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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 생애기록-④] 내 인생을 누가 보상하나 - 강애순
등록일 [ 2017년12월30일 13시04분 ]

12월 18일부터 동짓날인 22일은 '홈리스 추모주간'이었습니다. 홈리스와 무연고자를 애도하고 이들의 존엄한 삶과 죽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 마련을 촉구하는 한 주였습니다. 비마이너는 '2017 홈리스 생애기록팀'이 엮은 '홈리스 생애기록집 III-소리 없는 이들의 삶의 기록' 중 다섯 편을 발췌해 공유합니다. 굴곡진 한국사를 온 몸으로 헤쳐온 사람들의 삶을,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미래를 현실로 살았고,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야말로 우리 사회의 운영 원리를 거짓 없이 보여주는 창이 될 것이기 때문('소리 없는 이들의 삶의 기록' 여는 글 중)'입니다. 

 

▶[홈리스 생애기록-①] 숨죽인 채 반짝이던 반딧불 하나 - 故김한기

▶[홈리스 생애기록-②] 동자동에서 만난 고아원 동지들 - 故유철동

▶[홈리스 생애기록-③] 잊혀진 계절 - 故이화웅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긴 했지만, 고아로 자란 나


강애순 님(62세)은 전라북도 고창에서 팔남매 중 넷째로 자라났다. 애순 님의 아버지는 원래 할아버지, 작은아버지들과 함께 전라남도 영광에서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면서 논밭을 팔아 돈을 다 쓰고, 애순 님이 일곱, 여덟살 때 빈털터리로 도망쳐 나온 곳이 고창이다. 그러는 통에 애순 님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아홉 살 때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기억이) 다 나지요. 냇가에 가서, 어떤 집은 한 집은 우리 아버지가 갖다 쓰고 그 집 가서 살아라 해서 했는데. 할아버지가 있어갖고 옛날에 할아버지가 한복 있잖아요. 이렇게 꼬매서 하는 그거, 냇가에 가서 장갑이나 있어요, 뭐 있어요. 찬 물에 가서 그거 빨아서 삶아가지고. … 물동이, 그 동이 있잖아요. 물동이. 물 이렇게, 애기 업고 물 담아서 줘요. 아니면 지게로 물 져 나르고. 이렇게 해도 수도 틀면 나오기나 해요? 시골에는. … 애기 키우고 뭐. 밥 같은 거 이런 거는 전부 내가 다 했지, 그때. 어려도.”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면 겨우 1학년일 어린 나이에 빨래, 물 나르기, 아기 키우기, 밥하기, 고된 일을 도맡아야 했던 애순 님은 너무 힘들고 외로웠다. “왜 우리 엄마, 아버지가 나를 낳아가지고. 이런 인생길을 가게 만들었나. 힘든 인생을 살게 만드는가.” 원망스러웠다. 심지어 죽으려고 시도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동사무소에서 쥐약 주잖아요. 죽을라고 먹었는데 안 죽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또 뭘 먹었냐면, 옛날에는 석유를, 화약을, 이렇게 방에, 저런 전기불이 아니고 화약 켰잖아요. 그러면 그, 대두병 그, 소주병으로. 유리병. 그걸로 한 병씩 사다 썼잖아요. 불 킬라고. 그걸 한 병을 다 먹어버렸더니, 죽지는 않고 입에서 석유 냄새만 나더라고.”


우리 아버지가 나를 초등학교만 졸업시켰어도

 

또래 아이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 애순 님은 모 심기, 밭 매기, 나락 베기, 산에서 나무하기, 쌀 도정 공장,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긴 했어도 아홉 살 때 이후로는 고아로 자란 셈이었다. 행복했던 기억이라고는 없다.


“행복했을 때는 없는 것 같아요. (...) 내가 부모들한테 너무 사랑을 못 받고 자랐잖아요. 이를테면, 열 달 동안 가져가지고 열 달 동안 낳아서 나 길러준 게 아홉 살까지 길러준 것 밖에 없잖아요.”


특히, 애순 님은 부모님이 자신을 초등학교도 졸업을 못시켜서 글자도 못 보는 눈 뜬 장님으로 살게 했다는 게 한스러웠다. 열일곱 살 때, 서울로 올라와 카센터 직원들 밥해주는 일을 하던 애순 님은 부모님께 돈을 부쳐드리며, 이 돈으로 동생들은 꼭 초등학교라도 졸업을 시키시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애순 님 아래로 남동생, 여동생은 모두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카센터에서) 밥해주는 데 옆에 애가 하나가 한 6학년 정도 되더라구요. 걔보고, 제가 불렀어요. 밥을 해주고 시간이 나서. (...) 불러서, 저, 글씨를 잘 못 쓰는데, 제가 불러주는 대로 편지를 좀 써달라고 했어요. 아버지한테, 다른 자식들은, 눈물이 나올라 해서. 다른 자식들은, 까막눈을 만들었지만, 밑에 동생들 둘은, 제가 돈을 해서 부쳐드릴 테니 학교를 꼭 초등학교라도 졸업을 시키세요, 하고 돈하고 편지하고 부쳤어요. 그래서 걔네들은 초등학교 졸업을 했어요. 저 때문에.”

 


다방 보조에서 주방장으로


얼마 후,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고창으로 내려갔던 애순 님은 스물 둘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새로 일을 시작한 곳은 면목동에 있는 기사식당이었다. 그곳에서 3년간 서빙을 하던 애순 님은, 식당 사장님이 식당을 접고 서대문 로터리에 음악다방을 열자 다방 보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커피 잔도 닦고 ‘아가씨들’ 밥도 해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눈썰미가 있던 애순 님은 보조 일로 만족하지 않고, 커피 배합하는 요령을 곁눈질로 배워 다방 주방장으로 스카웃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보조를 해준 거예요. 밥을 해주면서. 이거를 1년을 그렇게 했어요. 했는데, 보조만 갖고는 안 되겠어요. 그래서 제가 눈썰미가 있어요. 지금은 눈이 나빠 버려서 그렇지만, 그때는. 그래서 그 하는 거를 눈빛, 보조하면서 눈빛으로 배웠어요. 그거를요. 배합해서 갈아서 커피 빼는 거를요. 그래가지고 다른 데로 가서 이제 주방장으로 뛰었어요. 그러니까 월급이 되더라구요. 그 대신에 밥은 내가 했어요. 여자니까 이제. 주방장으로 가면서, 그 대신 뭐를 조건으로 걸었냐. 제가 글을 못 배웠으니까, 원래는, 지금은 모르겠지만은. 다방에 있나 없나 모르겠지만은. 옛날에는 주방하고 카운터하고, 계란 한 개라도 다 재고 정리하고 쓰고, 전표 정리를 해야 돼요. 그래야 그날 저기가 나오잖아요. 그거를 해야 되는데, 그거는 안 하는 조건으로. 그 대신에 내가 쉬는 날도 없이 오전만 목욕하고, 오후에는 가서 다시 일을 도와주는 거예요."


죽도록 사랑한다 해서 결혼을 했는데


서른 살까지 다방 주방장으로 일하던 애순 님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 남자가 매일 같이 다방에 와서 제일 비싼 쌍화차를 시켜놓고는, 주방장이라 원래는 배달을 안 하는 애순 님을 꼭 불러 배달을 시키곤 했다. 결혼을 안 해주면 죽겠다며 따라다니는 남자를 두고, 애순 님은 일 년 동안 지켜보며 고민했다고 한다.


“제가 이제 두고 보니까 술을 너무 먹어요. 그래서 제가 일 년을 봤는데, 애기 아빠 지인, 직장을 다니니까. (...) 지인, 나 아는 언니, 동생. 다섯 명이야, 중마쟁이가. 살으라고만 하는 거예요. 근데 딱 하나가 말리더라고. 아는 언니가. 너 같은 착한 애가, 특히 술을 먹는 사람은 안 된다, 말리는데. 남들은 다 하라고만 하는 거예요.”


술을 너무 먹는 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너도 이제 몸도 안 좋고 고생도 많이 했고, 나이도 많으니 웬만하면 살라”는 어머니 말씀에 결혼을 결심했다. 몸이 안좋아서 임신이 어려울 거라는 걱정과 달리, 결혼하고 바로 다음해부터 연년생으로 딸과 아들을 낳았다.


우리 애들,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참자


실리콘 기술자였던 남편은 일용직으로 수입이 불규칙했지만, 나가서 번 돈을 생활비로 꼬박꼬박 갖다 주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착했으나, 술만 마시면 한 달에 두 서너 번은 애순 님을 때렸다. 그럴 때마다 몇 번이나 보따리를 쌌지만, “내가 못 배워서 아홉 살 때부터 그 고생을 했는데 내 자식만큼은 가르쳐야지”하는 마음에 이혼하지 못했다.


“마음은 이혼을 할라고 맨, 마음을 먹었다가도. 이제 우리 새끼들 저거를 어떻게든 대학을 가르켜서 졸업을 시켜야지 하고. (...) 내 자식은 정말, 사람은 배워야 역시 살아나가는 길이라는 거를 제가 알기 땜에 그렇게 우리 애들을 가르킬라고 기를 쓰고. 참 이 집으로 끌고 댕기면서 돼지고기 몇 근씩 사서, 우리 딸 숙제 좀 한 번 봐달라 그러고. 제가 그러고 손잡고 다니면서 울면서 그렇게 했어요. 저기 그러다가 안 되겠어서 고등학생을 한 달에 얼마씩 준다고 그렇게 해가지고, 딸이 어느 정도 하니까 알잖아요, 이대로. 그러니까는 딸이 숙제를 알켜줘가며 지네들끼리 둘이 해나가더라고. 그래서 가르킨 거예요, 애들을.”


애순 님은 “우리 애들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참자”는 마음으로 27년을 버텼지만, 결국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이혼을 결심했다. 남편뿐 아니라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동생, 동서, 시누이까지 ‘육대일’로 괴롭히는 시가족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보다 못한 딸과 아들도 애순 님한테 이혼을 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혼을 했어요. 육대일로다 저를 팬 거예요. (...) 그래서 이혼했는데, 전화가 왔어요. 왜 이혼했녜 또. 이혼하라고 아들보고 맨날 괴롭히고, 쫓아와서 두드려 패고 해놓고는. (...) 예, 때려요 막. 아무거나 들고 막 와서 살림살이 두드려 깨버리고, 나도 때리고 막. (...) 애들이 그러더라고. 엄마, 아들도 그렇고. 엄마, 우리도 인제 성인이다. 그러니까 이제 고만 매 맞고 이혼을 해라. 엄마도 이제 고만 매 맞고 좀 살다 돌아가셔야 될 거 아니냐.”


삼십 년간의 가정폭력,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한 이혼


마침내, 이혼을 결심한 애순 님은 남편 앞으로 접근금지를 걸어놓고 법률사무소에 찾아가서 삼십만 원을 주고 이혼 수속을 밟았다. 삼십 년 간 가정폭력을 당했지만, 이혼할 때 위자료는 십원도 받지 못했다. 모아놓은 돈도 없고, 집도 사글세로 살았던 탓이다. 오히려 여기저기 맞아서 아픈 몸을 치료하는데 백만 원이 들었다. 돈이 없어 아들의 카드를 빌려쓰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아들의 신용등급이 낮아지자 아들은 화가 나서 이후로 연락을 받지 않았다.


“(생활비로) 쓴 게 아니고, 그때 내가 아들이 인제, 남편이 그 한입도 안 주고 그래서, 생활비를 아들한테 보낸다 해서 난 그게 남편이 아들한테로 보낸 줄 알고, 그거를 내가 병원에를 가야 되는데 돈이 없어서, 아들이 카드를 갖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거를 갖고 이제 아픈 데 여기저기 병원에 다니고 그렇게 해서 쓰다보니까, 아들이 그게 아빠가 줘서 부친 돈이 아니고 그게 그, 예를 들면 은행에 그, 있잖아요. 빌려서 쓰는 카드 있잖아요. 비씨카드 이런 거, 그런 카드였던 거예요. 제가 모르고, 그걸 백만 원을 쓴 거예요.”


아픈 몸으로 혼자 남겨진 애순 님은 보증금 삼백만 원을 모두 까먹고, 집을 나오면서 살림을 모두 내버렸다. 그런데도 아이들 사진이 담긴 사진첩은 버리지 못했다. 애순 님은 서대문 영천시장 건너편 재개발 지역에 있던 버려진 고시원으로 갔다.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그곳에서 5개월 간 생활하며, 아는 사람들한테 얻어먹거나 종교시설에 찾아가 식사를 해결했다.


나를 살려준 사람, 그러나


그러던 어느 날 영천시장 뒤편에 있는 공원에서 ‘지금 남편’을 만났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영천시장에서 1년간 식당을 운영했을 때 손님으로 알던 사이였다. 어려운 사정을 듣더니, 무료병원에 데리고 가고, 쪽방을 얻어주며 애순 님을 수급자로 만들어줬다.


“거기 공원에서 우리 아저씨를, 내가 거기 고시원에서 자면서 거기가 있으니까, 와서 보더니, 어디서 지냈냐고 하면서, 왜 이렇게 됐냐고 이제 이렇게 돼가지고, 인제 사정을 일러주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됐다고 얘기를 했더니, 자기가 성가병원 쪽에다가 방을, 자그마한 쪽방을 하나 얻어가지고, (...) 예. 나를 살려놨으니까. 그래서 살아났어요, 내가. 제기동으로, 성가병원으로 데꼬 다니면서 나를 살려놓은 거야. 병원으로 끌고 댕겨가지고. 그래가지고 수급자를 만든 거예요.”


‘생명의 은인’이었다. 둘이 나오는 수급비를 합쳐서 백만 원 안팎이지만, 그 돈에서 얼마씩이라도 모으고, 둘이 맞춰서 살면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또 다시, 술, 가정폭력. 삼십 년을 참고 살았는데, 또 다시 맞으며 살 수는 없었다. 얼마 안 되는 수급비를 아끼고 아껴서 한 푼 두 푼 모아놓은 돈도, 남편이 술 먹고 사고 친 벌금으로 내야 했다. 이번에도 위자료는 없다. 오히려 애순 님이 남편보고 따로 나가 살라고 방 보증금을 준다.


“방세 이십만 원 주고. 남진이(나머지)는 순 그냥, 적금하고 사랑방에다 다 몰아놨어요. 쪼끔만 쓰고 그냥. 그러고 이제 밥도 나 솔직히 말해서, 밥도 여기 인정복지관 같은 데도 가서 먹고. 여기 와서도 오백 원씩. 그때는 오백 원씩 받았어. 오백 원씩 주고도 사 먹기도 하고 그랬어요. 왜냐면, 돈이 덜 들어가게 모을라고. 그래 갖고 돈을 모은 게 그렇게 모았는데, 지금 도저히, 그냥 하면 괜찮은데, 뭐 오만 원, 십만 원짜리만, 낸 거 그거 빼놓고. 요번 초에요. 얼마 낸지 알아요? 벌금을. 오백오십만 원을 냈어요. (...) 그냥 줬어요. 그냥 주고. 방세 보증금을, 내가 여기 살고, 백만 원 줄 테니까 갖고 나가라고.”


인생을 좀 엽엽하게 살았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까


아홉 살 때부터 안 해본 일 없이 힘들게, 누구보다 노력하며 살아온 인생이지만 애순 님은 자신의 인생을 칭찬할 수가 없다. 부모님을 챙기고, 동생들을 챙기고, 자식들을 챙기고, 평생을 참고 희생하며 살아왔지만 결국 이렇게 아픈 몸만 가지고 홀로 남았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좀 더 약삭빠르게, 좀 더 독하게 살았으면 어땠을까, 후회가 된다.


“제가 인생을, 좀, 엽엽하게 잘 살았으면은, 이렇게 되진 않았을까. (...) 뭐 이렇게 내가, 다른 사람들 같이 좀 야물게, 난 독하질 못해요. 그랬으면, 좀 이렇게까지 인생이 되지 않았을 건데.”


아무도 보고 싶은 사람도 없지만, 아들은 가끔씩 보고 싶다. 길을 가다가도, 아들처럼 키 큰 청년이 지나가면 우리 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은 인생은 혼자서 구속받지 않고 조용히 살면서, 수급비를 조금씩 모아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빚진 돈을 갚아주고 싶다.


“딸 전화번호도 모르고. 아들도 전화 해보지도 않고. 안 나오면 가슴 아프니까. 내가 돈을 모아놓고,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어야지, 내가 아들한테 성의라도 한 백만 원이라도 쥐어줄 수가 있잖아요. 근데, 남자하고 살고 있으니까 못 하잖아. 그렁께 이제는 나 혼자 살면서 악착 같이 모으고 아끼고 써서, 방세 주고 살면서, 어떻게 인연이 닿으면은 죽기 전에 한 번이나 보고 죽을랑가 모르겠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거죠.”

 

 

글 | 강민수(생애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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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홈리스 생애기록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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