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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영화제의 은밀한 장애 차별 영화들
<미운 오리>, <파란 입이 달린 얼굴>
등록일 [ 2018년01월22일 18시26분 ]

장애인들의 숱한 죽음과 지독한 투쟁으로 장애인 차별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일상적으로 장애인의 존재를 접할 기회도 늘어나면서 장애인과 그 가족을 다룬 영화도 많아졌다. 특히, 젊은 감독일수록 자극적인 스토리에 사회적 이슈와 윤리적 아포리아까지 담아낼 수 있는 소재로 장애인과 그 가족의 고통스런 현실에 매혹되기 싶다. 그런데 어설픈 매혹에 치열한 고민과 성실한 조사도 없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만 재생산하는 영화도 꽤 있다. 


<미운 오리>: 게으르고 어설픈 예술혼이 빚어낸 장애차별


2017년 4월 19일 서울장애인 인권영화제에서 <미운 오리>란 극영화를 보고 나는 경악을 금지 못했다. 영화는 10살 무렵의 발달장애 자녀를 둔 어머니의 괴로움을 몇 가지 에피소드로 엮고, 남편의 무관심과 자폐 아이의 구제불능에 절망하다 결국 아이를 ‘보호소’에 맡긴다는 내용이다. 배우들의 연기, 특히 비장애 아역배우의 자폐 연기가 부자연스런 것은 그렇다 쳐도, 에피소드들의 상투성은 리얼리티와 주제의식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10년 동안 같이 산 발달장애 자녀가 “꽃”이란 말을 못한다고 다그치며 울부짖는 엄마의 모습에서는 인물의 ‘고통’보다 감독의 ‘작위’만 느껴졌다. 자폐 아이의 도전행동에 대한 엄마의 반응이 너무 즉자적이고 감정적이라 10년을 함께 한 친 엄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남편과는 어떤 갈등이 있는 건지, 전화로 알아보고 있는 ‘보호소’란 게 주간보호시설인지 상주 거주시설인지 보는 내내 궁금했다. 리얼리티가 구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마지막에 무슨 대단한 결단인 양 ‘보호소’로 보내는 장면에서는 의문이 폭발했다. 뭐야? 어디를 보내는 거 길래 저리 폼을 잡아? 주간보호소면 별 거 아닌 건데? 그동안 주간보호소도 안 알아보고 24시간 애를 끼고 살았던 거야? 아니면, 아예 거주시설에 보내 버리는 거야? ‘보호소’라는 이름의 거주시설도 있나? 


영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모든 의문이 풀렸다. 발달장애 부모회도 많은데 부모님들은 만나 봤냐니까, 대학교 영화제작 수업 기말과제로 3개월 만에 찍느라 못 만나 봤단다. 모티브는 어디서 얻었냐니까, 인터넷에서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엄마의 괴로운 심경을 토로한 글을 보고 얻었단다. 결말에 대해서는, 시설에 안 보내는 결말도 생각해 봤는데, 그런 ‘모성애’는 식상할 것 같아서 역발상으로 시설에 보낼 수밖에 없는 엄마의 심정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싶었단다. 이 게으르고 어설픈 예술정신의 소산으로, 영화는 말도 못하고, 소통도 안 되고, 말썽만 피우는 발달장애인과 함께 사는 비장애인의 괴로움을, 발달장애인을 시설에 보낼 수밖에 없는 우리사회의 현실적 괴로움을 역설하는 영화가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화가 난 건 그런 장애인 차별의식이 발달장애인 부모의 고통으로 둔갑하여 장애인 인권영화제에서 버젓이 유포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파란 입이 달린 얼굴>: 여성영화와 장애인영화 사이의 위험한 줄타기  


<파란 입이 달린 얼굴>(김수정 감독)도 작품의 완성도는 월등히 높지만 장애인을 버리는 가족의 고통에 이입된 시선에서 <미운 오리>와 다르지 않다. 2015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배급사를 찾지 못하다가 올해 독립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배급으로 1월 18일 정식 개봉했다. 감독 말마따나 살짝 ‘맛이 간 여자’의 서슬 퍼런 생존의지를 그린 이 여성영화가 2016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새로운 물결 부문에 초청되고, 그해 양성평등문화상 신진여성문화인상을 수상한 것은 이해된다. 하지만 장애인 오빠를 쓸모없는 벌레취급하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 한 여성의 관점에서, 그녀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이 영화가 제17회 장애인영화제(PDFF) 경쟁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파란 입이 달린 얼굴> 스틸컷.

주인공 ‘서영’은 불안정 노동으로는 도저히 갚을 길 없는 빚에 짓눌려 표정까지 잃어버렸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 중 도드라져 보이는 건 오직 혈색 잃은 입술, 타인과의 관계를 끊는 혀, 걸리적거리는 존재를 없애 버리는 독설의 ‘파란 입’밖에 없다. 그녀가 처한 지옥 같은 ‘현실’과 그녀의 파란 입이 내뱉는 ‘악담’ 사이에 인과의 직선을 그을 수 없다는 점, 그녀가 처한 현실로부터 그녀의 비윤리적 선택이 곧바로 도출되진 않는다는 것, 그 사이에는 작지만 중요한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하지만 아주 모호하게. 거의 보이지 않게. 


영화 첫 장면에서 마트 판매직원인 서영은 자기 물건을 팔기 위해 다른 사람 제품을 근거 없이 비방한다. 그 때문에 명예훼손죄를 추궁당한 서영은 그딴 게 대수냐는 눈 빚으로 자의 반 타의 반 마트를 그만 둔다. ‘생존을 위한 악’이라는 주제를 함축한 도입부다. 더욱 대책 없어진 빚에 ‘서영’은 장기 입원 중인 엄마를 찾아가 “엄마, 이제 그만 하자. 엄마 곧 죽을 거잖아. 엄마가 없어지면 돼” 하며 자살을 종용한다. 웰다잉법, 존엄사법으로로 불리는 ‘연명치료결정법’ 시범사업이 작년 말에 시행되면서 앞으로 현실에서 자주 언급될 될 장면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엄마는 연명치료의 지속여부를 논할 만큼 중환자가 아니다. 노인성 질환에 장기 요양 중인 엄마는 의사 지시대로 매일 한 시간씩 춤을 출 정도로 삶의 의지가 충만하다. 대책 없는 병원 빚에 고통 받는 서영 입장에서는 별 차이 없어 보이겠지만 ‘치료요양’ 상태와 ‘연명치료’의 차이는 매우 크고, 거기엔 중요한 윤리적 의미가 있다. ‘웰다잉법’이 시행되면 중환자실의 연명치료자에 한정된 법 적용이 서영 엄마처럼 가난한 요양치료자에까지 확산되어야 한다는 담론의 물꼬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영이 엄마에게 ‘나 좀 살아야겠으니 사라져 달라’는 독설을 내뱉고, 다음 날 엄마 스스로 병원에서 실종되는 초반 장면은 그냥 넘어가기 힘든 윤리 논쟁을 내포한다. 연명치료는커녕 주도적으로 술판과 춤판을 벌릴 정도로 생 의지가 큰 저 엄마가,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성격도 아닌 저 엄마가 서영의 독설에 아무 대거리도 하지 않고 자살적 행동을 감행한 이유가 뭘까? 영화는 그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구질구질한 설명이 뭐 필요하냐고, 서영의 입장 설명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서, 관객도 그렇게 느끼게 만든 영화라면, 그 게으른 윤리의식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영화는 정말 서영의 빚 없는 삶을 위해 장기요양 중인 엄마는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는 영화인가? 엄마의 자살이유와 실종 이후에 대한 설명이 끝까지 없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엄마와 서영의 관계가 이후 서사의 실마리로 지속된다는 점에서는 아직 그렇지 않다. 


엄마는 실종되었지만 서영이 엄마에게 한 행위의 윤리적 의미는 실종되지 않았다. 서영의 아는 스님이 그 윤리적 의미를 붙들고 있다. 술, 담배, 고기는 물론이고 서영과의 잠자리도 마다하지 않는 이 스님은 서영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알선해 준다. 그러면서 절 사람들과 새로 알선해준 공장 사람들에게도 서영이 엄마에게 한 ‘몹쓸 짓’을 알려준다. 법적 처벌은 몰라도 서영의 행동은 분명 윤리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행동이었다. 스님은 절 사람들과 인쇄 공장 사람들의 사회적 비난을 통해 서영 스스로 윤리적 책임을 지고 속죄하도록 했다. 인쇄 공장 노동자들의 왕따에 부딪치고, 싸우고, 사과하고, 용서받으면서 서영은 점점 노동자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다.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노동자들의 친목모임에 참여하면서 서영은 이기심이 아니라 ‘연대를 통한 생존’을 배워간다. 엄마에 대한 속죄가 이기적 생존에 대한 반성으로 사회화 된다는 점에서 매우 뜻 깊은 대목이다. 


하지만 스님은 그런 속죄의 사회화를 원치 않는다. 대신 천도제를 통해 서영에게 엄마에게 행한 죄를 상기시키고, 그 죄의식을 이용하여 서영이 노동자들을 배반하게 만든다. 서영이 “말썽피우고 사장과 싸우는 놈들과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스님은 “사장이 나한테 일임했다”면서, 잘리기 싫으면 노조준비모임을 파괴하는 구사대 짓을 하라고 요구한다. 어떻게 그러냐는 서영의 항변에 스님은 “네가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러는 거다” 라며 엄마에게 행한 죄를 상기시킨다. 스님이 원한 건 속죄가 아니라 죄의식이다. 그 죄의식으로 자기의식을 채운 서영은 ‘생존을 위한 죄(악)’의 화신이 되기로 결심한다.  


서영이 지체장애인 오빠에게 ‘나 좀 살아야겠으니 사라져 달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도 남은 빚 청산하려면 집을 내 놔야 하니 오빠가 결혼해서 나가면 좋겠다고 하고, 그래서 돈 많은 집 지적장애인 여성과의 혼담을 알아보기는 했지만, 대놓고 오빠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오빠 ‘영준’은 지체장애가 있지만 쓸모없는 짐짝 취급받을 만큼 최 중증장애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직립보행이 불가능해서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지만, 혼자 신변처리도 하고, 요리도 잘한다. 무엇보다 유능한 미싱사로서, 봉재공장이 지하에 있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자기가 없으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자존감이 높다. 결혼해서 나가면 좋겠다는 동생의 말에 ‘영준’은 이참에 “내 능력을 알아봐주고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 여긴 협력업체 디자이너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하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싱에 손까지 다치자 ‘영준’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한 손으로 화장실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쓰러져 잔 다음날 아침, 스님과 외박하고 돌아온 ‘서영’은 기저귀를 던지며 “비싸니까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 물 많이 먹지 말고” 라며 노골적으로 모욕한다. 엄마에 이어 자기도 버리려 드는 동생에게 영준은 “너 내가 당장 없어졌으면 좋겠지?” 하고 대거리 한다. “너랑 결혼할 사람 만났어. 그 집 잘 살아서 너만 괜찮으면 당장 결혼하재. 여자가 지적 장애인이야, 서로 의지하고 살면 되잖아. 착하더라.” 라는 서영의 장애인 비하에 영준은 “바보니까 착하겠지” 하며 또 다른 장애인 비하로 받아치고, “너보다 나아. 사지 멀쩡하고 집에 돈도 많고 너 먹여 살리겠다니까 감사하다고 해” 라는 독설에 영준은 아무 말 없이 싱크대에서 과도를 꺼내 자기 목에 갖다 댄다. 뭐하냐는 서영을 향해 영준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쏘며 자기 경동맥을 과도로 찔러 누른다. 


이처럼 서영이 영준에게 ‘나 좀 살아야겠으니 너 사라져라’고 한 건 영준이 원래부터 가진 장애 때문이 아니다. 서영은 지체장애인 오빠의 부양자가 아니다. 오히려 정규직 기술자인 오빠 ‘영준’의 월급이 더 많았고, 가사노동도 영준이 주로 했다. 전에는 자신의 장애를 별로 인식하지 않던 영준이 장애인으로서의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서영이 분가를 요구하면서부터이다. 급한 마음에 디자이너에게 포로포즈를 하다 거절당한 것이 변곡점이 되었고, 한쪽 손을 다쳐 일시적으로 신변처리가 힘들어진 것이 결정타였다. 이 퇴락의 과정에 장애인이라는 변수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다. 상대의 칭찬을 애정으로 착각한 것은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남성으로서의 오만함 때문이며, 사고로 인한 일시적 손상은 치료하면 그만이다. 하필 그 때 스님의 간계에 넘어간 서영이 ‘연대를 통한 생존’ 대신 ‘생존을 위한 죄(악)’을 선택하여 오빠에게 독설을 내 뱉고 그 말에 ‘욱’ 해서 영준은 자살을 감행한 것이다. 

 

<파란 입이 달린 얼굴> 스틸컷.

서영의 독설과 영준의 자살은 빚과 장애라는 현실의 고통에서 비롯된 피치 못할 결과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악의 화신이 되겠다는 서영의 (비)윤리적 ‘선택’과 영준의 주관적 감정에 매몰된 ‘성격’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인물들이 처한 지옥 같은 현실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그 지옥을 만든 인물들의 (비)윤리적 선택과 성격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의 미덕은 현실과 윤리(성격) 간의 미세하지만 중요한 간극이 자아내는 긴장이다. 그럼에도 주인공 여성에 편중된 시선과 그녀에 의해 무력해진 장기요양 노인과 장애인의 시선 사이의 비대칭성 때문에 영화를 보는 관객의 관심은 윤리문제보다 현실문제 쪽으로 기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줄거리는 병든 엄마가 안긴 빚과 장애인 오빠가 안긴 부양책임에 짓눌린 여성의 독한 생존의지를 그린 영화로 쉽게 요약되어 버린다. 그리고 앤딩크레딧과 함께 ‘누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하는 감동이 밀려 올라온다. 2년 전 여성영화제에 초대되고, 2년 기다렸다가 ‘반 스까 래디칼 페미니즘’(트랜스젠더를 비롯하여 다른 부문운동과의 연대에 얽매인 ‘스까’ 페미니즘을 탈피하여 오직 여성문제에 집중하는 페미니즘)의 흐름을 타고 정식 개봉한 이 ‘여성영화’의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될 것이다. 장기요양노인과 장애인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는 여성에 대한 반-페미니스트들의 여성혐오와 무의미한 싸움을 해야 때문이다. 만약, 장애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걸로 면피하려 한다면, 장애인영화제 측이나 여성영화 측이나 비극은 아주 희극적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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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lizom@hanmail.net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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