐잖아. 봉지째 그 집 문짝에 던져버렸다.


신문사에서 왔는데요.


멘트도 기술이다. 멘트를 바꾸니 문이 보다 쉽게 열렸다. 문 열리면 발부터 집어넣었다. 밥 좀 주세요. 줄 때까지 버텼다.


또다시 겨울이다. 땅을 파서 방공호를 만들어 생활했다. 운 좋게 폐타이어를 구한 날이면 공터에서 밤새 폐타이어를 태우며 잠들었다. 초상집에서 구한 사자(死者)의 이불을 덮고 까만 밤을 보냈다. 아침에 뜨끈한 국물이라도 한 사발 마시고 싶으면 인천 화평동 순댓골목을 찾았다.


아줌마 국물 좀 주세요.


비닐봉지를 내밀었지만 내심 먹고 가라는 말을 기대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펄펄 끓는 국물을 얇은 비닐봉지 안에 확 부었다. 동냥 쪽박(비닐봉지)이 깨져 버렸다. 추위에 달달 떨리던 몸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씨발.


식모살이하는 누나들은 밥과 반찬을 잘 챙겨줬다. 늦게 일어나면 옐로우하우스(인천 남구의 성매매업소 집결지)로 갔다. 걸식하는 아이들을 동생처럼 여긴 아가씨들이 밥 먹고 가라며 밥상을 차려주곤 했다. 비루함이 비루함을 위로했다. 


그러나 빌어먹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구두 닦는 기술을 배웠다. 사과 궤짝을 구해 볏짚 깔고 앵벌이로 번 돈으로 솔과 구두약을 샀다. 구두 한 켤레 닦으면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먹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겨울나기에 요긴했다.


아저씨 구두 닦으세요.


극장 출입구 지키는 이들의 구두를 닦아주고 극장에 들어갔다. 극장엔 톱밥 난로가 타고 있었다. 낮 시간 대부분을 극장 안에서 보내고 나오면 또다시 배가 고팠다. 늘 먹는 게 걱정이었다.


아줌마 하나만 주세요. 


밤엔 대폿집 순례를 하며 손님이 먹고 남은 안주를 받아 챙겼다.


술지게미(술찌꺼기) 남은 거 없어요?


몸은 음식을 태워 생의 에너지를 내는데 내 몸에 들어가는 것은 늘 사람들이 먹고 남은 것들이었다. 버린 것들을 주워 사는 삶. 나머지 같은 삶. 온전히 한 사람의 삶으로 셈해지지 않는, 정수가 아닌 소수점의 삶. 버려지는 나머지 같은 삶이어서 삶이라는 공식에 내 삶은 셈하여지지 않는가. 양주장에 가서 얹어온 술지게미에 설탕 뿌려 먹고 얼큰하게 취해 잠드는 밤이면 그래도 조금 견딜만했다. 술의 달달함을 일찍 깨달았다.


공터도 가려서 자야 했다. 종종 새벽에 ‘대선배님’들이 공터로 찾아왔다. 그들은 인천 구월동 선인원*의 경비대장이었다. 시설은 정부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거리 부랑아들을 잡으러 다녔다. 그들은 어디 가면 머릿수를 채울 수 있는지 꿰뚫고 있었다. 소수점 같은 삶은 시설 안에 가둬질 때만 필요에 의해 정수로 셈해져 시설을 지원하는 돈이 되었다. 선인원과의 술래잡기 같은 잡힘과 도주가 반복됐다.

 

*선인원 : 1968년 9월 2일 인천광역시 남구 옥련동에 부랑인 수용시설을 개원한 서천재단이 1973년 1월 10일 ‘인천시립 선인원 설치조례’에 의거해 위탁 운영한 부랑인 시설이다. 서천재단은 현재까지 노인요양병원, 정신요양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인천사회복지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서천재단’ 관련 부분 참조. http://welpiahistory.or.kr/agency_his.html?code=2197)

 

내가 버려지고 싶어 버려진 것도 아닌데, 고아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날 멸시했다. 이곳은 선감도 바깥이었으나 당신이 사는 세계의 내부는 아니었다. 난 이후 선감학원에 두 번 더 잡혀갔다.

 

선감학원에서의 피해 경험을 증언하고 있는 김성환 씨. (사진출처 : SBS '뉴스토리' 10월 28일 방송분 화면 갈무리.)


80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오락실에서 기분 좋게 놀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오랜만이다? 경찰서에 좀 잠깐 가자. 몇 개 물어보고 내보내줄게.
내가 거길 왜 가요? 할 얘기 있으면 여기서 해요.


동네 아는 형사였다. 이 새끼들이 우릴 또 만만하게 보는구나. 그러나 개겨봤자다. 친구들과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저녁이 지나니 사람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서로 들어온 이유를 물었다. 계엄군에 떠밀려 들어왔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다 잡혀 들어 왔다, 문신 때문에 걸렸다 등. 이유도 제각각이고 특별한 잘못도 없었다. 내가 대체 왜 여기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유치장엔 소변통 하나뿐. 사람이 너무 많아 앉아도 한 방, 서도 한 방이었다. 누울 수 없어 잠도 자지 못했다.


너 이 새끼, 시내에서 하고 다니는 거 다 봤어. 그냥 다 불어. 


경찰은 훈방(D급)으로 내보내줄테니 조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말과 달리 난 ‘C급’으로 분류되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8월 4일, 친구들과 버스에 태워져 부천의 육군 33사단 167연대 1076대대로 보내졌다. 내리자마자 군인들이 방망이로 머리를 두들겨 팼다. 머리를 박박 밀린 채 내무반까지 벅벅 기어갔다.

 

**삼청교육대 : 전두환 정권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사회악 일소를 목적으로 1980년 7월 29일 불량배 소탕계획(삼청계획 5호)을 입안했다. 이거 근거해 계엄사령부가 검거한 불량배 수만 전국적으로 6만 755명에 달한다. 이들은 분류심사를 통해 A~D급으로 나뉘어 A급은 군사재판 또는 검찰 인계, B급은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 C급은 순화교육 후 사회복귀, D급은 훈방조치 됐다. B, C급은 군부대 내에 설치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순화교육을 받았다. 이후 삼청교육대에서 발생한 가혹한 육체훈련과 구타, 강제노역, 장기 구금 등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피해자들의 요구 끝에 2004년 ‘삼청교육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삼청교육대 수용 중 54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입소 직후 3~5일간은 반발과 저항력을 감소시키고 질서 유지에 필요한 복종심을 키우게 하려고 일부러 하루 2끼니분을 3끼니로 나눠 식사량을 줄여 배식했다. 저녁 8시와 9시 사이엔 자아 반성을 위해 반성문 및 수양록을 작성하도록 했으며 훈련 불량자는 특수교육을 실시했다. 순화교육 과정 땐 반성 구호를 외치게 했는데 식탁 복창 구호 중엔 “돼지보다 못하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소보다 못하면 소고기를 먹지 말자”는 구호도 있었다.


뭐땜에 들어왔어?
길 가다가 잡혀 왔습니다.
야이 새끼야, 나라에서 죄 없는 사람을 왜 잡아넣어?


내무반장이 내 앞의 사람을 방망이로 두들겨 팼다. 내 차례다.


2중대 1부대 20번 김성환입니다!


뭐땜에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나도 내가 왜 끌려왔는지 모른다.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다.


술 한 잔 먹고 지나가던 아가씨 희롱 좀 했습니다.
솔직하네. 우리도 외박 나가면 그럴 때 있어. 자넨 밖에서 뭐했나?
구두 닦았습니다.


운이 좋았다. 조교 워커를 닦아주는 것으로 남들보다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교육은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16시간 동안 이어졌다. 주말에도 평일처럼 교육이 계속됐다. 그들은 교육이라고도 했고 훈련이라고도 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여름날 연병장에서 봉체조(어깨 위로 통나무 들기)를 하는 것, 깍지 낀 채 50분 동안 비행기타기(엎드려뻗쳐한 자세에서 발은 높은 곳에, 손은 아래에 두는 것)하는 것 등이 교육 내용이었다. 월남전에서 수류탄 파편으로 허리 다친 이는 ‘태도가 불량하다’며 내무반에서 얻어터진 뒤 ‘특수교육’ 받으러 끌려나갔다. 이것이 왜 고문과 학대가 아닌 교육과 훈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잘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정신교육 시간에 눈 뜨고 잤다. 저녁엔 수양록을 쓰며 반성했다.
 

삶을 돌이켜봤다. 또래들이 책가방 들고 학교 갈 때 내 손엔 밥 빌어먹는 깡통이, 구두통이 들려있었다. 여학생들에게만은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숨어다녔다. 창피했다. 나는 이게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이렇게 사는 건데 내가 왜 창피해야 하지? 이상했다. 이 수치스러움은 정말 내 몫의 감정인가.


왕초들은 나를 두들겨 팼다. 내가 두들겨 맞는 이유는 그가 배고프기 때문이다. 그는 밥 얻어 오라고 깡통을 집어 던졌다. 그는 나한테 왜 그랬을까.


부모에 의해 버려진 것도, 선감학원에 끌려간 것도, 삼청교육대에 온 것도 애초에 내가 선택한 삶이 아니었다. 나는 왜 이곳에 끌려 온 걸까. 


어느 날 4중대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형이었다. 선감학원에서 나온 뒤 형을 만난 적 있다. 형은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나처럼 살고 있던 형이, 나처럼 이곳에 끌려왔다. 만나도 더러운 데서 만나는구나. 


내무반장님, 제 친형이 4중대에 있습니다.


워커 닦기로 다져놓은 친분이 형을 만나게 해줬다. 그러나


교육 잘 받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


만나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우리가 여기서 살아나갈 수는 있을까. 답 없는 물음을 주고받으며 그저 운을 빌었다. 4주 뒤, 난 퇴소했다. 얼마 후 형도 퇴소했다. 우린 또 살아남았다.

 

 

 

(다음 연재 기사 이어보기 : ▶시착한 삶, 독방을 나가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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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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