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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남긴 절망과 희망
[나눔과 나눔] 무연사회, 죽음을 기억하다
8월 장례이야기
등록일 [ 2019년09월11일 11시26분 ]

여름, 견디기 힘든 시간

 

거짓말처럼 찾아온 가을이 반갑습니다. 그 이유는 여름에 무연고 사망자 장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치르며 계절별로 일정한 경향성을 띠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로인해 이제는 다가오는 계절을 설렘보다는 걱정으로 맞이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작년(2018년)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으로 8월 한 달 동안 40명의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치렀습니다. 올해의 경우 39명으로 작년과 비슷했지만 공영장례 시행으로 장례식장 일정에 영향을 받아 9월로 미뤄진 경우를 고려하면 그 수가 줄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18년 5월부터 서울시 공영장례가 시행된 이후 서울 지역의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는 서울시립승화원 전용빈소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2019년 2월 이후 기초생활수급자와 저소득시민으로 그 대상이 확대되면서 일반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는 서울시립승화원 전용빈소에서, 무연고 기초생활수급자와 저소득시민 장례는 장례식장에서 빈소를 마련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단, 장례식장 일정과 상황에 따라 빈소 사용이 여의치 않아 서울시립승화원 전용빈소에서 진행할 경우도 있습니다.

 

8월 한 달 장례의 특징으로 고독사(고립사), 그리고 노인층의 비율이 높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서른아홉 분 중 아홉 분은 거주하시던 곳에서 돌아가셨고, 노인층이 다수인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신 분도 열두 분이었습니다.

 

생전에 딸처럼 잘 돌봐주었던 여성분이 ‘아버지’라고 불렀던 어르신의 무연고 장례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망한 지 7개월 만에 발견

 

8월 초 장례를 치른 ㄱ님은 7월 중순 거주하시던 곳에서 돌아가신 채 발견되었습니다. 1년 전 컴퓨터 네트워크장비 판매회사를 함께 다녔던 한동네에 살던 직장 동료는 지난 몇 달 동안 ㄱ님에게 수차례 전화를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걱정스런 마음에 집에도 찾아갔지만 인기척이 없어 경찰에 신고했고, 다음 날 거주지를 확인한 결과 사망한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발견 당시 고인은 거실바닥에 침낭을 덮고 누워 있었고, 시신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사망시점은 작년 12월 20일 이전으로 추정되었고, 돌아가신 지 7개월이 지난 후에야 발견되었습니다.
 

ㄱ님은 임대주택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 5~6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혼자 지냈습니다. 여동생이 있었지만 주로 어머니와 소통을 했고, 최근 3년 넘게는 연락도 없이 지내다 오빠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동생은 생활고를 이유로 시신인수를 포기했고 무연고 사망자가 되었습니다.

 

40여 년 만에 만난 어머니

 

8월 중순 ㄴ님의 장례가 있기 전 해당구청으로부터 아들이 장례에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0시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아들의 연락처를 알 수 없어 기다리다 결국 운구가 시작되었고, 화장로에 들어간 이후 늦게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시립승화원 접수실에 있다가 직원의 안내로 뒤늦게 화장로 앞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서울시립승화원 전용빈소에서 장례식이 시작되었고, 아들은 어머니의 위패가 모셔진 제단에 술을 올리고 절을 드렸습니다. 바닥에 엎드려 읍소하던 아들은 한참을 그대로 있었고, 젖은 눈으로 몸을 일으켰습니다. 종교집례가 이어졌고 아들은 내내 위패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관망실로 내려왔고, 아들은 그제야 어머니와의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따로 살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 어머니는 학교로 두 번 찾아오셨고, 16세가 되던 고등학교 때 어머니를 다시 뵈었습니다. 몸집이 작고 안경을 낀 어머니의 모습,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가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이미 이사를 간 후였고, 수소문을 해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후 만난 요양병원에서 본 어머니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열여섯 살에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주름진 백발의 여인은 낯설기만 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이 날 정도로 변한 모습에 흘러버린 세월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장이 끝나고 유택동산에서 아들은 젖은 눈으로 어머니의 유골을 뿌렸습니다. 50대 중반이 된 아들에게 어머니는 서너 번의 만남과 장례, 그것이 기억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40년 만에 만난 어머니의 무연고 사망자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들과 고등학생 자원봉사자.
 

폐지 줍던 노인의 장례

 

8월 중순 ㄷ님의 장례에는 많은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에는 서울시 수행업체와 장례집례자(나눔과나눔), 그리고 종교봉사자와 자원봉사자들이 참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유가족과 지인들이 참석할 경우가 있지만 비율이 10%미만으로 드문 경우입니다. 하지만 ㄷ님의 장례에는 생전에 알고 지내던 분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ㄷ님에게는 배우자가 있었지만 중국인으로 소재를 파악하기 힘들어 무연고 사망자가 되었습니다. 친누나와 조카가 있어 장례를 치르고 싶어 했지만 서류상의 연고자가 아니어서 시신인수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ㄷ님에겐 또 다른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ㄷ님은 폐지를 주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는데, 동네 카센터 사장은 그런 ㄷ님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카센터에 폐지와 고물을 모아두었다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ㄷ님은 자주 카센터에 들르게 되었고, 카센터는 동네 아지트가 되어 지인들과 모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ㄷ님을 비롯한 카센터 사장과 그 지인들은 고향이 같았고, 때문에 ㄷ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인들은 낚시와 여행을 좋아하시는 ㄷ님을 위해 시간을 내어 함께했고, 몸이 아픈 ㄷ님을 위해 병원을 모시고 가는 등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ㄷ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르고 싶었지만 가족이 아니었기에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주민센터의 협조로 ㄷ님이 서울시 공영장례 대상으로 장례를 요청하여 지인들은 장례식장으로 찾아와 함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지인들은 ㄷ님을 생각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고, 화장장(서울시립승화원)까지 동행하여 “다음 세상에서는 아프지 말라”는 바람으로 ㄷ님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평소 밝은 성격으로 사셨던 ㄷ님의 장례에는 사시던 모습 그대로를 이야기해주는 지인들이 있었고, 마음을 다해 고인을 보내주는 또 다른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공영장례, 그 의미를 살린 장례

 

한 구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 한 분(ㄹ님)이 돌아가셨는데, 유가족으로 어머니가 계시지만 치매와 파킨슨병으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유가족은 없고 ㄹ님에겐 사실혼 관계의 남편분이 계셨지만 사업차 중국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유가족을 대신해 장례를 진행할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상담기관은 구청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방법을 안내드렸고, 구청은 의견을 받아들여 서울시 저소득시민 장례로 장례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례가 확정되기까지 여러 가지 난관들이 있었습니다. 무연고자가 아니기 때문에 병원과 장례식장은 일반적인 비용을 다 받기를 원했고, 서울시 공영장례 상담기관인 나눔과나눔과 구청은 장례식장에 공영장례의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 위해 여러 차례 설득을 해야 했습니다. 장례 후 유골을 모시는 방법도 결정할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구청 담당자는 중국에 있는 사실혼 관계의 남편분에게 이를 상의했고,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남편분은 자연장 비용을 송금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구청 직원들은 상주가 되어 제단에 꽃을 올렸고, 화장이 끝나고 경기도 파주 용미리 자연장 묘지까지 동행했습니다.
 

이렇게 서울시 공영장례 시행 후 처음 진행된 저소득시민 장례는 장례를 치르기 힘들어 자칫 무연고자가 될 뻔한 상황에서 지자체의 노력으로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제도는 많지만 시행과정에서 많은 난관에 부딪히기 마련입니다. 집행하는 주체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좋은 제도(공영장례)의 취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장례였습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헤어졌던 아버지를 무연고 사망자로 보낸 딸이 시립승화원 화장로 앞에서 오열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이름들

 

- 8월 무연고 기초생활수급자
 박호영, 한필수, 이광영, 주연석, 임순민, 이영은, 한호용, 박민출

 

- 8월 저소득시민
 김지선

 

- 8월 무연고 사망자
 서경남, 남유진, 박성기, 한철호, 손현남, 노대선, 김형대, 조정식, 김종문, 유상근, 오덕기, 최형근, 김미숙, 김병기, 김달순, 길순태, 김원철, 최순철, 김순근, 강해선, 김형준, 안장호, 최순옥, 이의창, 최동현, 윤오남, 이종득, 우새윤, 임호, 박현성

 

나눔과나눔이 함께 마지막을 동행했던 서른아홉 분의 이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게 불렸을 이름

나눔과나눔은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외롭게 삶을 마감하신 분들의 이름을
함께 기억해주세요.
“Re’member
나의 순간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을 순간을 공감하는 것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렇게 함께 하는 것”
(문구출처 : 마리몬드)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공동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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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구 나눔과나눔 장례지원실장 nanum@goodnanum.or.kr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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