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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석 ①] 84년 서울, ‘불구자’의 유서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김순석의 삶과 죽음 ①
등록일 [ 2019년10월04일 17시33분 ]

[편집자 주] 열사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말에 응답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열사의 말을 유서로써 손에 쥐고 체제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적 장애운동에는 여전히 그러한 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열사 추모제에서 열사의 생과 죽음, 열사가 남긴 말을 통해 자신을 조직하고 옆에 있는 자를 조직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열사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함에도,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해서는 파편적 정보만 있을 뿐 현재까지 정리된 이야기는 없다. 기억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함’을 상기한다면, 열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또한, 열사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승리자의 관점이 아닌, 억압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 하반기 비마이너는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를 기획 연재한다.

 

ⓞ [서문] 시대의 악령들을 애도하기
① 김순석(1952~1984.9.19) 장애인 이동권 등에 항의하며 유서 남기고 자결 _ 정창조
② 최정환(1958~1995.3.21) 극악한 노점단속에 항의해 서초구청에서 분신 _ 강혜민
③ 이덕인(1967~1995.11.28) 노점단속에 항의해 인천 아암도에서 망루 투쟁 중 의문사 _ 최예륜 
④ 박흥수(1958~2001.7.2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정창조
⑤ 정태수(1968~2002.3.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_ 홍은전
⑥ 최옥란(1966~2002.3.26) 기초생활수급권, 이동권 투쟁 중 심장마비로 사망 _ 김윤영 
⑦ 이현준(1965~2005.3.16) 장애운동 중 활동지원사가 없어 수면 중 사망 _ 여준민
⑧ 박기연(1959~2006.6.2)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중 철로에 뛰어내려 자결 _ 박희정
⑨ 우동민(1968~2011.1.2)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등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홍세미

 

* 글의 순서는 필자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 김순석 열사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난 몇 달간 김순석 열사에 대한 자료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그 노력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이 글은 그나마 남은 파편적인 자료들을 바탕으로 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겪어온 일상적인 경험을 반영하여 작성되었다.


음독

 

꾹꾹 눌러 쓴 다섯 장 유서가 다시 눈에 밟힌다. 나름 시장님께 보내는 편지다. 이게 잘하는 짓일까?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내 마지막 말을. 됐다, 마. 고마해라. 이래라도 안 카믄 내 언제 높은 분들께 관심 한 번 받아 보긋노. 유서를 고이 접어 품에 넣고선 가슴을 툭툭 두들겨 본다. 마음이 한결 든든하다. 내도 이제 드디어 떠날 수 있겠구마. 병을 쭉 들이킨다. 목이, 식도가, 위장이 차례로 뜨거워진다.

 

지난날들이 스쳐 간다. 내게도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그래, 이제 곧 잘 나갈 것만 같은 날들도 있었는데. 그럼 뭐하노. 다 헛꿈이었데이. 이러나저러나 결국엔 억수로 지랄맞은 인생이었제. 이런 세상에서 나 같은 다리 빙신은 살아 있어도 뒤진기랑 진배읎다. 통증이 거세진다. 저도 몰래 볼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린다. 맘 한 켠으로는 빨리 편해졌음 좋겠는데, 또 맘 한 켠에서는 그러하질 못한다. 쯔쯔, 이 미련한 것이.

 

머리를 아무리 비워내도 여보야랑 아가 짓는 헛헛한 표정이 환영처럼 나타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 참 못난 남편, 못난 애비를 뒀데이. 바깥서 빙신 취급받고 와 집서 화풀이나 허고. 아이다. 미련 갖지 말자. 이제사 뭔 놈의… 이제사…

 

몸이 차가워진다. 옅은 숨소리조차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그래도, 내 유서는 꼭 읽어줄끼다. 아무리 높은 분이라케도. 아니, 시장님은 아이라도 그 누군가는. 그래서, 누구라도, 내를 기억 한 구석에나마 간직해 준다면.

 

천둥소리가 울린다. 지하 셋방에도 거센 소낙비 소리가 스민다. 여름내 들어찬 거리의 열기도 점차 식어간다. 이제 가을도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나 보다.

 

1984년, 9월 19일 오전 10시경, 마천2동 한 지하 셋방에서 김순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서른셋. 경찰은 이 사건을 ‘음독자살’로 결론지었다.

 

염보현 당시 서울 시장에게 그의 유서가 실제로 전해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김순석이 죽고 며칠 후인 9월 22일 그의 사연이 ‘조선일보’ 11면에 실렸고, 염보현 시장은 다음 날 간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간신문에 눈물겹도록 기막힌 얘기가 쓰여 있다 (...) 교통, 건설, 보사국 등 관련 부서 간에 충분한 협의를 거쳐 횡단보도나 건축물에 장애자들의 편의를 도울 수 있는 시설을 단계적으로 갖추도록 대책을 세우라.” “장애자들의 통행 편의가 증진될 수 있도록 항구적이고 면밀한 대책을 수립하라.”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신문 기사에 대한 응답일 뿐, 순석의 유서에 대한 응답은 아니었다. 게다가 시장의 지시에도 정작 장애인들의 접근권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서울 시내 건물들 대다수는 여전히 휠체어가 접근 불가능한 채 남아 있었다. 우뚝 솟은 도보블록도, 높은 육교도 그대로였다. 장애인들은 그 후에도 십수 년간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했다.

 

김순석의 유서도 서서히 잊혀갔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지금, 그의 삶과 말들은 이제 신문 기사에 실린 단 몇 문장의 파편들로만 전해지고 있다.

 

김순석 열사 기일을 하루 앞둔 2018년 9월 18일, 서울역에서 열린 김순석 열사 34주기 추모제. 과거 한 언론사에 실린 김순석 열사 흑백 사진이 영정 사진으로 놓여있으며 그 앞에 국화가 있다. 사진 최한별

상경

 

순석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물론 부산은 폭격 한 번 안 당하고 전투가 직접 벌어지지도 않았지만, 어쨌거나 여까지도 전란의 여파가 미쳤다. 피란민이 대거 몰려들어 도시 전체가 어수선했고, 언덕이란 언덕들에는 죄다 천막촌이 들어섰다. 골목마다 배고픈 사람들이 빼곡했고 곳곳에 불안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잘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잘 살았다.

 

순석은 어려서 소아마비를 겪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다섯 살부터 한쪽 다리를 절기 시작한다. 인생이 겨우 기억나기 시작할 즈음부터 그는 장애인이었다. 주변엔 상이용사들도 종종 보였고, 저맹키로 소아마비를 겪은 친구들도 몇 있었지만, 순석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평범한 이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청소년기를 부산서 보내고, 서울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던 이들이 곁에도 꽤 있었다. 경제개발의 광풍 속에서 부산으로 돈을 벌러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으나, 서울이 이 부산보담도 더 낫단 말도 적잖이 들려왔다. 부산도 참 잘 나가는 도시라 카지만, 아무래도 수도만 하긋나. 옆 동네 아무개는 서울서 엄청 성공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다리는 절었지만 손재주 하나만은 자신 있던 차였다. 또 내 한 성실 하는 사람아이가. 서울서 뭐라도 열심히만 하믄 내도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끼다. 뭐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입에 풀칠은 안 하긋나.

 

1970년, 열아홉 순석은 드디어 서울 땅을 밟는다. 화려했다. 부산도 한국서 두 번째로 큰 도시라지만, 이곳은 부산보다도 더 삐까뻔쩍했다. 건물들도, 사람들도 뭔가 더 세련되었다. 무엇보다 낯선 것은 말투였다. 서울 사람들의 말투는 뭔가 약아 보이면서도 교양 있어 보였다. 어째 깍쟁이들 사이에서 저만 촌놈 같았다.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이 찾아왔다.

 

그러나 화려한 것은 중심부뿐이었다. 도심을 조금 벗어나니 가난의 풍경이 펼쳐졌다. 언덕마다 들어선 빼곡한 달동네들. 어째 익숙했다. 말이 서울이지 서울 도심이랑은 딴판이었다. 하긴 돌이켜 보면 부산도 그랬다. 중심부만 화려했지, 구석탱이는 참 초라했다. 여도 똑같네.

 

순석이 들어간 액세서리 공장이 있던 동네도 그랬다. 공장은 강동구 거여동(현 송파구 거여동)에 있었는데, 이 지역은 재개발이 시작된 2008년까지도 서울서 ‘가장 낡은 마을’로 불릴 정도로 황량했다(그만큼 오늘날에는 강남 지구에서 가장 개발이 덜 된 지역인지라, 부동산 투기꾼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지역 중 하나다). 70년엔 더했다. 깨진 연탄재로 지저분한 비포장도로 곁에는 판자촌이 쭉 널려 있었고, 집들은 지붕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어설프게 지어진 비좁은 화장실을 여러 세대가 함께 썼다.

 

동네 사람들 말을 들어 보니 이곳은 서울로 편입된 지도 얼마 안 되었단다. 하긴 허름하고 비좁은 마을 너머론 긴 논밭이 쭉 펼쳐져 있었다. 원래 이곳서 농사짓고 살던 사람들도 제법 있었지만, 이웃 대부분은 서울 도심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변두리로 쫓겨온 철거민들이었다. 이들 역시 이곳에 정착해 판잣집들을 짓고 새 삶을 일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순석은 외롭지 않았다. 저만 이방인이 아니었다.

 

월급이 아주 많진 않았지만 그래도 먹고 살 만은 했다. 일도 점점 손에 익어갔다. 금은세공 기술도 많이 늘었다. 내 뭐라켔나. 원래 나가 손재주 하나만은 있다 카지 않았나. 그렇게 9년을 성실히 일했다. 마침내 사장은 순석에게 공장장 자리를 제안했다. 기쁘게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1년 전인 77년엔 동갑내기 김동심 씨를 만나 결혼도 했던 터라, 이번 승진은 유난히 더 반가웠다. 제대로 가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경사가 겹쳤다. 80년, 아들 경남도 태어났다. 엄청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삶에는 늘 작은 희망이 들어차 있었다. 뭔가 인생이 탄탄대로 풀려가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내 고생도 이제사 빛을 보는 기라. 순석은 틈만 나면 갓 태어난 아들을 품에 쏙 안고서 이 말 저 말 조용히 속삭였다. “갱남아, 이 애비만 믿그라.”

 

순석은 이제 저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줄만 알았다.

 

좌절, 그리고 재기

 

경남이 태어날 즈음, 나라는 뒤숭숭했다. 언제까지고 대통령일 줄 알았던 박정희가 죽고 새 대통령이 들어섰다 카드만, 곧 또 다른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켰단다. 그리고 다음 해 9월 그 군인은 새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래도 뭐 내 먹고사는 데 지장이야 있긋나. 이대로만 살믄 내 인생은 탄탄대로다.

 

그러나 불운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해 10월, 기어코 일이 터지고 만다. 순석은 심한 교통사고를 당해 버렸다. 이제 막 공장장도 되고 가족도 꾸려, 앞으로는 탄탄대로 일 줄 알았더니만 이 무슨 일이고. 아팠다. 그저 아팠다. 정신이 오랫동안 몽롱했다 깨어 보니 몸이 뭔가 이상하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감각 자체가 달라졌다. 두 다리에는 철심이 박혔다. 이제 다리를 저는 것이 아니라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장애랑은 비교도 못 할 만큼 심한 장애를 입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병실에 누워 있었다. 날짜를 보지 않은 지도 이제는 꽤 되었다. 아니, 볼 필요가 없었다. 이젠 일도 몬 하는 데 멋하러. 월화수목금토일, 요일이 사라졌다. 살아있는 듯 움직일 때라곤 그저 재활 치료를 받을 때뿐이었다.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본인이 몸져누운 터라 홀로 생계를 꾸려 가고 있는 동심에게 그저 미안했다. 동심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이제 갓 태어난 갱남이, 저 작은 것이 그저 안쓰러웠다.

 

그렇게 2년 반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고, 또 봄은 찾아왔다. 경남도 이제는 꽤 자랐다. 그동안 아내 동심은 순석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남들 얘기 들어보면 남편이 불구되어 갖고 떠나는 사람도 많다드만. 허긴, 그기 뭐 나쁜 기가. 내 다 이해한데이. 그런데 동심은 왜… 순석은 동심이 그저 고마웠다. 동심은 순석이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도록 조용히 곁에서 그를 격려하고 있었다.

 

이제는 휠체어도 제법 익숙해졌다. 그래도 내 아직 젊은데 이리 무너질 수야 읎다. 더구나 난 한 집안 가장아이가. 시간이 날 때면 아내, 아들과 함께 병실 바깥을 산책했다. 날 좋은 날엔 모처럼 가족사진도 한 장 박았다. 순석은 점차 제 삶이 돌아오고 있음을 체감했다.

 

벚꽃이 한창이던 82년 4월 순석은 퇴원을 서둘렀다. 공장으로 돌아가기는 어째 미안했다. 시도라도 한 번 해보려다 금방 포기한다. 내 같은 장애자를 누가 돈 주고 데려 가긋나. 그래도 여전히 손은 쓸 수 있어 다행이었다. 마천동 지하 셋방 건물 곁 추녀 밑에 3평 남짓한 작업장을 꾸리고 다시 연장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드디어, 순석의 재기를 알리는 쇳소리가 울렸다. 내 원래도 발로 먹고살지 않았다. 원래도 성치 않은 발이었다. 내 지금까정 손만 믿고 살아온 기라. 머리핀, 브로치, 반지, 목걸이가 하나하나 작업대 곁에 쌓여 갔다. 새로운 모델의 상품들도 만들어 보았다. 녹슬지 않았구마. 허긴 내 잘난 재주가 고작 몇 년 논다고 어디 가긋나. 순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다.

 

언젠간 나같이 손기술 있는 장애자들과 함께 공장을 꾸려보면 어떨까. 내 같은 사람들이 또 있을 낀데. 우리 같은 사람들도 희망을 가져야 한데이. 열심히만 살믄 다 먹고 살 수 있는기라. 열심히만 살믄. 그 사실을 다른 장애자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이부자리에 누워 그 꿈을 동심과 나누며 깔깔거려 보기도 했다.

 

장애

 

정성 들여 만든 물건들을 들고 바깥에 나왔다. 휠체어 탄 몸으로 버스를 탈 수 없으니 택시를 잡아타려 손을 휘젓는다. 택시는 순석을 본둥만둥 그냥 지나간다. 다음 택시가 지나가길래 앞서보다 더 크게 손을 휘젓는다. 택시는 또 그냥 지나간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그러나 택시는 잡히지 않는다. 벌써 시간은 많이 흘렀다. 그래도 별수 있나. 계속 택시를 향해 손을 휘젓는다. 더 크게, 더 크게, 더 크게. 결국 택시 한 대가 마지못해 곁에 선다.

 

휠체어 바퀴를 잡고 있는 손. 사진 픽사베이
 

기사는 작게 혼잣말을 한다. 휠체어가 안 들어갈 것 같은데…. 혼잣말인데 어째 다 들린다. 순석은 끓는 속마음을 꾹 누르고 입을 열었다. “저 좀 태워 주이소. 부탁합니데이. 택시를 몇 대나 보냈는지 몰라요. 남대문 시장까정만 가면 됩니더.” 기사는 영혼 없이 휠체어를 제 차에 구겨 넣고선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와 앉는다. 남대문 시장으로 향하는 내내 기사의 표정이 좋지가 않다. 순석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는다. 간헐적으로 울리는 신경질적인 한숨 소리만이 불편한 정적을 깬다.

 

남대문 시장까정 도착하기만 하믄 되는 줄 알았더만, 인도가 이리 사람 다니기 힘든 길인지는 여태 몰랐다. ‘인도’란 말이 갑자기 우스워졌다. 내는 사람이 아이가? 멋을 낸다고 유난히 울퉁불퉁 깔아놓은 길바닥 돌무더기들이 유난히 얄미웠다. 휠체어로 억지로 밀고 지나갈 때마다 온몸이 쿵쿵 울렸다. 툭 하면 바퀴가 돌 틈에 끼었다.

 

횡단보도를 만나 길을 건너려 했드만 혼자서는 도무지 건널 수가 없다. 횡단보도로 내려가려면 도보블록의 턱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 횡단보도를 건널 수 없으니, 다음 횡단보도가 나올 때까지 다시 휠체어를 밀고 간다. 그러나 거도 마찬가지다. 마침 파란 불이 켜졌다. 순석은 다음 횡단보도까지 갈 기력이 없어 별수 없이 곁에 있는 남자 둘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생님들, 죄송한데 저 좀 밑으로 내려주심 안 되겠능교?” 양복을 멀끔히 입은 두 남자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한 번 흘깃 보더니 별수 없단 표정으로 순석의 휠체어를 잡는다. 도움을 받는데도 순석의 마음은 어째 좋지가 않다.

 

“감사합…”

 

두 남자에게 인사를 전하기도 전에 그들은 휑하고 순석을 앞서간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 이제는 또 인도로 올라가야 하는데, 거기에도 턱이 버티고 서 있다. 도와줄 사람은 이제 곁에 아무도 없다. 한숨을 푹 쉬고선 그냥 차도로 길을 간다.

 

그래 10미터쯤 갔을까. 경적 소리가 울려댄다. 순석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빵빵. 빵빵. 그래도 어쩌긋나. 미안합니데이. 내 이리 갈 수밖에 없습니더. 속으로 계속 그 말만 되뇌고 있는데 한 차가 끼익하고 곁에 멈춘다. 창문이 열리고 굵은 음성이 순석을 힐난한다.

 

“야 이 새끼야. 뒤질라고 환장했냐?”

 

시장에 들어왔어도 거래처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인들은 순석이 지나다니는 꼴만 봐도 신기한가 보다. 멀 그리 열씸히 봐쌌노. 좌판에 앉은 한 할머니는 가엾은 듯 혀를 찬다. “쯔쯔 젊은 양반이…”. 할머니는 괜시리 제가 팔던 사과 하나를 무릎 위에 얹어준다. 제 딴에는 좋은 맘으로 그러실 게다. 그런데도 뭔가 기분이 석연찮다. 할매요, 내 그리 불쌍한 놈 아입니더. 그래도 맘 한켠에선 고맙긴 고맙다. 상인들이 이 할머니만 같았다면 조금은 나았을 텐데. 순석이 지날 때마다 성난 고함소리가 시장통을 울린다.

 

“아 좁아 죽겠는데, 여까지 휠체어를 끌고 들어와서 뭐 하는 거예요? 장사 방해되게.”

“야. 이 병신아. 저리로 가라. 재수없게시리. 뭘 얻어먹으려고 여까지 와서.”

 

좁은 길목을 가득 메운 리어카들과 좌판들에 순석은 그저 불청객일 뿐이었다.

 

액세서리 상점들 역시 순석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순석이 제가 만든 물건들을 꺼내 보여주기도 전에 상인들은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봐요. 사지 멀쩡한 사람들 물건 받아도 모자를 판에, 불구자 물건을 받기가 좀 그래요. 영 불안해서 말이지요. 좀 이해해주세요. 제가 딸린 식구가 많아서.” 순석은 항변한다. “내도 말입니더, 딸린 식구 있다 아잉교. 그라고 내가 이래 뵈도 다치기 전까정 공장장까지 했던 사람입니더. 물건이라도 함 보고 평가해 주이소.” 그래 봐야 소용없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저희 사정도 좀 이해해 주시지요. 자 가세요. 가.”

 

겨우 물건을 봐준 가게가 있었지만, 사장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가격을 깎으려 한다. “제가 선생님 사정 다 이해합니다. 저희 먼 친척 중에도 장애자가 있어요. 어디 보자. 음 물건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제가 물건을 받아 드릴 테니까 한동안은 좀 싸게 받읍시다. 아무리 그래도 장애자가 만든 물건인데 정상인 것들보다야 좀 싸게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물건만 좋음 됐지, 그게 먼 상관인교. 순석은 턱 밑까지 나오는 말을 꾸역꾸역 참아내고서 예의를 차려 묻는다. “그래 얼마나예?” “2할만 싸게 하십시다. 뭐 처음만 그러고 나중에 문제없으면 차차 가격을 올려 드릴 테니까…”

 

하. 그래도 어짜긋노. 결국 그리 계약을 하고선 그곳을 나선다. “저 병신새끼 오지 말라니까 또 왔네.” 집에 돌아가려고 택시를 타러 가는데 아까 들었던 욕설들이 또다시 반복된다. 순석은 깨달았다. 저는 지금까지 손으로만 먹고 살지 않았다. 발로도 먹고 살고 있었다. 손기술이 있음 뭐하노. 발이 빙신이면 손도, 아이지, 내 몸이 몽땅 빙신이 되는 기라. 세상이 다 그른기라.

 

그래도 말이다. 내 이리 질 수야 읎다. 내 이제 니들한테 미안하지 않다. 어디 함 해보자 마. 순석의 얼굴에는 독기가 잔뜩 배였다.

 

>> ②부 : 시장님, 장애인들이 살 곳은 어디입니까?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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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조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msophist1@gmail.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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