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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이름도 없이, 한 사람의 죽음이 증발했다
실종 후 사망한 채 발견된 시설 거주인 성민 씨의 삶과 죽음을 기록하다
그의 죽음을 대하는 사회의 불성실한 태도는 우리가 쌓아올린 시스템
등록일 [ 2018년02월09일 19시02분 ]

이금옥 씨(가명)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아들 성민 씨(가명)의 시체검안서이다. '전두골과 코뼈와 상악뼈가 노출되어 있고 안구는 없어졌으며, 하악은 백골화되어 따로 떨어져 있으며...' 시체검안서는 원래 금옥 씨의 시누이가 떼서 차에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것을 왜 가지고 내렸는지 물었을 때 금옥 씨는 반쯤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어서..." 금옥 씨는 요즘 밥을 잘 먹지 못한다. 꿈에서는 성민 씨가 '선생님이 나를 안 찾아줬다'며 나타난다. 금옥 씨는 아직 성민 씨와 작별 인사도 못했다. 다시 만난 아들은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한 줌 재가 되어 이미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다. 

 

성민 씨(아래 왼쪽)의 가족사진
 

지적장애가 있는 금옥 씨는 열아홉에 중매결혼을 했다. 남편은 금옥 씨보다 열네 살 많았다.  금옥 씨는 스물넷에 첫 딸을 낳았고 바로 이듬해 겨울에는 아들을 낳았다. 1995년 12월 3일, 병원에 들어가는 금옥 씨는 두 번째 출산이지만 여전히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두 자녀 역시 금옥 씨처럼 지적장애를 갖고 있었다. 둘째 성민 씨의 지적장애가 누나보다 조금 더 ‘중증’이었다. 

 

성민 씨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간경화로 사망했다. 소식을 들은 금옥 씨의 가족들은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죽은 금옥 씨 남편의 가족들 여럿이 근처에 살고 있으니 잘 돌봐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2년 후에 집을 방문한 성민 씨의 큰외삼촌과 외숙모가 문을 열었을 때, 금옥 씨와 두 자녀가 작은 전기장판 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집안은 한겨울 바깥보다 더 추웠다. 이 냉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 사람의 손발은  유난히 까맣고 흐물흐물했다. 심한 동상 때문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금옥 씨의 통장은 성민의 고모, 그러니까 죽은 남편의 누이가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돌봄은 없었다. 국가는 돈과 쌀을 주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금옥 씨 가족들은 세 식구를 곧장 대구로 오게 했다. 금옥 씨네 형제들이 사는 지역 한가운데였다. '누구나 왕래하며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대구에서 처음 살았던 집은 원룸이었다.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말수가 적었지만 세 사람만 모여 있을 땐 꽤 시끄러웠다. 세 사람만의 언어와 주제들이 있었다. 깔끔한 금옥 씨의 손길이 바지런히 닿은 공간에서, 세 사람은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룸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성민 씨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누나의 가슴을 만지거나 성기를 노출하기 시작했다. 금옥 씨도 누나도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문제는 다른 가족들의 개입으로 중재되었다. '방을 분리하는 것'이 가족들이 내놓은 방법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이자 장애인으로만 구성된 가족이라 신청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대주택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이 되진 못했다. 성민의 행동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리를 지르거나 집안 가구를 발로 차 부쉈다. 어머니와 누나를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 한밤중에 나가려고도 해서 금옥 씨는 '신고 당할까봐' 말렸고, 말리는 금옥 씨를 향해 성민은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도 어머니와 누나는 해법을 알지 못했다. 다른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궁여지책으로 정신과에 데리고 가 '차분해지는 약'을 먹였다. 하지만 약기운이 떨어지면 성민 씨의 폭력적 행동은 다시 터져 나오곤 했다. 결국 지난번과 같은 '처방'이 내려졌다. 물리적 분리. 그렇게 성민 씨의 거주시설에 입소가 결정되었다. 

 

성민 씨가 살 시설을 찾는 일은 임대주택을 구하는 것처럼 수월하진 않았다. 원래 살던 집과 가깝고 지역사회에 있는 작은 가정형 시설들에서는 성민 씨의 지적장애가 너무 중하다거나 거주 인원이 꽉 찼다는 이유로 입소를 거절했다. 성민 씨의 '새로운 거처'는 그렇게 지역사회에서 먼 곳, 산골짜기로 밀려올라갔다. 결국 성민 씨는 대구시 팔공산 안에 위치한 A시설에 입소했다. 2015년 11월 1일, 그의 스무 번째 생일을 한 달 하고 이틀 앞둔 날이었다. 

 

시설에 들어간 후, 가족들은 성민 씨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가끔씩 교사들이 보내오는 문자와 시설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안내문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영 바쁠 때에는’ 오지 않았다. 2년간 총 14통의 안내문이 왔다. 금옥 씨는 시설에서 보내오는 안내문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바람에 봉투가 헤지고 안내문이 찢어지면 다시 테이프로 단단히 붙였다. 안내문은 금옥 씨가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시설에서 보내주는 성민 씨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그러나 그 흔적도 2017년 6월을 끝으로 더는 오지 않았다. 

 

시설에서 보내온 안내문들. 금옥 씨는 안내문을 잘 모아두기 위해 봉투 겉면에 날짜를 작성했다.
 

금옥 씨가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성민 씨를 만난 것은 그가 사라지기 몇 주 전, 추석을 앞둔 방문에서였다. 성민 씨는 이상하게도 힘없이 축 쳐져 있었다. 엄마와 누나는 알아봤지만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는지 물었을 때, 담당 교사는 ‘약을 먹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몇 주 후, 추석 연휴가 시작된 10월 1일, 성민 씨는 시설에서 친하게 지냈던 다른 거주인과 손을 잡고 문을 나섰다. 그가 나가고 3시간이 지나서야 시설에서는 두 사람이 없는 것을 알았다. 한 사람은 시설 근처에서 곧 발견되었지만 성민 씨는 그 길로 ‘실종’되었다. 

 

11월 27일, 가족들이 시설 주변 마을 곳곳에 붙인 ‘사람을 찾습니다’ 전단지가 뜯겨질 때쯤, 시설에서 불과 3km 떨어진 개울가에서 갈색 셔츠와 검정 바지를 입은 시신이 발견된다. 성민 씨가 실종 당일 입고 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시신이 성민 씨가 아닐 가능성은 희박했다. 경찰 역시 시신은 성민 씨일 거라고 추정했다. 신원 확인을 위해 금옥 씨의 DNA를 채취해갔다. 

 

하지만 성민 씨는 DNA 검사 결과가 나오기 불과 열흘 전에 '무연고자'로 화장되었다. 

 

금옥 씨가 성민 씨의 사망을 아직 모르고 있을 때, 시설은 지적장애인인 어머니가 아니라 비장애인인 큰외삼촌에게 연락을 했다. 시설 측은 큰외삼촌 부부에게 ‘시신안치비용이 비싸니 무연고자로 화장 처리하는게 낫지 않겠냐’고 했다. 같은 말을 경찰에서도 했다. 기관이나 공무원이 오죽 법을 알아 이야기할까 싶어 ‘그렇게 하자’고 했다. 

 

하지만 경찰이 시신을 수습했을 때, DNA 감식 결과로 신원을 특정하기 전까지의 시신 안치비용은 경찰이 내는 것이 원칙이다. 즉, ‘유족에게 경제적 부담이 된다’는 근거는 거짓인 셈이다. 

 

경찰은 검찰에 제출한 ‘수사지휘건의’에서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시체를 인도할 유족을 특정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 변사자를 장례식장에 계속 안치하게 되면 그에 대한 많은 비용이 발생하는 부담”이 따른다며 성민 씨를 ‘무연고자로 행정처리’ 할 것을 건의했다. 경찰이 건의서를 제출한 날은 11월 30일, 성민 씨가 안치된 지 사흘째였다. 

 

검찰이 행정처리를 승인한 12월 4일부터는 ‘행정처리’가 급물살을 탔다. 6일, 대구 동구청은 성민 씨 시신을 경찰로부터 인수받는다. 그리고 이틀 뒤인 8일, 성민 씨는 화장되었다. DNA 결과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열흘 후인 19일이었다. 성민 씨가 안치되었던 병원의 시신 안치비용은 하루에 9만 6천 원. 경찰이 하루라도 빨리 성민 씨의 시신을 ‘처리’해 아끼려 했던 ‘많은 비용’은 고작 96만 원이었다. 

 

금옥 씨가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시설은 통장 하나와 앨범 한 권을 건넸다. 시설에서는 매달 기록하는 일지와 상담기록을 유가족에게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무단외출’ 전 성민 씨가 어떤 상태였는지 알 길이 없다. 열 네 통의 ‘안내문’과 한 권의 앨범이 2년간 성민 씨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금옥 씨는 앨범을 받아들고 한참을 울었다. 아들이 불쌍했다. 

 

성민 씨는 ‘외출’하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시설에서 불과 3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그의 ‘외출’이 실종이 되었던 이유는 시설의 위치와도 연관된다. 팔공산 깊은 곳, 인적이 드문 그곳에서는 외출이 실종으로 쉽게 이어졌다. 

 

그가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었더라면, 그가 고함과 폭력적 행동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들을 귀가 우리에게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가 시설로 ‘쫓겨나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한국에서는 한 사람에 두 대씩도 있다는 핸드폰이라도 갖고 있었더라면, 무엇보다 성민 씨와 가족의 삶이 온전히 다른 가족들의 책임으로만 남지 않고 그 공백에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중재가 있었더라면. 수많은 아쉬움들이 그의 죽음 이후에서야 떠오른다. 

 

그의 삶의 궤적이 그러하듯 죽음 이후의 궤적 역시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남긴다. 사회가 누군가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곧 산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그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중심에서 밀려났고 그의 죽음마저 충분한 무게를 갖지 못한 채 ‘비용’과 ‘편의’에 떠밀려 서류 틈을 미끄러져갔다. 

 

성민 씨의 초상화.

 

사회에서 사람의 죽음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진다. 사람들은 고인을 충분한 시간 애도하고, 말을 삼간다. 누구나 고인에 대한, 그리고 유족에 대한 예의를 엄숙히 지키려 노력한다. 죽음은 그만큼 무거운 ‘사건’이다. 

 

그러나 사회가 성민 씨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불성실했다. 96만 원의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그의 시신은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화장되었다. 구청은 유족으로부터 ‘시신처리 위임서’를 받아야 했지만 이런 절차는 전화 한통으로 대체되었다. ‘화장한 유골을 모셔다 수목장이라도 치러 달라’는 유족의 요구에 시설은 ‘이왕 무연고자로 10년간 납골당에 모셔졌으니 그냥 두자’라고 답했다. 그의 죽음을 대하는 경찰과 관공서, 그리고 시설의 태도는 살아있는 성민 씨의 존재에 이들이 어떤 가치를 부여해왔는지를 비추는 거울이다. 

 

리모콘 등 기계류를 잘 조작해 다른 시설 거주인들에게 곧잘 도움을 주었던 사람, 야구와 축구를 좋아하지만 어디서 해야 할지 몰라 그저 TV로만 봤던 사람, 트로트를 좋아하고 잘 불렀던 사람, 사진 찍는 취미가 막 생기기 시작했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성민 씨’들이 있을까. 그리고 이 사회는 얼마나 많은 ‘성민 씨들’의 죽음을 익명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의 존재를 변방으로 밀어내고 기어이 그들의 죽음마저 가벼이 만드는 시스템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들이 착실하게 쌓아 올려온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과 죽음이 존중되는 사회를 구축하려면 우선 이 시스템을 해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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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별 기자 hbchoi1216@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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