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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와 ‘생명정치의 탄생’ ③] 신자유주의 안전 메커니즘, ‘장애인의 위험도’를 계산하다
푸코와 함께 장애 읽기 - 12
등록일 [ 2018년06월14일 17시31분 ]

인권의 한계와 피통치자의 권리


‘인권의 정치’에 비판적이라는 점에서도 푸코는 아렌트와 비슷하다. 1977년 7월 ‘바더 일당’(독일 적군파)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클라우스 크로이산트Klaus Croissant가 망명을 요구하며 프랑스로 왔다. 프랑스 정부는 그의 망명을 거절하며 그를 독일 정부에 인도하려 했고, 푸코가 막아섰다. 크로이산트가 추방을 위해 감옥에서 끌려 나왔을 때 푸코는 1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감옥 앞에서 상징적 바리케이트를 쳤다. 경찰은 그들을 난폭하게 해산시켰고, 푸코는 갈비뼈 하나가 부러졌다. 푸코는 크로이산트를 숨겨준 혐의로 기소된 두 여성을 변론해 줘야 한다고 지식인 사회에 호소하기도 했다. 크로이산트가 독일에 인도된 후 푸코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시위를 했다. 푸코는 왜 이 변호사의 망명권에 열중했을까?


당시 푸코는 『안전, 영토, 인구』로 출간될 강의를 하고 있었다. 푸코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기고문에서 크로이산트의 망명은 ‘피통치자gouverné의 권리’로서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코는 ‘피통치자의 권리’는 ‘인권’보다 더 명확하게 역사적으로 규정된 권리라고 했다. 망명자의 권리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라기보다 ‘피통치자’로서의 권리로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왔다는 것이다.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의 오이디푸스처럼 고대부터 어쩔 수 없는 사정상 법률적 보호를 박탈당한 사람이 와서 보호를 요청할 때 테세우스처럼 그 영토의 수호자는 망명자를 보호해줘야 한다는 관습법이 있었다. 중세 시대에도 영토 안에 있는 개인과 재산은 그 영토의 통제를 받는다는 원칙이 망명자를 보호해주었다. 푸코는 근대 통치국가 역시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인구(population)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안전협정’을 맺었으며 이 ‘안전협정’은 인권의 근거가 되는 ‘사회계약’보다 훨씬 실질적인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1)

 
주목할 점은 푸코가 크로이산트의 망명권을 주장하면서도 크로와산트가 변호한 독일 적군파는 옹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이 들뢰즈와 달랐고, 한동안 질 들뢰즈와 사이가 서먹해진 이유다. 푸코의 주장은 피고인의 권리와 범인 인도 거부에 국한된 반면, 질 들뢰즈가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서명한 청원서는 서독이 파시즘 체제로 치닫고 있다면서 그에 저항한 독일적군파의 테러리즘까지 지지했던 것이다. 서독의 정치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 독일적군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논외로 하고, 푸코와 들뢰즈는 망명자권의 근거를 각기 다르게 이해했다.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들뢰즈가 크로이산트의 망명을 받아들인 것은 그가 억압적인 국가의 피억압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망명은 과거 북한에서 남한으로 망명해온 사람들을 ‘귀순용사’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뜻의 ‘귀순(歸順)’이다. 나쁜 편에 붙잡혀 있다가 우리 편으로 왔으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다. 푸코는 적대적인 국가 이념이나 종교 이념의 맥락에서 망명자의 권리를 이해하는 방식을 반대한다. 푸코가 망명자의 권리를 인권의 관점에서 볼 수 없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 망명자의 권리 보호에 앞장선 ‘프랑스 인권연맹’ 역시 정치적 확신이나 활동으로 박해받는 개인들을 구출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정치적 양심, 종교적 양심에 따를 권리라는 인권 개념 속에서 그런 양심에 따른 망명자를 보호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와 다른 이유로 망명을 요청하는 훨씬 많은 수의 난민에 대해서는 무관심, 무대책이라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국민국가 체제에서 인권으로 난민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난망함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2차 대전 후 국민국가 체제로 재편된 국제질서에서 망명의 권리는 성문법이나 헌법, 또는 국제협정으로 보장받지 못했다. 정치적, 종교적 양심에 따라 망명을 요청한 몇몇 개인들 말고, 유대인처럼 한꺼번에 국적을 박탈당하거나 내전 상황으로, 혹은 기후 재난으로, 혹은 경제적 재난 상황으로 한꺼번에 수만, 수십만 명의 난민이 망명을 요청할 때 국민국가 체제 하의 국제연맹은 그들을 받아들일 힘도 없고 근거도 없다. 아렌트가 보기에 이런 점에서 망명자의 권리는 인권과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즉, 한 번도 법이 되지 못했고, 단지 정상적인 법 제도로 충분치 못한 예외적인 경우에 하나의 도덕적 호소로서 공허한 실존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2)

 
푸코가 망명자의 권리로 제안한 ‘피통치자의 권리’는 어떤가? 푸코는 ‘피통치자의 권리’가 ‘인권’보다 더 명확하게 역사적으로 규정된 권리라고 했지만, 실정성과 구속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피통치자의 권리’는 ‘인권’과 마찬가지로 실정법으로 규정된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무의미한 권리는 아니다. 프랑스 인권선언이 시민권의 전제로 인권을 제시한 것처럼, 피통치자의 권리와 인권은 권리들에 앞선 권리, 모든 구체적 법 권리들의 전제조건이 되는 선험적(transcendental) 권리로서 의미가 있다. 아렌트는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은 비로소 그런 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권리들을 가질 수 있는 권리(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의 행위와 의견에 의해 평가받을 수 있는 하나의 구조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자신의 행위와 의견에 의해 평가받을 수 있는 어떤 문화적, 정치적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고, 그런 소속의 권리가 인간의 기본적 권리라는 것이다. 추방되어 무국적자가 된 인간은 바로 그 인권, 다른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박탈당하고 벌거벗겨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푸코의 ‘피통치자의 권리’ 역시 법 권리들에 앞서 제반 권리들의 가능조건이 되는 선험적 권리이다. 그러나 푸코의 ‘피통치자의 권리’는 아렌트가 말한 권리들을 ‘가질’ 권리가 아니라, 권리들을 ‘만들’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공동체에 소속됨으로써 주어지는 ‘자격’이나 ‘소유’의 권리가 아니라, 생명의 안전을 비롯하여 삶의 제반 통치 방식을 통치자에게 요구하고 동의할 권리이다. 권리는 법으로 제정되기에 앞서 발명되어야 한다. 권리를 발명하는 곳은 국회가 아니다. 그것은 법에 앞선, 법 바깥의 삶의 지대다. 푸코가 생명(life) 통치라는 말로 지칭한 영역 말이다. 주체(subject)라는 단어가 지닌 ‘따르는 자’와 ‘세우는 자’의 이중적 의미 그대로 ‘피통치자’는 삶의 통치가 이뤄지는 영역의 주체이다. 피통치자는 통치자의 통치를 따르는 동시에 삶의 통치 방식에 따른 제반 권리들을 발명하고 동의하는 자이다.
 

생명권력과 안전사회


푸코가 생명권력에서 주목한 것은 통치의 절약이다. 규율권력이 개별 인간 낱낱에 정상 규범을 주입시키는 걸 목표로 한다면, 생명권력은 ‘인구’로 파악된 통계학적 생명의 집합적 안전을 전략적 목표로 삼는다. 생명권력이 추구하는 인구의 정상성은 개별 인간의 정상성이 아니라 통계학적 정상성, ‘정상분포’ 곡선이다. 정상분포 곡선을 보호한다는 것은 평균에서 동떨어진 개별 생명은 내버려 둔다는 뜻이다. 우생학적 생명정치에서 보듯 무리 생명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하면 열등한 인간 생명은 도태시키는 것이 좋다는 게 근대 생명권력의 안전 메커니즘이다. 푸코는 『안전, 영토, 인구』 강의 첫날 안전을 추구하는 사회, ‘안전사회’에 대해 말한다. 


제가 여기서 연구하고 싶은 것은 소위 안전테크놀로지의 역사이며, 안전사회라는 것을 실제 운운할 수 있는지 포착하는 것입니다. 어찌 됐든 이 안전사회라는 이름으로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단지 안전테크놀로지라는 형태를 취하는, 혹은 안전테크놀로지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권력의 어떤 일반적 체계가 실제로 있는지의 여부입니다.3)


세월호 사건 이후 ‘안전사회’라는 개념과 담론이 확산되고, 대통령 헌법 개정안에도 ‘생명권’과 ‘안전권’이 새로 들어갔다. 푸코가 조심스레 제안한 ‘안전사회’에 대한 검토를 실제로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상황은 다르다. 19세기와 달리 지금은 통치의 절약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통치를 요구하면서, 정상사회의 안전이 아니라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안전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15년 서울시교육청이 동대문구 성일중학교 내에 설립하려던 발달장애인직업훈련센터에 대해 학부모와 학생들은 격렬하게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 때 반대 목소리 중에는 발달장애인직업훈련센터를 세월호와 연결시켜


그럼에도 안전 메커니즘 특유의 배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정신질환자 범죄와 여성 안전에 대한 담론이 연동되어 확산되고 있다. 여성의 안전을 위해 정신질환자에 대한 예방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안전 담론의 핵심 대상은 ‘아이들’이다. 한 발달장애인부모회가 깊은 산 속에 거주시설을 지은 것은 아이들의 안전을 희구해서이다. 지역사회는 발달장애 아이들에게 위험하고, 지역사회도 발달장애인을 위험하게 보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부모회가 왕따, 방관, 폭력이 난무한 일반학교에서의 통합교육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특수학교에 보내는 것도 발달장애 아이들의 안전을 희구해서이다. 지역사회의 비장애인 부모들이 발달장애인 직업능력개발센터나 특수학교 설립을 죽기 살기로 막을 때 그것도 아이들의 안전을 희구해서이다. 동대문구 발달장애인 직업능력개발센터 ‘커리어월드’ 설립 때 반대 주민이 세월호 사건을 언급하며 아이들 안전을 위해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4) 안전사회는 위험성 색출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배제할 수 없다.


생명권력과 자유주의


발달장애인 부모운동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발달장애인에 대한 외부의 시선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발달장애인 자녀에 대한 내부의 시선이다. 발달장애인 자녀의 안전과 자유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안전이냐 자유냐’의 선택이 아니라 ‘안전과 자유의 종합’, 그것이 생명권력의 안전 메커니즘에서 푸코가 주목한 사항이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 생명권력은 자유주의 통치의 일환이다. 19세기 자유주의는 국가의 통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화하는 통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통치문제에 대한 반응이었다.


19세기 생명권력의 안전 메커니즘은 ‘자연’의 힘에 근거한 자유방임을 통치원리로 제시했다. 가령, 질병 통치에 있어서 규율 메커니즘은 페스트 대처법처럼 병자와 정상인을 분리하고 각자 정해진 위치와 행동규범을 부과하고 감시하는 방식이다. 반면에 안전 메커니즘은 장티푸스 예방접종처럼 병을 완전히 제거할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자연적 소여로 보고 통계적으로 관리한다. 식량난(기아)에 대한 대처방식도 다르다. 규율 메커니즘은 식량난, 특히 도시의 식량난을 저지, 근절, 예방하기 위해 곡물수출을 통제하고 식량을 비축해 놓거나 경작지를 통제하는 등 인위적인 규제를 부과한다. 반면에 안전 메커니즘은 식량난을 자연적 소여로 받아들이고 곡물생산의 자연적 순환과 시장에서의 교류를 통해 저절로 사라지도록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런 정상화 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은 병들어 죽거나 굶어 죽을 것이다. 그건 불가피한 자연 현상이고, 중요한 것은 통계학적으로 정상적인 인구 분포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안전 메커니즘은 시장과 자연의 힘을 믿고 ‘일어나도록 내버려 둔다laisser faire’는 의미에서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주의 통치원리이다.


19세기 자유주의는 시장 가격을 자연 가격으로, 시장의 조절원리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 신격화(자연화) 했다. 이와 달리 2차 대전 이후 신자유주의, 즉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와 미국의 무정부적 자유주의는 시장을 자연적 소여로 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경쟁의 장으로 보았다. 경쟁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경쟁은 형식화의 원리, 그것도 불평등의 형식화 원리이다. 경쟁은 존중해야만 하는 자연적 소여가 아니라 통치술의 역사적 목적이다.5)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통치는 경쟁을 조장한다. 왜냐하면 경쟁이 시장뿐만 아니라 시장을 모델 사회를 통치할 때 합리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제 자유는 ‘내버려둔다’는 의미의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경쟁의 주체가 능동적으로 행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신자유주의 통치에서 주체의 역량으로 제시된 자유는 선택의 자유이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철학적 기원으로 영국의 경험론을 든다. 흄은 다른 이유를 댈 필요도 없고 타인에게 양도할 수도 없는 경험적 선택의 주체를 만들어냈다. “원자론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주체 자신에 준거하는 선택의 원리가 바로 이해관계라고 불리는 것”6)으로, 이해관계의 원리에 따라 선택하는 인간이 바로 신자유주의적 인간인 ‘호모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이다. 시장의 경쟁력과 통치의 합리성을 보장하는 것은 호모에코노미쿠스’의 선택 원리인 이해관계에 따른 선택이다. 경쟁 관계에 있는 주체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른 선택을 할 때 그 개별적 선택들의 통계적 총합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원리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안전 메커니즘은 자유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호모에코노미쿠스의 주체적인 선택이 통계적 안전성을 산출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령, 산전기형검사 중 삼중표지자 검사라는 게 있다. 임신 14-20주 임신부의 혈액을 채취하여 알파태아단백, 사람융모생식샘자극호르몬, 비결합에스트리올 등 세 가지 호르몬의 농도를 측정하고 컴퓨터로 분석하여 다운증후군의 ‘위험도’를 계산하는 검사다. 이 삼중표지자 검사로 산출된 값은 태아의 유전자에 이상이 있을 ‘확률’이다. 이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고 해서 태아의 유전자에 이상이 있다는 게 아니라 대략 ‘1 퍼센트’의 위험도(risk)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위험에 처한 사람은 보통 이분법적이고 규범적인 범주 안에서 자신의 검사 결과를 평가한다. 그 결과 ‘양성’은 확률이 아니라 아이에게 실질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7)
 

그래서 삼중표지자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온 다수가 이후 단계로 양수 검사 같은 침습성 검사를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양수 검사로 인해 태아가 유산될 위험도 역시 1퍼센트이다. 산전표지자 검사 결과 ‘양성’이 말해주는 1퍼센트의 리스크와 양수검사로 인한 유산의 리스크 1퍼센트가 수치상으로는 같지만 경험주의적 주체는 전자를 훨씬 위협적으로 느낀다. 논리적으로는 같은 1퍼센트의 위험도인데 왜 장애아의 위험도를 크게 느끼냐고 물으면 경험주의자는, 혹은 신자유주의자는 당연한 거 아니냐고, 그건 다른 이유가 필요 없는 자신의 환원불가능하고 양도 불가능한 감정이라고, 그에 따른 선택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 경험적 판단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처우라는 선험적(transcendental) 조건 위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간단히 무시한 채 말이다.

 

사진출처 : www.flickr.com


신자유주의적 안전 메커니즘은 이렇게 호모에코노미쿠스의 선택이 통계적 다수, 즉 통계적 정상성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비단 시장에서의 상품 거래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거래행위와 법률 행위, 신상 관련 행위들에 있어서 호모에코노미쿠스로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사람이 많아지게 한다. 이해관계의 주체는 곧 계약의 주체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하는 주체는 그에 따라 계약하고 책임지는 법률적 주체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법 권력이 약해지기는커녕 개인의 행동양식(conduct) 전체가 계약 행위로 법률화 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미국에 변호사가 그렇게 많은 이유이고, 신자유주의의 수입과 함께 법률서비스 시장이 개방된 이유이다.


또한 이것은 사문화 되어가던 금치산자 제도가 성년후견인 제도로 탈바꿈하여 법률서비스 제도로 확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택장애’라는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통치 속에서 선택해야 상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호모에코노미쿠스로서 이해관계에 따라 똑바로 선택하고 계약하지 못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통치 질서에서 (본인과 사회 전체에) 크고 작은 위험을 초래하는 장애이다.


발달장애인 부모들이 성년후견인 제도 도입에 적극 나선 것에는 이런 맥락이 있다. 성년후견인 제도는 발달장애인 자녀의 의사결정을 믿을 만한 법인이 대리해줌으로써 계약과 약정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여긴 것이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안전장치 속에서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자유는 너무 쉽게 부정된다. 왜 성년후견 제도가 필요하냐고? 발달장애인은 본래 자유롭게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결정능력이 없으니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하고 책임지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기준에서 발달장애인에게는 장애가 있다. 발달장애인만 그런가? 치매 노인만 그럴까? 복잡한 행정 테크놀로지 환경에서 선택 장애를 겪는 사람은 경제적 문화적 빈곤선을 따라 확산되고 있다. 발달장애인과 치매 노인의 장애를 ‘인지장애’로 실체화하여 성년후견의 필요 이유로 삼지 말고, 신자유주의 통치 환경이 만든 ‘선택장애’라는 맥락 속에서 사회화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통치를 분석하면서 푸코는 통치의 영역에서 자유를 어떻게 고려할지 고민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그것을 선택의 주체, 거래의 주체라는 법 권리의 주체로 환원시켰다. 푸코는 흄과 칸트보다 훨씬 앞선 고대로 거슬러 가서 다른 방식으로 자유를 사유할 수는 없는지, 다른 방식으로 (피)통치자의 자유를 사유할 수 없는지 연구했다. 거기서 푸코는 통치자, 즉 돌보는 자와 피통치자, 즉 돌봄을 필요로 하는 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자유, 즉 자기-돌봄의 능력으로 이해된 자유를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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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미셀 푸코, 오트르망 역, 『안전, 영토, 인구』, 난장, 2011, 497쪽.
2) 『전체주의의 기원 1』, 509쪽.
3) 『안전, 영토, 인구』, 30쪽.
4)
http://beminor.com/detail.php?number=9287&thread=04r06 하금철, “안전 책임의 사유화 시대, 발달장애인 공포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5)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187쪽.
6)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376쪽.
7)  Anne Waldschmidt, ‘Who is Normal? Who is Deviant? Normality and Risk in Genetic Diagnostics and Counseling’, Foucault and the Government of Disability, edited by Shelley Tremain, Michigan: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15, p.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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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lizom@hanmail.net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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