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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하는 이들 속의 내부자이고자 했던 박종필의 카메라
'박종필의 카메라, 이것이 액티비즘이다!' 추모포럼 열려
"박종필 감독은 현장성과 내부자적 시선을 유지하는 액티비스트였다"
등록일 [ 2018년07월27일 22시37분 ]

27일, 콘텐츠코리아랩 컨퍼런스룸에서 50여명의 사람들은 박종필을 기억하며 그가 자신의 전부로 여겼던 카메라와 활동을 논의하는 <박종필의 카메라, 이것이 액티비즘이다!>라는 주제로 추모포럼이 열렸다.
 

故박종필 감독은 자신의 카메라가 어느 곳을 향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가장 낮은 곳으로 카메라를 끌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렌즈를 고정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만들어 낸 사회를 향해 목소리 내며 싸우는 자들을 찍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의 고통을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 여기에도 있다고. 가끔은 힘들고 외로워서 포기하고 싶겠지만, 같이 나아가면 괜찮다고. 다큐멘터리에 카메라를 든 그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카메라 뒤에서 외로운 자들과 항상 현장에 있었다.

 

그는 현장을 기록하며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 기록은 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현장이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사람들에게 읽혔을 때 그것이 어떤 공론화와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등 수많은 고민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종필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몸 담은 현장을 확신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 공간을 기록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카메라는 좋은 무기였다. 그의 렌즈는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는 장애인운동, 빈민운동 등에 '줌인(Zoom In)'해 촬영했다. 그렇게 20여 년간 현장에 카메라를 묶어두고 떠나지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점점 상해갔고 결국 2017년 7월 28일 카메라를 현장에 두고 떠나갔다.

 

박종필추모사업회(준)는 27일, 콘텐츠코리아랩 컨퍼런스룸에서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박종필을 기억하기 위해 그가 자신의 전부로 여겼던 카메라와 영상활동을 논의하는 <박종필의 카메라, 이것이 액티비즘이다!>라는 주제로 추모포럼을 열었다. 이 날 자리에는 그가 죽기 직전까지 담고자 했던,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으로 구성된 416합창단도 함께 해 고인을 노래로 추모했다.

 

박 감독이 장애인운동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낸 대표적인 작품은 <끝없는 싸움-에바다>(1999),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버스를 타자!>(2002), <노들바람>(2003)이다. 이 세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의 ‘2008 다양성영화 DVD 제작 지원작’으로 선정돼 하나의 DVD로 묶여 출시가 되기도 했다. 또 다른 대표작으로는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 노숙자> (1998)가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당시 한국사회가 장애인, 홈리스 등을 차별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현장을 당사자의 말을 무기로 고발했다. 각종 영화제는 박종필의 작품을 소개하며 빈곤과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반성을 촉구했다.

 

박 감독은 수많은 다큐에서 어떤 시선을 유지했을까. 이 날 발제를 맡은 김도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는 박 감독의 시선과 관심은 늘 ‘내부자’의 것이었다고 평했다. 그는 “박 감독은 늘 장애인운동의 곁을 넘어 우리 ‘안’에 있었다. 그는 우리의 투쟁이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여러 기록물들을 창작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노들장애인야학의 이야기를 다룬 <노들바람>을 예로 들었다. 이 작품은 2004년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올해의 인권영화상’을 수상했지만 평가는 엇갈렸다. 특히 지나치게 긴 러닝타임(123분)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날 발제를 맡은 김도현 노들장애인야학 교사는 박 감독의 시선과 관심은 늘 ‘내부자’의 것이었다고 평했다.
 

김 교사는 이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을 수 있지만, 박 감독의 시선과 감성이 야학 내부인들의 시선과 거의 일치해 있었던 탓이 컸을 것”이라고 말하며 “적어도 그 시기의 역사와 맥락을 공유하고 있는 노들 사람들에게 <노들바람>은 더 이상 어느 한 곳 덜어낼 장면이 없는, 그럴 경우 너무나 큰 아쉬움과 내러티브의 결손이 생기는 가장 압축된 분량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박 감독도 그런 의미에서 러닝타임을 더 이상 줄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가 싸우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언어로 현장을 충실히 담아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대표작인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 노숙자> (1998)에서도 그는 내부자적 시선을 고집했다. 그 당시 주류 방송은 이들을 단지 사회문제로 경계하고 대상화 했다. 하지만 박종필은 IMF 이후 노숙인들이 거리로 내몰릴 수 밖에 없었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며 노숙인을 보는 사회의 편견 어린 시선을 폭로했다. 이 작품의 영향으로 1990년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홈리스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내부집단에서만 상영되는 노동영화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박 감독의 장애, 빈민다큐가 상영되고 나서 외부에 있는 관객들에게 이 문제가 알려졌다”고 평했다.

 

박 감독의 이력을 보면 영화제 상영과 수상이 많다. 그가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에는 영화제가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독립다큐멘터리 제작 집단 '다큐인'(1998)을 결성한 것도 이 때다. 주요 영화제는 보여지고 평가되는 존재로서의 장애인이 아닌 운동의 주체로 나선 장애인을 담은 영화를 소개했고 그는 각종 수상을 휩쓸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졌던 영화들은 박종필의 대표작들로 액티비즘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 받는다. 특히 그 정점 중 하나인 <버스를 타자!>(2002)는 배급이 이뤄져 이동권 싸움을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이 영화에서 사람들의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장면은 장애인 리프트의 움직임을 촬영한 약 3분 여간의 롱테이크 씬이다. 리프트가 천천히 상승하는 동안 비장애인 몇몇이 장애인을 구경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답답함을 느낀다. 또한 갇힌 프레임 안에서 리프트의 멜로디도 계속 흘러 나온다. 이 장면은 휠체어 장애인들이 리프트를 이용할 때의 수치심과 스트레스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박종필의 영화적 언어’를 발견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이 다큐는 2002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고 2004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으며 같은 해 KBS 독립영화관에서도 방영됐다.

 

하지만 2011년에서 2012년 사이 박종필 감독은 슬럼프를 겪었다고 한다. 현장다큐 외에도 다양한 방식을 시도한 영화들이 나오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그는 ‘앞으로 어떤 다큐를 찍을 것인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또한, 2000년대 중반 이후 다큐의 플랫폼이 영화제를 넘어 극장배급으로 일상화 되고 방송과 온라인으로 확장됐다. 영화제와 공동상영을 중심으로 영화를 선보였던 감독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영화를 선보일 공간이 줄어든 셈이다. 김동현 집행위원장은 “독립영화의 배급환경의 변화는 박종필의 액티비즘을 분명 소외시킨 측면이 있다”고 평했다. 이 시기에 박 감독은 다큐의 내용과 형식적 측면 모든 것을 고민해야 했다.

 

<두 개의 문>(2012), <공동정범>(2018)을 만든 김일란 감독 역시 이런 지적에 동의했다. 그는 “박종필 감독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기술의 발달에 따라 액티비즘 다큐 역시 다양한 실험을 필요로 하게 된다. 또한, 액티비즘 다큐는 감독의 물리적인 위치나 의미상의 시선이 내부적인 시선 하나보다 더 다양해져야 하고, 그 자체로 영화적 미학을 생산해야 한다”고 비평했다. 그래서 <두 개의 문>처럼 현장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감독의 위치가 표면적으로는 ‘내부자’가 아닌 영화들을 보며 그는 ‘현장투쟁을 충실히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다큐의 의미를 다시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종필 감독은 변화된 다큐의 흐름 속에서도 일관되게 홈리스, 장애인, 독립영화 진영에서 활동했다. 2003년 장애인 미디어 교육을 했고, 2005년부터는 약 4년간 미디액트라는 단체에서 장애 영상활동가 양성에 힘썼다. 2007년에는 시민방송 RTV에서 격주로 방영되는 <나는 장애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의 책임연출을 맡았다. 채널과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를 결합한 그의 시도이기도 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도 역시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 형성,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 당사자의 의지와 행동으로 세상을 직접 바꿔내는 것에 중점을 뒀다. 그는 대본 속 언어 하나까지도 신중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생긴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실행한 예산 삭감, 정책변화 등의 여파로 그의 실험 프로그램 역시 중단됐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그는 세월호 진상규명에 매달렸다. 그는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 들어갔다. 박종필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기록이 중요한 투쟁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결과로서의 참사가 아니라 물리적인 시간의 과정으로 접하는 참사라고 말했다. 2015년 8월부터는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2기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세월호 관련 다큐 <바다에서 온 편지3 – 알고 싶습니다>(2015), <416 프로젝트-기억과 망각: #프로젝트4 인양>(2016)을 연출하며 최근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2010년 간경화 판정을 받고,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한 달도 채 안 된 2017년 7월 28일 49세로 박종필 감독은 사망했다.

 

이 날 추모포럼에 참여한 문종택 세월호 유족은 박종필을 '아픈 사람들에게서는 옆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있었던 사람'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는 "종필이는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의 한 발짝 뒤에 있었다. 또한, 종필이의 카메라는 움직이는 피사체가 카메라 앵글을 벗어나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그 높은 계단에 휠체어가 올라가더라도 따라가지 않고 그의 카메라는 있던 자리를 비추었다"며 고인을 기억했다. 그러면서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이야기 했다. 그는 "우리의 육체에는 '두 눈'이라는 카메라가 있다. 그리고 여러분의 카메라는 이 사회에 어떤 감동을 주고 있는지 생각했으면 좋겠다. 못 다한 종필이의 카메라, 단 하루도 놓지 않았던 카메라다. 우리의 카메라는 종필이가 내어준 숙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추도했다.

 

평소 고인과 친하게 지냈던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이자 박종필추모사업회 대표는 "그의 영상에서는 당사자들의 고민이 항상 묻어 나온다. 그의 손에서 기록되고 보여졌다. 그의 다큐에서 우리는 단순히 보여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작고 가장 변두리에 있고 가장 힘 없는 우리의 존재를 기록해 주어서 감사함을 느낀다. 더 오래 박종필을 기억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박종필 덕분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날 자리에는 그가 죽기 직전까지 담고자 했던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도 함께 해 고인을 추모했다. 416 합창단은 노래를 부르며 박종필 감독을 잊지 않겠다고 이야기 했다.


박종필 감독의 추모포럼에 많은 관객들이 함께 했다. 이 날 많은 이들은 3시간이나 되는 진행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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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미 기자 hyemikim@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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