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12월10일mon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펼침
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애도 되지 못한 슬픔, 처리되는 죽음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기원을 알 수 없는 삶이 시장 바닥을 유영하다
[무연고사 기획] 애도 되지 못한 슬픔, '처리'되는 죽음 ①
최만, 50대 남성, 풍물시장에서 ‘잡화’를 팔았다
등록일 [ 2018년11월26일 18시45분 ]

2008년 ‘서울 풍물시장’이란 이름으로 개장한 건물 2층 남색동에 최만의 가게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오리지날 무삭제 비디오 태잎프, VOD, DVD”를 팔았다. 지난 3월 23일 방문했을 당시 최만의 가게 모습.
 

- 쫓겨난 삶 : 청계천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다시 신설동 풍물시장으로

 

그의 연고(緣故)를 묻기 위해 신설동에 있는 ‘서울 풍물시장’을 찾았다. 이곳은 청계천에서 밀리고 동대문운동장에서 또다시 밀린 이들이 떠내려온 곳이다.

 

2003년 2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청계천 복원사업을 발표하면서 그해 여름부터 서울시와 청계천 노점상인들 간의 싸움이 시작됐다. 청계고가도로 철거를 시작으로 그 주변의 1500여 노점상인에 대한 단속과 철거가 강행됐다. 2004년 1월, 청계천 노점상인 일부는 결국 동대문운동장 풍물시장으로 강제이주 당한다. 허나, 이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차기 시장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짓겠다며 또다시 이들을 밀어낸 것이다. 결국 900여 명의 노점상인들은 2008년 8월 어떠한 상권도 형성되지 않은 신설동 옛 숭인여중 터(현 서울 풍물시장)로 재차 강제이주 당한다.

 

2008년 ‘서울 풍물시장’이란 이름으로 개장한 건물 2층 남색동에 그의 가게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오리지날 무삭제 비디오 태잎프, VOD, DVD”를 팔았다.

 

최만. 1962년 1월 1일생, 56세 남자. 2018년 3월 9일 새벽 6시 36분, 서울 성동구의 한 병원에 심장질환으로 입원하여 치료받던 중 상태가 악화하여 사망했다. 그는 가족이 없어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되었다. 그의 시신은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되어 파주시 무연고 추모의집에 봉안됐다. 10년 후 산골(散骨, 분골한 유골을 땅에 묻거나 산, 강, 바다 등에 뿌리는 것)되는데, 연고자가 아니라면 그의 유골함을 볼 수 없으니 10년간 그는 또다시 외롭다.

 

3월 15일 오전 11시, 서울시립승화원에선 최만의 시신이 화장되는 1시간여의 시간 동안 장례식이 진행됐다. 무연고자의 장례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나눔과나눔은 유족대기실에서 최만을 비롯한 무연고자 3명의 장례식을 치렀다. 한 사람(70대 남성)은 배우자와 자녀가 있지만 시신위임을 묻는 등기에 답변이 없어 무연고자가 되었고, 또 다른 이(20대 남성)는 가족이 시신을 위임하여 무연고자가 되었다.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염불봉사단이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며 곡진히 염불을 외웠다.

 

이날 장례식은 이례적으로 붐볐다. 지난 3년여간 무연고자 장례식을 진행해온 나눔과나눔도


“근래 몇 년간 무연고 사망자 장례에서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고 했다. 이날 장례식에 참석한 40여 명의 사람 중 절반은 최만의 지인이었다. 그가 청계천, 동대문운동장, 신설동 풍물시장으로 흘러오는 동안 함께했던 사람들이다. 가족은 없으나 친구는 많은 사람, 그 생의 연고(緣故)가 궁금했다.

 

- 기원을 알 수 없는 삶이 시장 바닥을 유영하다


“진짜 신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더 잘 살게, 더 부유하게 해줘야 하잖아요. 부모가 혼이 있으면, 내 새끼가 저렇게 고생하며 사는데 어떻게 해줘야지, 그게 없잖아요. 너무 불쌍하게, 정말 막말로 그런 자식 뭐하러 낳아 놨나. 저렇게 팔자 드센 새끼 뭐하러 놔놨나. 부모덕도 없고.”

 

서울 풍물시장 건물 앞 노점에서 호떡을 뒤집으며 지영옥 씨(69세)가 말했다. 그는 최만을 ‘만식이’라 불렀고, 최만은 그를 ‘어머니’라 불렀다. 언제부터 장사하셨느냐는 질문에 그는 “전 여기서 늙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했다. 청계천 15년, 동대문운동장 4년, 신설동 풍물시장 10년. 그가 최만을 처음 만난 것은 청계천에서였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으나 청계천 복원공사 한참 전이였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는 삶의 절반을 길 위에서 음식을 만들어 팔았고, 최만도 그가 만든 음식으로 종종 허기진 배를 채웠다.

 

신설동 서울 풍물시장 앞에서 호떡 장사를 하는 지영옥 씨. 최만은 그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최만이 어디서 어떻게 자랐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가족 이야기를 묻는 말에 최만은 ‘절대’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모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게 되자 할아버지와 단둘이 남게 된 것이 싫어 서울로 올라왔다는 이야기만을 들을 수 있었다.

 

“일곱 살 땐가 여덟 살 때인가 서울 올라왔다던데. 열 살 안에 올라왔나 봐. 여기 서울역에 떨어져서 거지 마냥 돌아다니며 주서먹고 다닌 거지. 그 소리하더라구. 엄니 나 이렇게 자랐다고. 아무 데서나 자고, 굶기도 엄청 많이 굶었고 추운 데서도 엄청 많이 자고.”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한글은 어떻게 깨쳤지만 받침을 제대로 알지 못해 웬만하면 글씨를 쓰지 않으려고 했다.

 

정희(가명, 48세)는 지영옥보다 일찍 최만을 만났다. 80년대 후반 즈음, 최만이 스물예닐곱 되던 해 지갑 만드는 봉제공장에서였다. 정희의 남편과 최만이 부쩍 친해지면서 셋은 단짝 친구처럼 어울려 다녔다. 그러다가 정희의 남편이 따로 동대문구 장안동에 봉제공장을 차리면서 그곳에서 최만은 직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몇 해 가지 않아 공장은 문을 닫았고, 그들은 2000년경에 함께 청계천으로 나왔다.

 

그러나 청계천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003년,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겠다며 그곳에 있던 노점을 철거하겠다고 했다. 노점상인들의 저항은 거셌다. 지영옥은 노점상인들의 생존권 투쟁에 연대하러 온 사람들에게 줄 육개장 3000그릇을 끓였고 최만은 그 육개장을 날랐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수십 년 일한 삶의 터전에서 보상 한 푼 없이 동대문운동장으로 쫓겨나야 했다. 지영옥은 참 많이도 울었는데, 그곳에서 정희네 장사를 거들던 최만은 무덤덤한 듯 보였다.

 

그러다가 동대문운동장에서조차 밀려 2008년 신설동 풍물시장으로 왔다. 신설동 풍물시장은 지하철역과도 멀리 떨어져 있고 유동인구도 많지 않아 상권이 좋지 않았다. 처음엔 서울시에서 홍보도 많이 해줬지만 그때뿐이었다. 점점 개시(開市)조차 못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동대문운동장은 상권이 좋잖아요. 전철도 버스도 바로 탁 있으니. 야구도 하고. 여기 들어와서 다 망한 거지. 아예 바닥이에요. 지금 개시 못 하는 게 한 70%는 돼요. 하나도 못 팔고 그냥 가는 게 70~80%는 된다고. 수입이 하나도 없어요.” (지영옥)

 

2008년 ‘서울 풍물시장’이란 이름으로 개장한 건물 2층 남색동에 최만의 가게가 있다.
 

그나마 풍물시장 건물 바깥에서 노점하는 지영옥은 수입이 나은 편이었다. 평일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손님이 없어 공치는 날이 많았다. 최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로 성인 DVD를 팔았는데 요즘 시대에 사람들은 더이상 DVD를 찾지 않았다. 최만은 지영옥에게 와서 “엄니, 나 개시도 못했어”하며 호떡을 집어 먹었다. 어떤 날은 돈을 내고 어떤 날은 돈 없이 그냥 먹었다.

 

술만이 그 삶의 허기를 채웠다. 어제도 먹고 오늘도 먹고 내일도 먹고. 사람들과 어울려도 마시고 혼자서도 마시고. 최만은 종종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탔다. “그렇게 오도바이타고 다니다가 나 죽기 전에 내가 널 갖다 버리게 생겼다!” 안타까운 마음에 타박도 많이 했는데 정말 먼저 가버렸다. 죽기 전 그의 모습이 선명하다.

 

- 지영옥의 기억 : 죽기 직전 그가 나를 ‘엄마’라고 불렀어요

 

그날(장례식날) 사진 든 애 있죠? 경한이. 그 애가 여기 와가지고 가만히 서서 쭈물쭈물해요. 왜에, 너 왜 그래? 오늘 왜 이렇게 만식이가 안 지나가니? 어머니, 만식이형 쓰러졌대. 우리 셋째 딸이 이런 장사를 요 찻길 건너서 해요. 만식이가 우리 딸하고 엄청 친해요. 오빠동생하면서. 전화를 했지. 만식이 오빠 쓰러졌대. 한양대 병원에 응급실로 들어왔대. 그랬더니 엄마, 일단 끊어요, 끊어. 대충 장사 정리해놓고 얘네가 차 타고 간 거야.

 

나도 병원 가려고 장사 정리하려니깐 연락이 왔어. 엄마 안 가도 돼, 오빠 정신 말짱하고 일단 병원 응급실 들어가서 오늘은 괜찮아. 기다려 봐. 집에 갔다가 그다음 날엔가 아침 일찍 병원 갔는데 최만 있는 데는 출입증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구. 출입증이 없지, 나는. 그런데인지는 몰랐지. 출입증 없어도 환자보고 나오라고 하면 나와서는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구. 그때만 해도 걸어 다닌다고 해서 전화했어. 그런데 한 20분 기다려도 안 나와. 다시 전화 걸었더니 ‘나 도저히 못 나가겠어요, 어머니. 그냥 가세요’ 그러더라고. 그래, 그럼 몸조리 잘해라. 엄마 그냥 간다. 마음이 안 좋더라고.

 

토요일에 우리 딸이 병원 갔다 오고 한 이틀 지났나, 경한이한테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 만식이형 보내줘야 할 거 같아요. 어머, 아침에 장사하러 나왔는데. 이걸 펴놨는데. 어머, 진짜 이게 무슨 일이야. 의사가 보고 싶은 사람 다 와서 보라고 했다는 거예요. 이제는 가는구나, 싶은 생각에 택시 타고 가면서 딸한테 전화하니 오빠 복수가 차서 그냥 복수 빼러 들어가는 거야, 안 가도 괜찮다고. 아니야, 나는 지금 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올 거야. 병원에서 최만이가 사귀던 여자애를 만났어요. 오래됐어요. 결혼은 안 하고. ‘어머니, 오셨어요’ 하니 눈을 번쩍 뜨더라고, 최만이가. 그때, 이상하게(목소리가 커지며 말에 힘을 준다), 딴 땐 다 어머니 어머니하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엄마, 뭐하러 왔어.”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거예요. 이 좋은 세상에 병원을 가지, 왜 이러도록 있었냐고. 내가 막 울으니깐 내 손을 꽉 잡고 안 놓더라구. 그래, 이제 병원에 들어왔으니깐 나을 거니깐 걱정하지 말고. (울먹) 걱정하지 말고. 그런데 이미 보니깐 복수가 차서 씨익씨익거리더라고. 마지막이구나… 오늘이 너하고 나하고 마지막이구나. 내가 그러니깐 씨익씨익거리면서 “엄마 나 괜찮아, 걱정하지 마. 엄마, 나 금방 걸어 나갈 거야, 엄마…” 그러면서 이 손을 꼬옥 잡고는 그래, 만식아. 너 걸어 나와라. 꼭 걸어 나와야 된다? 그러니깐 알았어, 엄마. 그러고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울음) 그게 마지막… (울음)

 

2008년 ‘서울 풍물시장’이란 이름으로 개장한 건물 2층 남색동에 최만의 가게가 있다. 최만이 늘 앉아있던 의자.
 

응급실 들어가서 이틀인가 삼일 있다가, 전화가 왔어요. 지금 위독하다고, 얼른 들어오라고. 아침에 갔죠. 갔더니 바깥에서 울고 섰더라고. 딸내미가 펑펑. 이미 갔구나, 너는 오늘 세상을 떠나는구나. 이것(육체)만 살았지 이미 혼은 다 나갔다는 얘기구나. 의사가 우선은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이야기 하시더라구. 집으로 온 지 이틀 만에, 새벽 4시 반에 전화가 왔어. 정희한테. 빨리 오시라고. 지금 운명한다면서 얼른 오시라구. 알았다하고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는데 또 전화가 왔어. 아직은 좀 괜찮데요. 우리 도로 가라고 해서 다시 옷을 벗고 가만히 그러고 앉아있는데 6시 20분에 또 전화가 온 거야. 죽었다는 거야, 이제. 죽었다고. 기가 막히잖아요. 얼굴 보려면 얼른 들어오시라고. 그래서 안 본다고. 나 그냥 살아생전에 엄마, 엄마, 그 소리… 세상 떠난 얼굴은 안 본다. 말자. 그렇게 했어요.

 

그러면서 어디 자기네 집 앞 병원으로 간다는 거예요. 글로 가면 나한테 전화를 해라, 그 병원에 택시 타고 찾아가마. 그런데 전화가 안 와. 한 아홉 시쯤 되어서 내가 전화했어요. 우리가 장례 못 치른다는 거야. 연고자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주민등록상에 연고자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손을 못 댄다는 거예요. 너무 기가 막히잖아요. 어떻게든 초상은, 돈은 얼마가 됐든 간에, 많이 뿌리고 가서 지가 초상 치르는 만큼 부조는 들어올 거예요. 많이 하고 갔으니깐. 안 들어와도 딸내미하고 나하고 치를 생각했어요. 모자라는 돈은 우리가 대자. 그렇게 생각했는데 안 된다는 거야. 보호자 연락 올 때까지 냉동실에 넣어야 한다는 거야. 냉동실에 들어갔다는 거야. 한번 상상을 해보라고. 어머, 이게 무슨 일이냐고. 그렇게 고생했는데 찬 바닥에 또 드러누워야 한다는 게 무슨 경우냐고. 일주일을 그런 거예요. 일주일 동안 잠도 못 자고. 장사도 장사 같지도 않고. 나와도 마음이 이상하고. 아주 죽겠더라고. 토, 일요일 끼고 월요일날 무연고로 치러야 된다, 연락이 온 거예요. 너무 기가 막히잖아요.

 

- 그 곁엔 좋은 사람이 참 많았는데, 그 또한 마음 이쁜 사람이었어요

 

그의 지인들은 장례식 한 번 해보겠다고 경찰서에도 가보고 구청에도 가보았지만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답만을 들었다. 연고자(사실상 법적 혈연 가족)가 아니면 그의 시신을 위임받아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구청 측은 주민등록상에 남아 있는 그의 연고자들에게 연락했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최만은 무연고 사망자가 됐다. 구청은 화장하는 날 나눔과나눔에서 장례식을 한다며 정희에게 원하면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다고 했다. 정희는 주민등록증에 있는 그의 증명사진으로 영정사진을 준비해 최만과 친밀했던 이들과 함께 장례식에 참여했다. 지영옥은 “무연고자라고 험하게 가는 거 아닐까” 걱정했는데 “아주 엄숙하게 잘 해주어서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그것이 남은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3월 15일 오전 11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무연고자의 장례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나눔과나눔이 화장을 하는 동안 최만을 비롯한 무연고자 3명의 장례를 올렸다.
 

부모·형제 없이 자란 그가 무연고자가 되지 않기 위한 방법은 결혼을 하여 ‘정상 가족’을 이루는 것이었으나 그의 삶에서 그것은 좀처럼 어려웠다. 주변 사람들이 재차 여자를 소개해주고 결혼을 재촉하기도 했으나 끝끝내 결혼에 이르진 못했다. 지영옥과 정희는 “아저씨가 돈이 없어 결혼할 처지가 안 되었던 거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가고 나니 차라리 외롭게 가는 게 잘 된 것인지 모른다. “자식 주렁주렁 다 낳고 병들어서 가면 그 자식들은 누가 키”운단 말인가. 그가 물려줄 유산은 가난뿐이었다.

 

배운 것 없고 돈 없는 이가 으레 그러하듯 그 또한 삶을 돌보는 기술이 부족했다. 건강보험료가 연체된 것을 안 지영옥이 그것만이라도 연체되지 않게 관리하고자 최만 주소를 지영옥 딸네 주소로 올려놨는데 그마저도 또다시 연체됐다. 죽기 직전 병원에서 한 건강검진이 그의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검진이었다. 수년간 연체된 건강보험료 75만 원과 마지막 병원 입원비 천만 원가량을 낸 것은 정희네였다. 최만이 15여 년간 살았던 집, 최만의 점포, 최만의 오토바이도 모두 정희네가 마련해준 것이었다.

 

개발이 밀어낸 가난한 이들의 삶 속에 최만의 삶이 있었고, 가난을 도시 저변으로 밀어내는 힘이 세질수록 그의 삶은 불안정했다. 그럼에도 다행히 그의 곁엔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의 곁에 좋은 이들이 머문 것은 그 또한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풍물시장 상인들은 최만을 돈 버는 재주는 없지만 “남한테 절대 싫은 소리 안 하고 마음 착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특히나 “진짜 엄마마냥” 지영옥의 일을 많이 도왔다. 날이 추워질 때면 난로와 전기방석을 챙겨준 것도 최만이었다. 술 먹고 노래방 다니고 낚시 다니고, 날 좋은 날엔 청계천에서부터 함께한 상인들과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명절 때면 지영옥네 가서 육남매와 화투 치고 놀았던 그는, 그의 생에서만큼은 한 판 신나게 놀다 간 사람이었다.

 

부아아아앙-. 그는 늘 오토바이를 타고 지영옥 가게 앞을 오갔다. 어머니, 나 오늘 개시도 못 했어. 핫바를 집어 먹으며 그가 말한다. 작달막한 체구의 남자. 부아아아앙---. 오토바이 소리가 나면 지영옥은 호떡을 굽다 멈칫하며 고개를 든다. 그가 올 것만 같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올려 1 내려 0
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우리는 살아도 쪽방, 죽어도 쪽방이오
살아생전 ‘부부’였던 당신과 나, 죽음으로 남이 되었다
가려진 삶, 증발하는 죽음
죽음을 경유하여, 연고 없는 삶의 이유를 말하다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가려진 삶, 증발하는 죽음 (2018-11-29 15:46:01)
죽음을 경유하여, 연고 없는 삶의 이유를 말하다 (2018-11-19 19: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