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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장애, 혹은 ‘섹슈얼리티의 역사’ ①] 정관수술 받겠다는 미혼남성이 병원에서 쫓겨난 이유
푸코와 함께 장애 읽기 - 13
등록일 [ 2018년06월20일 17시43분 ]

나르키소스와 에코

 

에코와 나르키소스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작, 1903년 (사진출처 : 위키백과)


고대 그리스와 현대 신자유주의 사회에 공통된 인간형이 있다. 그것은 자기한테 몰입된 인간, ‘나르키소스’형 인간이다. 나르키소스 신화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자기에 대한 관심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이해하는 독특한 방식이 담겨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나르키소스는 그리스 최고의 미소년이었다. 그를 본 자는 누구든지, 신이든, 요정이든 인간이든, 동물이든, 혹은 남자든 여자든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나르키소스는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 타인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상처받은 이가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이가 ‘에코’다. 에코는 원래 수다스런 님프였다. 어느 날 에코는 제우스의 불륜 현장을 덮치러 가는 헤라를 만나 수다를 떨었다. 에코의 수다 때문에 남편의 불륜 현장을 놓친 헤라는 화가 나서 에코에게 “너는 앞으로 네 말 하지 마. 남이 하는 말만 해” 라고 저주를 내렸다. 그렇게 자기 말을 뺏긴 에코는 어느 날 나르키소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못하고 따라다니며 지분거릴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남한테는 관심 없던 나르키소스는 자꾸 귀찮게 하는 에코를 향해 “못 생긴 여자가 왜 따라다녀?” 라고 험한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에코는 너무 부끄러워 산속으로 도망쳤다. 에코는 동굴 속에 몸을 숨긴 채 자신의 못 생긴 몸을 저주했다. 저주의 끝은 소멸. 지독한 자기모멸은 에코의 몸을 사라지게 했다. 결국 산 속 동굴에서 몸이 소멸된 에코는 가끔씩 남이 하는 말을 따라하는 목소리만 남았다. 산 속 동굴의 ‘메아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주는 유래담이다. 자연에 이야기를 담는 그리스인들의 이야기 솜씨가 놀랍다. 특히 ‘에코’의 유래담을 ‘나르키소스’ 설화와 연결한 발상이 흥미롭다.


에코의 비극을 듣고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나르키소스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복수의 원칙은 등가성의 원칙, 받은 대로 돌려줘야 하는데 에코가 나르키소스에게 받은 피해가 뭘까?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슬픔. 하지만 나르키소스는 절대 꽃미남, 그의 사랑을 거절할 존재는 세상에 없다. ‘미러링’의 천재 네메시스는 나르키소스를 우물로 이끌었다. 우물 에 비친 자기를 본 나르키소스는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동일성을 내포하지만 나에게 없는 게 타인에게 있거나 나와 다른 점이 있어야 사랑을 통해 완성을 이루는 법. 자기에 대한 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다 우물 속의 자기를 껴안았다. 그 순간 우물 속의 자기 모습도 흩어지고 껴안은 자의 생명도 흩어졌다. 그 소멸된 아름다움은 수선화로 환생했다.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대칭성이다. 나르키소스는 자기한테만 관심 있고 타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반대로 에코는 자기 말은 못 하고 남의 말만 따라 한다. 나르키소스에게는 자기만 있고 타자가 없다. 반면, 에코에게는 자기가 없고 타자만 있다. 이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나르키스소적 인간과 에코적 인간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여준다. 그리스 문화답게 이 이야기는 두 성격의 ‘하모니’를 교훈으로 담고 있다. 자기에 대한 관심과 타자에 대한 관심의 조화. 자기한테만 몰두하여 타인에게 무관심한 나르키소스적 인간의 파국도 조심해야겠지만, 자기 생각도 없이 남의 말만 따라하는 에코적 인간의 비극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


고대 그리스인들이 만들어낸 이 이야기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에도 기가 막히게 잘 맞는다. 신자유주의 통치체제는 어떤 유형의 주체성을 양산할까?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말라’는 신자유주의 모토에 따라 타인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무관심하고 오직 자기 생존과 자기 이익에만 충실한 나르키소스적 주체가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 인간은 에코적이기도 하다. 자기 생각이나 요구는 말 못하고 남의 말만 따라 하는 그런 인간 말이다. 신자유주의적 인간 양성에 충실한 부모들, 자식의 적성이나 욕망은 아랑곳 않고 경쟁력 높인다며 영어 몰입교육을 시키고, 조기 유학을 보내고, 선행학습을 시키고, 명문고를 보내고, 명문대를 보내는 교육 투자에 몰두하는 부모들에게 왜 그렇게 하냐고 물어보라. 자녀가 싫어할 수도 있고, 견디지 못하고 폭발할 수도 있는데 비용 대비 투자 결과가 나쁠 가능성도 무지 큰데 왜 그렇게 무리한 투자에 몰두 하냐고 물어보라. 열에 아홉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거다. “남들 다 하니까.”


신자유주의 통치자는 피통치자들에게 완수해야 할 목표나 규범,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직 통계적인 정상치만 제시하고 각자 알아서 정상분포 안에 들 것을 권유한다. 사회 전 영역에서 개인의 품행 전반에 걸쳐 촘촘하게 경쟁을 조장하고, 성과에 따른 차등 보상과 도태에 의 고통을 보여준다. 그러면 피통치자들은 정상분포에서 벗어나 도태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알아서 선택하고 자기 계발에 몰두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에서는 통치자가 따로 없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교사이고 모델이고 거울이다. 다수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다수가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라, 그것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명령어이다. 그 다수의 이름이 ‘남’이다. 왜 그러느냐고? 남들 다 하니까. 신자유주의 통치체제가 원하는 피통치자는 그래서 나르키소스인 동시에 에코이다. 자기밖에 모르는데 자기 건 없고, 남들 다 하니까 하는 인간.


고대 그리스와 신자유주의 문화에서 동일한 주체성, 즉 ‘나르키소스이면서 에코’인 인간형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푸코는 1979년 ‘신자유주의의 생명권력’에 대한 강의를 마친 후 1980년 미국에 가서 ‘주체성과 진실’에 대해 강의했고 1981년에 프랑스에 돌아와 ‘주체의 해석학’에 대해 강의 했다. 이 일련의 강의에서 다뤄진 주제는 고대 그리스문화권에서 ‘자기(self)’가 다뤄지는 방식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에서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나르키소스와 에코’를 종합하는 하나의 방식임을 밝혔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화를 통해 그것과 다른 종합방식, 신자유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나르키소스이면서 에코’인 주체성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의 총괄이 1983년부터 죽기 전까지 ‘자기와 타자의 통치(government of self and others)’라는 제목으로 지속된 강의이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나르키소스이면서 에코일 수 없을까? 이것이 푸코의 마지막 문제의식이다.


생명통치에 대한 나르키소스들의 반란


신자유주의의 나르키소스들이 다수가 되어 이명박과 박근혜 같은 나르키소스적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그로 인한 고통과 배신감에 치를 떨다 그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그래서 다수의 깨어있는 시민과 정의로운 사람들은 이제 에코에게 대안을 구한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케인즈주의에 복귀 명령을 내리고, 국가에 더 많은 통치를 요구한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다. 다시 케인즈주의에 맡겨보자. 이기심과 자기 총을 버리고 국가와 더불어 공동체를 회복하자! 통치체제의 양당제이고, 통치사의 변증법이다. 하지만 역사는 교체되는 게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그리고 정권교체를 일으키는 원동력은 정치권이 아니라 사회 저변에서 일어나는 통치성의 변화이다. 그 변화를 일으키는 자들은 나르키소스들이다. 자기 이해에 따라 자기애에 충실하게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 신자유주의 통치체제가 양산한 또 다른 나르키소스들이 신자유주의 생명통치에 반기를 들고 있다. 


생명통치의 변화된 현실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활동가 최황(34)씨는 2017년 봄 정관수술을 받기 위해 비뇨기과 의원을 찾았다가 거절당했다, 의사는 “미혼·무자녀 남성에게는 정관수술을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 생명 윤리적 측면도 있다”고 답했다. 정관수술을 받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최 씨는 다른 병원을 찾았으나 같은 이유로 거절당했다. 최 씨는 결국 세 번째 병원에서 “결혼했고, 쌍둥이 자녀가 있다”고 거짓말을 한 뒤에야 수술대 위에 누울 수 있었다.1)

 

SBS 동상이몽2 방송 화면 갈무리.


미혼이거나 자녀가 없는 기혼 남성은 정관수술을 받기가 어렵다. 법으로 금지된 건 아니고, 정상성의 기준에 투철한 의사들 때문이다. 피임 목적으로, 페미니즘에 동참하기 위해, 혹은 번식하지 않겠다는 신념 때문에 정관수술을 원하는 성인 남성의 자유의지가 정상가족의 가치를 대변하는 의사에 의해 좌절될 때 그때서야 남성은 ‘생명을 통치하는 권력’의 존재를 실감한다. 내 몸에 대한 통제권이 나한테 있지 않고 타자의 정상성과 도덕 기준에 달려 있는 경험 말이다.


남성의 정관수술은 국가의 인구정책에 따라 저지되기도 하고 권장되기도 한다. 1960년대에는 ‘가족계획 사업’의 하나로 정관수술비를 지원했다. 1970년대에는 수술을 받은 이들에게 아파트 분양 우선권까지 주었다. 1982년에는 예비군훈련 중 정관수술을 한 사람에게 훈련 잔여 시간을 면제해줬다. 1984년 한 해에 8만3527명이 정관을 차단했다. 보통은 권장하고 유도했지만 어떤 사람들의 정관수술은 우생학적 판단에 따라 강제로 이뤄졌다. 한센인 단종수술 얘기다. 2017년 2월 15일 한센인 강제 정관수술에 대해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해방 후 80년대까지 한센인 산아제한 정책으로 이뤄진 강제 정관수술 피해 남성 9명에게 3천만 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이다. 더불어 낙태 피해 여성 10명에게는 4천만 원 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들이 전부가 아니다. 2011년부터 500여 명이 6차로 나누어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 중 한 건이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것이다.


국가의 우생학적 생명통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이 소송에서 흥미로운 판결이 하나 있다. 2016년 9월 23일 서울고등법원 민사 30부(부장판사 강영수)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긴 하면서, 배상액을 감액하여 남녀 균일하게 2000만을 선고한 것이다. 소록도국립병원에 ‘특별법정’까지 열어 국민적 관심을 끈 이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판사가 ‘일베’ 회원이 아닌가 싶은 요상한 근거를 내세웠다. 재판부는 1심 재판부가 강제 정관수술 피해 보상액 3,000만원, 강제 낙태수술 피해 보상액 4,000만원으로 차별한 것은 “헌법 제 11조 모든 영역에서 불합리한 차별을 금지한” 평등원칙에 위배되고, “낙태 수술과 정관절제 수술로 인해 여성과 남성으로서 받았을 정신적 고통은 서로 그 정도를 비교하여 그 경중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볼 자료가 없으므로” 동일한 금액으로 보상하라고 판시했다. 국가의 생명통치권에 대한 논란과 별도로 재생산권에 관한 남녀평등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 재판부는 강제 정관수술로 인해 피해 남성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상실감, 자녀를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정관절제수술을 받을 당시 느꼈을 치욕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분노로 고통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정관수술로 인해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었다는 불가사의한 얘기는 그렇다 치고, “자녀를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 강제 정관수술로 인한 남성의 구체적 피해 사실이다. 아마 판사의 머리 속에는 남자로서 씨를 뿌릴 권리, 대를 이을 권리, 자식을 낳아 노년에 봉양 받을 권리가 침해했다는 말이 맴돌았을 것이다. 만약, 3, 40년 전에 이 재판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대를 이를 권리를 봉쇄당한 남자의 권리 침해가 훨씬 높이 평가되고, 겨우 남자의 아이를 뱄다가 떼인 것뿐인 여성의 모성권은 훨씬 낮게 평가되지 않았을까?


정관수술과 낙태수술은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의 침습성이 비교할 수 없이 다르다. 또한 정관수술로 인해 남성은 ‘생길 수도 있는’ 자식을 잃게 되지만, 낙태수술로 인해 여성은 ‘이미 생긴’ 태내의 생명을 빼앗긴다. 대부분의 낙태수술은 임신 사실이 겉으로 드러난 임신 3개월 이후에 이뤄졌다. “배에다가, 그러니깐 아이 머리에다가 주사 놨다. 그러면 아이가 죽는다. 이후 약물로 꺼냈다.” “7,8 개월 된 태아를 개복수술로 꺼내 죽였다.” 등의 증언이 쏟아졌다. 정관수술로 인해 남성은 “자녀를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강제 낙태수술로 인해 여성은 “태아를 지키지 못하였다는 죄책감이 평생 마음에 한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항소심 재판부는 남녀의 고통을 차별적으로 느끼지 않았고, 차별적으로 느끼는 것은 헌법에 적시된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꾸짖었다.

 

시신해부가 이뤄졌던 소록도 검시실. 소록도 주민에 의하면 1996년까지 오른쪽 선반에 낙태한 태아 표본을 포르말린액 속에 담아 보관한 유리병이 있었다.


3, 40년 전 국가의 우생학적 생명통치로 한센인들이 침해받은 권리는 무엇일까? 재판부는 헌법에서 ‘행복권’과 ‘인격권’을 찾아냈지만, 그보다 정확한 개념은 ‘재생산권’이다. 이번 판결을 기화로 인간 생명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는 개인에게 있으며, 국가는 개인의 재생산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공인받고 헌법에도 명시해야 한다. 하지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생명통치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 어떤 ‘공공의 이익’이나 ‘유전학적’(우생학적) 필요, ‘질병관리’의 필요로 인간 생명의 재생산에 국가가 개입할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재생산권이 개인에게 있다고 하면 결정적인 재생산 수단인 ‘자궁’의 소지자, 즉 여성이 재생산권의 주체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아마 수많은 가부장주의자들이 반대할 것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나르키소스적 기치 아래 ‘낙태금지법 폐지’를 외치는 여성들은 국가의 생명통치권뿐 아니라 인류 역사 상 2500여 년 간 이어져온 가부장 통치체제에 대한 반란에 돌입한 것이다.


국가의 생명통치권에 대한 이 나르키소스적 반체제(dissident)는 신자유주의적 안전 메커니즘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산전검사와 선별적 유산을 통해 국가가 유도하는 우생학적, 비장애중심적(ableism) 선택을 하는 주체로 정상화될 가능성도 있다. 안 그래도 모자보건법 14조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부모의 낙태를 허용, 장려하고 있다. 형법의 낙태금지 조항(270조 1항)은 우생학적, 비장애중심적 선택을 막기 위해 만든 것도 아니고, 실제로 막지도 못한다. 오히려 낙태금지법과 모자보건법은 우생학적으로 건강한 인종의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고 열등한 인종과의 결혼, 출산을 금지한 나치의 뉘른베르크법을 모델로 한 국가의 우생학적, 비장애중심적 생명통치장치임을 상기해야 한다.


태아의 생명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 하는 ‘에코’의 문제는 자기 몸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 하는 ‘나르키소스’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자기 몸을 돌보는 주체가 태아의 몸을 돌보게 해야 한다. 태아를 돌보는 사람이 태아의 돌봄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 여성의 자기 돌봄과 타자(태아)의 돌봄을 분리시키면서 태아의 돌봄 여부(임신중단 여부)를 제 3자의 관점, ‘공공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 공공의 관점이란 것은 실은 여성의 몸을 식민 통치하는 남성의 관점에 다름 아니다. 푸코의 말처럼 인민의 정의에 제3자는 없다.


출산에 대한 나르키스소적 반체제와 나란히 신자유주의적 생명통치는 죽음에 대한 나르키소스적 반체제를 야기한다. 어떤 순간 자신의 생명에 끝을 부여하는 권리를 개인에게 줘야 한다는 나르키소스적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2018년 2월 4일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연명의료결정제도’를 본격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투석 같은 연명의료 시행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법으로, 인간의 존엄을 위해 인간다운 삶의 회복이 불가능하고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는 생명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을 권리를 주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물론, 히틀러가 그의 대량학살을 ‘치료 불가능한 환자’들에게 ‘안락사’를 허용함으로써 시작했다는2) 역사적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또한 이 법이 국가의 건강보험 재정 부담과 가족의 의료비 부담을 덜기 위한 경제학적 조치라는 논란도 있다. 선별낙태와 마찬가지로 가치 있는 생명과 가치 없는 삶의 구분이 장애인의 삶에 대한 가치평가로 이어질 위험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인간다운 죽음에 대한 이 나르키소스적 통치권에는 인간 생명의 절대성과 무한성을 근간으로 한 근대 생명권력 및 생명 테크놀로지와 단절한다는 의미에서 반체제성이 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종적 생명의 불멸에 대한 지향이 얼마나 많은 폭력과 절대 권력을 낳았는지 반성하면서, 죽음의 공포를 떨치고 생명의 유한성을 깨달으면서, 잘 사는 법의 완성을 잘 죽는 법에서 찾은 스토아주의자들의 지혜와 용기를 재평가하고 활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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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http://www.hani.co.kr/arti/society/health/831379.html
2) 한나 아렌트, 김선욱 역,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5, 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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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lizom@hanmail.net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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