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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고 헤매다 보니, 길을 찾았어요
[제1회 대구지역 장애인 탈시설 증언대회] ⑧ 홍정수
등록일 [ 2019년09월23일 22시30분 ]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은 2019 사회복지의 날을 맞아 ‘제1회 대구지역 장애인 탈시설 증언대회’를 했습니다. 시설에서 나와 탈시설하며 살아가는 장애인 당사자 여덟분의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홍정수 씨.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비교할 삶이 없는 삶

 

시설에 어떻게 들어온 지는 모르겠어요. 확실히 기억나는 건 누군가 저를 안고 약을 먹여주는 상태였다는 것과, 바로 그분이 시설에 입소시켰다는 거예요. 시설에 들어왔을 때 어떤 사람이 제 얼굴을 보고 “정수야, 너 이름은 홍정수야”라고 말해줬던 기억이 있어요. 어릴 때 기억이 그것 말고는 없어서 저는 제가 아기 때 시설에 들어온 줄 알고 있었거든요. 얼마 전에 서류를 떼어봤다가 98년도에 입소한 걸 알았어요. 그럼 12살에 시설에 입소한 건데 다른 기억이 전혀 없어요. 어렸을 땐 재활병원에서 살다가 열몇 살에 시설로 옮겼어요. 2년에 한 번씩 방이동에 있었거든요. 재활병원 1층은 병원이었고, 2, 3층은 완전히 누워서 밥 대신 우유를 먹는 중증거주인이랑 애기들이 살았어요. 제 머리부터 허리까지 수술 자국이 깊게 나있는데 그래서 애기 방에서 자란 것 같아요. 애기들 자라는 상태를 봐가면서 병원이나 시설로 이동하는 시스템이었고요.

 

재활병원에 살 땐 학교에 안 다녔어요. 아마 스무 살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부터 순회교육받았고요. (시설 안이었는데) 완전히 학교처럼 주르륵 나눠가지고 몇 학년 몇 반, 학년별로 공부했어요. 그때 글자, 숫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거든요. 유치원 과정부터 단계적으로 공부해서 스물일곱 살에 고등학교 과정까지 졸업했어요. 재활병원에 있는 동안 학교 다니려고 무지 애쓴 적이 있거든요. 어렸을 때 부분적으로 하체 감각이 없어서 기저귀를 차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결국 학교를 못 다녔어요. 시설에서는 기저귀 차는 사람은 학교에 못 다닌다고, 학교에 가면 냄새 나서 반발할 거라고 했어요. 휠체어가 이동할 차량도 없다고 했고요. 근데 휠체어 타고 기저귀 차는 사람도 학교 다니더라고요. 통학버스에 업혀서 타고 내리고 하는 것도 보고, 기저귀 차도 학교 가는 사람 있다고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전동휠체어만 있었어도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거예요. 그걸 시설에서 나오고 난 다음에야 깨달았어요.   

 

순회교육받으면서 시설 안에 있는 보호작업장에 4~5년 다녔어요. 처음에는 지우개 포장하는 일로 시작했는데, 잘 못해서 비닐하우스 클립에 탁탁 침 끼우는 일을 했어요. 열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일하고 10만 원 안 되게 받았어요. 솔직히 연금 나오는 통장관리를 저희가 안 하잖아요. 그런 건 시설 사무실에서 다 관리하기 때문에 담당선생님한테 용돈 필요하다고 말하면 한 달에 만 원, 많으면 이만 원 정도 받아썼어요. 보통은 돈 쓸 일이 거의 없어요. 제가 바깥 생활을 거의 안 해봤기 때문에 시설 안에 있는 가게에서 뭘 사 먹는 정도였죠. 보호작업장에서 받는 월급통장은 제가 가지고 있었거든요. 처음으로 직접 돈을 빼(인출)보기도 하고, 눈치도 안 보고 써 본 거예요. 모은 돈으로 옷을 사보기도 하고, 신발을 사보기도 했고요. 재미있더라고요. 시설에 있기 싫어서, 자꾸 시설 밖으로 나갔어요, 내 의지로 (어디든) 다녀보겠다는 생각으로요.

 

시설에 있는 동안 제일 지긋지긋했던 건 내가 보조인 같이 산다는 거였어요. 병원에서 살 때는 선생님들 따라서 다른 중증거주인한테 밥도 먹이고, 기저귀 차는 사람들 기저귀도 채우고 그랬거든요. 아픈 사람들 있으면 (도와줄) 사람을 부르기도 했고요. 시설로 옮기고 나서는 일을 많이 했어요. 다른 시설에는 남자직원이 있다고 하던데 저희 시설은 대부분 여성 직원이었거든요. 선생님이 보통 아침 7시 반에 출근하는데, 저는 6시에 일어나서 거주인 여섯 명 목욕을 다 씻겼어요. 밥 먹은 뒤에 그릇 치우는 거랑, 방 쓸고 닦는 청소도 대부분 제가 했고요. 무릎 꿇고 손으로 기어서 했죠. 시설에 있을 때 휠체어는 복도에 세워놓고 주로 바닥 생활만 했거든요. 일이 많은 것도 그렇지만 요양원에서는 지내기가 좀 어려웠어요. 지적장애인들이 많으니까 말도 안 통하고,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멀쩡해 보이는데 너는 왜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니?”하면서 뭐라고 하고.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같이 사는 거주인들 사이에서 왕따였어요.   

 

직원들은 우리(거주인)끼리 나가는 거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래도 나가고 싶으니까 뻥을 치는 거예요. 밖에 누구 아는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이랑 나가려고 한다고요. 그럼 그 사람을 데리고 오라는 거예요. 외출증 써야 한다면서. 아니다, 외출증 내가 쓰겠다고 하고 우겨서 나갔죠. 사실 밖에 지리도 잘 모르는 데 그냥 나갔어요. 저희는 9시에 소등을 하니까 외출해도 6시까지는 시설로 들어와야 하거든요. 어쩌다 늦으면 “너는 왜 이렇게 늦게 들어오니”, “늦게 들어오면 이야기(전화)를 해야 되지 않니” 그런 식으로 선생님들이 엄청 따져요. 근데 그땐 핸드폰도 없으니까 늦어도 시설에 연락을 할 수가 없잖아요? 불평등한 거죠. 그래도 시설에 살 때는 시설 생활이 불편하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비교할 아무 삶이 없잖아요.

 

기록자 송효정 씨의 뒷모습과 구술자 홍정수 씨의 모습.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해봐야 내 것이 된다

 

2009년도였나, 시설에서 공동으로 쓰는 전동휠체어를 쓰다가 스물 몇 살 때 저랑 같은 장애인 분이 전동휠체어 한 대를 후원해 주셨어요. 처음 전동휠체어 받았을 때 “우와 이거 신기하다!” 했죠. 누구한테 부탁하지 않아도 되고, 내 팔 힘을 안 써도 어디든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그걸 타고 반월당까지 나갔어요. 그 부근은 복잡해서 길을 잘 모르니까 처음엔 시설 근처 공원을 많이 돌아다녔죠. 그러다 점점 지리를 익히고, 지하철 3호선 생긴 뒤엔 더 넓게 다니게 됐고요.

 

2012년도에 누군가 자립캠프 안내판을 가져다줬어요. 캠프니까 그냥 놀러 간다는 생각으로 나왔거든요. 자립캠프에서 와서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자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실제 모습을 만나봤어요. 그분들이랑 같이 잠도 자고, 이야기도 나눴고요. 사실 캠프 끝나고 별생각이 없었는데, 여기 대구 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상담 나와서 자립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여행도 많이 다녔고요. 센터에서 자립하라고 꼬셨다기보다 제가 많이 다가갔죠. 같이 캠프 갔던 분이 먼저 자립했는데, 저한테도 욕망이 생기더라고요. 4주 동안 단기체험을 나왔어요. 한 달 동안 생활하면서 여행도 가고 난생처음 미용실 가서 머리도 잘라봤어요. 시설에서는 자원봉사자가 와서 머리를 잘라줬거든요. 단기체험 나왔을 때 기억에 남는 건… 길을 처음 잃어봤어요. 밤 11시가 넘어서 지하철은 끊길 시간인데, 대구역이 동그랗게 생겨서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체험 기간 동안 핸드폰을 빌려줘요. 그걸로 오만 데에 다 전화를 했죠. 사람들이 알려주는 데로 가다 보니까 지하철이 나오더라고요. 나만의 삶을 가진 느낌이었어요. 허락받지 않고 외출할 수 있고, 늦게 들어갈 거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단기체험 끝나고 자립을 준비하면서 두려움도 있었어요. 첫째는 돈 관리였고, 그다음이 지리요. 자립해서 목표 없이 큰돈을 만지니까 막막했거든요. 돈을 어떻게 쓰는지도 몰랐고, 사기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돈 쓰는 법을 아무리 말해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쓰다 보니까 알게 됐어요. ‘카드 고지서에 얼마 나왔구나, 한 달 용돈은 이만큼 쓰면 되겠구나.’ 그다음에야 돈을 쓰고 모으는 게 되더라고요. 일정을 관리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해봐야 내 것이 되는 거였어요. 일정이나 용돈, 지리를 알고 생활 패턴을 잡는 데 1년 가까이 걸린 것 같아요.

 

자립주택에서 2년 정도 살다가 지금은 임대아파트 구해서 살고 있어요. 자립주택에 살면서 천만 원을 목표로 돈을 모았어요. 혼자 살려면 이것저것 필요하잖아요. 티비, 장롱.. 무엇보다 냉장고는 꼭 큰 걸로 사고 싶었거든요. 좋은 걸로 샀어요. 거기에 먹을 걸 다 넣어야 하니까. 그리고 뭘 갖고 싶다기보다 제가 동물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푸들 분양받아서 이 년째 같이 살고 있어요. 자립해서 이런 일상이 생겼다는 게 만족스러워요. 시설은 보호하는 대신 많은 규칙을 지키게 하잖아요.

 

계단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게, 인권침해인 줄 몰랐어요

 

시설에서는 감옥 같아서 답답했는데 밖에 나오니까 일반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이 괴로운 게 있어요. 자립한 직후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멍했거든요. 사람들한테 욕을 많이 얻어먹었어요. 나는 그냥 지나가는 건데 엘리베이터 타면 “우리 탈 자리 없으니까 나중에 타라”, 비 오는 날 밖에 나가면 “비 오는 데 왜 나오냐, 그냥 집에 처박혀 있지” 사람들한테 욕을 먹어요. 제일 싫어하는 말이 학생이냐는 질문이에요.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내 나이가 어려 보이나?’ 했죠. 근데 그게 장애인을 무시하는 말인 거예요. 아이처럼 대하는 거죠. 어떨 땐 거지 대하듯 돈을 쥐여 주기도 하고. 상황을 피하거나 무시할 때도 있는데 다 느껴지니까 쉽지 않아요.

 

저 나올 땐 휠체어 들어갈 데가 많이 없었거든요. 지리를 모르니까 휠체어 들어갈 수 있는 데가 많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몇 달 살다 보니까 누군가 “어디에 휠체어가 많이 들어갈 수 있더라” 알려주기도 하고, 이동 동선이 넓어지니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휠체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닐 수 있게 되더라고요. 모임에 나가면 저도 다른 사람한테 알려주기도 하고, 다 같이 가서 밥도 먹어요.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복지일자리인데, 편의시설 점검하는 일이거든요. 처음에 시설에서 나왔을 때 ‘장애인들은 편의점에는 어떻게 들어가지?’라고 생각했어요. 계단이 있으니까요. 그걸 인권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진 계단이 장애인 인권에 들어간다고 생각을 못 했어요. 말(언어폭력)이나 인권침해 그런 것만 인권이라고 알았거든요. 어디에 못 들어가면 개선해서 들어가게 만들어 줘야 하는 것, 그게 인권이란 걸 알게 된 거죠.

 

요즘엔 교육 들으면서 인권강사 준비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수영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제가 비뇨기 쪽의 마비 때문에 시설에서 나오기 전까지 기저귀를 착용했는데, 그게 감염이 생겼어요. 병원에 갔더니 염증이 심해서 한쪽 신장이 완전히 손상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다음에는 쭉 폴리를 사용했어요. 평생 차고 다닐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수술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큰 전환점이에요.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한 마음이고요. 특별한 계획은 없지만,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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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홍정수·기록 송효정 saramcil@empas.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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