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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 운동은 ‘없애는 것’ 넘어 ‘만드는 것’
[교차적 관점으로 시설화 비판하기] ②
등록일 [ 2019년04월03일 15시13분 ]

/기획의도/

 

장애여성공감은 [IL과 젠더 포럼]을 통해서 장애인 탈시설 운동의 문제의식을 확장하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삶을 통해 증명하듯이,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지난한 ‘과정’을 의미합니다. 단지 삶의 장소를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시설에 수용된 역사를 재해석하고, 지역사회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관계 맺기를 해나가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인 조건과 권력의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시설을 폐쇄해서 더이상 시설에 갈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또한 이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은 등록된 장애인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부랑인, 홈리스를 비롯해서 정신병원에서 심지어 지역사회와 집에서 사실상 감금된 채로 살아온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함께 드러내고 변화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에 대한 억압뿐만 아니라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에 대한 억압과 정상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동시에 필요하며 다양한 해방의 관점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장애여성공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설화에 저항하는 동료들을 만들고, 누구도 시설에 수용되지 않는 사회를 그려보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과 집단(부랑인, 정신장애인, 소위 요보호 아동, 여성, 성폭력 피해자, 난민,  HIV 감염인 등)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시설화의 양상들을 살펴보고, 이와 관련된 문제점과 대안을 찾아 나가는 시도를 해보고자 합니다.

 

/연재순서/

 

시설화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며 : 나영정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②사회복지체계에서 탈시설 운동의 의미: 김지혜(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③탈시설 운동의 확장: 조미경(장애여성공감)

④홈리스 시설: 김윤영(빈곤사회연대) 

⑤한부모 시설: 오진방(한국한부모연합)

⑥입양/미혼모 시설: 김호수(뉴욕시립대학교 사회학과)

⑦정신병원/요양시설: 노다혜(장애여성공감)

⑧성폭력 피해자 쉼터: 여름(장애여성공감)

⑨난민 시설: 고은지(난민인권센터)

⑩(탈가정) 청소년 시설: 변미혜(함께걷는아이들)

⑪요양병원: 권미란(에이즈환자 건강권 보장과 국립요양병원 마련을 위한 대책위원회)

⑫가족: 김순남(가족구성권연구소)

⑬성매매피해자 자활시설: 김주희(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

*필자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사회복지제도는 불평등을 해소할까

 

사람을 집단으로 구분하는 행위에는 딜레마가 따른다. 장애, 나이, 출신 국가, 가족 형태, 경제적 수준 등 개인의 특성을 이유로 사람을 구분 지으면, 그 행위 자체로 인해 낙인이 생길 수 있다. 반면, 소수자가 집단으로서 정체성을 표현하고 사회에서 가시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는 것은 시민권을 획득하는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게다가 특정 집단이 지속적으로 불평등한 상태에 있다면, 이를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 사회가 집단을 구분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 사회의 사회복지서비스는 많은 경우 장애인, 노인, 아동, 한부모, 다문화가족, 학교 밖 청소년, 노숙인 등 어떤 집단을 구분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골격으로 만들어져 있다. 서비스 적용을 받는 ‘대상자’를 정의하고, 대상자의 특성과 욕구를 파악해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여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전달체계로서 장애인복지시설, 노숙인복지시설,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 대상자별 기관이 설치되곤 한다.

 

사회복지체계를 집단별로 만들면서 소수자를 위한 ‘적극적 조치’가 되기를 기대하지만,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가 생길 위험도 상존한다. 사회복지제도가 해당 집단이 열등하다는 낙인을 만들고 분리와 배제를 촉진하여, 결과적으로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선별적’ 복지가 낙인을 동반한다는 사실은 전혀 새로운 지식이 아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도 하다.

 

집단을 구분해서 표적으로 하는 정책은 차별을 해소할 가능성과 조성할 가능성을 모두 가지기 때문에 늘 긴장스럽다. 그래도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은 있다. 집단의 구분이 개인의 신분으로서 일상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분리정책이 작동하는 기제는 그 구분이 ‘신분화’되는 것이었다. 신분증에 특정 구분이 표기되고 그 표식에 따라 거주지, 직업, 생활공간 등이 분리되는 상태였다. 어떤 사회복지제도가 이런 일상의 구분과 분리를 만든다면, 애초의 목적과 상관없이 억압의 기제가 될 수 있다.

 

사회복지제도에서 낙인이 경험되는 상황들

 

사회복지제도가 의도치 않게 낙인을 만드는 상황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어떤 사람이 그 ‘대상’에 들어가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이다.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을 받기 위해 타인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과정은 상당히 모욕적일 수 있다. 소득수준을 기준으로 수급여부를 결정하는 경우 개인의 정보를 상당히 많이 노출해야 하며, ‘부양의무자 기준’에서와 같이 내밀한 가족관계까지 국가에 밝혀야 할 때가 있다. 장애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는 장애등급제의 경우 본래 목적이 적절한 서비스 제공을 위한 것이었더라도, 말 그대로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마치 동물이나 물건에 등급을 매기는 것처럼―낙인이 된다.

 

둘째, 자신이 서비스 대상에 해당한다는 것을 원치 않게 타인에게 노출하는 상황이 있다. 사회복지서비스는 대개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제공된다. 그래서 그 집단에 해당한다는 사실 자체가 상황에 따라 밝히기 싫은 민감한 개인정보가 된다. 하지만 대상자별로 분리된 서비스체계 속에서는, 어떤 기관에 가거나 어떤 서비스를 받는다는 사실로부터 그 해당 집단에 속한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때가 많다. 교실에서 ‘다문화’, ‘수급자’라는 말이 때때로 조롱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이미 학교에서 누군가 이 용어를 사용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있었고 서비스를 받는 학생에게 부정적인 꼬리표가 부착된 결과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서비스를 설계하고 실천하는 과정과 내용 자체가 낙인을 생산하는 방식일 수 있다. 대개 서비스를 개발하는 사람들은 ‘대상자’ 집단의 개인, 가족, 지역사회 등의 특성을 조사하여 그 집단의 ‘평균적인 특징’을 파악한다. 이때 주요 관심은 서비스가 필요한 부분, 즉 결함이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평균적인 특징’은 곧 열등함과 등치되는 효과로 이어진다. 물론 다양한 실천이론이 존재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해결이 필요한 ‘부족한 점’을 찾는다는 접근은 큰 틀에서 유지된다. 집단별 특징에 관해 만들어지는 ‘전문적 지식’은 일종의 편견으로 작동하며 사회적으로는 낙인을 형성한다.

 

2014년 2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되지 못해 생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던 송파 세 모녀가 자살했다. 자살 전에 그들이 집주인에게 남긴 봉투. ⓒ서울지방경찰청
 

어떤 집단에 대해 평균적인 특징을 가정해 서비스를 표준화시키면, 서비스는 개별성과 유연성을 잃기 쉽다. 사회복지사의 공감 능력이나 면접의 기술, 개별적인 욕구를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한 능력은 현장에서 덜 중요해지고, 서비스에 맞는 사람을 찾는 역전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현장에서 낙인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더라도, 기금을 후원받기 위해 사회적인 편견을 이용하는 상황도 있다. 해당 집단에 대해 권리를 말하는 것보다 무언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수사가 기금을 얻는데 더 효과적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코드를 활용하기도 한다.

 

사회복지서비스가 선별적으로 제공되는 한 낙인을 피할 수 없다고 간단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가령 노숙인을 위해 무료숙소를 제공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낙인을 만들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만일 하룻밤을 자기 위해 자신의 신상정보를 공개하고, 가족사를 말해야 하며, 국가기관에 이 모든 사실을 알려야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자신이 숙소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노숙인’이 되어야 하는 이 절차가 낙인을 만든다.

 

그 무료숙소가 간판이 없는 건물이거나 ‘모텔’ 정도로 되어 있어도 개인이 경험하는 낙인의 강도는 다를 것이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무료숙소 이용자를 ‘노숙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이나 본인이 원하는 별칭으로 부른다면 낙인은 더 줄어든다. 단지 집이 없다는 상태에 초점을 두는 것과, ‘노숙인’의 특성을 예단하여 접근하는 것은 다르다. 제도적으로 노숙인을 위한 서비스가 있더라도 그것이 개인의 ‘신분’이 되지 않도록 하는 세밀함이 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사회복지시설, 억압이 된 공간

 

사회복지시설이 사회복지서비스의 하나로서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을 해소하는 체계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엔, 불편한 기억이 너무 많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대구 희망원 사건, ‘도가니 사건’으로 알려진 광주 인화학교 사건 등을 비롯해 지금도 매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되는 많은 인권침해 사건이 사회복지시설에서 일어난다. 법적으로 ‘사회복지시설’에는 주간에 방문이용하는 시설 등의 다양한 형태가 포함되지만, 이렇게 문제가 되는 사회복지시설은 주로 일상적인 생활공간으로서 주거를 제공하면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들이다.

 

주거는 먹고, 입고, 씻고, 배설하고, 자고, 쉬고, 친밀한 관계를 나누는 등 인간으로서 필수적인 행위를 하는 생존 공간이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한정된 자원이라는 점에서 주거는 공공성이 강하게 요구되지만, 현실에서 주택은 개인의 능력으로 획득해야 하는 사적 재산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컸다.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이 생존 공간을 개인적으로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타인에게 의존해야 했다. 사회복지시설은 이렇게 ‘가지지 못한 자’에게 주거를 제공하면서 그 외에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주요한 사회서비스체계로 존재해 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사회복지시설은 개인 공간으로서의 주거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시설'이라는 특수한 실체를 만들어냈다. 대상 집단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집합공간을 만들고, 외부적으로 그 집단을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묘사했다. 시설에 사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과 낙인은 단지 부수적인 효과가 아니라 시설을 유지시키는 힘이 되었다. 동정심에 기초한 자선을 끌어내기에 편견과 낙인은 필요했고 유용했다. 장애인시설에 후원을 할 마음을 끌어내기 위해 장애인은 ‘천사’ 같으면서 ‘희망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했다.

 

사회복지시설은 분리와 배제의 공간으로 작용했다. 사회복지시설은 ‘사회에서 생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모이는, ‘사회가 아닌’ 공간이었다. 분리가 지속되는 한, 이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사회가 변화할 필요가 없었다. 사회복지제도가 발전하는 것 같으면서도, 장애인, 비혼모 등 다양한 조건의 사람들이 존중받으며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변화들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가 기존의 주류에게 익숙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주류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발전하는 동안, 시설은 주류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사회복지시설은 위험한 공간이 되었다. 많은 사회복지시설이 민간에 의존하여 설립되면서, 이를 사적 소유물처럼 여기는 운영자들이 많았던 탓도 있다. 이들은 국가의 감독을 부당한 간섭이라고 여기며 개인의 권리로서 운영의 자유를 요구하곤 했다. 운영자가 시설을 사유 재산으로 여기며 국가의 감독을 거부할수록, 시설은 입소자에게 위험한 환경이 되었다. 마치 가족은 사적 영역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요구가 가정폭력을 통제 불능의 상태로 만들 듯, 시설에서의 인권침해는 이렇게 공적 체계가 사유화된 변형된 구조 속에서 계속되었다.

 

시설은 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다. 정반대로, ‘나의 것’이라고는 없는 감시와 통제의 공간이 되곤 했다. 시설이 온전한 주거 내지 ‘집’이 될 수 없는 건, 그 공간이 자신의 몸과 삶에 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온갖 개인정보를 밝혀야 하고, 누구도 보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개인 공간을 갖지 못하며, 일상에 대한 감시와 규율, 단체 생활이라는 이유로 요구되는 규칙과 강제적 활동 등에 둘러싸여, 시설은 잠시의 사생활도 인정되지 않는 억압의 공간이 되곤 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랑아 수용 현장(1961년, 국가기록원)

 

탈시설 운동의 의미

 

본래의 설립 의도가 무엇이었든, 분리된 생활 세계로서의 사회복지시설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이런 시설은 특정 집단을 열등하다고 규정한 전제 위에서 유지되며 낙인을 강화한다. 이런 시설은 특정 집단을 비가시화함으로써, 이들이 배제되고 차별받는다는 사실을 은폐하며 불평등한 구조를 지속시킨다. 이런 시설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적 공간이 되지 못한다. 그 공간에 대한 통제권을 갖지 못한 입소자에게, 이런 시설은 개인으로서의 삶을 박탈하는 감시와 통제의 공간이 될 뿐이다.

 

탈시설운동에서는 “좋은 시설은 없다”고 단언한다. 단순히 몇 가지 시설운영방식을 개선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이다. 탈시설운동은 특정 집단에 대한 낙인과 배제를 용인하고 심지어 이용하는 구조 자체에 도전한다. 더 이상 시설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취급하고 비가시화하는 제도적 폭력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동등한 시민으로서 정치사회적으로 가시화되어야 하고, 사회복지제도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기제가 되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성찰과 변화를 요구한다.

 

사회복지시설은 대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잠시 머무는 곳으로 이해되곤 한다. 역으로 말하면 자립할 수 없으면 떠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시설이라는 기제로 불평등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세상에서, 이들의 ‘자립’은 기껏해야 열등한 수준으로 한계 지어지기 쉽다. ‘자립’의 의미가 주류의 관점과 기준에서 기획되는 한, 그런 자립은 ‘주류같이’ 되어야 한다는 동화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도달 불가능한 조건일 수 있다. 결국 불평등한 세상에서의 자립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거나 열등한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위험이 있다. 자립을 말하기 위해 먼저 주류와 소수자 사이의 분리되고 계층화된 세계가 종식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탈시설 운동은 분리된 세계의 종식을 요구한다. ‘시설폐쇄’ 자체는 탈시설 운동의 시작이겠지만 끝이 될 수 없다. 여전히 주거는 필요하며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 서비스와 정책이 필요하다. 다만 이때 어떤 혜택을 받기 위해 개별성과 존엄성을 잃고 낙인과 배제를 받아들이며 다른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원칙을 돌아보고 설계의 디테일을 살펴야 한다. 사회복지서비스를 받기 위해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으로서 주거와 그 공간에 대한 통제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사회복지제도가 도움을 주고자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억압의 기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동하는 많은 이들에게 두렵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회복지사 윤리강령 전문에서 밝히듯, “사회복지사는 인본주의•평등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고 천부의 자유권과 생존권의 보장활동에 헌신한다.(…)사회복지사는 개인의 주체성과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어떠한 여건에서도 개인이 부당하게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한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시설운동은 바로 그 선언으로 돌아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라고 요청한다. 사회복지제도가 만드는 낙인과 차별에 그동안 무감하거나 너그러웠던 태도를 반성하고, 소수자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실질적으로 평등을 실현하는 새로운 설계로 과감하고 용기 있게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낙인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설계를 수정하는 지표로 사용되어야 한다. 사회복지제도는 주류의 기준에서 기획된 것이 아닌, 당사자가 가시화되어 참여해 만드는 과정이자 결과이어야 한다. 그렇게 탈시설운동은 분리된 세계를 ‘없애는’ 것을 넘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운동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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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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