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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경쟁시키는 정부
[기고]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정부는 ‘중증장애인과 노인 중 누가 더 긴급한지’ 물으며 계산기 두드리고 있다
등록일 [ 2019년06월07일 21시15분 ]

수년간 노숙 생활을 했던 한 남성은 이제까지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포기하다가 지난해 마침내 수급자가 되었다. 그동안 그가 수급 신청을 포기했던 이유는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이었다. 노인인 그의 부모는 부양의무자기준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수급 신청을 하면 부모에게 연락이 간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는 십수 년 만에 연락하는 부모와 그런 식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사정이 나아지면 그때 얼굴을 보거나 부양의무자기준이 폐지되면 수급자라도 되어 그 뒤에 부모님 얼굴을 뵈어야지, 기약 없는 마음만 숱하게 먹었다. 그리고 지난해, 그의 가족관계 증명서에는 그 홀로 남게 되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다. 부모님 사망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장례식장도 가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오롯이 그의 마음에 멍울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었다.

 

지난 5월 16일, 재정전략회의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중증장애인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4월,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 의지를 밝혔으나 이번에도 ‘중증장애인만’ 폐지하겠다는 계획에 그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그리고 박능후 장관이 같은 약속을 한 지도 벌써 2년이 흘렀다. 그나마 나아졌다고 좋아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그 남성의 부모님이 살아계셨더라면, 그는 여전히 수급자가 되지 못한다.

 

지난 4월, 시민사회단체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20년을 맞아 부양의무자 기준 전면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국회 앞에서 열었다. 한 참가자가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 조속히 폐지해야 합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강혜민
 

중증장애인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가장 낮은 예산 지출을 선택한 것에 불과

 

왜 중증장애인에게만 부양의무자기준을 먼저 폐지하겠다는 것일까? 위급성 때문인가? 가난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은 장애여부, 경중과 관계없이 위급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보건복지부의 2016년 연구에서 ‘중증장애인’만 폐지하는 것이 어떤 모형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신규 수급자가 된다는 점이다. 중증장애인에게만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할 경우 기초생활수급자로 진입하는 인원은 5만 가구1)다. 장애인, 노인, 한부모가구 등과 함께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하거나 생계급여나 의료급여에서 폐지하는 것보다 중증장애인에게‘만’ 부양의무자기준을 폐지했을 때 가장 낮은 수준의 예산 책정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의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는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왜곡하고 후퇴시킬 수 있다. 신청권을 노인이나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 한정했던 과거 생활보호법과 달리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전 국민에게 최저생활을 보장한다. 근로 능력 유무, 신체 특성과 관계없이 누구나 가난에 빠질 수 있으며, 가난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약속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목표이다. 그런데 다시 연령이나 장애 유무에 따른 기준을 도입한다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보편성을 무너뜨리고 잔여적 성격과 낙인을 강화할 것이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속도와 방식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

 

이렇게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는 또다시 복지의 좁은 관문에 줄 서는 일이 되어버렸다. 중증장애인부터 폐지할 것인지, 노인이 더 급한지. 한부모가족이나 보호종료아동에 대해서도 기간의 제한 없는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언제 할 것인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야하는 이들 모두가 당장의 생계가 급급한 빈곤층이라는 자명한 현실 속에서 장애인이나 노인이라는 신체, 연령의 특성으로 서로의 긴급성을 경쟁하고 호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급여 중 교육급여와 주거급여는 각각 2015년과 2019년에 부양의무자기준이 폐지되었다. 이로써 현재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만 부양의무자기준이 남아 있다. 이 두 급여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기본 목표인 소득보장과 최저생계 보장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요구하는 시민과 단체들은 ‘급여별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요구해왔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의 방식과 속도는 장애유무와 연령 등에 상관없이 빈곤층 모두에게 동등하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는 가장 중요한 과제인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의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남겨둔 채 여전히 주변만 빙빙 돌고 있다. 따라서 이를 외면한 채 ‘중증장애인만’ 우선 폐지한다는 이번 완화안은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통해 이르고자 하는 근본적 효과에 다다르기 어려울 것이다.

 

낡디 낡은 ‘부양의무’, 시효 만료 정책이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

 

부양의무자기준이 이미 폐지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간혹 받는다. 그러나 지난해에도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수급에서 탈락한 뒤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다. 자녀의 배우자 소득 때문에 수급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고 전전긍긍하는 부모가 있다. 가정폭력 때문에 헤어진 부모와의 관계 단절 사유서를 매년 요구받는 자녀는 재조사 때마다 자신의 주소가 알려질까 두려워 몸서리치고 있다. 가난해도 소박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을 사람, 장성한 자녀의 독립을 기꺼이 축복할 사람, 가족의 가난과 관계없이 자신의 삶에 몰두할 시간이 필요한 이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부서지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20년, 부양의무자기준 폐지에 다다르기 위해 정부는 얼마나 더 천천히 가야 한다는 것인가? 조건 없는 부양의무자기준 폐지가 지금 당장 필요하다.

 

*  *  *

1) ‘맞춤형 급여체계 도입에 따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기준 개선방안’, 보건복지부,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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