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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정상, 나는 비정상. 나는 늘 침묵 당했다
약물 잘 복용하면 곧 ‘정상인’이 되겠지, 생각했던 시간을 지나
정신장애인 당사자 모임 통해 점차 ‘회복’되고 있어
등록일 [ 2019년03월05일 17시34분 ]

매니큐어가 칠해진 사람의 손이 약통을 쥐고 있다. 바닥엔 알약 몇 알이 떨어져 있다. ⓒ픽사베이

 

- 의사 말대로 약물 잘 복용하면 곧 ‘정상인’이 되겠지, 생각했다

 

삶은 오랫동안 쓸쓸했다. 사춘기가 시작되는 중학교 즈음부터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 법을 점차로 잊어갔다. 학교의 담임선생님이 어머니를 학교로 불렀다. 목우가 친구가 없네요. 학교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너는 친구도 없는 아이라면서?

 

아버지는 조현병이 있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달린 전셋집에서 아버지는 항상 어두운 골방에 누워계셨다. 경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이라며 어머니는 자주 아버지를 비난하셨다. 그리고 내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며 어린 시절부터 상처를 주시곤 했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조현병이 발병했다. 집이 싫어 밖으로 나도는 나를 면담한 정신과 의사는 입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경찰차에 실려 강제입원을 당했다. 나는 나의 문제를 상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끔찍한 공포와 함께 떠오르던 정신병원에 감금된 것이다. 그리고 한 달. 정신과 의사와의 어떠한 면담도 없었다. 리스페달이라는 약물을 먹으며 30kg 가까이 몸무게가 늘었다.

 

퇴원한 뒤 새로운 의사 선생님은 나의 병은 뇌의 호르몬의 분비에 이상이 있어 생긴 병이니 너무 크게 상심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약물을 잘 복용하고 잘 생활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말 잘 듣는 모범생처럼 그 말을 믿으며 이제 곧 ‘정상인’이 되겠지, 하루하루 버텨나갔다.

 

- 너는 정상, 나는 비정상. 나는 늘 침묵 당해야 했다

 

그러나 정신과를 다니면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해야 했고 ‘정상’이라고 말해지는 상황 앞에서 나의 경험과 느낌과 생각은 언제나 침묵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내가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말할 때면 차갑게 웃었고 가족과 다르다는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음악, 영화 같은 것들은 모두 ‘이상한’ 것이 되었다. ‘네가 이상하니까 그런 것을 좋아하고 그런 것을 느끼고 생각한다’는 시선을 견디는 것은 극심한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무엇 하나 나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삶은 의미 있는 경험들의 연속체이기보다는 나에게서 끊임없이 이탈해야 하는 무화된 것이 되어 버렸다.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정상’이라는 말에 모든 경험과 취향과 사고들은 의미를 잃었다. 나 아닌 그들만이 유일한 척도가 되었고 나는 그들의 기준에 동원되거나 침묵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혼자였다. 그즈음 내게는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혼자서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등단도 하고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세상은 여전히 불가해했으나 무엇을 쓰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 작가의 꿈을 키웠다. 나는 모순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글을 쓰나? 잠시 세상 밖으로 나가도 그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다시 나의 골방으로 숨어드는 것밖에는.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자아실현의 꿈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메리칸 드림처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혼자서라도 성실히 잘 적응해서 100점짜리 성적표를 받아오듯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병은 호전되기보다는 나날이 악화했다. 마지막 발병 이후 10년간을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이 병이 쉽게 낫지 않는 병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병원에서 알게 된 친구가 장애인 등록을 했다고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정신장애인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웠다. 그저 약물을 먹으며 치료를 잘하면 ‘정상인’이 될 수 있는데 굳이 장애인으로 등록해서 주변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혐오가 뒤섞인 시선에 끊임없이 상처받으며 사느니 ‘완전한 몸’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장애인 등록을 하는 것은 내가 ‘이상하고 비정상’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의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직업을 갖고 단체에서 프로그램도 하고 전보다 훨씬 밝아지고 자신에 찬 모습이었다. 늘 약물에 절어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던 친구가 아니었다. 그즈음에 다시 사회로 나오면서 10년간의 경력 단절과 자격증 하나 없이 아프기만 했던 시간을 지나오며 아무것도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낀 나는 한참의 고민 끝에 장애인 등록을 하고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게 되었다. 살기 위해 처음으로 사회에 요청이라는 것을 해 본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우울증’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울증’이라고 대답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용기를 냈다. “조현병이에요. 정신장애 3급이고요.” 그러자 몇 년간 알고 지내던 다큐멘터리 감독님이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천둥과 번개’라는 정신장애당사자 문학소모임이 있다고 소개를 해 주셨다. 나의 삶은 이곳에 오며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테이블 위로 노트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올려진 사람들 손엔 펜이 쥐어져 있다. 테이블 위에 노트 외에도 음료가 든 컵, 노트북 등이 있다 ⓒ픽사베이
 

- 사람들을 만나고 깨달았다. 이것은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것.

 

‘환자’인 개인으로 투병 생활을 했을 때의 나는 거대한 의료 시스템의 한 부속품일 뿐이었다. 3분간의 짧은 면담과 약물 복용, 그리고 무기력한 생활과 긴 잠. 그리고 내일은 조금 더 나아져 있을 거라는 기약 없는 희망. 조금 더 노력하면 ‘정상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자기계발류의 용기.

 

하지만 내가 ‘장애인’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커다란 품에 안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깨닫게 되기 시작한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로 각인되었던 강제입원의 트라우마, 정상화의 척도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부정했던 시간들, 막막하고 불안하기만 했던 미래, 개인화되어 아무런 관계 형성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병원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여겼던 믿음들……. 이 모든 것들이 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력하고 수동적인 개인으로서의 삶만 존재하던 곳에 장애 대중과 그들이 공통으로 겪는 트라우마가 있었고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기보다는 사회와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의 실패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현재의 구조가 지속된다면 개인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인식했다.

 

한 장애활동가가 “민주주의에 기여한 노동”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노동으로 장애인의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들이 줄기차게 이어져 왔었다. 사회는 각종 이익집단들―예컨대 시설의 권력, 의료집단의 권력, 사회복지사의 권력 등―의 이권이 부딪치는 현장이고 그러한 정치학 속에서 장애인 당사자가 권력을 가지고 운동의 방향을 이끌어나가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장애의 정치가 요청되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 장애인의 목소리는 ‘정상’이라는 기준에 맞춰 침묵 당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발굴되고 촉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매드 프라이드(mad-pride)가 그것이다. 우리들의 환청과 망상을 더욱 드러내고 그 과정에서 자신감과 소통의 기쁨을 알아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결정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자아존중감을 높이는 일이다. 침묵하고 억압받고 차별받던 우리가 적극적으로 오히려 그것을 전유해 우리의 긍지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순치되고 치료받아야 할 비정상을 지닌 환자가 아닌 사회에 대하여 우리의 필요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 큰 차별과 빈곤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었다. 그 필요와 요구를 드러내고 발굴해가는 것,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큰 힘과 용기다.

 

무엇보다 내게 좋았던 것은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비장애인들은 가족이나 사회 안에서 많은 인간관계를 갖는다. 하지만 정신장애인은 그러기가 힘들다. 특히 나처럼 10년 이상 환청과 망상에 시달린 경우라면 더욱더 그렇다. 나만 알던 삶에서 점차로 마음을 열어가는 법을 배운다. 혼자 있던 나에게 먼저 말을 걸며 다가와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래서 나의 아픔과 고민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슬픔과 기쁨에 함께한다. 이것이 내게는 무엇보다 값지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닐뿐더러 진심으로 나를 염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올해 중증장애인 복지일자리를 신청하면서 약값, 차비, 생활비 등등을 부담하면서 틈틈이 저축을 하고 있다. 내년에 문학상담을 배워 문학으로 당사자들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렸던 내가 이제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은 것이다. 30년 전에 놓아버린 삶의 끈이 다시금 이어지는 것, 나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회복이란 어떤 이상적인 기준과 몸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결핍과 필요를 알고 그것이 이웃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며 그 속에서 사랑의 관계로 서로를 잇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내일은 문학회에 간다. 내 마음속에 성좌를 그리고 있는 반짝이는 이들, 누군가의 어두운 밤에 나도 그 별자리를 그려주고 싶다. 그리고 그들을 찾아가기 위해 이제 나도 발걸음을 내디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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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우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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