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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자들의 자리를 위하여 - 영화 ‘공동정범’
[홍성훈 칼럼] 다섯 갈래의 용산과 마주하게 만드는 ‘지독한 영화’가 말하는 ‘용산의 진실’
등록일 [ 2018년02월19일 14시58분 ]

그때 이후, 불확실한 시간에
고통은 되돌아온다.
그리고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
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
-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늙은 뱃사람의 노래』, 582~585행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이 글은 영화 <공동정범>에 대한 짤막한 리뷰이지만 나는 당신에게 <공동정범>의 ‘관람’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가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라거나 "<두 개의 문>의 후속편"이라는 소문을 듣고 단순히 호기심이 동한 사람이라면, 그냥 호기심으로 남겨두기를 바란다. 때로 어떤 호기심은 풀리지 않은 채로 두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영화를 보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다만 열 번 정도 심호흡을 크게 쉬고 극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 마디 더 거들자면, 2009년 1월 20일 ‘용산’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은 잠시 기억 저편으로 미뤄두기를 권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영화를 보는 내내 괴로움에 시달려 입술을 깨물거나 쉼 없이 떨리는 손을 어찌할 바 몰라 애를 먹을 수 있다. 이것은 철저히 내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다.


<공동정범>은 지독한 영화이다. ‘지독하다’라는 표현이 극히 개인적이고 모호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 밖의 다른 형용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반복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 <공동정범>은 끔찍이도 지독한 영화이다. 영화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늪과도 같아서 빠져나오려 발버둥 칠수록 탈출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진다. 탈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 번째, 그들의 트라우마를 '관람'하거나 두 번째, 그들과 함께 증언자가 되거나……. 선택은 철저히 당신의 몫이다.

 

영화 <공동정범> 예고편 중 한 장면.


영화 <공동정범>은 모든 소리를 제거한 검은 화면에 ‘용산참사’ 사건의 개요를 자막으로 띄우면서 시작된다. 조금 길지만 여기에 다시 옮겨보겠다.


“2007년 8월 서울특별시는 서울의 중심인 용산 재개발 계획을 발표한다. 재개발이 본격화 되고 강제철거가 시작되자 용산지역 철거민들은 이주 대책과 보상을 요구하며 2009년 1월 19일, 한강로 변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짓고 점거농성을 시작한다. 망루농성에는 용산지역 철거민뿐만 아니라 신계동, 상도동, 순화동, 성남 단대동 등 15개 지역의 철거민이 함께 참여했다. 다음날 새벽인 2009년 1월 20일 경찰은 이례적으로 농성 25시간 만에 경찰 특공대를 투입하여 강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사망했다. 검찰은.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망루의 화재원인을 화염병으로 단정하였다. 그리고 망루 농성 책임자 이충연 용산 철거민 대책 위원장을 비롯, 망루에 남았던 모든 철거민에게 공동의 책임을 물어 공동정범으로 기소하였고 그들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이윽고 스크린에는 낯익은 장면이 펼쳐진다(이것은 <두 개의 문>에서 내내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동이 틀 무렵, 용산구 남일당 건물 옥상에 설치된 망루를 향해 물대포가 발사된다. 세 군데에서 발사되는 물줄기는 망루의 앞과 양 옆을 동시에 때린다. 이와 동시에 수십 명의 경찰 특공대가 타고 있는 컨테이너 하나가 크레인에 매달려 불안정하게 망루로 접근한다. 이윽고 특공대원들과 철거민들 간의 물리적인 공방이 이어지고 진압작전은 점점 속도를 높여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린 속 모든 소음은 중단되고 몇 초간의 정적이 이어지면서 불안감은 더욱 증폭된다. 아마 당신은 어렵지 않게 그 다음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009년 1월 20일 뉴스에서 몇 십 번 몇 백 번이고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을 그 장면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망루 모퉁이에서 불똥이 튀어 오르고 불똥은 곧 불길이 되어 망루 전체를 휘감는다. 화마는 순식간에 철거민들과 특공대원들을 덮친다. 이 화재로 철거민 다섯 명과 특공대원 한 명이 사망하고 스물 네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만약 당신이 강한 심장을 가졌다면, 혹은 2009년 1월 20일 ‘용산’과 관련된 뉴스를 비교적 많이 접해보았다면 이 장면을 비교적 무탈하게 넘어갈 수도 있겠다. 그건 당신이 알던 ‘용산’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아마도 당신은 다음 장면으로 잿더미가 된 망루와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유가족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다가올 슬픔을 마음속으로 예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화는 보란 듯이 당신이 예열해놓은 슬픔에 가차 없이 찬물을 끼얹을 것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더 이상 잿더미가 되어버린 망루에 머물러 있지도, 죽은 자들에게 머물러 있지도 않다. 카메라는 오로지 ‘산 자들’에게 시선을 둔다. 그렇다. 영화 <공동정범>은 서브타이틀 “The Remnants”(남겨진 자들)이 말하는바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다.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입을 통해야만 비로소 말해지고 소환된다.


김창수(성남 단대동 철거민 대책위원장), 김주환(서울 신계동 철거민 대책위원장), 천주석(서울 상계4동 철거민 대책위원장), 지석준(서울 순화동 철거민 대책위원장), 이충연(서울 용산4구역 철거민 대책위원장)이 그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들은 지옥 같은 그 곳에서 빠져나왔고, 살아남았다. 한국의 공권력은 그들에게 죄가 있음을 주장했다. 그들의 생존이 유죄의 명백한 증거였다. 화재는 그들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어야 했고 다섯 모두 징역형을 복역했다. 당연히 망루 안에서 경험했을 트라우마는 오로지 그들 자신이 감당해야 했다.


영화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잿더미가 된 ‘용산의 시간’에서 산 자들의 ‘용산 이후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당신은 다섯 갈래로 흩어진 시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다섯 갈래의 시간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결단코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그들은 다시 일터로 나가 노동을 하고 건강이 악화된 아내를 보살피거나 철거 작업으로 폐허가 된 동네에서 집을 지킨다. 또 어떤 이는 집안에서, 혹은 병원에서 홀로 시간을 보낸다. 카메라는 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저 묵묵히 기록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들의 입에서 ‘용산’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수 년 간 입속에서만 맴돌았을, 이야기‘들’이 하나 둘 흘러나온다.


여기에서 그 이야기‘들’의 단단함을 기대해선 곤란하다. 그 이야기‘들’은 고장 난 나침반처럼 어느 한 곳을 가리키지 않는다. 당신은 다섯 갈래의 ‘용산 이후의 시간’이 존재하듯, 다섯 갈래의 ‘용산의 시간과 마주할 것이다. 한국의 공권력은 김창수, 김주환, 천주석, 지석준, 이충연을 ‘공동정범’이라는 하나의 혐의를 씌워 처벌했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들은 2009년 1월 19일 남일당 건물에서 농성을 시작할 때부터 각자의 ‘용산’을 가슴에 품고 망루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생존권 사수’를 위하여 망루에 올랐겠고, 어떤 이는 ‘연대’라는 이름의 책임감으로, 또 어떤 이는 농성을 시작한 지 25시간 만에 특공대를 투입한 공권력에 두려움을 느껴 망루에 올랐을 것이다. 심지어 망루에 올라간다는 이야기조차 듣지 못하고 ‘용산’에 간 사람도 있었다.

 

영화 <공동정범> 예고편 중 한 장면.
 

철거민들은 “함께 살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망루에 올랐지만 종국에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로 나뉘어져 내려와야 했다. 죽은 자들은 침묵하고 산 자들은 ‘공동정범’으로 지목되어 처벌받아야 했다. 공권력은 산 자들의 신체를 구속했지만 그들의 기억까지 가두지는 못했다. 산 자들의 시간은 죽은 자들의 시간과 함께 멈춰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동정범’이 된 다섯 명의 산 자들은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살고 있었다. 기억은 산 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망루로 오르게 했다. 산 자들의 기억은 너무도 연약한 것이어서 거듭 되풀이될 때마다 그 형태가 바뀌었다. 어떤 기억은 옆에 있던 사람의 죽음이 ‘나’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기억은 그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있다고 말했다. 때로는 미칠 듯이 선명하게 그 날의 기억이 솟아오르고, 어느 날은 안개 속과 같이 흐릿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분노와 불신이었다. ‘나’에 대한 분노, 그리고 ‘너’를 향하는 불신……. <공동정범>의 중반부와 후반부는 방향 모를 분노와 불신의 표출로 가득하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서로에게 겨누는 말은 날카롭기만 하다. 그들이 기억하는 ‘용산’은 저마다의 형태를 지녔고 서로 부딪치고 반목한다. 그들은 9년 동안 외로이, 혼자서 기억의 망루를 오르고 있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죄책감은 그 무엇보다 큰 것이어서 어떤 이는 동료들이 내미는 손길에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오만하다거나 독선적이라고 비난하기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나약한 인간을 보았다.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을 나약한 인간의 모습 말이다.


지독하게도 영화는 ‘용산’의 진실을 위해 자의적으로 2009년 1월 20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같은 자리, 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영화가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그들의 말과 표정, 그리고 눈물이다. 아마도 당신은 그들의 말을 지지대 삼아 당신만의 ‘용산’의 진실을 찾으려고 할 수도 있다. 장담컨대,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결코 혼자의 힘으로 용산의 ‘진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에게도 그럴 힘은 없다. 영화 또한 당신에게 진실을 찾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용산’의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려는 노력에는 소홀해 보인다. 아니,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애초부터 진실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와 당신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가? 여태껏 헛수고를 해왔던 것일까?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이미 눈치를 챘을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그들이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용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약 9년 동안 세상에 내놓지 못해 혼자 끙끙 앓기만 하던 그들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니 우리는 그들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기억들이 옳고 그른지는 현재로선 판단하기 힘들다. 또한 기억을 공유한다고 해서 그들의 트라우마가 치유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용산’의 진실규명과 치유를 위한 첫 걸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더 많은 이들이 ‘용산’에 대한 기억을 말할 수 있는 자리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더 이상 홀로 기억의 망루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고, 지상에도 당신들의 자리는 있다고. 그리고 함께 기억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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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훈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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