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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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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착한 삶, 독방을 나가다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⑦-2
김성환 씨의 이야기, 두 번째
등록일 [ 2017년12월31일 14시18분 ]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 ▶빌어먹을 삶, 나머지 인간

 

 

인천 생활을 접고 형이 있는 안양으로 올라왔다. 안양에서 깡패 생활을 했다. 좀처럼 바닥 인생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길 위를 흐르다 미끄러져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빠졌다. 


형님, 한 방 하고 땡칩시다. 


거절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아는 동생 둘과 안양에서 자산가로 소문난 이의 집에 칼과 몽둥이를 들고 들어갔다. 금고에 있는 돈만 챙겨 나오려고 했다. 저 돈만 있으며 가게 하나 차려 번듯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역전을 꿈꿨으나 방심하는 사이 그 남자가 


강도야! 


외치며 4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죽었다. 1년 7개월의 도피 생활이 이어졌다. 사무치게 후회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수배 도중 형을 만난 적이 있다. 형은 새로운 형수를 맞아 여전히 스탠드바에서 일하며 살고 있었다. 여전(如前)히, 전과 같이, 없이 살았어야 했다. 인생역전, 바닥 인생 털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꿈은 꿈으로 두었어야 했다. 


87년 8월, 내 나이 서른둘에 잡혔다. 


세상엔 꼭 필요한 사람과 필요치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피고인은 어느 쪽일까요. 피고인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합니다. 


검사는 내게 사형을 구형했다. 선고 전까지 수갑이 채워진 채 독방에 갇혔다. 내 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세상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영아원에서부터 선감학원, 선인원, 삼청교육대 그리고 교도소.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 존재가 어떤지도 모르고, 이렇게 죽는구나. 갑자기 너무 살고 싶었다. 나 좀 살려달라고, 신에게라도 빌고 싶었다. 살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다 견디며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 판사는 15년을 선고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마음 다르다지. 죽는 줄 알았는데 살려준다고 하니 이젠 살아가는 게 걱정이었다. 여기서 15년을 어떻게 사나. 숨이 막혔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pixabay.com)

삼천리 독보권(三千里 獨步權, 교도관 감시 없이 홀로 다닐 수 있는 권리)을 빼앗겼다. 교도관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했다. 그 삶이 견디기 힘들어질 때면 난동을 부렸고, 그로 인해 사지는 연쇄(쇠사슬)에 묶였다. 두 다리가 연쇄에 묶인 채 질질 끌려다녔고, 손을 사용할 수 없어 개처럼 밥을 먹었다. 화장실 갈 때도, 잘 때도 손발을 풀어주지 않았다. 뼛속까지 골병이 들었다. 내가 나를 포기하니 그곳에서 난 ‘문제수’로 찍혀 청송교도소로 이감됐다. 호송차에서 내리자마자 매타작이 쏟아졌다. 


야이 쌔끼들아, 여기는 갱생(更生)이다, 알았나? 일어서, 갱생. 앉아, 갱생, 
갱생! 갱생! 


다시(更) 살아(生)나려면 우선 죽어야 했다. 이감된 교도소에서 가져온 팬티와 비누, 치약, 칫솔을 모포에 둘러싸안고 오리걸음으로 감방까지 기어갔다.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외쳤다. 


갱생! 갱생! 


재수 없게 내 방은 제일 높은 3층이었다. 계단도 오리걸음으로 기어 올라갔다. 우린 모두 독방에 갇혔다. 한 평도 되지 않는 방에 화장실이 있고 세면대가 있었다. 시찰구(視察口, 재소자 동정을 살피기 위해 감방 문에 만든 감시 구멍)에 교도관 모자만 보여도 


갱생!


외쳐야 했다. 딴짓하다 걸리면 관구실에 끌려가 물에 젖은 담요에 말려 두들겨 맞았다. 통방(옆방 재소자와 창문 등을 통해 대화하는 행위)하다 걸리면 작살나니 통방도 할 수 없었다. 영치금으로 물건 구매도 안 되고 아무 읽을거리도 없었다. 정좌로 앉아 시커먼 벽을 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일과였다. 내가 미쳐가는 거 같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므로, 사람이, 죽었다. 자살이었다. 그들은 다시(更) 살아(生)나려면 죽지 않을 만큼만 몰아붙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성경책을 한 권씩 넣어줬다. 우린 그 책을 이스라엘 무협지라고 불렀다. 어느 날엔 빵을 하나 넣어줬다. 빵보다 글자가 반가웠다. 빵 봉지 뒤에 적힌 식품 재료, 첨가물을 달달 읽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사식을 구매할 수 있게 됐다. 나눠 먹을 순 없었다. 사식 받는 수감자와 사식 나눠주는 소지 사이엔 은밀한 거래가 오갔다. 소지들은 배식 때 그들에게 밥과 반찬을 조금씩 더 줬다. 저 사람은 빵도 먹고 우유도 먹어서 조금만 먹어도 될 텐데. 오히려 밥과 반찬을 좀 더 먹어야 할 사람은 아무것도 사 먹지 못한 나 같은 사람 아닌가. 이곳에도 부익부 빈익빈이 있었다. 


갱생! 


또다시 정신교육이 시작됐다. 


이곳에서의 교육이 제 자양분이 됐습니다. 교육을 통해 전 진짜 새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전 이제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 국가에 충성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교육생 소감문을 썼다. 일반교도소로 환소되기 위해 내가 얼마나 새사람이 되었는지 간증해야 했다. 그러나 난, 신설된 청송2교도소로 이감됐다. 


겨울은 혹독했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담요 한 장 깔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동상에 걸렸다. 몰래 속옷을 여러 개 겹쳐 입었는데 교도관이 일어나보라며 엉덩이를 찔렀다. 두들겨 맞았다. 


겨울엔 목욕을 감방이 아닌 목욕탕에 가서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목욕시간은 단 5분. 감방에서 목욕탕까지 오가는 시간까지 포함한 시간이다. 짧은 시간에 대해 수감자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교도관들의 짜증도 극에 달한 때였다.  


갱생! 


목욕탕에 가기 위해 옷을 홀딱 벗고 감방을 나오며 외쳤다. 


엎드려! 


교도관은 알몸인 내게 항문을 보자고 했다. 항문에 연장을 숨긴 것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다. 엎드리지 않았다. 왜 나한테만 그래 이 새끼들아. 목욕 안 해 이 새끼들아. 난 다시 감방에 들어갔다. 두들겨 맞았다. 


난 교도소에서 숫자(162번, 6301번, 5024번, 189번,…)였고 도둑놈(교도소에서 재소자를 칭하는 용어)이었으며 개새끼였다. 보따리장수처럼 모포에 치약, 칫솔, 팬티, 비누를 싸들고 전국의 교도소를 유랑했다. 광주, 대전, 진주, 안동, 목포, 대구. 청송교도소에 비하면 일반교도소는 천국이었다. 독방보다 일반수들과의 합방이 훨씬 나았다. 그러는 사이 서른 둘은 마흔일곱이 되었다. 2002년 11월 20일, 난 출소했다. 형이 있는 안양으로 갔다. 잘 살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


이 새끼가 바가지를 씌우나. 무슨 버스비가 이렇게 비싸?
광역버스니깐 비싸죠. 


출소 후,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다. 버스를 탔는데 버스비가 너무 비쌌다. 버스 기사 귀싸대기를 한대 후려쳤다. 그때 알았다. 버스엔 마을버스, 시내버스, 광역버스가 있으며 광역버스는 시내버스와 달리 비싸다는 것을.


죄송합니다. 제가 출소한 지 얼마 안 돼서 몰랐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신생아처럼 이 세계가 낯설었다. 내 세계는 선감학원이었고 삼청교육대였고 교도소였다. 갑자기 난 1987년에서 2002년으로 15년의 시간을 건너 물적 기반과 심적 문법이 다른 세계로 불시착하듯 떨어졌다. 사람들은 공상과학에서처럼 핸드폰을 들고 거리에서 통화하고 있었다. 난 기역니은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하지만 사회는 친절하지 않았다. 서울역으로 올라와 노숙을 시작했다. 차라리 이 생활이 익숙했다. 아니, 익숙했을 뿐이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자괴감이 나를 파먹었다. 나는 내가 던져진 이 세계에서 도망쳤다. 약물 중독. 도망친 세계에 환청이 찾아왔다. 


나를 구원해준 건 노숙인 대상으로 무료급식 봉사를 하던 천주교 신자였다. 그이가 운영하는 미인가 시설에서 삶을 회복하며 약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형이 있는 안양으로 왔다. 늘 그랬다. 먼저 오라고 한 적 없으나 우린 서로 말없이 먼 곳에서 찾아왔고, 그 말없음이 서로를 기대게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언덕이었다. 


인천에서 차 사고가 크게 난 적 있다. 형은 내 전화 한 통에 늦은 밤 비를 쫄딱 맞고 안양에서 인천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왔다. 형이 있어 좋긴 좋구나. 마음이 든든했다. 형이 내 고향이다.

 

자신의 유년을 잡아먹었던 선감학원 터에 세워진 선감역사박물관에서(2017년 8월 19일). 오른쪽 네번째가 김성환 씨.

2006년 형이 있는 안양에 자리를 잡았다. 때마침 삼청교육대 피해보상금 560만 원을 받아 보증금 200만 원을 내고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다. 그런데 딱히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었다. 아침에 눈 뜨면 천장이 보이고 앉으면 벽이 보였다. 내게 이 세계는 벽이었다. 사방에 벽이 쳐질 때 난 독방에 갇혔다. 그 벽에 나의 이상(理想)을 그리며 벽 너머의 세계를 희구했다. 벽이 아닌 사람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고, 내 존재의 쓸모를 찾고 싶었다. 이 방을 제발 나가고 싶었다. 벽을 더듬어 어딘가에 있을 문고리를 찾아 열고, 집 앞 복지관에 갔다. 복지관에선 사회 적응이 어려운 나 같은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봉사 같은 거 해보시면 어때요? 


프로그램 끝날 때쯤 사회복지사가 제안했다. 부모 탓, 세상 탓 참 많이 했는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날 도와준 이들이 있어 죽지 않고 이만큼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배고플 때 내게 찬밥 한 덩어리 주던 사람, 우산 저당 잡히고 내게 빵조각 나눠주었던 이, 출소하던 날 기차에서 오렌지주스에 빨대 두 개 꼽아 같이 나눠마시자고 건넸던 할머니. 날 구원해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도 타인의 삶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몇 년 전부터 복지관 식당에서 배식과 청소 봉사를 하고, 지역 장애인단체에 가서 손을 거들고 있다. 



정말 개 같은 인생이었다. 나는 야바위꾼이었고 깡패였고 사채업자였고 홈리스였고 약물중독자였고 선감학원과 삼청교육대의 피해생존자이고, 전과자다. 지울 수만 있다면 지난 모든 과거를 지우고 싶다. 죽고 싶어서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선감학원에서만 6년 넘게 있었다. 혹시 아버지가 나를 찾진 않았을까. 선감도가 외진 곳에 있어서 못 찾는 거 아닐까. 만약 아버지가 나를 찾았다면 지금 난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못 배운 게 한이다. 내가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라도 할 수 있었다면. 제대로 글을 배운 적이 없다. 한자도 큰집(교도소를 칭하는 은어)에서야 익혔다. 한자고 영어고 간에 간판 같은 거라도 보이면 손가락으로 글씨 써서 익히는 게 습관이다. 


어린 시절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 누구도 나의 미래를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기약 없는 미래보다 당장 오늘 한 끼가 갈급했다. 아무도 내게 하지 않았던 그 질문을 이제야 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본다. 


성환아, 넌 커서 뭐가 될 거야?
운동 좋아하니깐 운동선수, 아니면 체육 교사. 혹은 형사, 혹은 고아원장. 


내게도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정의롭게 살고 싶었고, 나처럼 부모가 없는 아이도 이 사회에서 뿌리내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8살이 되면 학교 가고, 성인 되면 군대 가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하며 아이 낳고 사는 삶. 그런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제일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버린 거 같다. 그래, 살려고 산 게 아니라 '살아'진 거였다. 

 

11월 23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선감학원 사건 진상규명 요구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겪은 피해를 증언하고 있는 김성환 씨(왼쪽).

 

내 나이 예순둘. 선감학원에서 먹은 밥이 생각난다. 반찬은 새우젓, 밴댕이젓 따위였고 그조차도 시커멓게 썩은 거였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난 젓갈 들어간 음식을 먹지 못한다. 


과거는 끊임없이 오늘에 침투한다. 과거의 내가 그림자처럼 붙어 나의 발밑에서 수런거린다. 나는 사과받고 싶다. 내 어린 시절을 몽땅 빼앗아간 국가에게. 한창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야 했던 그 시간을 빼앗아간 국가에 제대로 사과받고 싶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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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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