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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나이에 전국을 떠돌던 아이, 그에게 국가는 없었다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⑧-1
김성곤 씨의 이야기, 첫번째
등록일 [ 2018년01월12일 12시53분 ]

1984년에 태어나 91년에 처음 공교육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공장에 다니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컸지만, 끼니를 거른 적은 없이 살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입시 스트레스에 치여 살던 와중에, TV에서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집회를 보고 난 뒤 ‘대학 들어가면 저기부터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별 탈 없이 대학에 들어갔고, 원 없이 데모를 하러 다녔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때와 별 다르지 않은 ‘삐딱한’ 사상을 지닌 채로, ‘삐딱하게’ 살고 있다.


이것은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생애를 소략한 것이다. 이 한 문단의 생애사를 곱씹으면서, 이를 다시 한 단어로 요약하면 무엇이 될까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나는 그 한 단어가 당연히 ‘삐딱하게’라고 생각해 왔다. 언제나 국가, 사회, 학교 등 나를 둘러싼 거대한 것들에 대해 ‘삐딱하게’ 말했고, ‘삐딱하게’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런 투의 글을 쓰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김성곤 씨를 만나고 난 후 그동안 내가 큰 착각 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삐딱하게 본다 한들, 사실 나는 본질적으로 국가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84년에 태어났으며, 91년에 공교육의 수혜를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리고 하○○, 박○○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국가가 발급해주는 증명서 한 장이면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존재증명에 대해 국가가 언제라도 보증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의문에 부칠 필요도 없어 보이는 이 사실, 즉 나의 존재 근거가 애초부터 국가에 의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의 생애사를 들으며 비로소 체감했다. 그의 유년기의 생을 가족도 버리고 국가마저 외면했다. 그래서 그는 의탁할 곳 없이 떠돌아야 했다. 나에겐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국가 안에서의 존재 인정’이 그에게는 처참하게 박탈되어 있었다. 그와 나의 삶을 비교하자면, 안온하고 평탄하기만 했던 나의 삶이 대한민국 평균치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진실을 훨씬 더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의 삶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자 내가 발 딛고 선 이 땅이 너무 위태롭게 느껴졌다.


고아원을 도망쳐 나온 아이, 인천-서울-부산-제주-목포 거쳐 다시 서울로


솔직히 말하자면, 김성곤 씨와의 첫 만남에서 나는 매우 안일했다. 그와 선감도에 함께 들어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첫 질문은 다른 피해자와의 만남에서와 다를 것 없이 “어떻게 선감도에 잡혀오게 되셨나요?”였다. 대답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골목이나 역 앞에서 놀고 있는데 경찰 또는 공무원이 와서 잡아갔다, 아동보호소에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선감도로 보내졌다... 그리고 이를 전후한 소소한 개인사 몇 가지 정도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의 증언을 영상으로 담기 위해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만 믿은 채, 그의 이야기는 나태한 태도로 귀를 반쯤만 열고 들으면서 예상 외로 따가운 가을 햇살 아래서 얼굴만 사납게 찡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천천히 입을 연 그에게서 선감도로 잡혀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듣는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는 이 일들이 대략 7~9살 때 벌어진 일이었다고 했다.

 

김성곤 씨.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인천 부평이에요. 큰아버지가 운영했던 ‘선한 사마리아원’이라는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우리 어머니가 큰아버지에게 나를 맡길 때, 가족들 있다는 이야기하지 말고 다른 고아들과 다름없이 키우게끔 했다더라구요. 사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그냥 버리려고 했대요. 아버지는 뱃일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뱃사람들이 미신을 많이 믿잖아요. 내가 태어나자마자 죽을 병 같은 게 걸려가지고 ‘저 자식은 오래 못 산다. 재수 없으니 내다 버려라’ 그런 이야기도 했대요. 이 얘기는 나중에 큰 누나한테서 들었어요.


그래서 고아원에 큰아버지도 있고 고모도 있었지만, 그 사람들이 내 친척이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7살까지 자라오면서 ‘나도 고아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또래 원생들과 함께 도망 나왔어요. 두명이서 열차를 탔어요.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기동열차. 그걸 타고 무작정 동인천으로 들어왔어요. 


그러고 있었는데, 옛날에는 종이 줍는 넝마주이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에게 잡혀가지고. 똘마니 잡는다고 하죠. “여기서 우리랑 같이 있을래, 안 있을래?” 그렇게 묻는데, 안 있겠다 그러니까 있겠다고 답할 때까지 때리더라구요. 그 사람들은 3-40대 성인이었죠. 그 사람들한테 감금되다시피 있다가 밤에 탈출을 했어요. 아침에 이리저리 피해다니다가 몰래 열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해서 서울역에 왔지요. 서울역에서 구두 닦는 일을 했는데, 어린 나이에 그것도 잘 못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구걸해 가면서 밥 얻어먹고. 표 파는 곳에 사람들 줄 서 있으면 “1원만 주세요” 그러고. 


서울 양동(현 남대문로5가-편집자 주)에 넝마주이 조직이 있더라구요. 그 사람들에게 또 잡혔어요. 콜라병, 오렌지병 이런걸로 막 때리는 거야. 머리통에 피가 막 터지고. 죽을만큼 맞다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또 탈출을 해요. 서울에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또 열차를 탔어요. 다 도둑열차죠 뭐. 그래서 무작정 간 곳이 부산이에요. 부산 가서도 거지 생활을 하면서, 남포동이나 자갈치시장 같은데 가서 얻어먹고 살다가. 영화숙*이라는 곳에 또 잡혀갔어요. 거기서도 못 도망가게 곡갱이 자루 같은 걸로 발바닥을 때리는데, 사정 없어요. 팅팅 부어서 걷는 건 어림도 없고,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가야 돼. 

 

*1960~70년대 부산 장림동에서 운영되었던 부랑아시설. 1970년 1월 13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영화숙 원장 이순영(당시 40세)은 고아·부랑아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짓는다고 부산시로부터 1백50만원을 받아 횡령한 혐의로 부산시청 직원 4명과 함께 구속되었으며, 그 외에도 각종 구호단체 구호금품을 12년 동안 빼돌려 2만여평의 대지와 6천5백여평의 임야를 사들이는 등 비리를 저질러 왔다. 당시 영화숙 수용규모는 고아 450명과 걸인 및 행려자 750명 등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이런 곳에 있으면 안되겠다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한 밤중에 도망을 시도했어요. 영화숙 옆에 산이 높은데, 그 산을 넘으면 다 공동묘지에요. 공동묘지에 비석 같은 게 있는데, 달빛에 보면 처녀귀신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도, 귀신이 나타나면 그 귀신을 물리치고 도망갈 정도로 무서움이 없었어요. 어떻게든 여길 빨리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거길 나와서 다시 자갈치시장에 들어왔는데, 노점에서 밥장사하는 아주머니가 나한테 잘 해줬어요. 근데 어느 날 그 분이 어느 아줌마를 소개시켜주는 거예요. 나를 양아들 삼아줄거라고. 양엄마를 따라 제주도로 갔어요.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갔는데, 막상 가보니까 내가 양아들이 아니었어요. 나중에 거기서 탈출할 때 생각해보니까, 사실은 내가 머슴살이로 갔던 거예요. 애 봐주고, 고사리 캐러 당기고, 일 시키고... 그 당시에 아주머니가 손가락이 다 잘렸더라구. 세월이 흘러서 생각해보니까 그 아줌마가 문둥이였나? 그런 생각도 났었어요. 그 손가락 잘린 걸로 머리통이고 뭐고 막 때리는 거야. 나중에는 그 사람 딸내미가 육지에서 들어와 가지고는 얘기를 한 것 같아요. “엄마, 얘 보내주자, 불쌍하잖아.”


그 아줌마가 그 당시에는 양계장을 좀 했는데. 배가 고플 때는 아줌마 일 나가고 몰래 계란을 깨먹기도 했어요. 배 좀 채우려고. 어느 날, 아주머니가 계란 장사 나가자고 해서 큰 통에다 계란을 짊어지고 나섰어요. 밥도 안 먹고 나섰는데 아주머니가 계란을 다 팔 때까지 밥도 안 사주는 거예요. 따라오라는 말도 안하고. 그 길로 그 아주머니랑도 헤어졌어요. 이후엔 시장에서 건빵 같은 거 얻어먹고 다니다가 제주도 선착장까지 걸어오게 됐어요. 건빵을 먹어가면서 거기까지 오는데 눈물이 쏟아지더라구요. 그 망망한 바다를 보면서. 내 부모가 어디 있을까? 나도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나를 낳아준 부모가 있을텐데. 눈물이 막 쏟아지더라구요. 


거기에도 보니까 거지 아이들이 있더라구요. 제주도 아이들도 있지만, 육지에서 온 아이들도 있고. 그 아이들하고 어울리며 지냈어요. 그러다 거기서도 제주시청 직원들한테 잽혀가지고 이제는 육지로 쫓겨났어요. 


목포로 나왔는데, 거기서 막 반나절 정도 시장을 헤매다가 아이스께끼 장사꾼한테 또 잡혔네? 맞는 건 또 내가 일인자였어요. 그렇게 또 그 사람들한테 끌려가다가 나중에 옆 골목으로 싹 피해버렸어요. 도망가려면 무조건 열차를 타야 돼. 월남 다니는 군인들 타고 다니는 열차 있잖아요? 거기에 올라탔어요. 처음에는 차장한테 잡혀서 암흑 같은 역에 버려졌어요. 플랫폼에 서 있는데 너무 춥고 떨리더라고. 내가 어떻게 이렇게 살아있었는지... 그래서 열차 소리만 나면 무진장 반가운 거야. 다시 다른 열차에 올라타서, 맨 뒤 칸에 탔어요. 군인칸이더라고. 혹시 또 잽히면 혼날까봐 들어가지는 못하고 난간에서 그냥 가는 거야. 그 바람을 다 맞으면서. 그렇게 해서 다시 서울로 들어왔어요.

 

서울시 부랑아 수용 장면, 1961년 5월 26일 촬영.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http://photoarchives.seoul.go.kr)
 

7~9살 어린 나이에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경부선과 호남선, 그리고 제주도 뱃길을 따라 전국을 한 바퀴 다 돌았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다소 과장된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말하는 중간 중간 “우리 생존자들 중에서 내가 최고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같은 말을 자주 했는데, 타인의 입장에서 이를 확인할 방법도 없고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의 이런 발언과는 거리를 두고 싶었다. 


게다가 그는 이 이야기도 ‘그나마 뺄 내용은 다 빼가면서’ 하는 거라고 했다. 10살도 안 된 아이에게 닥친 고독하고 어두운 떠돌이 생활. 그것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게 하는 것이었다. 대체 이 이야기는 어디쯤에서 끝나는 걸까. 어린 아이가 그렇게 거리를 떠도는데 아무도 보호자에게 인계해 주려 하지 않았다. 그를 반기는 것은 주먹으로 모든 소통을 대체하던 넝마주이 조직이거나, 머슴살이로 보내려는 장사꾼뿐이었다. 공무원이나 군인들조차 그를 자기들의 시야 밖으로 내쫓기 급급했다. 가족을 포함해 그 어느 누구도 그를 반기는 이 없었고, 그 자신조차 어디 한 군데 정착하려 하지 않았다. 떠밀리듯, 숙명처럼, 도망다니며 살았다.

 

'도망'이 숙명이 되어버린 삶

 

서울역에서 다시 구걸 생활을 시작했어요. 서울역에 보면, 표 사려고 사람들이 개찰구에 몰려 있잖아요? 거기서 내가 구걸을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코트를 딱 입고 스카프를 두른 여자가 나에게 오더니 ‘너 성곤이 아니니?’ 그러는 거예요. ‘야 이놈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어?’ 그러는데, 선한사마리아원에서 일하는 선생인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이 ‘너 사마리아원에서 언제 나왔어?’라고 했으니까. 그 길로 그 사람이 나를 남산동 자기 집에 데리고 갔죠. 수돗가 가서 씻고 오라더군요. 그 당시 펌프도 아니고 수돗가 있는 집이면 꽤 잘사는 편이었겠죠. 그런데 사마리아원에 다시 보내지면 도망 나왔다고 또 혼날까봐,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 길로 또 도망쳤어요. 그런데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큰어머니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 분이 저희 막내고모 였더라구요.


다시 서울역에서 생활을 하다가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잡혀 갔어요. 아동보호소에서도 계속 도망다녀서 들락날락하길 세 번... 세 번째에는 아예 나를 이송시켜 버리더라구요. 말썽꾸러기로 여겨진 몇 명을 추려가지고. 그래서 간 곳이 선감도에요.


말 그대로 이곳이 진짜로 감옥이구나, 어린 감옥소구나, 생각했어요. 강제노동 당하고, 말 안 들으면 구타, 일하다가 밥 때 놓치면 밥도 굶어야 하고. 그러면 밭에서 일하다 배가 너무 고프니까 채소 같은 거 몰래 서리해가지고 먹고. 그렇게 살았던 거예요. 그리고 인천에서 배가 들어와서, 연탄, 시멘트 같은 게 들어오면 우리가 직접 날랐어요. 뚝방에 물 빠지면, 뚝방에서 뻘까지 높이가 얼추 4-5미터 돼요. 거기에 배하고 뚝방 사이에다가 발판을 두 개를 놔요. 생각을 해봐요. 그 어린 나이에, 열 살, 열한 살 이런 어린 나이에, 그 40키로 짜리 시멘트를 어깨에 메고. 지금 애들한테 그런 거 시킨다고 해봐, 어림도 없지. 그러다가 내가 한번은 세멘 푸대를 어깨에 메고 올라오다가, 중심을 잃어서 떨어져버렸어요. 갯벌 뚝방 밑에는 돌 뿌리 같은 게 많이 깔려 있었는데, 거기 떨어져가지고 여기 등짝에 찡겨서, 그때부터 내가 허리 디스크를 안고 살아온 거예요.

 

도립선감학원 창립 24주년 기념식 장면 (사진제공 :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저수지나 바다에 가서 이곳을 탈출하려고 수영을 배웠어요. 목숨 걸고 하는 거죠. 저수지 수영을 어느 정도 마스터하면 파도치는 바다에서도 했는데, 바다 밑에 가끔 암초가 있어요. 그 암초에 부딪쳐서 머리통이 깨지기도 하고. 그리고 마침내 탈출을 시도했어요. 날짜도 안 잊어버려요. 칠월 칠석. 태풍주의보가 내렸다고 하더라고. 세명이서 옷을 다 벗었어요. 팬티 바람에, 신발이고 뭐고 전부다 모래에다 파묻어서 장물을 없애버린 거예요. 갯벌을 차고 나가는데, 점점 더 깊어지는 거예요. 안되겠다 싶어서 다시 뻘 따라 나와가지고 대부도로 갔어요. 대부도에서 배를 타고 도망가볼까 해가지고. 그런데 방아머리(대부도 끝 인천 방향에 있는 선착장) 쪽에서 소금배가 있었는데, 거기 뱃사람들한테 걸려서 또 도망을 쳤어요. 친구랑 태풍이 그치면 다시 도망가자 그랬는데, 안 그치더라고. 춥고 배고프고, 산타고 넘어오다가 가시에 찔려서 피는 흐르지 환장하겠더라고. 


같이 도망 나온 동생이 결국 “형 안되겠다. 다시 돌아가자” 그러더라고. 나는 좀 더 버텨보려고 했는데, 결국 선감도로 들어오고 말았어요. 선감학원 식당 바로 뒷산에 무 배추 담그는 통이 있었어요. 그 통 뚜껑을 힘들게 열어서 소금에 절인 무 이만한 걸 먹었어요. 그리고 비가 오면 산에서 물 흐르게 되어 있는 로깡에 3일을 숨어 지냈어요. 배고픔 보다 더 서러운 게 없다고 하잖아요. 3일만 굶으면 돌덩어리가 빵으로 보인다고. 결국 못 버티고 자수했죠. 그리고 돌아온 건 곡갱이 자루 타작...


다음 여름에, 다시 탈출을 시도했어요. 이번엔 어섬 쪽으로 헤엄을 쳤어요. 섬에 닿으니까, 낙지잡이 하는 가족이 있더라구요. 그 사람들이 저한테 잘 해줬어요. 선감도에서 나를 잡으러 왔는데도 숨겨주고. 그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어요. 선감도 주변 섬에서 주민들이 원생들을 보면 선감학원에 신고해서 밀가루 포대 받거나, 자기집 머슴으로 부려먹고 했는데, 그래도 그 집에서 나한테 잘 해줬어요. 내가 이제 인천으로 나가고 싶다고 하니까 백 원짜리 두어장 쥐어주면서 보내주고. 그렇게 1년을 어섬에서 보내다가 인천으로 왔어요.

 

국가가 방기한 삶의 공백에 폭력이 들어와 앉았다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그는 최근에 자신의 어린 시절 기록을 찾은 것을 보여주겠다며 인천에서 서울까지 달려왔다. 과거 서울시립아동보호소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서울특별시아동복지센터(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소재)에서 받은 아동카드였다. 그러나 이 기록이 명확히 김성곤 씨의 것이라고 명기된 것은 아니었다. 공문 첫 장에는 “2017.09.19 민원과 관련 본인의(김성곤) 우리 시 아동복지센터 아동 D/B 검색 확인 의뢰요청에 대하여 유사한 아동카드를 붙임과 같이 회신함을 알려드립니다.”라고 되어 있었다. 

 

김성곤 씨의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아동카드. 상당수 기록란이 비어있다.

아동카드는 한 눈에 봐도 엉터리 같아 보였다. 두 장 짜리 기록에는 공란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적혀 있는 기록도 김성곤 씨 본인의 기억과 맞지 않았다. 주민등록번호란은 ‘61’로 시작했지만, 그는 자신이 56년생이라고 했다(나중에 사망신고 된 호적을 살리면서 주민등록상에는 57년생으로 등록했다). 아동보호소 입소 날짜가 69년 7월 21일로 되어 있는 것도 본인 기억과 6년 정도 격차가 있다. 재학상태 란에 적힌 ‘국2 중퇴’도 본인 기억과 전혀 다르다. 그는 고아원에 있을 때 학교에 며칠 들락거렸을 뿐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고 했다. 제일 이상한 것은 ‘아동의 가정환경(성장과정)’이 “부사망 모생존 가정불화로 입소”라 되어 있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서울역에서 부랑생활을 하다가 입소했다고 말했는데, 가정불화로 입소했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나마 보호자란에 적혀 있는 김○○이 함께 고아원에서 자란 작은 누나의 이름과 동일해 이 기록이 본인의 것임을 증명해줬다. 하지만 ‘모생존’인데 보호자란에 미성년자인 누나의 이름을 적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또한 이처럼 연고자가 확인이 됐다면 누나에게든 어머니에게든 인계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의 어린 시절의 삶은 그나마 존재하는 기록에서도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렇게 국가의 방기로 생긴 그의 삶의 커다란 공백에는 거리에서 마주친 날것의 폭력과, 영화숙, 아동보호소, 선감학원 등 각종 시설에서 마주친 흡사 군대와도 같은 폭력이 들어앉아 주인 노릇을 했다. 앞서도 말했듯, 그가 증언해 준 이 이야기가 나에게는 과장 섞인 무용담으로 들리기도 했다. 유년기 내내 안정적인 주거를 박탈당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들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내 앞에서 이런 이야기로 허장성세를 부려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가 겪은 삶의 이야기가 솔직히 어디에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닐뿐더러, 지금으로선 그 피해의 크기를 과장한다고 어디서 보상이라도 더 많이 받으리란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끔찍한 폭력의 체험이 그의 기억을 군데군데 부스러뜨려 일그러지게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의 유년기 삶에서 국가의 정상적인 시스템은 단 한 번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그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음 연재 기사 이어보기 : ▶시계와 달력을 빼앗긴 삶...‘선한 사마리아인’은 없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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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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