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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입양과 미혼모, 그리고 한국의 정상가족
[교차적 관점으로 시설화 비판하기] ⓺
등록일 [ 2019년05월02일 11시44분 ]
/기획의도/
 
장애여성공감은 [IL과 젠더 포럼]을 통해서 장애인 탈시설 운동의 문제의식을 확장하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삶을 통해 증명하듯이,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지난한 ‘과정’을 의미합니다. 단지 삶의 장소를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시설에 수용된 역사를 재해석하고, 지역사회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관계 맺기를 해나가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인 조건과 권력의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시설을 폐쇄해서 더이상 시설에 갈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또한 이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은 등록된 장애인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부랑인, 홈리스를 비롯해서 정신병원에서 심지어 지역사회와 집에서 사실상 감금된 채로 살아온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함께 드러내고 변화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에 대한 억압뿐만 아니라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에 대한 억압과 정상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동시에 필요하며 다양한 해방의 관점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장애여성공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설화에 저항하는 동료들을 만들고, 누구도 시설에 수용되지 않는 사회를 그려보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과 집단(부랑인, 정신장애인, 소위 요보호 아동, 여성, 성폭력 피해자, 난민,  HIV 감염인 등)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시설화의 양상들을 살펴보고, 이와 관련된 문제점과 대안을 찾아 나가는 시도를 해보고자 합니다.
 
/연재순서/
 
시설화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며 : 나영정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사회복지체계에서 탈시설 운동의 의미: 김지혜(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탈시설 운동의 확장: 조미경(장애여성공감)
홈리스 시설: 김윤영(빈곤사회연대) 
한부모 시설: 오진방(한국한부모연합)
⑥입양/미혼모 시설: 김호수(뉴욕시립대학교 사회학과)
⑦정신병원/요양시설: 노다혜(장애여성공감)
⑧성폭력 피해자 쉼터: 여름(장애여성공감)
⑨난민 시설: 고은지(난민인권센터)
⑩(탈가정) 청소년 시설: 변미혜(함께걷는아이들)
⑪요양병원: 권미란(에이즈환자 건강권 보장과 국립요양병원 마련을 위한 대책위원회)
⑫가족: 김순남(가족구성권연구소)
⑬성매매피해자 자활시설: 김주희(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
*필자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필자의 논문, The Biopolitics of Transnational Adoption in South Korea, Body and Society, [한국의 해외입양, 그리고 생명정치] Vol 21, no 1, 2015 (58-79)를 바탕으로 미혼모 시설의 논의를 확대시킨 것임.

 

 

한국전쟁 당시 구호사업으로 시작되었던 ‘해외입양’은 지난 65년 동안 20여 만명의 한국 태생의 아동들을 세계 15여 개국에 송출하였다. 그중 12 여 만명의 아동이 미혼모 아동이었다1).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서 태어난 혼혈아동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혼모는 입양아동의 가장 큰 공통분모였다. 이 글은 미혼모와 입양이 인과관계로 이해되던, 1980년대부터 국가의 저출산 대책에 미혼모자가정이 편입되기 시작하던 200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미혼모 시설을 살펴보기로 한다. 특히, 미혼모 시설에서 대다수의 미혼모가 입양을 ‘선택’ 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미혼모에 대한 ‘낙인’과 ‘배제’ 가 미혼모 시설에서뿐만 아니라 시설 밖에서도, 미혼모 집단을 보호/관리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사회로부터 분리/배제함으로써, 재생산 권리를 요구할 권리조차 없는 자들로 만들어 왔는가에 주목한다. 이 글은 미혼모의 시설수용 경험을 바탕으로,  미혼모 아동의 입양을 정당화했던 ‘정상가족’이라는 폭력적 가치를 비판하고, 시설화된 삶에서 재생산권리를 억압받았던 여러 ‘비정상’ 집단들과의 연대를 통해, 소거된 미혼모의 기억을 수용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탈시설 운동을 의미를 확장하고자 한다.

 

미혼모의 낙인: ‘사생아’

 

미혼모는 흔히, 10대에서 20대의 미혼여성으로서, 법적으로 혼인하기 이전에, 출산한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법적인 의미에서 미혼모는 결혼제도 밖에서 출산한 여성으로서2), 현재 미혼모의 정의와 낙인은 이제는 사어가 되어가는 ‘사생아’의 법적, 사회적 의미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사생아란 혼인 관계에 있지 않은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자로서, 법적 신분이자, 비천한 존재라는 낙인을 내포하고 있다. 역사학자 홍양희는 사생아의 법제화의 계보를 일본의 민법에서 찾는다.  일부일처 법률혼과 부계혈통주의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민법이 식민지 조선의 가족법으로 이식되는 과정에서, 사생아의 법률적 지위는 아버지의 “인지행위”에 따라 결정되었다3). 법률혼과 남계혈통의 가족구성 원리는 한국근대가족법의 근간을 이루는 호주제로 계승되었고,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기까지, 미혼모와 혼외출생자녀는 법적으로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부계혈통의 가족법안에서, 사생아는, “어머니가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를 확보하지 못한 아이, 혈통을 모르는, 즉 근본과 뿌리가 ‘없는’ 비정상적’ 이고 불온한 존재”라는 사회적 낙인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218). 법적신분에서 “가족” 바깥으로 밀려난 사생아는, 1972 년 이전 생인 경우, 혼혈아, 고아와 더불어 군복무 차별적 면제부터 직업 및 주거선택의 자유까지 신원보증이 필요한 모든 일상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였다. 법적인 배제와 일상화된 차별은 사생아 본인뿐만 아니라 미혼모에게도 해당되어, 미혼모를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은, 타락하고 불결한 여성이라고 낙인찍었다. 미혼모에 대한 낙인은, 2005년   150,467(추정치)의 미혼 임신 중 95.7%가 임신 중절의 통계에도 잘 드러나듯이, 사생아의 출산은 미연에 예방하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자 기대된 행동이었고, 혼외출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2016년 통계청 조사에서도 75.8%로 높게 나타났다4). 한국은 비슷한 경제 규모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현저히 낮은 1~2%로 혼외출생률을 보인다.

 

미혼모, 사생아, 해외입양

 

미혼모의 출생 자녀가 왜,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해외입양으로 선별, 선택되었는가? 한국의 해외입양역사에서 바라본다면, 혼인하지 않은 남녀 사이의 출생한 자녀가 해외입양으로 이어진 사례는 한국 여성과 주둔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동이 그 첫 세대라 하겠다. 이들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해외 입양아동의 다수를 차지했고 모두 당시 미국인 아버지의 인지를 받지 못했던 사생아였다5). 1952년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늘어나는 혼혈아동 사생아를 한국에서 내보내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판단, 내무부와 경찰국에 혼혈아동의 수를 파악하라고 지시하고, 1954년 외원의 보조로 대한양연회를 설립하였다. 당시 혼혈아동의 존재는 인종적 이질감으로 인해 함께 한국인들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 ‘단일민족, 단일국가’라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제1 공화국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또한, 혼혈 자녀를 둔 미혼모들은 혼혈 자녀의 존재만으로도 부도덕하고 타락한 여성,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여성으로 분류되었다. 해외입양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홀트아동복지회의 기록을  보면1950년대 혼혈아동의 입양은 종종 입양기관의 상담원이 지역 경찰의 도움으로 혼혈아동을 찾아 나서면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의 해외입양 역사는 국가와 지역사회, 그리고 입양기관이 앞장서 입양을 독려하고 혼혈 자녀와 미혼모를 분리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 고아를 입양한 미국 가정 방문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생산기관: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 생산년도: 1959년 관리번호:CET0062240)

 

미혼모 시설의 확대6) – 입양

 

혼혈아동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시작되었던 해외입양은 197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입양산업의 면모를 갖추었다. 특히1980년대는 네 곳의 주요 입양기관들이 입양 가능한 아동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였다. 이 후 20년동안  미혼모 시설이 급격히 늘어났으며, 미혼모 자녀가 입양아동 중 차지하는 비율이 70%에서 90% 이상으로 급격히 증가하는 변화가 관찰된다. 1970년대까지 3곳이었던 미혼모 시설이 1980년대 말에는 9곳으로, 1990년대엔 다시 13곳, 그리고 2000 년대 중반까지 27곳으로 늘어난다. 2009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미혼모 시설을 통한 혼외출생 비율은 해당연도 총 혼외출생아의 31%~43%까지 차지했다7). 2000년대 중반까지, 시설이용자의 입양비율은 80~90%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즉 미혼모 시설 이용자들의 입양율이 시설 밖 혼외출생아동의 입양율에 비해 현저히 높다고 볼 수 있다. 미혼모 시설이용자의 높은 입양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미혼모 시설 이용 미혼모들의 증언과 미혼모 시설의 설립근거와 취지, 출산 후 결정을 돕는 상담프로그램의 예시를 통해 미혼모 주거시설의 지원과 배제, 보호와 억압의 모순적 면모가 어떤 방식으로 입양의 경로가 되었는지 살펴보자8).

 

미혼모 시설 – 입양의 메커니즘

보호와 지원 = 배제와 구속

 

미혼모 시설은 위기를 맞은 미혼 임산부들에게 임신, 출산 지원을 하는 총체적인 거주 시설이다. 미혼모 시설은 입소대상을 미혼인 임산부로 지정하고 미혼 임산부의 안전한 출산을 위해 주거, 숙식, 의료지원과 출산, 퇴소 후의 진로 상담을 제공하는 유일한 사회복지시설이다. 초기 미혼모 시설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생명존중 사상”에 입각하여 미혼모의 낙태를 반대하고, 갑작스러운 임신에 고민하는 미혼모들에게 “임신 출산의 지원과 건강한 사회인으로의 재활과 복귀를 돕고자” 설립되었다9). 이 미혼모 시설의 초창기 역사는 윤락행위 방지법에 따른 직업보도시설로써 초기에는 미군을 상대하는 “윤락여성” 및 고아들을 돌보다가 1970년대 이후 점차 미혼모만을 위한 시설로 변모하였다10).  입소와 함께 미혼모들은 시설의 규칙과 일과에 참여하고 일정 정도의 신체적 자유를 통제받는 단체거주시설이라는 특성상 시설 이용자들은 가능한 한 늦게 입소하며 평균 입소 기간은 1~3개월이다.  일단 시설에 입소하게 되면 미혼모들은 양육과 입양 중 선택을 해야 하고 이 선택을 위한 상담 지원은 시설 거주기간 동안 이루어진다.

 

1983년 구세군여자관에 입주하여 아이를 입양 보냈던 차명숙(가명, 57, 당시 18 세) 씨는, 자신이 미혼모시설에 입소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순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모피공장을 다니다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해 공장 기숙사에서 나오게 되니 갈 곳이 없어 시숙 집에서 지내던 중, “우리 형님이 저를 동네 조산소에 데리고 갔어요. 조산소를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서 저를 그리로 보냈어요.  구세군 여자관으로 저를 보냈어요.  저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따라갔어요. (중략) 봉고차에 나를 태우고 갔어요. 근데 거기를 우리 신랑 허락도 안받고 내 허락도 안 받고 그렇게 가게 되었어요.  거기를…”11)

 

차명숙의 증언대로, 당시 미혼모 시설은 윤락행위등방지법에 의거 직업보도 시설로 분류되었고 이 법령의 제 7조에 근거, 차명숙은“윤락행위의 상습이 있는 자와 환경 또는 성행으로 보아 윤락행위를 하게 될 현저한 우려가 있는 여자(以下 要保護女子라 한다)를 선도보호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던 보호지도소로 미혼모라는 이유로 감금되었다. 입소와 동시에 자신의 옷과 소지품을 반납하고, 차명숙은 밖에 나가지도 밖으로 연락도 못하는 상태로, 직업훈련에 해당하는 자수, 꽃 만들기에 참여하면서, 출산을 기다렸다. 오직 갈 수 있었던 곳은 구세군 여자관 옆 동의 교회였다고 한다. 차명숙이 시설에 보호, 아니 감금된 생활을 하는 동안 출산 후 아이의 장래는 입양으로 결정되었다. “[1984년] 당시에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으면 무조건 입양이에요. 상담 뭐 이런 것도 없었고 …”12)

 

차명숙의 증언처럼, 1996년 미혼모 시설의 법적 근거가 모자복지법으로 전환, 확대되기까지, 미혼모 시설에서 상담 자체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1996년부터 미혼모 시설은 사회복지사, 상담 전문인력을 고용하고 상담을 제공할 수 있었다13). 그러나 2000년도 중반에 미혼모 시설 이용자였던 희영 씨(가명, 당시 35세)에 따르면 미혼모 시설에서 받을 수 있었던 상담은 매우 한계적이었다14). 입양 교육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입양기관에서 직접 나와 시설 안에서 정기적으로 입양 설명과 홍보를 한 반면, 양육에 관한 정보는 제대로 취득할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입양은 계획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해 태어날 아기를 위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희생이자, 본인과 아이의 인생을 돕는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설명회에서는 국내입양과 해외입양의 장단점을 짚고, 국내입양은 곧 비밀입양, 해외입양은 편지 및 사진 교환이 가능하며, 아이가 성인이 된 후 상봉을 할 수도 있다고 소개된다. 또한 미혼모 시설에서 해외입양인 방문을 받고, 시설이용자들과의 정기적 만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예정일을 기다리는 미혼모들에게, 또한 자신의 출생환경과 배경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양인들에게 만남은 소중한 기회이자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양육에 대한 실질적인 지지와 프로그램이 너무 빈약한 상태에서 이런 만남은 추상적이기만 했던 입양을, 특히 해외입양에 대해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교육하고 장려한 효과도 있었다.

 

일단 입양을 “결정”하게 되면, 이 입양기관에서 개인면담과 소위 말하는 “관리”에 들어가는데, 희영씨가 개인면담을 요청하자 세 곳의 입양기관의 직원들은 일제히 “입양 동의서”와 “친권포기각서”를 들고 왔다고 증언한다. 입양동의서에는 “저와 아이 아빠의 취미, 특기, 학력, 가족관계, 혈액형, 좋아하는 꽃과 색깔, 체중, 키 등 신체정보”를 적고, 한번 더 미혼모 시설에 들러 5분 정도의 안부인사를 나누었다. 그것이 희영씨가 받은 개별화된 입양상담의 전부였다.  미혼모시설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입양상담인 경우, 종종 아이가 출생하기도 전에 입양 동의서에 서명을 종용했으며 서명 후에는 출산과 동시에 아이를 병원에서 입양기관으로 인도하였다. 분만 후 아이와 한번 만나보지 못한 채 입양기관에 인도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 과정에서 쓴 친권 포기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혼모들에게 입양의 선택을 번복할 수 없는 구속 기제로 쓰였고 입양기관 상담원들은 끊임없이 미혼모의 불안한 현재를 양부모의 안정된 경제 상황과 비교하면서 입양을 가장 최선의 선택으로 제시하였다.

 

만일 시설이용자가 양육과 입양 사이에서 결정하지 못한 채로 아이를 분만하게 되면 결정의 유보, 망설임 자체가 스스로 양육을 책임지고 할 수 없는 증거라고 판단되어 재차 입양을 독려, 결정하도록 하였다. 2005 년 당시 16세였던 또 다른 시설 이용자, 김유미(가명) 씨는 끝까지 결정을 유보하고 있던 상태에서 예정일보다 빠르게 분만을 진행했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입양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입양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어떤 지원도 준비물도 없이 분만한 김유미 씨는 출산 후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도착한 입양기관 직원 앞에서 친권 포기각서와 입양동의서에 서명하고 아이를 입양 보낸 기억을 가지고 있다15).

 

앞의 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혼모 시설이용자는 미혼모라는 요보호 여성들로 분류, 지역사회로부터 분리되면서 시설의 보호를 받게 된다. 시설보호를 통해 임신과 출산의 지지와 보호는 받았으나, 미혼모 시설이용자들은 국가의 지원제도의 결핍, 사회적 낙인, 지역사회, 원가족으로부터의 공간적, 시간적 분리를 경험하면서 사회적 지지망과 기본권을 양육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받지 못한 채 양육을 포기하게 된다. 또한 입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친권자로서 입양의 절차에서 가지게 되는 어떠한 권리에 대한 설명과 이해 없이 단지 입양기관에서 제공하는 편파적이고 피상적인 정보 앞에서 양육의 불가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고 입양을 선택하게 된다. 이처럼, 입양에 대한 숙려기간이 전무한 상태에서, 미혼모 시설이용자에게, 5분, 10분 정도의 상담으로 중요한 삶의 문제인 입양을 결정하는 방식에 대해, 이명숙 대한 변호사 협회이사는 “민법상 강박에 따른 의사표시로도 볼 수 있다”고 일갈한다16). 다시 말하면, 미혼모 거주시설에서 입양에 관한 독려와 입양의 절차가 이루어 지는 것은 명백히 미혼모들의 재생산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해외입양을 줄이고 국내입양을 늘리겠다며 5월 11일을 '입양의 날'로 지정했다. 그러나 미혼모•한부모•해외입양인 단체들은 이러한 취지에 반대하며, '혼자서도 양육할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하라'는 요구를 담아 이날을 '싱글맘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사진 보건복지부
 

또한 미혼모 시설은 미혼모에 대한 인구학적 특징을 파악하고 미혼모 인구집단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장이 되었다. 즉, 1970 년대부터 2000 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복지, 형사학, 간호학, 사회문제연구 등 다양한 지식발전에 시설거주 미혼모들은 곧 미혼모 인구집단의 표본집단으로 상정된 것이다. 시설에서 수집한 미혼모들의 IQ 지수, 교육 정도, 가정환경, 성장배경, 고용상태부터, 성경험, 임신횟수, 흡연, 약물사용 등에 이르기까지의 수용인에 관한 신체 정보 및 사회인구학적 행위 패턴 정보는 전문가의 언어로 가공되어 미혼모는 양육이 불가능한, 입양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들로 분류되었다. 이렇듯 미혼모 시설은 특정 인구집단을 ‘비정상, 요보호’ 집단으로 범주화하고, 집단의 인구학적 특징의 일반화를 가능케 함으로써 통치의 기제의 역할을 해 왔다.

 

미혼모 통치의 핵심은 정상가족을 보전하는 것에 있다. 미혼모 시설에서 입양기관으로 이어지는 미혼모의 선택은, 태어나는 아이에게 편모보다는 부모가 있는 ‘정상적’인 환경이 좋다는 상식,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 아이를 입양 보내고 새 출발 하는 것이 좋다는 모두를 위한 선택처럼 포장된다. 이러한 상식이 된 정상가족의 가치와 편견 앞에서 미혼모는 가족의 바깥으로 내몰린다. 이때 미혼모의 입양 결정은 단순히 개인의 결정이라기보다는 미혼모 시설에서 입양기관으로 이어지는 경로로 포획되는 과정은 아니었는지 반문하게 된다. 몇 세대에 걸쳐 미혼모와 사생아, 혼혈아동, 기아, 장애아동 등, ‘비정상적인 인구집단’의 배제의 기제로 자리한 입양은, 다시 한번 미혼모를 가족을 만들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하고, 이성애 정상가족주의라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질서를 지켜내는 과정이었다.

 

시설 밖으로: 입양을  보낸 미혼모

 

시설을 나오면서 많은 시설이용자는 자신이 아이를 출산하고 입양을 보낸 사실을 감추고 시설의 담장 너머 사회로 돌아온다. 미혼모의 낙인에 입양을 보냈다는 사실까지 떠안고 돌아온 미혼모 시설이용자들은 미혼모 시설의 설립 취지처럼,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고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재활할 수 있었을까? 사회복지학자 최승희는 퇴소 후 미혼모의 만성적 슬픔에 주목하면서, 이 슬픔을 입양의 상실감을 죄의식, 불안, 두려움, 분노 등을 동반하는 복합적 슬픔으로 표현한다. 최승희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복합적 슬픔은, 유예된 만성적인 비탄의 감정으로 남게 되어, 슬퍼해야 하는 시기에 슬퍼하지 못하고, 상실에 대해서 심리적으로 갈등하며, 오래도록 지속되는 특성을 가진다”고 한다17).  입양 미혼모들의 복합적이고 만성적 슬픔에 대해, 그보다 더 무거운 미혼모들의 침묵에 대해 탈시설운동은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입양미혼모들의 시설의 경험과 시설 밖의 비가시화는 탈 시설운동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장애여성 공감의 IL 활동가 조미경은, 탈시설운동의 목적과 의미를, “시설화를 유지하는 지배권력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이에 대항하여 상실되었던 삶에 대한 주체성과 권리를 되찾는 일, 나아가 시설화를 추동하는 정상성에 도전하는” 일로 정리한다18). 지금은 노년에 이른 기지촌 미혼모부터 최근 입양을 보낸 미혼모에게 이르기까지 자신이 ‘선택’ 했지만 ‘선택이 아니었던’ 입양의 결정 과정에서 상실되었던 주체성과 권리를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입양 서사로부터 너무나도 강력한 미담, 성공 신화를 걷어내고, ‘가슴으로 낳은 아이’가 존재하기까지 필연적이었던 친생모의 복합적이고 만성적 슬픔을 정상성의 구조적 폭력으로 기억하는 일이다. 무수한 미혼모의 호명되지 못한 슬픔을 구조적 폭력으로 애도하려면, 김순남의 제언처럼, 탈시설 운동은 “분리와 시설의 삶을 강제했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질문이자, 폭력적 가치에 개입하는 삶의 여정’으로 실천되어야 한다19). 이렇게 개입과 권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비단 미혼모뿐만 아니라, 장애인, 부랑인, 성 판매 여성 등, ‘비정상’ = “요보호” 인구집단과 함께 연대하는 과정이자 정상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언어적, 신체적, 재생산의 폭력과 ‘정상’을 구현하는 국가의 통치기술에 대해 맞서는 일이다.  또 이것은 정상성의 이름으로 시작된 여러 수용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기도 하다20).

 

 

 

*         *         *

 

각 주


1) 이 수치는 입양기관의 신고를 바탕으로, 보건복지부의 통계를 취합해 나온 수치이다. 

2) 미혼모라는 범주는 기혼여성이 법률혼외의 관계에서 출산하는 경우, 사실혼 관계의 여성의 출산 등을 모두 포함한다.  

3) 홍양희, ‘애비없는’ 자식, 그 낙인의 정치학: 식민지 시기 ‘사생아’ 문제의 법적구조, 고아, 족보없는 자, 2014, 207-8

4) 김희경 ‘아이들에게 가족은 울타리인가?”, 황해문화 2018 년 봄, 45

5) 혼혈아동이 미국인 아버지의 인지를 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다양하다. 첫째, 미국인 아버지가 아이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 둘째, 아이의 존재를 알고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 세째, 미군아버지가 결혼과 이주를 추진하였으나 이동명령이나 상관의 허락을 받지 못해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 등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6) 그 중 반 이상의 시설이 세 곳의 입양 기관(홀트, 동방, 대한사회복지회)에서 설립, 운영하는 미혼모 시설이었다. 미혼모 시설 증가의 배경을 둘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입양기관에서 미혼모 시설을 설립함으로써 입양아동을 확보하려는 노력인 동시에, 2000년대 중반, 정부의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재생산위기 대책의 일환으로, 미혼모 시설에 대한 모자보호시설 국고보조가 시작되면서 기존의 미혼모 시설이 미혼모자보호시설로 확대되는 양상을 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미혼모자 보호시설과 미혼모자 가정의 인정과 지원이 시작되었지만, 너무도 미미한 당시 미혼모시설 이용자는 꾸준히 입양을 선택하였다.

7) 이미정, 사회적 편견과 미혼모 관련 통계, 제60차 여성정책포럼, 미혼모의 현실과 자립지원 방안 

8) 모든 미혼모 시설이 입양을 위한 프로그램만을 선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예외적으로 애란원은 1990 년대 말부터 미혼모의 자기결정권과 양육지지 프로그램을 선도적으로 모색해 나갔다.    

9) 광주 인애원, 평택 에스더의 집 홈페이지 참조 (2011).

10) 애란원, 애란원 50년사 (1960-2010), 한국장로교 복지재단 애란원, 55.
11) 해외입양친모구술작업, 2011년 1 월 14일. 
12) 해외입양친모구술작업, 2011 년 1 월 14일

13) 애란원 50 년사, 42.
14) 희영씨의 증언은 2011 년 3 월 전화면접의 심층인터뷰와 2012년 싱글맘의 날 행사자료집을 토대로 재구성되었다.  
15) 해외입양 친모 구술작업, 김유미, 2012 년 1 월 2 일.

16) 제 60 차 여성정책 포럼, 미혼모의 현실과 자립지원방안, 111. 
17) 제 60 차 여성정책 포럼, 미혼모의 현실과 자립지원방안, 33.
18) IL 과 젠더포럼: 교차성의 관점으로 시설화를 비판하기, 탈 시설 운동을 전망하기, 44.

19) 위의 책, 57.
20) 위의 책,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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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수 뉴욕시립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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