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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학과 장애학, 그 ‘말과 사물’ ②] 인간학의 한계와 장애학의 출현
푸코와 함께 장애 읽기-2
등록일 [ 2018년04월23일 14시10분 ]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와 재현의 세계


근대 들어 생명, 노동, 언어가 인식주체에서 독립된 객체, 칸트가 ‘물 자체Ding an sich’라고 부른 것과 같은 ‘사물’로 출현했다. 생명, 노동, 언어는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지만 인간보다 항상 앞서 있으며, 인간이 인식하는 것과는 무관한 자기 법칙과 역사를 따른다. 생명, 노동, 언어에 대한 이런 근대적 에피스테메는 17, 18세기 고전주의 에피스테메가 붕괴된 자리에 새롭게 형성된 인식 지형이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는 인간의 관념으로부터 독립된 ‘사물 자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사물, 혹은 자연은 그것을 표상하는(representation) 인간의 관념 표상(representative)으로만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처럼 사유하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며, 사물의 질서는 그것을 표상하는 관념이나 말의 질서와 같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멀리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 있어서, 마치 보는 눈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 경계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 생물을 포함한 자연은 감각에 의해 가시화되고, 이성에 의해 위계적 질서를 부여받는다. 자연은 가시적 기관의 형태, 수, 비율, 위치에 따라 저마다의 특징으로 파악된다. 그 특징들의 동일성과 차이에 따라 자연은 종별화 되고 위계적으로 분류된다.


자연사의 대상은 작용이나 비가시적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표면과 선에 의해 마련된다. 계통적인 단위에 따라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기관들의 가시적인 모양에 의해 식물과 동물이 보이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은 호흡이나 내부의 체액이기에 앞서 발과 발굽, 꽃과 열매이다. 자연사는 본질적인 종속 관계 또는 조직 관계가 없는, 가시적이고 동시적이며 병존하는 변수들의 공간을 가로지른다.1)


푸코에 따르면 고전주의 시대 자연사에서 자연(생물)을 분류하는 방식은 근대 생물학이 생명의 유기적 구성 원리와 역사(진화)를 탐구하는 방식보다 오히려 ‘부’(richness)를 분석하는 중상주의자들의 이성과 더 많은 연속성을 지닌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는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보이지 않는다. 중상주의로 대변되는 고전주의적 가치 분석에서 관심 영역은 ‘부’가 표상되는 장, 상품의 가치가 비교, 분석되는 교환의 장이며, 관심 대상은 교환 수단이자 가치 비교의 척도인 화폐이다. 푸코는 놀랍게도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로 보통 함께 호명되는 아담 스미스(1723~1790)와 데이빗 리카도(1772~1823) 사이에 에피스테메 상의 단절선을 긋는다.


아담 스미스는 ‘부’를 노동량(시간)으로 분석한 점에서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로 불리지만 푸코가 보기에 그것은 튀르고나 캉티용의 분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교환의 척도를 노동의 양에서 찾은 것은 캉티용2)으로부터로, 그것은 부에 대한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에서 크게 벗어난 게 아니다. 캉티용이나 아담 스미스에게 노동의 양은 계측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노동의 가치는 교환의 장에서 노동자가 먹고 살기 위해 구매한 재화의 양으로 환원된다. 결국 노동자의 ‘필요’가 가치의 척도로 규정된 것이다.


아담 스미스에게 중요한 것은 가치 ‘척도’로서의 노동이다. 모든 상품은 일정 양의 노동을 표상하며, 모든 노동은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일정 양의 상품을 표상한다. 고전주의적 부의 분석과 근본적인 단절이 일어난 건 데이빗 리카도에서이다. 리카도는 가치의 ‘척도’가 아니라 가치의 ‘원천’인 노동에 주목했다. 그에 따라 노동은 빈곤한 자연 환경 속에서 가치를 산출하는 인간 활동으로 정의되고, 교환의 장이 아니라 생산의 과정에서 파악된다. 그에 따라 상품의 가치는 가치가 표상되는 교환의 법칙이 아니라, 가치를 산출하는 생산의 조건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여겨진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 언어는 자연을 표상하는 수단으로서, 혹은 이성의 질서를 담는 그릇으로서 보편성을 지향한다. 『말과 사물』 첫 페이지에 인용된 ‘중국인 백과사전’을 다시 보자. 이것은 보르헤스의 수필집 『또 다른 심문』(1952) 중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에 인용된 것으로, 진짜처럼 보이지만 실은 보르헤스가 상상해낸 백과사전이다. 하지만 존 윌킨스(1614-1672)는 고전주의 시대 실존했던 인물이다. 그는 인류의 사고 전체를 조직하고 담아낼 수 있는 보편 언어를 만들려고 했다.


그는 우주를 40개의 범주 또는 종種으로 분류했다. 이 범주들은 다시 차差로 분류되며, 이 차는 또한 조組로 분류될 수 있다. 각각의 종에는 두 글자로 된 단음절을 지정한다. 각각의 차에는 자음 하나를, 각각의 조에는 모음 하나를 지정한다. 예를 들면 de는 ‘원소’를 의미 하고, deb은 원소들 중 첫째인 ‘불’을 의미한다. deba는 불이라는 원소의 한 부분인 ‘불꽃’을 의미한다.3)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는 이렇게 언어를 구성하는 낱말과 자연의 질서를 구성하는 특징이 동등한 지위를 동일한 방식으로 부여받는다. 단어가 고유명사에서 추상명사까지 지칭 범위에 따라 분절되는 원리와 자연이 위계적으로 분류되는 원리는 같다. 명제 안에서 단어가 일정한 방식으로 분절되고, 그에 따라 자연을 일정한 방식으로 지칭하고, 가장 근원적인 지칭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의미가 파생되는 원리는 이성의 문법과 원칙적으로 같다. 그래서 이성이 그렇듯 문법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가 붕괴되면서 보편 문법을 추구하는 경향은 사라지고 대신 각기 다른 민족어의 문법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보편문법이 언어의 재현 능력, 즉 의미화(signification) 능력에 근거하는 것과 달리, 비교문법은 굴절, 모음 교체, 자음변이 등 비의미적 요소, 음운과 형식 형태소를 비교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언어는 생물학에서의 생명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요소들(음운)의 기능적(문법적) 통합체로, 각기 다른 언어 환경 속에서 변이하는 역사적 구성체로 파악된다.


인식론적 지각변동 속 인간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는 17세기 중반 르네상스적 에피스테메가 붕괴된 자리에서 출현했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 ‘표상’(representation)이 맡은 지식 생산 원리를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에서는 ‘닮음’(resemblance)이 맡고 있었다.


텍스트에 대한 주석과 해석을 이끈 것은 바로 닮음이다. 닮음에 의해 상징작용이 체계화되었고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사물의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사물을 나타내는 기법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세계는 안으로 접혀 포개어졌다. 대지는 하늘을 반영했고 별에는 얼굴이 비치었으며 풀의 줄기에는 인간에게 유용할 비밀이 숨어 있었다.4)


‘닮음’은 크게 네 가지 원리, 인접한 사물들 간의 ‘부합’(convenientia), 멀리 떨어진 것들 간의 ‘경합’(aemulatio), 관계들 간의 ‘유비’(analogie), 사물들 간의 감응(sympathies)에 의해 발생한다. 사물들의 유사성은 드러나 있든 숨어 있든 사물들의 표면에 흔적을 남긴다.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에서 언어는 이렇게 사물들 간의 유사성을 알려주는 표징(signatures)이다. 그 표징들을 해석해 내는 박물학적 이성이 지식의 생산을 주도한다.
  

서구의 인식 지층에 ‘인간’이 출현한 것은 17세기 중엽과 18세기 말엽에 일어난 두 번의 인식론적 지각변동 이후의 일이다. 르네상스 에피스테메에서는 우주의 유사성을 응축하는 소우주로서 사물 속에 잠겨 있었고,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서는 자연의 질서를 표상하는 이성 안에 잠겨 있었기에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가 붕괴되고, 생명, 노동, 언어가 실증과학의 인식 대상으로 출현하면서 인간은 고된 노동을 통해, 동물적 삶을 영위하며, 불투명한 말로 사유하는 유한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칸트의 ‘인간학’은 그렇게 대상화된 인간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다. 그와 동시에 ‘경계’가 없어서 보이지 않던 인식 주체의 시야도 그 경계와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칸트는 그것을 인간의 지성, 이성, 상상력이 지닌 각각의 한계, 즉 유한성에 대한 사유로 포착했다. 인식 대상으로서의 인간과 인식 주체로서의 인간이 모두 보이게 된 것은 이처럼 인간의 ‘유한성’을 사유하면서이다.


화가의 거울 속 인간의 출현


『말과 사물』 1장에서 푸코는 벨라스케즈의 <시녀들>(1656)을 통해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가 붕괴되면서 인식주체이자 인식 대상인 인간이 출현하게 되는 방식을 본다.

 

벨라스케즈, <시녀들>


이 그림은 ‘보고’ 그린 그림이 아니라, ‘생각하고’ 그린 그림이다. 그건 관람객 기준 왼쪽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오른손에는 붓을, 왼손에는 팔레트를 들고 있는 인물이 화가, 벨라스케즈임을 알아차린 순간 드러난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볼 수는 없으니까. 그는 지금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마치 우리가 보고 있는 <시녀들>을 그리고 있는 실제 화가처럼. 그의 시선을 주목하자. 그는 캔버스 앞에 서서 어딘가를 보고 있다. 그는 어디를 보고 있을까? 그가 보고 있는 곳에 누가 있을까? 그림 속 화가가 <시녀들>을 그린 실제 화가의 재현이라면 그림 속 화가는 그림 밖 실제 화가 자신을 보고 있다. 그의 시선에서 ‘벨라스케즈야. 너는 뭐하는 놈이냐? 너는 뭘 보고 있니?’ 라는 메시지가 느껴질 수 있다.


다시, 그림 속 화가의 눈을 쳐다보자. 그는 어디를, 누구를 보고 있을까? 우리 자신, <시녀들>을 보고 있는 관람객인 우리 자신을 보고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가 그림 속에 재현된 것처럼, 그림을 보고 있는 관람객이 이 그림 속에 그려져 있다면? 가장 안쪽, 바깥의 빛을 끌고 안으로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아무튼 그림 안과 밖의 경계에 있는 저 인물, 이 그림 안 풍경에 대해 구경꾼인 저 인물이 구경꾼으로서의 관람객을 재현하고 있다.


다시, 그림 속 화가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는 어디를, 누구를 보고 있을까? 이번에는 그림 속 다른 인물들의 시선도 고려하자. 그러고 보니, 한 가운데 작고 귀여운 공주는 어디를 보고 있나? 그리고 공주 옆에 있는 시녀와 더 오른쪽에 있는 난쟁이 광대는 또 어디를, 누구를 보고 있나? 그들의 시선도 그림 바깥의 실재 세계를 향해 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림 속 화가가 보고 있는 것이라면? 그들은 화가가 아니므로 실제 화가나 실제 관람객에게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화가의 모델이라면 관심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화가는 지금 캔버스 앞에 서 있고, 그 시선은 영락없이 캔버스 안에 그려지고 있는 대상을 보는 시선이다. 공주와 시녀들이 흘깃 쳐다보고 있는 것도 화가가 그리고 있는 실제 모델인 것이다. 화가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는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그림 밖 실제 화가와 관람객이 있는 바로 그 ‘보는’ 위치에 있으면서 화가에게 ‘보이고’ 있는, 공주와 시녀들이 보고 있는 자는 누구일까?


 그 존재는 그림 중앙의 거울에 반사되고 있다. 그는 왕과 왕비이다. 재현된 세계 속에 재현의 주체가 재현되어야 한다는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에 따라 시선의 주체인 화가와 관람객은 그림 속의 인물들로 재현(representation)되고 있다. 하지만 화가의 모델인 왕은 그림 속에 재현되기보다는 거울 속에 흐릿하게 반영(reflection)되고 있다. 인식 주체로부터 독립해 있는 ‘사물 자체’는 재현되는 게 아니라 반영된다. 그게 근대 인식론의 기본 공리다. 벨라스케즈는 재현의 대상인 ‘왕’에게 고전주의적으로 재현될 수 없는, 그 너머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재현의 세계 너머에서 반영되는 대상이다.


 왕은 화가의 대상이기만 한 게 아니라 궁극으로는 시선의 주체이다. 시선의 주체인 화가와 관람객의 위치에 왕이 서 있다는 점, 저 멀리 방안으로 들어온 신하를 향한 시선의 움직임(‘어, 세바스찬 무슨 일인가?’) 때문에 공주를 비롯한 시녀들의 시선을 움직인 점, 궁정화가의 자의식 ‘나는 왕을 보고 그리지만 내 시선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왕이다. 나는 왕의 시선으로 왕을 그려야 하는 궁정화가다.’ 속에서 왕이 시선의 주인이라는 점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시선의 대상이면서 시선의 주체인 왕, 반영되는 대상이면서 반영의 주체인 왕, 푸코는 <시녀들>의 그 왕이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의 한계 지점에서 출현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한다. 


실증주의와 인간학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가 붕괴되면서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생명, 노동, 언어가 실증과학의 인식대상으로 출현했다. 그렇다고 해서 생물학과 경제학과 언어학 자체가 인간학인 것은 아니다. 칸트가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학은 “생리학적 관점”이 아니라 “실용적 관점”에서 인간에게 적용되는 자연 법칙을 인식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자유롭게 행위하는 인간을 상정한다.5) 즉 생명, 노동, 언어의 법칙을 수동적으로 따를 뿐 아니라 그 법칙을 표상하고 사용하는 존재로의 인간이 인간학의 고유한 대상이다.


인간학에서 인간은 “표상을 구성하는 생물이다. 그는 생명의 내부로부터 표상을 구성한다. 인간은 이 표상에 의해 살아갈 뿐 아니라, 이 표상을 토대로 하여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표상할 수 있는 기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6) 생물학적 법칙이 의식 차원이든 무의식 차원이든 인간의 정신에 표상되는 방식을 다룰 때 인간학의 한 분야인 ‘심리학’이 출현한다. 마찬가지로 생산, 분배, 소비의 메커니즘 자체는 인간학의 대상이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경제적 위치를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방식, 자신이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지,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는지, 자유롭다고 느끼는지 따위가 인간학, 즉 ‘사회학’의 문제계이다. 또한, 음운 변화, 비교문법, 언어의 역사, 의미 변환에 대한 탐구는 아직 인간학의 고유 영역이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단어를 표상하는 방식이라든가 문장의 형식과 의미를 사용하는 방식, 담화를 구성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은폐하는 방식을 연구할 때 인간학으로서의 문학, 신화학, 문화 기호학이 탄생한다. 
 

인간학의 한계와 장애학의 출현


이렇게 해서 18세기 말에 붕괴되었던 표상의 공간이 19세기 인간학의 에피스테메에서 다시 형성된다. 그러나 인간학에 의해 열린 표상공간은 고전주의 시대의 표상공간처럼 투명성과 무한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인간학에서 파악된 표상은 신체성 때문에 불투명하고, 역사성 속에서 유한하다. 또한, 고전주의 시대의 표상은 고도로 의식적인 반면에 인간학에서 파악된 표상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말과 사물』 말미에서 푸코는 최후의 인간학으로서 정신분석학과 구조인류학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정신분석학과 구조인류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따라가지만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생명, 노동, 언어의 법칙이 인간에게 표상되는 ‘방식’, 그 무의식적 구조를 탐구한다. 인간본질이 구성되는 에피스테메 자체에 반성적 시선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정신분석학과 구조인류학은 무의식적 구조를 보편적이고 정태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그것의 생성과정과 (역사적, 지역적, 사회적, 정치적) 유한성을 충분히 사유하지 못했다.
 

인간 본질에 대한 지식의 에피스테메를 유한성 속에서 사유하는 것, 그것이 푸코가 『말과 사물』을 통해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푸코 자신이 『지식의 고고학』에서 말한 것처럼, “『말과 사물』에서는 방법론적 지표설정의 부재가 분석을 문화적 총체성에 의거한 것으로 믿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7) 이후 푸코는 ‘감옥’, ‘공장’, ‘학교’, ‘정신병원’ 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 부류의 인간을 프리즘으로 삼아, 인간에 대한 지식이 생산되는 방식을 추적한다. 또한 그렇게 생산된 인간학적 지식과 그것이 생성된 장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유형, 그들을 둘러싼 권력 장치와 맺는 상호 작용에 초점을 맞춘다.
 

빅터 핀켈스타인 이제 인간학(Human Sciences)과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의 관계를 밝힐 수 있다. 1970년대 영국에서 명시적으로 출현한 장애학은 장애와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학문이 아니다. 장애학은 장애(인)란 무엇인가? 장애인은 어떻게 분류되는가? 장애인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건 ‘의학’, 재활학, 사회복지학, 특수교육학의 방식이다. ‘장애학’은 장애인을 주체화하는 운동 속에서 출현했다. 영국에서 장애학은 60년대 말의 대항문화 속에서, 70년대 ‘분리에 저항하는 신체장애인연합’(UPIAS), ‘장애인해방네트워크’ 등 장애인 운동조직의 활동 속에서 탄생했다. 장애학 과정은 1975년 오픈 유니버시티의 학제간 연구팀에 의해 만들어졌다. 여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장애인 임상심리학자 빅터 핀켈스타인이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운동가이자 장애운동가였으며, UPIAS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오픈 유니버시티는 이름대로 18세 이상 영국 거주자 누구든 입학할 수 있었다. 오픈 유니버시티의 장애학 과정은 기존 학문 분과에 얽매이지 않은 학제 간 연구와 새로운 교수법으로 기성 교육에서 배제된 이들의 접근권을 보장했다. 개설 첫해 1,200명 이상의 학생이 모였다. 여기에는 전국에서 온 관련 전문가, 자원 활동가, 장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장애학 과정은 94년에 폐지되기 전까지 두 차례 갱신되었으며, 거기서 생산된 풍부한 자료는 영국 전역 주류 대학들의 학부 및 대학원에서 장애학 과정과 전문가 양성 계획이 수립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장애학은 ‘장애란 무엇인가?’고 묻는 게 아니라 그런 물음이 제기되는 인식 틀(에피스테메)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 장애인에 대한 지식이 구성되는 인식 틀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생성되며, 그것의 권력효과는 무엇인가? 영국의 장애학 1세대는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장애인에 대한 지식이 구성되는 장을 ‘사회’로 보았고, 그 지식의 권력효과를 ‘억압’으로 규정했다. 1976년 ‘분리에 저항하는 신체장애인 연합’(UPIAS)은 장애를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가 보기에 신체적으로 손상을 입은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은 사회다. 장애disability는 우리가 손상impairment 위에 부과되는 어떤 것으로, 그것은 우리가 아무런 필연적인 이유 없이 사회에 대한 완전한 참여로부터 고립되고 배제됨으로써 초래된 것이다. 이렇게 장애인은 사회 안에서 억압받는 집단이 된다.8)


장애를 개인의 기능 손상으로 보는 의료적 관점에 맞서 사회적 억압의 산물로 보는 이런 사회적 모델은 장애인을 사회적 주체로 참여시키는 운동에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바꿔야 하는 것은 장애인의 결함이 아니라, 장애인을 배제하는 사회의 물리적, 제도적, 법률적 장벽이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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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미셀 푸코, 『말과 사물』, 208쪽.
2) 캉티용(Richard Cantillon 1680s–1734)은 화폐의 수량을 중요하게 여긴 이론가로 화폐의 유통 속도와 양을 결정하는 요인을 추산했고, 귀금속의 국제적 배분이 자동적으로 조정된다는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통화량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가할 때 그 각 방법이 경제활동의 순환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다.
3)
http://www.qtessay.or.kr/n64a14.htm
4) 미셀 푸코, 『말과 사물』, 45쪽.
5) 칸트,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서론. AB III, IV, V
6) 미셀 푸코, 『말과 사물』, 481쪽.
7) 미셀 푸코, 이정우 역,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2000, 39쪽.
8) 톰 세익스피어, 이지수 역, 『장애학의 쟁점: 영국 사회모델의 의미와 한계』, 학지사, 2013,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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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lizom@hanmail.net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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