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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뉴스홈 > 기고ㆍ칼럼 > 칼럼 > 유기훈의 의학이 장애학에 건네는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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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 금지와 자기결정권은 서로 충돌하는가
가치 없는 삶의 결정 : 장애학에서 바라본 ‘안락사’와 케어의 윤리①
등록일 [ 2018년11월22일 20시41분 ]

지난 11월 8일, 미국의 장애인권 단체 ‘아직 죽지 않았어(Not Dead Yet, 이하 NDY)’1)는 의과대학 학생들에게 의사조력자살(Assisted Suicide)2)에 관한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3)

 

저는 중증 신경근육질환을 가지고 있고, 호흡보조기를 하루 18시간 동안 사용합니다. 만약 조력자살이 합법화된 지역에 살고 있다면, 중증장애인으로서 저는 조력자살 신청조건을 언제나 만족하죠. 만약 제가 배우자나 직업을 잃고 낙담하여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건강한 사람 혹은 비장애인이 배우자나 직업을 잃은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질 것입니다. (…)
다른 모두는 ‘자살예방사업’이라며 자살하지 말라고 권유받는데, 왜 늙고, 병들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만 조력자살을 권유받을까요.

 

작성자이자 단체 설립자인 다이앤 콜먼은 신경근육질환으로 하루 대부분을 호흡기를 통해 숨 쉬어야 하는 장애 당사자로서, 편지를 통해 ‘안락사 권하는 사회’에 숨겨진 불평등을 드러낸다. 사회는 ‘건강한’ 개인의 자살을 예방하려 노력하지만, 늙고/병들고/장애가 있는 몸에 대해서는 ‘안락사’라는 이름의 자살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안락사’는 마치 ‘존엄한 죽음’, ‘좋은 죽음’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젊은/자유롭게 움직이는/고통이 없는/장애 없는 몸이 좋다’는 장애차별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다. 즉, 국가와 사회는 마치 삶의 마지막을 ‘자율적이고 존엄하게’ 마무리하는 것인 마냥 안락사를 홍보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픈 몸/늙은 몸/장애가 있는 몸을 ‘무가치한 것’으로 전제하는 깊은 장애차별주의(ableism)와 혐오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휠체어 사용자는 자살예방사업에 대한 접근성은 없고, 오직 조력자살의 길만 사회적으로 장려된다. (출처 https://tvndy.ca/en/)

 

-자기결정권, 그 양면적 얼굴

 

그렇다면 결국 안락사란 ‘장애를 지닌 상태’를 부정하는 못된 행위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지난 20년간의 한국 장애운동에서의 하나의 축은 자립생활운동(Independent Living)이었다. 자립생활운동의 ‘자립(自立)’이란, “다 너를 위한 것이다”는 말, 즉 의사와 국가의 오랜 후견주의적(Paternalistic) 개입으로부터,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라고 소리쳐온 역사이기도 했다.4) 즉, 자립생활운동은 장애인을 ‘보호’ 한다는 명목하에 수십 년간 지속하여 왔던 후견주의적 ‘시설’로부터 자신의 ‘자율성(autonomy)’과 ‘자기결정권(self-determination)’을 쟁취해온 역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락사 폐지 운동은 자립생활운동과는 정반대의 구도를 지닌다. 안락사 폐지는 기본적으로 장애인 당사자가 스스로의 몸/생명의 종결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 대한 후견주의적 개입을 긍정한다. 장애를 지니게 된 몸을 지니고 스스로 생명을 중지하고자 하는 개인에게, 국가가 “다 너를 위한 것이다”라며 생명을 처분할 결정권조차 빼앗아가는 ‘안락사 금지’는 자립생활운동의 맥락에서 보자면 자기결정권의 박탈인 듯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시설을 나가는 장애인 당사자에게 으레 건네지는 “그러다가 몸 다치면 어쩌냐”는 말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투쟁해온 역사는 “그래도 죽으면 안 되지”라는 ‘안락사 금지’의 주장으로 다시 위기에 빠진다. 후견주의적 개입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안락사 거부 운동은 장애운동이 오랫동안 힘들여 쟁취해온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다시 권력에 반납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몸, 나의 삶, 나의 생명에 대해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장애운동의 양면적 얼굴을 어떻게 통합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탈시설을 긍정하면서도 안락사를 거부하는 장애운동은 어떠한 자기결정 담론을 추구하여야 할까?

 

안락사 문제는 사회로부터의 후견주의적 개입과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대립의 문제일까?
 

- 안락사를 긍정하는 것과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 : 드워킨과 김원영

 

안락사는 정말 ‘장애를 지닌 몸’에 대한 가치 절하일까. NDY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철학자가 있다. 미국의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이다. 그는 장애인의 삶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안락사를 긍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선 ‘삶의 영위와 생명의 지속이라는 개인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다는 안락사 폐지론자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폐지론자들에 따르면 고통을 느끼지 않는 지체성 의식장애 상태(이른바 ‘식물상태’)의 경우, 고통도 없기에 삶을 끝낼 어떠한 이유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삶을 의도적으로 종료시키는 안락사는 오히려 개인에 대한 명백한 위해이며,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가 된다.5)

 

그러나 드워킨은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비록 안락사 시점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 있거나 병이 진행되어 자신의 죽음을 욕망하지 않는 상태일지라도, 명징한 정신상태에서 삶을 반추하며 내린 죽음의 결정은 개인의 이익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익(interest)을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익인 ‘향유적 이익(experiential interest)’과 자기 삶의 역사를 써온 ‘신념’으로부터 나오는 ‘비판적 이익(critical interest)’으로 나누며 논의를 전개한다.

 

드워킨에 따르면, 지체성 의식장애 상태의 사람은 ‘향유적 이익’ 측면에서는 이득도 손해도 지니지 않지만, ‘비판적 이익’의 측면에서는 개인의 신념에 따른 다양한 판단이 가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신을 자율적 주체라 생각하고,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의존적이지 않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에게 지체성 의식장애 상태에서의 안락사 결정은 ‘향유적 이익’으로는 여전히 손해일지 몰라도, 스스로 일생의 가치관에 비춘 ‘비판적 이익’ 차원에서는 다른 응답이 나올 수 있다. 매트릭스 속의 개인의 삶이 더 ‘행복’할지라도(향유적 이익), 매트릭스 밖의 어두운 현실(비판적 이익)을 선택한 영화 속 저항군들처럼, “일관된 주제를 가진 소설처럼 평가되기를 바라는” 개인의 비판적 이익은 때로 향유적 이익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6)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작품처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 이 비유의 핵심은 창조된 것의 가치와 창조하는 행위의 가치 관계다. 위대한 예술품에 가치를 두는 궁극적인 이유는 예술품이 우리의 삶을 증진시켜서가 아니라, 예술적 도전에 맞선 수행(performance)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잘산 삶을 경배하는 것은 그 결과물로서의 서사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삶이 제시하는 도전에 맞선 수행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최종적 가치는 부사적이지 형용사적이지 않다.7)

 

비판적 이익과 향유적 이익의 구분은, 보다 근본적으로는 ‘옳은 것(the right)’과 ‘좋은 것(the good)’의 차이에 기반한다.8) 옳은 삶이란 잘 사는 것(living well)이며, 비판적 이익을 추구하는 삶이다. 좋은 삶(good life)이란 향유적 이익이 보장된 삶이다. 옳은 삶과 좋은 삶은 많은 경우에서 겹치지만, 앞의 매트릭스의 예처럼 때론 옳지는 않지만 좋은 삶도, 좋지는 않지만 옳은 삶도 생겨나며 서로 엇갈릴 수 있다.

 

작가 김원영은 바로 이 교차의 지점에 생겨나는 현상에 주목하며 낙태와 관련하여 장애인의 삶과 생명의 중단 양쪽 모두를 변호한다.

 

장애를 받아들이는 일은 장애를 어떤 가치 있는 산물이라고 믿는 일과는 다르다. 그러한 믿음은 우리가 장애아의 출산을 손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가치 있는 산물이 손해라는 말인가.

그러나 장애라는 정체성이 어떤 산물이라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나가는 ‘이야기’ 그 자체라면, 우리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긴 삶의 시간 동안 그것을 ‘써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의 수용이란 결국 우리가 철저히 자발적으로 장애라는 정체성을 작성해나가는 일을 의미하게 된다.9)

 

이처럼 ‘장애를 지닌 몸’이 그 자체로 힘들고 통증을 유발하며 삶을 힘들게 할지라도(향유적 이익의 감소), 그럼에도 장애인도 당당한 권리의 주체이며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가족이자 친구임을 매일매일 써나가고 받아들여 가는 일(비판적 이익의 증가)은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장애가 그리 편리하지 않고 불편하여 ‘좋은 것(the good)'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은 ’옳은 것(the right)'이며 그 공동의 노력이 바로 '잘 산 삶(living well)'을 만들어 낸다.

 

이제 드워킨의 입장에서 NDY 활동가들의 지적에 대해 대답해보자.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장애를 지닌 ‘상태’가 그 당사자에게 손해이기 때문에 안락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즉, ‘병들고 장애가 생긴 몸’은 ‘향유적 이익’이 적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바라봐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락사가 정당화될 수 있는 맥락은, 평생 동안 삶을 써내려 왔던 바로 그 스타일대로 죽음을 맞고자 하는 ‘비판적 이익’의 측면에 있다. 개인의 삶의 내러티브 속에서 그러한 상태의 지속을 거부하는, 매우 개인적이고 맥락적 선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의도된 죽음 그 자체는 ‘좋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개인이 살아온 평생의 ‘내러티브’에 비추었을 때 삶의 특정 상태가 정합적이지 않고 우아하지 않다면 거부될 수 있고 포기될 수 있다. 즉, ‘우아한 죽음’은 긍정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드워킨이 볼 때 NDY의 비판은 ‘비판적 이익’의 증가에 근거한 안락사 찬성론을 ‘향유적 이익’의 감소에 근거한 주장으로 착각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드워킨은 자기결정권을 강하게 옹호하고 후견주의를 배격함으로써 ‘비판적 이익’이라는 개념을 도출해내고, 이를 통해 안락사와 장애 상태의 긍정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이대로 좋을까? NDY가 말한 장애차별주의와 혐오는 혹시 ‘자기결정’이라는 신성성 이면에 조심스럽게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 2편 [‘벽에 똥칠할 때까지’ 의존하며 사는 삶의 가치]

 

* 각주

1) NDY는 1996년 창설된 단체다. “아직 죽지 않았어”라는 이름은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 ‘몬티 파이튼과 성배(Monty Python and the Holy Grail)’에서 유래했다. 극 중 흑사병 환자를 ‘산 송장’이라 생각하며 외진 곳에 버리고 돌아가려는 가족의 뒤통수에 환자는 “아직 죽지 않았어!(Not Dead Yet)”라고 소리친다.

2) 광의의 ‘안락사(Euthanasia)’는 크게 ①소위 ‘적극적 안락사’라고 불리는, 인공호흡기 등을 제거하여 생명을 중단시키는 행위 ②‘소극적 안락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이라 불리는 추가적 치료 중단 행위 ③의사가 환자의 요청으로 생명을 중단할 수 있는 약물을 제공하는 ‘의사조력자살’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②와, 때로는 ③에 대하여 ‘존엄사’라는 용어로 칭하기도 한다. NDY에서는 위 세 경우 모두 결국 본질은 자살이라는 의미에서 ‘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위 세 경우 모두를 넓은 의미의 ‘안락사’라 칭하고자 한다. 

3) Diane Coleman, Open Letter to American medical students concerning Assisted Suicide, 2018.11.8. 강조 필자.http://notdeadyet.org/2018/11/open-letter-to-american-medical-students-concerning-assisted-suicide.html

4)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2013),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 삶창

5) 드워킨은 안락사 폐지론자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묻는다. “죽음으로써 종식시킬 고통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상황을 왜 반드시 종식시켜야 하는가?” (로널드 드워킨(2014), 박경신·김지미 역, 『생명의 지배영역』, 로도스. p.290)

6) 로널드 드워킨(2014), 앞의 책, 역자 서문(p.29) 참고

7) 로널드 드워킨(2015), 박경신 역, 『정의론』, 민음사. p.321. 강조 필자.

8) 로널드 드워킨(2015), 앞의 책. p.318-325

9) 김원영(2018),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p.149. 강조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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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훈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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