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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당한 슬픔, 처리되는 시신, 장례 없는 죽음
[무연고사 기획] 애도 되지 못한 슬픔, '처리'되는 죽음 ⑨
무연고사에 대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책임 : 공영장례 제도의 마련과 사회적 애도
등록일 [ 2019년01월03일 19시47분 ]
비마이너는 지난 12월 10일, ‘무연고 사망과 공영장례, 그리고 사회적 애도의 의미’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무연고 사망자를 ‘잘’ 애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지,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폭넓게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토론회 기사: 삶뿐만 아니라 ‘존엄한 죽음’도 사회가 보장해야… “무연고사 대책 필요”). 그중 무연고 사망자와 국가폭력에 의한 의문사 피해자를 '애도의 정치'로 묶어낸 정원옥 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 연구원의 토론문을 공유합니다.

 

정원옥 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 연구원
 

과거 권위주의 정부하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많은 희생자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알 수 없기에 애도가 불가능했던 유가족들은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국가와 사회에 요구하는 싸움을 30년이 넘도록 전개해오고 있는데, 저는 이러한 싸움을 ‘애도의 정치’라는 차원에서 해석한 박사학위논문을 썼습니다. 

 

제가 정의하는 개념에서 ‘애도의 정치’란, “의문사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정치·사회적인 조건에서 의문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도록 국가와 사회에 호소하고, 촉구하고, 압박을 가함으로써 죽은 자에 대한 충실을 다하려고 하는 남은 자들의 모든 실천적 행동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영정 사진을 품에 안고 오열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을 시위나 농성의 전면에 배치하는 방식은 ‘애도의 정치’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가족들의 요구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자신의 가족과 같은 억울한 죽음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가족과의 이별을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국가기구에 의한 조사가 있었지만, 의문사의 진실은 단 한 건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유가족들은 죽은 이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자책, 분노와 실망 속에서 애도가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무연고사망자에 관한 논의를 접하며, 의문사 사건의 희생자들이 떠올랐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노동운동을 했던 문영수를 꼽을 수 있습니다. 문영수는 1982년 8월 19일, 작은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파출소에 연행되었다가 조사를 받던 중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문영수를 행려사망자로 처리하여 전남대의대에 해부용 실습교재로 넘겼습니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을 하다가 1992년 8월 29일 실종되었던 박태순은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가 시작되어서야 용미리 무연고 추모의 집에 유골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사망 시점에 박태순의 지문이 선명히 채취되었음에도 경찰은 박태순을 신원불상으로 처리, 행려사망자로 분류하여 가매장하였습니다.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행려사망자로 처리하여 그 죽음을 은폐·왜곡한 것이 과거 국가폭력에 의해 자행되었던 의문사 사건이라고 한다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는 무연고 사망은 국가 시스템의 부재와 사회적 무관심으로 인해 행정절차에 의해 ‘처리’되고 수습되는 죽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의문사 사건과 무연고사망자 문제는 얼핏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애도되지 못하는 조건 속에 놓여 있는 죽음이라는 점, 그리고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사회문제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예비 무연고사망자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장례 없이 자신의 죽음이 처리되는 것, 혹시라도 해부용으로 시신이 제공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의문사와 무연고 사망자는 모두 사후의 자기결정권이 심각하게 침해된 경우, 달리 말해 장례가 생략되거나 합당하게 치러지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애도가 불가능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로 올수록 장례는 점점 간소화·상업화되고 있지만, 남은 자들이 이별을 애도함으로써 죽은 이와의 관계를 다시 맺는데 장례의 의미가 있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죽은 이와의 관계 맺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죽은 이와는 더 이상 시선을 맞출 수도 없고 대화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은 이의 입장이 우선적으로 고려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이가 어떤 억울함이나 부당함도 없이 잘 떠나가도록 남은 자들이 말을 걸고 답을 찾으면서 충실을 다하는 과정이 곧 죽은 이와의 관계 맺기로서 애도이자, 장례의 절차라고 할 것입니다. 

 

죽은 이와 관계를 맺고 그와의 이별을 애도함으로써 올바르게 기억하는 것은 죽은 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남은 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애도의 과정이 생략되거나 장례가 합당하게 치러지지 않아서 충분히 애도되지 못할 경우 문제가 발생하는 곳은 남은 자들, 즉 죽은 이가 속해 있는 공동체입니다.  

 

원래 애도작업의 기능은 개인적 차원의 슬픔을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례를 수행하는 데 있습니다. 자크 데리다에 의하면, 애도는 “유품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죽은 이들을 어떤 장소에 배치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신원을 확인한다는 것은 죽은 자가 누구인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죽은 자의 삶과 죽음을 정확히 알고 그의 삶과 죽음에 합당한 장소에 매장을 할 때, 비로소 애도가 완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자크 라캉은 “애도의 작용은 무엇보다 의미화 요소들이 존재 속에 생겨난 구멍에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발생되는 혼란을 막기 위해 수행된다”고 말합니다(라캉, 1994: 168). 그에 따르면, 애도는 다른 사람의 죽음이라는 충격으로 인해 생겨난 ‘실재’의 구멍을 상징화로 메워줄 것을 주체에게 요청하는 작업입니다. 실재와 애도를 중개하는 상징화는 추모의 의식으로 구체화됩니다. 데리다와 라캉의 입장을 종합하면, 애도의 기능은 합당한 장례와 적절한 추모 의식 등 사회적인 의례를 수행하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서울시립승화원에서 무연고 사망자 장례식이 진행되는 모습.

 

문제는 애도 작업이 언제나 성공적으로 수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애도 작업에서 가장 나쁜 것은 죽은 자의 신원에 “혼동이나 의심”이 생겼을 경우나 “죽은 자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뭔가를 빠뜨리고 거절했을” 경우입니다. 애도가 잘못 이루어지거나 충분하지 못할 경우, 죽은 자가 ‘유령’(ghost)의 형태로 되돌아올 위험이 있다는 데 우리가 애도 작업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령이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어떤 사물(chose)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느낌, 혹은 이미지입니다. 그것은 “어떤 응시, 서로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 항상 불가능한 어떤 응시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며, “누군가의 죽음에 적절한 의식이 수반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갑자기 사로잡는 이미지”로 감지됩니다. 애도의 주체가 사회적 의례로서 장례를 수행함에 있어서 죽은 자에 대한 예우와 격식에 부족함이 없도록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죽은 자가 이러한 유령의 형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유령을 볼 수 없습니다. 죽은 이가 우리에게 말을 걸거나 해코지를 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문사나 무연고사망자와 같이 국가와 사회에 의해 양산된 죽음, 사회적으로 애도되지 못하는 죽음을 접할 때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 내면의 양심의 소리,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책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일의 정치철학자인 칼 야스퍼스는 홀로코스트 이후 세상에 만연한 부정의와 비참 앞에 ‘인간의 죄와 책임’의 문제를 논하였습니다. 그는 “인간 상호 간에는 연대가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세계의 모든 불법과 불의에 대해, 특히 자신의 면전에서 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운데 발생한 범죄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이웃 사람에게 범죄가 자행되는 경우, 물질적인 생활 조건을 나눠 가져야 하는 경우, 어디서든지 인간은 함께 살거나 함께 죽어야 한다는 원칙이 무조건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죄’의 본질이고, 인간 각자가 공동책임을 져야 할 근거가 됩니다.

 

무연고사망자의 죽음과 비인간적인 ‘처리’ 과정에 대해 국가의 책임만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는 연대를 통해서만 우리가 비로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고립사와 무연고사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정책과 제도, 무연고사망자들이 삶을 존엄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하며, 시민사회는 무연고사망자에 대한 인식의 개선과 함께 사회적 연대의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공동책임을 져야 합니다.

 

공영장례제도가 마련되더라도 중요한 것은 무연고사망자의 삶이 존엄하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사회적 애도의 과정을 충분히 갖는 것입니다. 애도의 주체는 가족인가 아닌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죽은 이에 대해 말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 옳습니다. 사회 환경의 변화에 의해 구조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무연고사망자의 죽음에 대해 국가와 시민사회가 책임을 다함으로써 공동체의 정의와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애도의 의미라고 할 것입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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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옥 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 연구원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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