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08월19일mon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펼침
HOME 뉴스홈 > 기고ㆍ칼럼 > 칼럼 >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아픈 청춘입니다만, 살아 있습니다
‘청춘’에 결코 닿을 수 없는 어떤 아픈 사람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등록일 [ 2019년02월13일 13시52분 ]

아픔에 대한 기록. OMR 카드의 앞면. ‘귀속재산처리’라고 흑연으로 적혀 있는 것에 밑줄과 별표가 있다. 그 주변에 빨간색으로 다음의 말들이 날림으로 적혀 있다. 매우 어지러움, 속이 메스꺼움, 입이 바싹 마름, 약 복용은 6시 30분쯤, 8시 10분쯤, 마취했다 깬 것 같음 → 온몸이. 팔에도 힘 잘 안 들어감. ⓒ안희제


- 이도 저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

 

나는 사람들이 흔히 ‘청춘’으로 간주하는 20대 대학생이다. 그러나 온 사방에서 들려오는 청춘 이야기는 그저 남의 이야기로만 느껴진다. 그렇다고 완전히 상관없는 일은 아니고, 어느 정도는 분명 내 이야기인데 결코 내가 충분히 체현할 수 없는 서사로만 느껴진다. 나는 아주 여러 면에서 내 존재 자체가 애매하다고 느낀다. 이도 저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 이걸 말로 풀어서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기억을 되짚어 보면 이런 무소속의 감각은 수험생활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두 번째 수능을 준비하던 시기에 난데없이 항문 근처에 생긴 또 하나의 숨구멍. 처음에는 그냥 종기일 것으로 생각했다. 원래 가끔 엉덩이에는 종기가 생겼으니까. 그런데 이번 종기는 상당히 커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종기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항문으로 가스가 배출되는 시점에 가스는 어떤 통로를 타고 그 종기가 있는 자리로 갔다. 종기인 줄만 알았던 큰 덩어리는 어느새 그저 얇은 피부가 되어 있었다. 통로를 지나서 온 가스는 그 피부를 들썩거리게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피부는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 항문외과에서 수술을 받았고, 그것이 ‘항문주위농양’임을 그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의사는 어떻게 이걸 여태 참았냐고 놀라며, 하마터면 고환에까지 염증이 침투할 뻔했다고 말했다. 나는 원래 통증에 둔했다. 초등학생 때에는 그저 배가 아픈 줄만 알고 며칠을 참다가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에 걸리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일이 커질 뻔한 것이다.

 

수술을 마치고 학원에 돌아왔지만, 저녁 식사 시간과 자습이 끝난 후에 나는 혼자일 때가 많았다. 같은 반 친구들은 농구나 축구를 하러 나가고, 간식을 먹으러 나가거나, 야식을 먹거나 맥주를 마시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도 낄 수 없었다. 당시 밀가루, 기름진 고기, 술을 모두 금지당한 나는 ‘치맥’도 할 수 없었고, 같이 부대찌개를 먹으러 갈 수도 없었으며, 수술 후에 달고 다니던 실리콘 때문에 운동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대체로 혼자서 공부하거나 아무도 안 다니는 주택가에서 산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 일탈은 밥버거, 그리고 과자가 아주 조금 들어간 바삭거리는 초콜릿이었다. (초콜릿도 다크초콜릿만 가능했다.)

 

수술 후에 드레싱을 받으러 한동안 병원에 매주 가야 했다. 그러다 2주 뒤에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의 행복이란. 그러나 2주 뒤에 들은 건 재수술 제의였다. 기왕 재수술할 거라면 큰 병원에서 하자는 생각으로 우리 가족은 송도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수술 부위와 항문 상태를 보더니 대장내시경을 찍어 보자고 했고, 소장조영술도 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검사 절차가 끝난 뒤에 내가 들은 말은, “크론병입니다.” 유학 중이던 어머니께서 내가 아프다는 소식에 귀국하신 지 이틀째였다. 6월 모의고사를 본 뒤 한 달이 겨우 지난 때였다. 대장에는 염증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지만 소장이 상당히 기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처음 들어 보는 희귀질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책자를 받고 식단 조절 매뉴얼을 받았다. 식단 조절 매뉴얼을 주시던 영양사님은 크론병 환자가 대장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겁을 주셨다. 그리고 그 후 적어도 2주 동안 나는 그 책자들만 들여다봤다. 대체 이 병은 뭘까, 알면 좀 덜 힘들지 않을까. 수없이 지각하고 조퇴하고 결석하면서.

 

수술, 요양, 진단, 누구의 잘못도 아닌 소외, 그리고 수능 공부. 이게 나의 스무 살이었다. 아마추어 배드민턴 선수로 서울시 대표까지 했던 고등학생 때에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과거로 돌아가서 “너는 재수 때 난치성 희귀질환 진단을 받고 운동도 못 하고 술도 못 마시게 될 거야.”라고 말해도 고등학생인 나는 절대 이걸 믿지 않을 것이다.

 

검붉은 덩어리. 주황색 바닥에 약간 윤기가 돌고 검붉은 물감이 덩어리져 있다. 주변에도 검은색, 빨간색, 그리고 약간의 파란색 물감들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다. ⓒ안희제
 

- 청춘의 상징, 여행·술·연애의 정상성

 

수능이 끝나고 원하던 대학의 원하던 학과에 기적처럼 입학했다. 새내기 오리엔테이션 첫날의 뒤풀이는 지옥이었다. 술게임 때 어떻게든 껴서 함께 놀아 보려고 했지만, 술을 마실 수 없던 나에게 벌칙은 맥주 500cc 잔에 물을 가득 채워서 원샷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소주 한 잔이었는데, 나는 술을 못 마시니까 ‘공평하게’ 물을 많이 마시라는 것이었다. 술자리는 술을 마실 수 없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알코올로 힘든 만큼 물로 힘들어야 한다는 ‘고통의 평등’을 공평함으로 생각했다. 술자리는 술을 생각했지, 나와 다른 사람들의 몸이 다르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학과 행사 뒤풀이 자리에 거의 가지 않았고, 2학년이 되어서 ‘후배’가 생긴 이후에야 뒤풀이 자리에서 한 테이블을 장악하고 그곳만은 술이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테이블은 섬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로 나는 술자리에 거의 가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 전에 이미 두 번이나 필름이 끊겨 봤을 정도로 술을 좋아하던 나에게는 술자리에 어울릴 수 없다는 게 꽤 큰 상실이었다.

 

그렇지만 1학년 때에는 내가 스스로 아픈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살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헬스도 했고, 아주 바쁜 일정을 꽉 채워 소화했으며, 공부도 열심히 했고, 과외까지 했으니까. 그러면서도 특별히 두통이나 복통이 생기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 크론병이 어쩌면 수험생활이 힘들어서 잠깐 생긴 이른바 ‘수능병’이 아닐까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수능이 끝난 뒤에 안 아픈 것이리라. 그러나 2학년 때에 건강은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고등학교 때에 쌓아둔 체력과 건강을 대학교 입학 직후에 다 몰아서 써 버렸다는 것처럼 두통이 몰려왔고, 힘들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결석 때문에 교수님들께 구구절절 메일을 써서 보내야 했다. 크론병은 다른 내부장애를 수반하지 않는 이상 장애등록이 안 되어서 나는 특수교육대상자로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고통을 설명하고 편의를 요청하는 일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크론병이 어떤 병인지부터 어떤 증상이 있는지까지, 내가 충분히 아파 보이지 않을까 봐 의학 용어를 섞어 가면서 조금은 더 심각해 보이게 설명하면서, 나의 고통을 인정받는 게 오직 한 사람의 재량에 달려 있다는 것에 억울해하면서.

 

으레 ‘청춘’이라고 하면 열심히 알바도 하고, 인턴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술도 마셔야 한다.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 아, 무엇보다도 핵심은 여행과 술, 연애. 이게 얼마나 많은 정상성 규범들 위에 있는지는 차치하고 우선은 여행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여행을 아예 안 다닌 건 아니지만, 갈 때마다 항상 불안했다. 혹시나 갑자기 아프면 어떡하지,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어떡하지, 가서 음식을 잘못 먹으면 어떡하지……. 다행히 여행을 가서 아픈 적은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피로와 스트레스에 약한 나는 여행을 다니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긴 이동 거리와 이동 시간은 건강에 직접 타격을 주었고, 2박 3일 정도의 여행을 생각해도 총 일주일 정도는 빼 둬야 했다. 여행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나는 그 전과 이후를 생각해야만 한다. 내시경 찍는 날 전후로도 총 일주일 정도는 아무 일도 못 한다.

 

나는 자주 약속을 취소하거나 미룬다. 우선 ‘오늘’ 때문에 그럴 때가 있다. 오늘 힘들어서, 혹은 힘들 것 같아서, 왠지 모르게 아플 것 같아서. 아니면 ‘내일’ 때문에 그럴 때가 있다. 오늘 나가면 내일 힘들 것 같아서, 아플 것 같아서. 이뿐 아니라, 뒤의 날들에 몇 개의 일정이 있는지, 각 일정이 얼마만큼의 체력이 필요한지, 지금 나의 스트레스와 건강 상태는 어떤지, 식사는 어떻게 해결할지를 하나하나 고민해야만 한다. 아프기 전과 후에 나의 감각은 많이 달라졌다. 특히 시간과 통증에 대한 감각은 기존과 정반대가 되었다. 원래 나는 오늘과 내일만 생각하며 지냈다. 그 밖의 날들은 내 오늘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지나간 날들과 다가올 순간들 전체가 나의 오늘과 내일을 결정한다. 배가 아프거나 두통이 생기면 과거엔 ‘지금 왜 이러지?’, ‘오늘 뭘 잘못 먹었나?’하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나의 지난 몇 주가 가능한 원인들의 집합으로 바뀌고, 다가올 순간들은 통증과 강제되는 휴식으로 상상된다.

 

모든 장애가 가시적인 건 아니다. "Some disabilities look like this. (어떤 장애는 가시적으로 보인다)"라고 적힌 것 아래에 지팡이를 짚고 활동보조를 받는 사람, 휠체어를 탄 사람, 목발을 짚은 사람이 있고, 그 아래에는 어떠한 보조도구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의 그림에 "Some look like this. (어떤 장애는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사진 : 해외 만성질환 커뮤니티)
 

- 아프게 살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원래 아픈 걸 참다가 일이 커질 정도로 통증에 둔했다. 둔한 만큼 잘 참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참아서는 안 되고 참을 수도 없어졌다. 이제는 아주 작은 따가움과 어지러움에도 모든 촉각을 세우고 집중한다. 눈 주변 근육의 움직임, 초점이 흐려지는 정도, 아픈 관절의 개수와 고통의 강도, 한 번에 몰려오는 통증의 가짓수……. 통증에 대한 감각은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고, 날이 갈수록 세밀한 통증 하나하나를 더욱 깊이 느낀다. 운동에 대한 향수를 해결하고 건강해지고 싶어서 헬스장에 등록도 해 보고 복싱장에 등록도 해 봤지만, 염증이 생겨 수술받거나 항생제를 먹으면서 다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지금보다 건강해질 수 없다면, 어차피 계속 점점 약해질 거라면 조금 느리게 약해지자는 마음가짐으로 아픈 순간들을 최대한 재빠르게 포착하려 노력한다. 아픔으로 인한 평온한 일상의 균열은 대단히 큰 계기로 시작되지 않는다. 핸드폰 게임에서 평소에는 잘 되던 기술이 갑자기 몇 번 연달아 실패할 때처럼 아주 사소한 순간, 그런 순간은 가끔 자고 일어난 뒤 내 얼굴에 생겨 있는 원인 모를 실금처럼 작고 불안한 균열이다.

 

이런 나는 결코 ‘청춘’에 닿지 못한다. 기존 청춘 담론이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었다는 비판은 이미 충분히 나왔으며, 나는 여기에 이 담론이 비장애인, 비질환자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청춘은 ‘건강한’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술은 아예 못 마시는 거나 다름없고, 여행 하나에도 근심이 가득하며, 대부분의 알바도 건강에 무리가 간다. 도서관에서 책 정리하는 일을 하다가도 팔 근육에 염증이 생긴 내가 성과주의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이건 크론병 환자에게 아주 희박한 확률로 발생하는 일인데, 전에도 약을 먹고 굉장히 드문 부작용이 생겨서 자리에서 한참을 못 일어나고 호흡 곤란이 온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관해기라고 불리는,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임에도 아픔에 비해 걱정이 많고 겁이 많아졌다. 이른바 ‘명문대’의 ‘취업 잘 되는’ 학과에 재학 중이지만 어차피 취업은 내가 갈 수 없는 길이다. 로스쿨도 그 이후의 직장들을 생각하며 포기했다.

 

평범한 ‘청춘’으로 보이는 사람이지만 아파서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는 사람, 그래서 나는 아픈 청춘이다. ‘청춘’이란 말은 얼마나 공허하고 무지하고 좁은가! 한편으로는 나의 게으름과 겁쟁이 기질이 섞여서 생긴 일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취업이나 로스쿨처럼 내 만성질환을 ‘극복’하는 길을 포기하고 내 아픈 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단받은 지 이제 만 4년 반 정도, 나는 여전히 배드민턴 코트 위에서 날아다니면서 스매싱을 내리꽂던 나를 추억한다. 영영 과거를 그리워만 하며 운명을 원망하며 살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내 아픔을 이렇게 말로 풀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의사도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는 내 통증을 몸으로 이해하고 거기에 익숙해져 간다.

 

수전 웬델의 『거부당한 몸』에는 ‘삶의 속도’라는 개념이 나온다. 사회는 정상적인 삶의 속도를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그 속도에 맞지 않는 사람은 경주에서처럼 뒤처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속도와 나만의 건강을 찾는 중이다. 내 친구는 자가면역질환이라 면역억제제를 먹어서 면역력을 어느 정도 낮춰야 하는 나의 건강을 이렇게 정의해 주었다. “면역 수치가 일정한 수준 이하로 유지되면서도 체력이나 컨디션이 호전되어 일상생활을 가볍게 영위할 수 있는 상태.” 면역 수치가 ‘정상치’ 미만인 게 나에게는 ‘정상’이다. ‘비정상’과 ‘정상’이 공존하고 둘이 잘 구분되지 않는 애매한 인간인 나는 ‘청춘’이 아닌 ‘아픈 청춘’으로 살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생존하기 위해 좀 느리고 아파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한다. 나는 아프지만 살아 있고, 아프게 살 것이다.

 

[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

관해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크론병과 통증을 정체성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올려 5 내려 0
안희제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건강한 비장애인처럼 보이는’ 나는 우물쭈물하고 말지
아플 걸 알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아플 걸 알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2019-03-11 20:31:16)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더보기
신간소개기사보기 도서 구매하기
기고 칼럼 기자칼럼

기고 작은이미지
발달장애인의 실종, 오직 그의 장애 때문일까?
대책 없는 발달장애인 실종 대책의 현주소 정부의 커...

복지부의 발달장애학생 방과 후 활동서...
"병원 갈 돈이 없어요" 저임금에 시달리...
우리 운동의 지향과 공동체의 일상은 어...
Beminor SNS 비마이너 페이스북비마이너 트위터비마이너 텔레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