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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접근가능한 해방구 만들기의 가능성과 어려움
언리미티드 페스티벌 참관기 ①
등록일 [ 2018년11월12일 15시24분 ]

- 낙인을 예술로 

 

팔다리를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줄리 클레비스(Julie Cleves)가 레고블록처럼 생긴 판넬을 이용해 바닥에서 휠체어 위로 어떻게 올라가는지를 보여준다. 활동지원인이 판넬 조립을 돕지만 클레비스의 몸을 직접 돕지는 않는다. 그녀는 상체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엉덩이를 번갈아들어 올려 엉덩이와 바닥의 틈새를 만든다. 그 사이로 활동지원인이 판넬을 하나씩 왼쪽, 오른쪽 순서로 끼워 넣는다. 한칸 한칸 쌓여가는 판넬은 바닥에서 전동휠체어 높이만큼 올라가고, 클레비스의 몸도 올라간다. 참가자들은 그녀의 움직임과 판넬의 무게, 조립방식을 번갈아 바라본다. 흡사 오뚜기와 같은 그녀의 가장 실용적인 움직임은 그 자체로 하나의 퍼포먼스다. 이 판넬은 다양한 형태로 조립이 가능하고, 무궁무진한 판넬의 조합수 만큼 클레비스의 움직임도 다양하게 전개될 것 같다. 

 

줄리 클레비스(사진 오른쪽)와 그녀의 활동지원인이자 동료예술가가 판넬을 이용한 클레비스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줄리 클레비스(사진 오른쪽)와 그녀의 활동지원인이자 동료예술가가 판넬을 이용한 클레비스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시간 뒤편 벽과 문으로 차단된 ‘블루룸’에서는 난소종양으로 자궁을 제거한 캐서린 호프만(Catherine Hoffman)이 자기 몸의 경험을 공연한다. 종양을 진찰했던 산부인과 도구의 기괴한 모습이 유머러스하게 표현된다. 반대편 ‘화이트룸’에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체장애여성 탄야(Tanja Erhart)와 영국의 비장애인 댄서 키티(Kitty Fedorec)가 스카이프로 연결된 채 동시에 춤을 춘다. 탄야는 무대에, 키티는 스크린에 있다. 스카이프를 통해 두 댄서는 중간중간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탄야는 한쪽 다리와 클러치(목발)를 이용해 체중을 지탱하며 움직인다.

 

장애예술운동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된 장애라는 개념에 개입한다(Jennefer Eisenhauer). 영국 런던에서 2년마다 개최되는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은 장애예술인들의 축제이며, 수십 년간 영국과 유럽에서 이어진 장애예술운동의 성과가 집적된 일종의 해방구다. 언리미티드(Unlimited)는 특정 조직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공모사업 브랜드로서, 영국 및 영연방 국가의 장애예술가들을 지원한다. 2년마다 9월경 런던 예술의 중심지구인 사우스뱅크에서 그동안 언리미티드의 지원 하에 역량을 갈고 닦아온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공연, 전시, 포럼 등을 함께하는 축제를 개최한다.

 

나는 지난 9월 영국문화원의 초청을 받아 런던에서 열린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일주일간 머물면서 심포지엄과 세미나에 참여했고, 몇 편의 공연과 전시를 보았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 행사에 관해서 공연, 축제 기획 등 여러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언리미티드 페스티벌과 관련하여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 언리미티드는 모든 소수자들의 축제이다. 둘째, 접근성(accessibility)을 편의제공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적 이상으로 삼는다. 셋째, 이것이 한국의 장애인, 장애운동진영, 장애예술계에 가지는 함의이다.

 

- 이념으로서의 ‘접근성’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통상 떠올리는 ‘장애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예술가들은 작은 계기만 있어도 스스로를 ‘장애인’이라 밝히고, 더 적극적으로 규정하려 한다. 가시적인 장애가 없는 사람들도 자신이 난독증, 통합행동장애, 뇌전증, 색맹 등이 있음을 밝히고 이를 강조한다. 또한 성소수자와 소수인종인 사람들도 이 페스티벌의 중요한 주체다. 언리미티드는 장애예술 페스티벌이라기보다는 ‘다양성’ 페스티벌에 가깝다. 이 의미에 관해서는 다음 기고 문에서 더 써보고자 한다.  

 

‘접근성’(accessibility) 보장은 이 페스티벌의 핵심적인 전제이다. 정보의 전달이나 공간에 대한 접근성은 당연히 중요하다. 휠체어 등이 접근가능한 공간에서 행사가 진행되는 것은 물론이고 영국수어(BSL)와 음성해설(audio description)이 거의 모든 공연에서 제공된다(약간의 예외가 있다).

 

접근성은 단지 어떤 시설물이나 정보에 접근가능한 조건에 그치지 않고 축제 전체를 흐르는 하나의 이념, 즉 다양성과 통합의 상징에 가깝다. 예컨대, 차별적인 언어의 사용은 비록 도움을 주려는 의도라도 접근을 제한할 수 있다. 또 상대의 상황에 따라 알아듣기 어려운 말도 접근(통합)을 제한한다. 이 때문에 수용가능한 언어를 강조한다. 발달장애인을 위해 이는 특히 중요하다. 말은 묘사적(descriptive)이어야 하고, 이해하기 쉽고, 간단해야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런던에서 비행기를 타고 13시간을 가야 하는 곳입니다. 저는 법을 공부하고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법으로 사람들을 돕습니다.” 정도로 나를 소개해야 한다(음 약간은 거짓말 같다. 그냥 예문이다).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는 안된다. “아이고 어떻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세요. 정말 감동이에요.”라고 말하기보다, “당신 그림의 빨간색과 초록색이 만나는 부분이 너무 예뻐요. 저는 당신이 그린 빨간색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페스티벌이 시작하기 전 세미나에서 진행된, 수용가능한 언어를 위한 지침. 묘사적이고, 이해가능하고, 간단하고, 감성적이지 않으며, 존중을 담으라고 한다.
 

당연히, 모든 말은 상대에 대한 존중을 담아야 한다. 최악의 예문은 이 정도가 아닐까? “아이고 정말 잘 그렸구나. 현대 회화의 핵심을 담으면서 장애자도 정상인과 똑같아질 수 있다는 예술적 충동과 불굴의 의지를 표상하는 네 그림을 보니 눈물이 다 난다. 어머니께 감사하렴(자 그럼 우리 사진 한 장 같이 찍을까?)”

 

상대방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할 때는 의학적 조건이 아니라 접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누군가 내게 “Osteogenesis Imperfecta 제3유형이라 못 걸으시죠?”라고 물으면 당연히 안 되지만, “걷는 게 불편하시죠”라고만 묻는 것도 적절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경사로나 엘리베이터가 필요하신가요?”라고 물으라는 소리다.

 

접근성을 돕는 실제적인 지침을 소개하고 있다. “의료적 상태가 아니라 접근하는데 필요한 것을 물어라.”
 

- 음성묘사(audio description)

 

사람들은 심포지움 등을 진행하거나 객석에서 발언할 때 자신의 시각 이미지를 말로 묘사하고 시작한다. 객관적으로 자신이 입은 옷과 피부색, 키 등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떤 것은 더 강조되거나 생략된다. 이때 그가 무엇을 자기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는지를 간접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이를테면, 체중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인종은 반드시 언급된다.

 

심포지엄 등에서 발언자는 각자 자신의 외모를 먼저 말로 설명하고 시작한다. 사진은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에서의 발표 모습. 예를 들어 사진 속 여성은 자신을 “동양계이고, 붉은색 옷을 입었고, 안경을 썼고…” 등으로 설명한다.
 

나는 이 점이 특히 재미있었는데, 체중이 적게 나가는 사람은 자신이 “젓가락처럼 생겼다”고 묘사하지만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이 자신이 “뚱뚱하다”거나 그와 비슷한 형용사로 자기를 묘사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자기를 묘사할지는 자신의 선택이며, 특히 낙인이 부여된 특성으로 자기를 묘사하지 않으려는 성향은 당연하다. 하지만 ‘시각’ 이미지를 그려내는 작업이라면 자신을 상세히 묘사하여 시각장애인이 더 생생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게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러나 체중이나 인종에 대해 자신이 직접 말하는 일은 그 속성으로 그 사람을 쉽게 환원시킬 위험이 있다. 시각장애인에게 이런 식의 묘사는 적절한 것일까? 이렇듯 어떤 음성 묘사가 적절한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이는 어떤 종류의 규범적 판단을 포함한다. 

 

언리미티드 페스티벌 프로그램 북 포스터. 흰색 갈기가 화려하게 뻗은 모자를 쓰고 무릎을 굽힌 채 자세를 취한 사람이 포스터 왼쪽에, 가운데는 검은색 원피스와 긴 부츠를 신고 양팔을 허리와 옆구리에 짚은 사람이, 포스터 오른쪽에는 양팔을 벌리고 흰색과 녹색이 섞인 원피를 입은 사람이 서 있다. (음성해설은 사람을 설명할 때 무척 어렵다. 젠더를 묘사하는 것은 타당한가?)
 

(내가 발언 기회가 있었다면 어떻게 시각적으로 나를 묘사했을까. 아마 키나 신발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아시아인이고, 휠체어를 탔고, 검은색과 회색 단자 무늬가 새겨진 스카프를 맸으며 팔뚝은 두껍고 머리카락이 많고 어깨는 제법 넓은 남성, 이라고 말했을 것 같다. 물론 나는 영어로 그보다 더 자세히 묘사하지도 못한다).          
 
다양한 존재들이 통합된 축제가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의 철학이자 이념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더욱 적극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예술의 소재로 삼는다. 모든 참여자들은 수용가능하고,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려 애쓴다. 하지만 음성묘사에서 보듯 이런 시도들은 때로 복잡한 딜레마를 가져오기도 한다. 자신을 장애인으로 규정하고, 특정한 젠더(gender)라고 설명하는 일, 그에 바탕에서 예술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일은 오히려 예술이 가진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무리하게 특정하지 않는가?

 

왜 그냥 예술가가 아니라 굳이 ‘장애예술가’라고 불려야 하는지는 우리나라 장애예술 정책에서도 오래된 논쟁이다.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복잡한 시도들이 오히려 어떤 존재들을 특정한 속성으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는 점은 정체성 정치와 소수자 운동을 둘러싼 역시 오래된 논란이다. 다음 글에서 더 살펴보기로 한다. 

 

>> 계속 : 언리미티드 페스티벌 참관기 ② 상호교차하는 장소로서의 장애, 장애예술

 

원영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비마이너 출범부터 함께 했지만 1년에 글 두 개 쓰는 게으른 칼럼니스트.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등을 썼다. 법, 장애, 예술에 관심을 두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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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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