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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칼럼]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등록일 [ 2019년08월29일 11시42분 ]

60대 청소노동자가 열악한 휴게실에서 사망한 사건에 대해 경찰이 심장질환으로 인한 ‘병사’라고 밝혔다. 이에 대한 언론보도 화면 캡처.

 

얼마 전, 서울대학교에서 한 청소노동자가 사망했다. 말도 못 하게 열악한 휴게실이 (새삼스럽게) 조명되었다. 경찰은 사인을 ‘병사(病死)’라고 밝혔다. 그가 심장질환자였다는 것이다. 마치 그가 죽은 데에 노동 환경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방이라고 할 수도 없는 ‘휴게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생활환경이, 특히 온도가 생명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심장질환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다. 과연 그 ‘휴게실’에 선풍기가 아니라 에어컨이 있었어도, 그는 그때, 거기서, 그렇게, 죽었을까.


질병은 그저 불행인가? 나에게 질병은 사고처럼 난데없는 일이었고, 아직 완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내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꿔 놓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나는 이 질병을 부정하다가 결국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나의 의지로 가능했을까? 아니, 결코 아니다. 내가 두 번째 수능을 준비하느라 스스로 돌볼 수 없던 와중에도 매일 자고 일어날 수 있는 집이 있고, 권장식단에 맞추기 위해 밤새 도시락을 준비해 주신 부모님이 계셨기에 나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이 없었다면, 적절한 의료적 조치를 제때 받도록 하고 나를 돌본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지금과 크게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저러한 환경에서 일하게 된다면, 상황은 또 크게 달라질 것이다. 실제로 증상이 거의 없던 크론병 환자가 직장생활 중에 갑자기 급성기로 진입하여 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기도 한다. 휴화산이던 몸을 활화산으로 만드는 건 주변 환경이다. 계속해서 새로 발견되고 진단되는 만성질환 중 적지 않은 수는 원인과 치료 방법이 명확하지 않다. 그런 몸은 사화산이 될 수 없다. 휴화산이 되고, 휴화산인 채로 잘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사회는 60대 청소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잘 관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있는가? 아니, 이 사회는 60대가, 청소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잘 관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있는가?


이뿐 아니다. 김승섭 교수가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사용한 표현처럼, 이 사회는 질병을 권한다.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고, 기업들의 뒤를 봐 준다. 공장에서 유해물질이 가득 배출되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해고노동자들은 죽어갔다. 노동자들은 원인 모를 질병에 걸렸다. 이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년의 투쟁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도 보장되는 건 없었다. 질병이 그 자체로 해악은 아니다. 다만 질병과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은 지독한 해악이다. 이 사회는 충분히 많은 돈이 없으면 질병을 관리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놓고서는, 노동자들에게 매 순간 질병, 손상, 그리고 죽음을 권한다. 노동자들은 지켜지지 않은 안전지침으로 죽고, 원래 있었거나 노동 중에 얻은 질병을 홀로 떠안고 있다가 죽고, 노동 중에 얻은 질병을 ‘들키거나’ 숨길 수 없는 손상이 생기면 해고당하여 느리게 죽어간다. 이는 살인이다.


질병은 그저 불행이 아니다. 불쌍한 것도, 안타까운 것도 아니다. 질병은 다만 삶의 어떤 조건이다. 자는 시간이 바뀌고, 화장실에 가는 횟수가 바뀌고, 먹는 약의 종류와 개수가 바뀌고, 일하는 시간과 장소가 바뀌는, 그런 조건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질병을 그저 어쩔 수 없는 불행으로 보거나 온전히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 것이다. 질병의 고통과 난치의 경험이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많지만, 누구든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일터와 가정에서 자기 몸을 돌볼 환경이 제공된다면, 질병을 치료의 대상보다는 적절히 관리할 대상으로 본다면, 환자와 아픈 사람도 얼마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비로소 질병은 죽음이 아닌 삶의 조건이 된다.


질병을 처음 만나게 될 때도, 질병과 살아가는 과정에도, 어쩔 수 없는 고통이나 불행보다는 노동 조건, 사람들의 인식, 적절한 의료적 조치가 더 큰 영향을 준다. 몸을 존중하지 않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질병도 등장한다. 생활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몸도 여유증이나 비만을 진단받곤 하는 것처럼, 질병은 문화적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질병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고,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정치적이다. 여기서 모두 다룰 수는 없겠지만, 질병과 함께하는 삶은 계급, 장애뿐 아니라, 성별, 인종, 지역, 나이 등 수많은 변수로 구성되어 있다. 너무나 명백하게도, 질병은 정치적이다.


“산재 아니고 병사다. 원래 지병이 있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가 심장질환을 얻은 계기가 ‘그저 우연’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미관상 좋지 않아서’ 문도 열 수 없고, 수년째 에어컨을 요청해도 대답도 듣지 못하고, 환풍기조차 자비를 모아서 사야 했던 그 환경이 심장질환을 악화시켜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은 간편하게 접어 둔 채로, 그저 ‘병사’니까 산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위치는 얼마나 놀랍도록 특권적인가? 그런 말을 지껄이기 전에 질병이 산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질병을 삶이 아닌 죽음의 조건으로 만들고 있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을 정치적이지 않은 것처럼, 다른 원인이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바로 그 사고방식은 국가폭력의 은폐에도 이용되었다. 경찰은 1987년, 박종철 열사의 사인을 병사로 위장하려 했고, 최루탄을 맞고 뇌사상태에 빠진 이한열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려 했으며, 1996년, 노수석 열사의 사인을 병사로 처리했고, 2016년, 백남기 열사의 사인을 병사로 처리했다. 누구의 책임도 없다는 듯 마무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질병은 표백제가 아니다. 질병이 표백제로 기능할 수 있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 질병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감추는 행위야말로 극도로 악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질병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 ]

 

관해기(증상이 일정 정도 가라앉아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의 만성질환자. 장애인권동아리에서 활동하고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수업을 들으며 크론병과 통증을 정체성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몸의 경험과 장애학, 문화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그것들을 공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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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dheejeh@nave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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