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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 생애기록-③] 잊혀진 계절 - 故이화웅
등록일 [ 2017년12월29일 18시31분 ]

12월 18일부터 동짓날인 22일은 '홈리스 추모주간'이었습니다. 홈리스와 무연고자를 애도하고 이들의 존엄한 삶과 죽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 마련을 촉구하는 한 주였습니다. 비마이너는 '2017 홈리스 생애기록팀'이 엮은 '홈리스 생애기록집 III-소리 없는 이들의 삶의 기록' 중 다섯 편을 발췌해 공유합니다. 굴곡진 한국사를 온 몸으로 헤쳐온 사람들의 삶을,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미래를 현실로 살았고,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야말로 우리 사회의 운영 원리를 거짓 없이 보여주는 창이 될 것이기 때문('소리 없는 이들의 삶의 기록' 여는 글 중)'입니다. 

 

▶[홈리스 생애기록-①] 숨죽인 채 반짝이던 반딧불 하나 - 故김한기

▶[홈리스 생애기록-②] 동자동에서 만난 고아원 동지들 - 故유철동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10월이면 라디오와 TV,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잊혀진 계절’이다. 나는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온종일 이 노래와 함께 맴도는 얼굴, 그리고 이름이 하나 있다. 이화웅 어르신이다.

 

거리에서 만나다

 

어르신을 만난 건 2005년 말이었다. 당시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은 남대문 지하도와 일대, 시청 의회, 남산공원 일대 그리고 회현역 출구 지하도에서 거리노숙인들을 만나고 있었다. 나는 회현역 6,7번 출구 지하도에서 목요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약 열댓 분 정도가 머물러 계셨는데, 한쪽 구석 박스집 안에 꼿꼿이 허리 펴고 흰머리를 가지런히 넘겨 빗은 분이 있었다. 말씀도 별로 없이 우리가 드리는 차 한 잔을 조용히 마시는 분이었다. 얼굴이 익숙해지자 사정을 여쭈는 질문에 말문을 여셨고, 그때부터 어르신~ 하고 불렀다. 화웅 어르신~하고 말이다.

 

내가 죽었다?!

 

조곤조곤 말씀하는 어르신의 사연은 특이했다.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사망신고가 되어’ 있더란다. 돈을 벌러 고향을 떠나온 이후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었다. 때문에 본인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일용직 일을 해왔던 터라 통장이 무슨 소용이겠나 싶어서 두었다가 지금까지 오게 됐노라 하신다. 아! 본인도 모르는 사망신고라니! 행정은, 경찰은, 병원은... 뭘 한 거지?! 어르신은 “죽기 전에 자기를 살리고 싶다고, 산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짧은 동행은 시작되었다.

 

이화웅 님 지갑 속 메모와 도장

 

“예. 그래요, 고마워요.”

 

어르신 주민번호 상 나이는 63세. 43년도에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건너왔고 형제들은 누님과 형님, 여동생 4남매라고 하셨다. 본인이 기억하는 주민번호 앞 번호와 몇 가지 단서들을 통해 2006년 1월부터 사망 정정을 위한 소제기를 계획했다. 본적지인 부산의 관할 구청에 전화해 어찌 된 건지 확인했더니 여동생이 1990년에 사망신고를 했단다. 서울에서 소를 제기해야 하니 부산 법률구조공단에도 확인이 필요했다. 서울에서 연계하는 방법과 몇 가지 갖춰야 할 것들을 안내받았다.


그러는 한편으로 불규칙한 식사, 좋지 않은 치아로 인해 늘 위가 아프고 힘들다는 어르신을 위한 거처 확보도 진행했다. 회현팀의 자원활동가 중 중구 내 쪽방을 잘 아는 당사자활동가가 비교적 친절한 관리인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데 동행했다. 당시 당사자 활동가인 송현호 님이 함께 다니시면서 마치 본인의 형님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함께 해주셨다. 어르신은 이런 과정 내내 우리에게“예, 그래요. 고마워요.”하셨다.

 

“기다리는 게 좀 답답하네요...”

 

그리고 수급신청. 당시 어르신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여서 수급신청을 통해 거처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담당하는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은 무적자 지원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주민센터에 동행해 사망신고가 된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이러한 경우 사회복지 전산관리번호(기초생활보장번호라고 불렸음)를 부여받아 수급신청이 가능함을 설명했다. 결국 임대차계약서와 제적증명서와 호적정정에 관한 소에 대한 증명서를 발급받으면 수급신청을 진행해주겠노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어르신은 이미 65세 이상(사실 주민등록번호 상으로는 65세가 아니다)이었고, 건강도 썩 좋지 않았지만 ‘일을 조건으로 급여를 받는’,“조건부과 수급”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2월 초 수급신청을 요청했지만 공무원은 ‘1개월 이상 거주해야 하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기초생활보장사업 안내서 중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취약계층에 대한 보장 방안에는 여전히 최소 요건으로 ‘1개월 거주’를 전제하고 있다) 3월 초에 신청절차를 밟을 거라고 했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나?! 이 분은 이미 남대문 쪽방에 10년 이상 거주해오다 거리노숙생활을 하는 분이다!


거리생활을 전전하다 방을 얻게 된 어르신은 꼬박 2주 가까이 감기몸살을 앓으셨다. 걱정하는 내게 자원활동가 송현호 님이 말했다. “바깥 생활하다 방 얻어 들어가면 며칠간 죽은 듯이 잠만 자기도 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프기도 하고 그럽디다. 어르신도 그럴 겁니다.” 기운을 좀 차리신 어르신의 방은 당신 차림새만큼이나 깔끔했다. 1년여 전 세탁소에 맡기고 찾지 못했던 양복도 찾아두었다고 하면서 벽에 걸어둔 옷을 가리키신다. 창문 앞에 작은 곰 인형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봄이 되면서 어르신과 함께 법률구조공단에 방문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공단에서 수급자 증명서를 요구하는 통에 지연되었다. 다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어르신이 헛헛한 소리로 그러신다. “기다리는 게 좀 답답하네요...” 수급 확정은 신청 이후 2개월 반이나 지나 결정되었다.

 

자활사업에 참여하다

 

어르신은 조건부수급자로 결정되었다. 조건부 수급은 일을 조건으로 급여를 지급하기 때문에 근로일수 중 1/4을 빠지면 급여가 중지된다. 자활사업이 어르신에게는 또 다른 곤욕이었던 듯하다. 이틀 결근했다고 하시면서 “그것도 일이라고... 9시에 출근해서 10시면 끝나요... 사람들이 모이니까 계속 담배만 피우게 되고... 오히려 이 일을 시작하기 전보다 더 무기력해지는 것 같네요...”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힘을 내시자는 말 밖에는. 어버이날이라 가져간 카네이션 화분을 인형들 옆에 놓아두고 일어섰다.

 

살아있었던 흔적을 찾아다니다

 

법률구조공단을 방문해 상담을 신청했다. 상담 결과는 현재 본인이 살아있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것들, 최초 주민등록증 발급 시 사진과 지문, 인우보증서-친족이 사망신고가 잘못된 것이라고 증언하는-를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법률구조공단에서는 친인척의 증언이 중요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서류를 뒤져보니 사망신고를 낸 여동생이나 다른 형제분들은 이미 사망하고 안 계셨다. 조카라도 찾아서 부탁해보자고 했지만 아주 어렸을 적에 만나서 본인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하신다. 가지고 있는 단서는 어르신의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수, 군번, 제적등본 상에서의 여동생 최후 주소지였다. 먼저 병무청으로 갔다. 신기하게도 어르신은 군번은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 주민번호는 앞자리만 기억하시면서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군번을 토대로 병적기록을 조회해 사진과 지문을 확보하려 했다. 그런데 1963년에 입대한 탓인지 사진은 비교가 불가할 정도였고 지문 또한 채취되어 있지 않았다.

 

고인의 병적기록
 

그길로 남대문 경찰서로 향했다. 어르신은 경범죄로 복역했던 기록마저 찾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증빙자료는 찾지 못했다. 결국 십지문을 떠서 개인 신상을 관리하는 부서로 보내 자료를 요청하기로 했다. 한 달가량 걸릴 거란다. 휴~


마지막으로 동주민센터를 방문했다. 주민등록을 관리하는 부서를 통해 최후 주소지(말소된 주소지)에 애초 발급받았던 원서류가 보관된다고 해 그것도 요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무청 기록보다 양호한 사진이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


희미해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실망에서였는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자신을 비관하신 건지, 여러 기관을 방문하던 그날 이후부터 줄곧 술을 드셨다고 했다. 깔끔한 방이 다시 더럽혀져 있었다. 자활근로도 스트레스였던지 계속 출근하지 않아 결국 중지 통지를 받기에 이르렀다. 어르신은 다른 일이라도 해서 현재의 거처를, 법률 통지를 받을 주소를 유지하고자 하셨다. 며칠 뒤 다시 또 힘내어 해보자고 다짐하면서 영등포 소재 상담보호센터를 찾았다. 그리고 특별자활근로 일자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여 뒤, 경찰로부터 십지문 조회 결과를 확인했고 각 기관의 공문을 통해 최후 주소지에 보관된 주민등록신청 시 원사진과 십지문을 얻었다. 드디어 법률구조공단으로 보낼 서류를 확보했다.

 

한여름의 장마, 무자비한 복지기관

 

거처 유지를 잘 하시던 어르신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긴 장마로 인해 방에 비가 샜고 방을 옮기는 과정에서 어르신의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일들이 생겼다. 관리인이 방에 물이 샌다고 어르신 허락도 없이 짐을 다른 방으로 옮겼고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다. 일을 마치고 들어온 후 기가 차서 멍하니 있던 어르신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는 같이 짐을 정리하자며, 그리고 법률구조공단에 확보한 서류를 발송했으니 힘내어 기다려 보시자는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10여 일 후 또 일이 벌어졌다. 일하던 상담보호센터에서였다. 요는 ‘우리 기관에서는 특별자활근로 급여 모두를 우리 기관에서 운영하는 통장에 전액 넣어야 한다. 잠은 여기서 자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니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일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안 되겠다 싶어 담당자를 찾아가 어르신 상황도 설명하고 어르신 방세만이라도 내게 해달라, 나머지 금액만 저축을 하도록 해달라고 “읍소”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너무나 명쾌하게 ‘안 된다’였다. ‘그러면 여기서 자면서 일하는 분들 분위기를 망친다’는 게 그의 이유였다. 아! 이 사람 정말 너무한다! 어르신이 법률소송 진행 중이고 이를 위해서는 주소지를 유지해야 하는 데, 이런 가구 상황을 무시하고 본인 사업실적만 챙기는구나! 사회복지를 하는 사람 맞나? 너무 원망스러웠다. 읍소와 거절이 있던 그 곳에 어르신이 없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바로 서대문구 소재 상담보호센터에 특별자활근로를 신청했지만 ‘서울시 일자리 창출 사업이 대폭 감소해 대기가 길어질 것 같다’는 답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용산구 소재 상담보호센터로 전화를 걸어 일자리를 신청해두고 어르신과 함께 방문할 약속을 잡았다.


어르신은 앓아눕기 시작했다. 목요일에 댁으로 방문할 때 실천단 후원금을 통해 얼마간의 방세와 먹거리를 지원했고 어르신 사정을 아는 동료분이 간간이 먹거리를 가져다 드렸다. 인우보증인을 확보해 관련 서류를 작성했다. 그리고 모든 서류가 법률구조공단에 보내졌으며 부산지검으로 우송되어 부산 방문만을 앞두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30일 어르신 몸이 안 좋아 보인다고 관리인 아주머니가 전화를 주셨다. 당시 같은 팀이었던 당사자 활동가가 방문해 간호했고 119를 불렀으나 어르신은 한사코 사양하셨다. 관리인 아주머니께 또 같은 상황이 생기면 바로 119를 불러주십사, 억지로라도 보내주십사 부탁했다.


그리고 31일, 10월의 마지막 날 아침. 조금 전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다는 연락을 관리인 아주머니로부터 받았다. 병원으로 송주상 활동가가 향했다. 그리고 오후가 될 무렵 주거지원을 위해 행정 동행 중이었던 내게 송주상 활동가가 울먹이면서 전화를 주었다.“어르신이 돌아가셨어요...”아!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를 만나보니 계속되는 복통을 호소해 엑스레이를 찍었지만 아무 소견이 없었는데 오후에 통증이 심해 시티촬영을 하던 중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그 과정에서 돌아가셨다는 거다. 위천공이라고 했다. 얼마나 많이 아프셨을까? 어르신을 뵈었다. 눈을 미처 감지 못하셨다. 영안실로 옮기고 돌아서다 나도 모르게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어르신을 아는 실천단 활동가와 아저씨들이 병원으로 오셨다. 그리고 ‘어르신이 애써주셔서 고맙다고 하셨을 거다. 너무 서러워 마시라’는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그냥 보내드릴 수 없었다

 

어르신은 거둘 분이 아무도 없었다. 무연고 장례에 대해 주민센터와 구청 담당자를 통해 물었다. 대신 장례 치르면 안 되겠는지. 대답은 가족의 확인이 없으면 안 된단다. 경찰을 통해 찾았지만, 어르신은 가족을 찾을 수도 없었다. 절차는 무연고 처리자가 몇 분이 되면 화장을 진행하는 거였다. 구청 담당부서를 찾아가 부탁했다. 어르신 가는 길에 함께 하고 싶다고, 언제일지 모르지만 기다릴 테니 꼭 연락해달라고. 구청 직원은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른 오전 약속 장소엔 허름한 은색 봉고가 한 대가 있었다. 김 반장님으로 불리는 분과 송주상 활동가와 함께 올라 탔다. 뒤를 돌아보니 거친 나무로 짠 관 두 개가 있었고, 각각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흰색 천이 덮여 있었다. 접은 주름이 그대로 남아있는 천이었다. 김 반장님이 한쪽을 가리키며 어르신이라고 알려주신다. 차는 벽제로 향했다. 그리고 화장이 진행되었다. 다행히 분골할 때 들어갈 수 있게 해줬다. 어르신의 유골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상자에 담겼다. 따뜻함이 남은 어르신의 분골함을 품에 안고 다시 봉고차에 올랐고 후미진 외길로 얼마간 차를 타고 들어갔다. 그리고 큰 컨테이너 박스 앞에 내렸다. 무연고 인 분골함은 10년간 보관되고 그 사이 친인척이 찾아가지 않으면 모두 매장한다고 했다. 낯이 설어서인지 내부 공간이 매우 크고 높게 느껴졌다. 도서관 책장들처럼 철재로 짜인 틀 위에 어르신의 분골함을 놓아두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멍한 머리로 다시 서울로 왔다.


해가 바뀌고 이듬해 3월, 부산에서 연락이 왔다. 재판을 받으러 부산에 오라는 담당 변호사의 전화였다. 아, 본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살아있음을 증빙하고자 그렇게 애를 쓰셨는데, 조금만 더 계셔주시지.


지금 회현역 6, 7번 출구는 대형 백화점이 생기면서 지하철과 백화점을 연결하는 통로가 생기고 조명이 환하게 밝혀져 이젠 아무도 머물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내눈엔 여전히 오른편 구석에 박스 집을 짓고 조용히 앉아계시던 작은 체구의 이화웅 어르신이 보이는 것 같다. 하늘에선 부디 아무런 아픔 없이, 평안히 지내시길 간절히 바라본다. 그리고 이 세상에 없는 송주상 활동가도 그곳에서 어르신을 웃으며 만날 수 있길 바라본다.

 

 

글 | 김선미(생애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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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홈리스 생애기록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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