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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 생애기록-⑤] 내 같은 인생도 있을까? - 김정호
등록일 [ 2017년12월31일 15시12분 ]

12월 18일부터 동짓날인 22일은 '홈리스 추모주간'이었습니다. 홈리스와 무연고자를 애도하고 이들의 존엄한 삶과 죽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 마련을 촉구하는 한 주였습니다. 비마이너는 '2017 홈리스 생애기록팀'이 엮은 '홈리스 생애기록집 III-소리 없는 이들의 삶의 기록' 중 다섯 편을 발췌해 공유합니다. 굴곡진 한국사를 온 몸으로 헤쳐온 사람들의 삶을,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미래를 현실로 살았고,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야말로 우리 사회의 운영 원리를 거짓 없이 보여주는 창이 될 것이기 때문('소리 없는 이들의 삶의 기록' 여는 글 중)'입니다. 

 

▶[홈리스 생애기록-①] 숨죽인 채 반짝이던 반딧불 하나 - 故김한기

▶[홈리스 생애기록-②] 동자동에서 만난 고아원 동지들 - 故유철동

▶[홈리스 생애기록-③] 잊혀진 계절 - 故이화웅

▶[홈리스 생애기록-④] 내 인생을 누가 보상하나 - 강애순

 

어린 시절


나는 경상남도 통영군 산양면 풍화리 359번지 어촌에서 1960년 4월 열 나흗날 오후에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두 살 때인가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하녀가 있을 정도로 호화스럽게 먹고 살았던 부유한 최 씨 가문에서 태어나 컸는데 대추나무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져 떨어져 머리를 다치고 고막이 나갔다고 한다. 통영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놀러갔다가 아버지를 만났고 가정 형편이 힘든 집에 와서 고생 많이 하셨고,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남에게 젖을 얻어 먹여 키웠다. 걸음마를 하게 되면서 나는 논도 있고 밭도 있고, 먹고 살만한 집으로 가서 풀을 베다가 소꼴도 먹이고 겨울이면 소죽도 쒀주고 소똥도 치우며 살았다. 명절 때면 티 하나 얻어 입고 밥 얻어먹는 게 다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초등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학교를 다니진 않았다. 대신 여덟, 아홉 살 때부터 농작물을 팔러 다녔다. 시금치, 마늘, 상추 같은 걸 캐다가 저녁에 다듬어서 단을 만들어 물을 주었다가 새벽 2, 3시에 주인아주머니는 이고, 나는 지고 사십 리 산길을 매일 걸어 팔러 다녔다. 돈 1원인가를 주면 과자도 사먹고 했는데 어린 나는 그런 맛에 어깨가 빠질 정도의 그 무거운 짐을 지며 그렇게 살았다.


뱃사람


그러다 어느새 나이가 열네 살 정도가 되어 배를 타게 되었다. 사회에 첫발을 딛게 된 거다. 1974년 6월, 동지나해상 장어 통발 배를 탔다. 대나무를 꽈서 통발을 만들어 정어리와 멸치를 넣어 밑밥을 해가지고 통발 장어를 잡는 거였다. 처음 배 타고 나갔을 때 태풍 ‘길다’를 만나 죽다 살아 돌아왔다. 오니까 동네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그 뒤 50마력짜리 야끼다마 통통배, 대구리 배, 그리고 세월이 좀 흘러가서 스페인 라스팔마스 주, 그 험한 곳에서 썩어가는 배를 수리해서 원양 트롤리까지 타게 되었다. 그때는 다른 회사에 한 달에 900달러, 1000달러를 받고 팔려간 거였다. 1년 계약을 하는데 그 안에 돌아오면 항공비와 비용을 다 물어야 했다. 그러니 올 수도 없고 무척 힘들었다. 그리고 좀 더 큰 배를 타게 되었는데 처음엔 잡화선을 탔고, 냉장운반선을 한 5~6년 탔고, 케미컬 탱크선도 탔다. 그런 식으로 배를 탔다. 1981년에 배에서 내려 징병 신체검사를 받고 방위로 해양경계근무를 서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를 한 번 만났다. 당시 연세가 예순 하나이셨던 어머니는 귀가 먹어 말도 듣지 못했는데 몹시 초라했다. 따뜻한 밥 한술 내 손으로 못해드리고, 마음은 있어도 금가락지 하나 못해준 나는 자식된 도리로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교도소도 사람 사는 곳


내 인생이 파란만장하게 된 계기가 있다. 그 때 당시 동네에 양귀비가 많았다. 나는 밭에다 양귀비를 순산하게 되었다. 상세하게 얘기할 수 없지만 내가 제조 과정을 잘 안다. 당시 양귀비로 인해 사건이 벌어지자 보건사회부에서 나왔을 때 내가 제조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 나중에 내가 출소하고 나서 알았는데 당시 시가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내가 잘못된 것은 서울 성동구 모병원의 원장이 자기가 필요하여 산다고 해서 내가 임시로 액을 추출해서 600g을 갖다 줬는데 그게 문제가 되어 걸린 거다. 그 때만해도 나는 파출소라는 것도 모르고 죄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 다만 돈을 좀 만들 목적 그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죄가 되고 그것도 큰 죄가 된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래서 10년 형을 받고, 만 5년 1월 실형을 살았다. 전국에 몇몇 교도소를 돌며 자격증도 여럿 따고 1급 모범수가 빨리 되었다. 사람들은 교도소 안에서 어떻게 사냐 하지만 그 안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자기만 사람답게 행실하면 나름 괜찮다.


사랑한 여자와 가족


교도소에 있다가 이 사회에 나올 때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고 기가 막혔다. 결국 나는 교도소에서 나와 바로 다시 배를 타게 되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드니까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전엔 안보이던 것도 보이고 좋다, 나쁘다 판단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해외에 나갔다가 귀국 하면서 그 당시 상당한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 때 사랑을 느낀 여자가 있어 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여자가 돈을 모아주겠다고 해서 믿고 맡겼다. 아파트를 사라고 몇 년 동안 2,400만원인가 2,500만원인가 엄청 큰돈을 보냈다. 부푼 기대를 하고 오니까 그 여자는 어느 무당하고 살고 있었고 돈도 하나도 없었다. 실망이 컸고 원망스러웠고 좌절감을 느꼈다. 몇 년 후에 그 여자가 돈을 몇 백 만원 가져왔는데 사람 자체가 보기 싫었다.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 돈으로 술 마시고 다 써버렸다. 그런데 그런 일이 한 번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다. 인천에서 교육을 받고 기관사로 마지막 배를 탄 게 해안 폐기물을 공해상에 갖다버리는 운반선이었는데 그 배 이름이 안국1호였다. 하선 날짜가 1998년 5월 12일이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여기서 어머니 얘기를 다시 해야겠는데 배 타고 외국에 있다가 한국에 오니까 돌아가셨다는 거다. 어머니는 너무나 고귀하신 분이신데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멍해서 몇 년간 정신적으로 잊히지 않고 떠올랐다. 5월 28일 화장을 했다는 기록은 남겨놨지만, 어머니가 어디가 아프셨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 나는 불효자식이다. 나는 삼형제 중 막내인데 첫째 형이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큰아버지도 배타고 풍파 만나 돌아가셨는데 그 큰 일이 1년 안에 다 일어났다. 내게는 둘째 형만 남았는데 어디 살아있다는 것만 안다. 그러니 가족은 아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고장 난 심장


배를 타고 미국에 갔을 때, 나 같은 죄명 가진 사람은 신상이 떠버리니까 육상에 내리지도 못하게 했다. 사람 죽이고 나쁜 짓 한 사람들은 다 내려서 기분 좋게 놀다오고 쇼핑도 하고 활발하게 다니는데 말이다. 미국 뿐 아니라 이 사회 어디서도 진짜 안 받아주고 사람 취급도 안 했다. 그래서 내가 사회에서 낙오가 된 거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한테 나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남을 나쁘게 만드는 사람도 아닌데... 그래서 그냥 그때부터 얻어먹고 다녔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 그런 식으로 다녔다. 그런데 배에서 내린 때부터 몸이 많이 안 좋은 상태였다. 배를 타고 생활하던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심장이 너무 많이 안 좋아져서 일을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서 배에서 내렸던 거다. '뱃사람 손에 물 마르면 돈 떨어진다.'는 옛말이 있다. 그 말대로 1년도 안되어 돈이 다 말라버렸다. 그때부터 할 게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용역 일을 했다. 근데 심장이 말을 안 들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두세 번 정도 멈추다가 많을 때는 열 번도 멈출 때가 있었다. 심장이 멈추면 그 자리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가슴이 쪼이고 머리가 터지면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했고 술을 마셨다. 목숨만 붙어있었다뿐이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병원에 가보지도 못했고 생활했다. 몸이 많이 허약하니 천안에 있을 때 일하러 가도 안 받아줬다. 종이와 박스를 주워 살았는데 종이 팔면 몇 백원 받았고 몇 백 원 더 보태 음료수를 사 먹었다. 한번은 어느 할머니가 “젊은 사람이 할 일 없어 이런 일을 하냐?”며 종이를 발로 차는데 그 자리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인천에 갔고 여인숙 옆방 사람이 일하는 데를 데리고 갔는데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 해서 검진을 했는데 폐결핵이 나왔다. 그러니 그 회사에서 안 받아주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17~8년 전쯤 되는데 인천주안보건소를 연결시켜주었다. 보건소에서 한 달 치 약값으로 800원을 달라고 했다. 여인숙비가 9만원이었다. 먹어야지, 일 해야지, 병은 나아야겠고, 산목숨이라 살아야겠는데 너무너무 힘들었다. 폐결핵 약을 먹으면 힘이 없고 오줌도 피가 나오고 진짜 비참했다. 그래도 술 안 먹고 몸가짐 잘 하고 일도 하고 참아가면서 약을 안 거르고 꾸준히 먹고 하니까 9개월 만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완치되고 다시 또 술을 먹고 나태한 생활을 하게 됐다. 그러니까 몸이 다시 망가져갔다. 심장이 망가졌다. 심장이 망가진 걸 안 것은 천안에 있는 천주교 쉼터에서였다. 거기서 내가 죽을 지경이 되어 큰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심장이 심각한 상태인 것도 알게 되었고 당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노숙생활


내가 천안에서 노숙하던 시절에 용역일 갖다오면 소주를 한 20병 이상을 사서 산 속 나무 밑이라든가, 전봇대 옆 허름한 보루꾸 담이라든가, 사람들이 잘 안 뒤질만한 장소에 몇 병씩 넣어두곤 했다. 아무리 내가 머리가 나빠도 그 술 넣어둔 것은 생각이 났다. 돈 떨어지고 먹을 것 없고 배고플 때 꺼내 마셨다. 우리 같이 심장 안 좋고 폐결핵 있는 사람은 회사에서 좋게 안 본다. 일을 잘 안 보내준다. 그래도 나가서 혹시나 일 보내줄까 기다리다 8시, 9시. 해가 중천에 뜨면 오늘도 틀렸구나 싶어 돈 천원 갖고 있는 거에다 동전 몇 개 얻어갖고 쭉 병나발을 분 다음, 여기저기 숨겨둔 술을 꺼내 저녁때까지 마시는 거다. 1년, 2년, 3년 계속 이렇게 술을 먹고 다니다보면 길거리 가다가 쓰러져버리고 심장 멈추고 나도 모르게 이성 한 번 잃어버리면 필름이 끊기는데 계속 끊긴다. 술을 조금만 먹어도 끊겼다. 많이 마셔서 심할 때는 고랑창에 쳐 박혀 거의 죽을 지경이 되면 119가 와서 싣고 가서 살려놓았다. 내가 노숙해봐서 알지만, 길거리에, 지하도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 중엔 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 세상은 많이 배우고 잘 입고 잘난 사람에게만 고개 숙이고 그들 말에 귀 쫑긋 세우는 그런 세상이지만, 힘없고 갈 곳 없는 사람도 잘난 사람들보다 생각의 범위가 더 넓다. 몸이 아프고 심장이 멈추고 정신적으로 고달프게 산 인생이라 죽고 싶은 마음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었지만 진짜 죽을 때가 되니까 ‘조금 더 살면 안 될까? 그래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쨌든 그리고 나서 서울 성동구 용답동에 비전트레이닝센터라고 있는데 거기서 만 3년간 생활을 했다. 그랬다가 인천에 밥 얻어먹는데 갔다가 산골로 들어갔는데 배가 고파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또다시 용답동을 찾아갔다. 그 전에 있을 때는 정신질환 치료사업, 알코올 치료사업, 노숙 치료사업 이렇게 세 가지를 했는데 다시 가니 알코올치료와 노숙치료는 없애고 정신치료사업만 하고 노숙자는 안 받아준다는 거다. 그래서 서울역 다시서기센터에 연락해 소개를 시켜줬다. 서울역에서도 자고, 지하도에서도 자고, 벤치에서도 자고 노숙생활을 했다. 2000년도쯤 됐을 거다. 그때 당시 다시 서기도 들어온 지 얼마 안됐을 때다. 다시서기 치료소도 있다. 서울역 광장에서 내려가면 지하도에 두 군데 잘 수 있는 곳이 있다. 큰 데는 근 80명, 100명 정도 잘 수 있다. 사람들이 거기는 술 먹고 와도 냄새 나도 상관없이 다 받아준다. 사람이 너무 많고 밤 12시, 1시 되면 그 위 다시서기 사무직 보는데다가 자리를 통째로 깔고 거기서 자기도 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그 생활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동자동 선반지기


그 생활을 하다가 서울 용산구 동자동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전에도 동자동에 와보긴 했지만 정식으로 들어온 건 2012년 11월 16일이다. 내가 심장이 많이 안 좋으니까 다시서기에서 의뢰서를 발급해주고 억지로 동부병원에를 데려갔는데 그때 이보라 과장을 만났다. 과장이 바로 입원하라고 했는데 무서워서 입원 안 하고 나와 버렸다. 그로부터 1년 뒤 입원을 했다. 입원해서 보니까 심장이 어머어마하게 안 좋은 상태였다. 맥박이 39회고, 심장이 멈춰 버린 거다. 느낌이 죽을 것만 같았다. 2차 병원인 동부병원에서는 3차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국립의료원으로 가서 접수하면서 돈이 얼마 들어도 상관없으니 최고로 잘하는 의사로 해달라고 했다. 그때 돈이 몇 만원 있었다. 의사에게 나는“조금만 더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했고, 의사는 한참을 가만있다가 간호사를 부르더니 바로 응급실로 옮겨서 주사를 주고 입원을 시켰다. 각서를 쓰고 3일 후에 심장 시술을 했다. 허벅지부터 와이어 두 가닥을 넣어 심장을 뚫었다. 의사는 “하루라도 약을 빼먹으면 당신은 못삽니다.”라고 했다. 그 의사가 지금도 내 주치의다. 살아나니까 자꾸 아픈 데가 드러났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수술을 받고 3일 뒤 나왔다. 그때가 2013년 9월이었다. 동네에 나가니 마침 동자동 사랑방 주최로 추석행사를 하고 있었는데 주민노래자랑을 한다고 해서 기분도 괜찮으니 노래 한 곡 하자 해서 참가비 천원을 주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다. 노래를 엄청 세게 불러서인지 노래를 부르고 나서 화장실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심장이 딱 멈춰버린 거다. 그런데 다른 때와 달리 바로 살아났다. 그래서 ‘이제는 살 수 있다’ 자신감이 생겨났고 그때부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노래자랑에서 난 3등을 했고 화장지를 선물로 받았는데 기분이 엄청 좋았다. 그 뒤로 돈 5만원 들고 바로 동자동 사랑방조합에 가서 가입을 했다. 이제는 ‘언제 내가 아팠던가? 언제 내게 그런 일이 있었던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다 잊고 살고 있다. ‘삶도 꿈도 자기가 개척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이제는 살아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있다. 어찌됐든 죽지 말고 살고 봐야 된다 느낀다. 남을 위해 살아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내가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라 생각한다. 사람들과 서로 편안히 지내면서 진짜 욕심 없이 그렇게 살고 싶다. 사람들은 욕심 없이 산다, 편안히 산다 그러지만 다 건성이라는 게 눈에 보인다. 아니꼽고 더러운 것도 참고 지내다보면 맘이 편해질 때가 있다. 내 자신도 그럴 때가 있지만 이 세상이 과장된 게 많아 오바이트가 나올 때가 있다. 나는 이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동자동에 와서 그런 걸 느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공부를 했다. 경우에 따라 눈물도 흘릴 줄 알아야 하고 거기에서 삶이 어떻다는 것을 내가 가슴으로 많이 느꼈다. 마음을 즐겁고 편하게 살아야 한다. 그게 진짜 건강에도 좋다. 현재 나는 동자동 쪽방에 선반을 직접 만들어 달아주고 있어 일명‘선반지기’로 불린다. 내가 앞으로 더 헌신적으로 한다는 것보다도 ‘생각 없이 더 해주자’하는 생각이고, 없는 사람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생겼다는 것이 사실 기분 좋다. 달리 내가 배불러서 배부른 게 아니고, 내가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다 해서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래서 힘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우리 동자동 사랑방에서 많이 배우고 앞으로 많이 더 느끼고 배워야겠다.


생애기록 이유


내가 이번에 크게는 아니지만 나의 생애기록을 남기려는 것은 홈리스행동 활동가들 때문이고, 솔직히 죽으면 인생이 다 허무하기 때문이다. 홈리스행동이 너무너무 감사하고 좋은 데, 나중에 동자동에 들어와서 알게 되었다. 내가 서울역에 왔다갔다 다닐 때 거리에서 내가 얼어 죽을까 싶어 따뜻한 차 한 잔을 주었던 것이 홈리스행동 활동가들이었던 거다. 그들이 홈리스 생애기록을 한다길래, ‘그럼 좋다, 비록 몇 살 안 되지만 내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싶어서 이렇게 참여하게 됐다.

 

 

글 | 선동수(생애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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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홈리스 생애기록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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