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10월16일wed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펼침
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시장님, 장애인들이 살 곳은 어디입니까?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김순석의 삶과 죽음 ②
등록일 [ 2019년10월10일 16시12분 ]

* 김순석 열사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난 몇 달간 김순석 열사에 대한 자료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그 노력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이 글은 그나마 남은 파편적인 자료들을 바탕으로 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겪어온 일상적인 경험을 반영하여 작성되었다.

 

▷ 김순석의 삶과 죽음 ① : 84년 서울, ‘불구자’의 유서

 

분노

 

순석은 4, 5일에 한 번꼴로 집 밖을 나섰다. 그때마다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었다. 순석의 마음에는 점점 굳은살이 배겨갔다. 그래도 비참한 건 비참한 거다. 비참함이란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는 유난히 더 그랬다. 순석 같은 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은 이 도시 어디에도 없었다. 내 참 오줌 한 번 쌀 곳이 없데이. 똥이라도 마려우면 정말로 큰일이다. 허기가 져 국밥이나 한 그릇 사먹으려 했드만 가게들은 죄다 턱이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어째 좀 안 되겠능교? 저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입니까. 다 먹고 살자 하는 짓인데.” “우리 식당은 휠체어 못 들어와요. 가세요 가. 다른 손님들한테 괜한 피해 주지 말고.” 식당들마다 이래 순석을 내켜 하지 않으니 목이 말라도 물 한 잔 얻어먹기 민망하다. 그렇다고 슈퍼에 가 생수 한 병을 사 먹기도 힘들다. 슈퍼에 들어가려면 전부 계단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허긴 턱이 없었어도 내를 지 가게에 들여보내긋나. 빙신이 들어오면 그날은 재수 읎는 날이라 안 카나. 뭐 겨우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어도 숟가락을 든 내내 주인장의 신경질을 참아내야 했다. 밥이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순석은 대강 밥을 입에 욱여넣고 그곳을 나왔다.

 

그래도 가끔은 반가운 일도 있었다. 을지로에 놓인 보도블록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 그랬다. 거기에는 모처럼 턱이 없었다. 대신 경사로가 깔려 있었다. 휠체어가 내려갈 수 있는 길이라니! 남들이야 머이 대단한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순석 같은 이에게는 참 안도스런 일이었다. 시장님, 다른 데도 이래 만들어 주시면 안 되겠능교?

 

몇 달을 그래 보내고 나니 차도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 것도, 차도를 그냥 지나는 것도 이젠 익숙해졌다. 서울 시내 어데로 가면 차도로 내려갈 수 있는지도 대강 외웠다. 맞다 저 짝 횡단보도엔 턱이 있었제. 마침 차도 안다니는구마. 여서 얼른 건너야겠다.

 

그러나 1984년 7월 어느 날, 이제 겨우 익힌 ‘불구자의 이동 방법’조차 법이라는 이름으로 가로막히고 만다. 성수동에 공구를 빌리러 간 순석이 열심히 휠체어를 밀고 도로를 건너는데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울린다.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달려온다.

 

“거기! 뭐 하는 겁니까! 그렇게 막 건너가면 안 돼요!”

 

순석은 억울했다. “슨상님. 내가 휠체어를 타고 있어서… 길을 너무 건너기가 힘들어서 그랬….” “변명하지 마세요. 법은 법입니다. 이렇게 무단횡단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람 다니는 길 차 다니는 길 따로 만들어 논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순석은 제가 사람 다니는 길로는 다닐 수가 없다고 계속 항변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쇠창살이 있고 안에는 사람, 이불, 책 등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인다. 사진 픽사베이
 

그날 밤, 순석은 유치장 신세를 졌다.

 

다음 날 아침, 파출소를 나와 다시 휠체어에 오르면서 순석은 잠시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여가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이 맞긴 한기가. 정말로 내 오기만 가지고서 버티낼 수 있긋나? 죽은 듯 산 듯 멍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동심이 놀란 표정으로 순석을 맞는다. “여보 어딜 갔다가 이제사…” 순석은 대답도 않고 작업장으로 향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그만큼 마음이 초라했다. 작업대 앞에 앉으니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그간 참아온 2년의 설움이 한꺼번에 폭발한다. 내게 쏟아진 욕설들. 그 모멸 찬 시선들, 동정 어린 표정들. 내게만 엄정한 법을 행사하는 저 경찰놈의 새끼.

 

순석은 괴성을 지르며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저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질 좀 고마해라!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수고 싶었다. 공구가 곳곳에 나뒹굴었고, 순석이 애써 만든 물건들도 죄다 조각조각 부서졌다. 내 앞에 선 모든 것이 내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상아. 차라리 망해 버려라. 순석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부서질 때까지 순석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

 

느닷없는 소리에 동심이 작업장 곁으로 뛰쳐 온다. 문틈으로 순석의 분노를 본 동심의 눈가도 점점 촉촉해진다. 미친 사람 같았다. 생전 처음으로 남편이 무서웠다. 하긴 미치지 않고서야 배길 세상이 아니다. 남편의 재기는 정말로 성공할 수 있을까? 예전처럼 나랑, 경남이랑 다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벌써 저리도 무서운 꼴을 봤는데. 나도 이제 희망을 접어야 하는 게 아닐까?

 

“엄마 무슨 소리야? 아빠 뭔 일 있어?” 경남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엄마 곁에 다가온다. 동심도 그제서야 겨우 이성을 되찾는다. 애써 눈물을 훔치고 경남을 안고선 조그마한 방으로 향한다. “아냐. 아냐. 아빠 괜찮아. 동심이 엄마랑 같이 방에 들어가 있자.”

 

결심

 

79년 2차 오일쇼크, 80년 흉작으로 인해 한국 경제는 잠시 휘청이고 있었다. 불황은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시기에조차 한국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80년을 제외하고선 계속 6%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뤘다. 심지어 83년엔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80년, 81년엔 물가가 20% 이상이나 상승했지만, 임금상승률도 꽤 높았다.

 

뉴스는 정부의 노력으로 국가 경제가 얼마나 나아졌다느니, 83년엔 드디어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를 넘어섰다느니, 무역수지 적자가 얼마나 많이 줄어들고 있다느니 매일같이 떠들어댔다. 게다가 전두환 정권은 복지국가 구현을 목표로 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기까지 했다. 81년엔 장애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순석네 살림은 어째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시장통을 지나며 이래저래 주워들은 뉴스들은 다 남 일 같았다. 내는 이래 사는데, 그기랑 내랑 먼 상관이고. 열심히만 살믄, 기술만 있음 다 잘 먹고 살 수 있다매. 그란데 내 삶은 왜 이 모냥이고? 다 그짓말이다. 이 세상은 다 그짓말인기라.

 

순석의 기술이 좋은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남들에게 순석은 그저 불구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거래처들은 그걸 이용해 늘 장난질을 쳐왔다. 순석과 1~2할 싸게 계약을 한 것도 모자라, 대금 날짜가 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가며 계약한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상인들은 순석이 장애자인지라 다른 거래처를 뚫기가 어차피 힘들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언제라도 제가 유리한 대로 순석을 싼값에 써먹을 수 있었다.

 

그동안 순석은 꾹 참아왔다. 아주 잠깐 반발을 하기도 했고, 이래저래 친한 척도 해가며 달래 보기도 했지만, 결국엔 거래처 사장들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 어짜피 내는 을인기라. 그놈들이 갑인제. 머 어쩌긋노. 이 경쟁 사회에서 별 수 있긋나. 결국 더 잘난 놈이 쪼금이라도 더 많이 받아 가는 세상 아이가. 내같은 빙신은 쓸모없는 놈 취급만 안 당해도, 이래 일하는 것만 해도, 고것만 해도 다행이다. 어떤 거래처가, 어떤 공장이 내 같은 놈을 제값에 받아 주긋노.

 

그런데 날이 갈수록 거래처들의 장난질은 점점 더 심해졌다. 순석이 만든 물건들은, 그러므로 실은 순석의 몸값은 점차 싼 가격에 팔려나갔다. “다음 계약은 좀 더 싸게 하십시다.” 그리고 그다음 계약은 조금 더 싸게…. 정작 내 물건에는 하자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거래처들에 놓인 다른 물건들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84년 8월 말, 거래처 사장 놈이 다시 한번 속을 긁는다. 그러잖아도 유치장에 다녀온 후로부턴 이 세상 모든 것에 슬슬 열이 받던 차였다.

 

“저희 가게니까 김 사장님 물건 받아드리는 거죠. 이것도 많이 쳐 드리는 거예요. 맘에 안 드시면 다른 가게 알아보세요. 저흰 김 사장님이랑 일 같이 안 해도 상관없어요. 요새 사지 멀쩡한 사람들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김 사장님이라 부르지 말고, 차라리 빙신이라 불러라. 이 새끼가 다리 못 쓴다고 계산도 제대로 몬 하는 줄 아나. 순석은 화가 폭발한다.

 

“사장님 말 좀 바로 하입시더. 제 물건에 하자 있음 하자 있다고 하이소. 그런 긋도 아이믄 도대체 물건값 깎는 이유가 뭥교? 내가 빙신인 기랑 그기랑 뭔 상관인교? 내도 한 만큼 받을 자격 있습니더. 그리 말씀 좀 그만 하이소.”

 

그래도 거래처 사장놈은 완고하다. 맘 같아선 멱살이라도 잡아채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대신 신경질적으로 좌판을 쾅 하고 내리쳤다. 깔끔하게 진열된 물건들이 흐트러졌다. 물건 몇 개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장놈은 그래도 눈 하나 꿈쩍 안 한다.

 

“어허. 이렇게 나오시면 안 돼요. 지금까지 물건 받아드린 분이라 정도 있고 해서 좋게 넘어가려 했는데, 자꾸 이런 식으로 영업방해 하면 신고할 겁니다?”

 

순석도 더는 참을 수 없다.

 

“뭐라꼬? 영업방해? 신고오? 하. 사람이 지 혼자 해 처먹어도 적당히 해야지. 정말로 인간이 되가 그러는 거 아입니다. 마. 됐습니다. 그만 하입시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믄 지도 사장님네 납품 못해예. 다 때려치입시다.”

 

순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휠체어를 굴렸다. 거래처 사장놈, 그래도 한 번은 잡을 줄 알았드만 안 잡는다. 됐다 마. 내도 니랑은 더 일 몬 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어째 마음 한 켠이 불안허다. 이제 곧 추석인데, 해필 이맘때 일이 끊겨 버리다니. 이번 추석도 공쳤네, 공쳤어. 동심이랑 경남에게 명절을 맞아 맛난 거 한 번 사줄라 했드만. 남들 맹키로 멋진 모습으로 고향땅 한 번 다녀오려 했드만.

 

그날 이후 순석은 방에 처박힌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래 며칠을 보냈다. 허긴 그동안 내 너무 힘들었다. 보람이라도 있음 좀 나았을 텐데. 2년간 뛰어봐야 결국 순석의 손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명절도 아무 날 아닌 양 휙 보내버렸다. 이 방을 나가서 도시의 화려한 꼴을 보기가 싫었다. 순석이 갇힌 지하 한 칸 방은 그저 습하고 어두웠다. 내 삶은 딱 이기라. 내는 딱 이런 게 어울리는기라.

 

그렇게 보름이 흘렀다. 순석은 침울한 경남과 동심 얼굴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더 이상 세상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 꼴에 맘이 괴로와 다시 한번 힘을 짜내본다. 그래, 새 거래처나 함 뚫어보자. 순석은 결혼 예물이었던 금목걸이를 손에 들고선 다시 바깥에 나왔다. 금목걸이를 전당포에 맡기니 10만 원을 준다.

 

그걸 들고서 이래저래 휠체어를 밀고 다녔다. 그러나 고작 보름 사이에 세상은 하나도 안 바뀌었다. 순석은 여전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간 겨우 익숙해진 거리의 턱도, 차별적 시선들도, 장애자를 대하는 거래처의 농간들도 그대로다.

 

휠체어 바퀴를 잡고 있는 손. 사진 픽사베이
 

그렇게 3일을 돌아다녔다. 성과는 전혀 없었다. 하하 이젠 더 이상 할 끼 읎네. 순간, 순석은 결심을 한다. 할 끼 읎는데 더 살아 뭐하긋노. 순석은 펜 하나와 편지지를 사들고선 지하 셋방에 돌아왔다. 펜과 편지지 옆으론 병 하나가 함께 놓여있다. 순석은 편지지를 바닥에 두고선 펜을 꾹꾹 눌러 제 삶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스스로 부딪쳐보지 못하고 피부로 못 느껴본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택시를 잡으려고 온종일을 발버둥 치다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읍니다. 휠체어만 눈에 들어오면 그냥 지나치고 마는 빈 택시들과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저렸읍니다.”

 

“그까짓 신경질과 욕설이야 차라리 살아보려는 저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져보게 해주었읍니다. 하지만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 놓았읍니다. 시장님, 을지로의 보도블록은 턱을 없애고 경사지게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밖에는 시내 어느 곳을 다녀도 그놈의 턱과 부딪혀 씨름을 해야 합니다. 또 저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화장실은 어디 한 군데라도 마련해 주셨읍니까.”

 

“장애자들은 사람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대우를 받아도 끝내는 이용당합니다. 조그마한 꿈이라도 이뤄보려고 애써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저를 약해지게만 만듭니다.”

 

이기 내가 세상에 전하는 마지막 외침인기라. 이기 내 할 수 있는 마지막 의무인기라. 이래가 장애자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그래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뀐다면. 갱남이가 컸을 때라도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나아진다면.

 

장례는 하루 동안 치러졌다. 이 사건 소식을 듣고 장례식을 찾은 기자에게 동심은 말했다. “누가 장애자들에게 사람대우를 해주었습니까.” 동심의 눈가엔 이내 눈물이 맺혔다. 사람들은 독극물이 순석을 죽였다 하는데, 어째 동심은 이 사회가 더 원망스러웠다.

 

다음 날 오후, 순석의 몸은 불길에 휩싸인다. 동심이 여전히 그 곁을 지키고 서 있다. 그의 손에는 순석의 유서가 구겨진 채 쥐어져 있다. 동심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내내 아빠가 어떻게 된 건지 정확히 모르던 다섯 살 경남도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아빠를 더 이상 볼 수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그래도 일단 엄마를 달래본다. “엄마, 울지마. 엄마, 울지마아.” 그러나 실은 그렇게 말하는 경남의 얼굴도 잔뜩 젖어있다.

 

그날 이후, 휠체어로 남대문 시장을 활보하던 독기 어린 표정의 한 남자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목격되지 않았다.

 

장례

 

순석이 생을 마감한 지 얼마 안 된 1984년 10월 6일. 정립회관 운동장에서는 제8회 전국지체부자유 학생체전 개회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훗날 보건사회부(아래 보사부) 장관이 된 문교부 장관 권이혁과 국회의원 두 명, 서울시교육감 등도 내빈으로 참석했다. 당시 보사부 장관이었던 김정례도 오기로 했으나 급작스러운 일로 참여하지 못하여, 그녀 대신 보사부 사회국장이 대신 자리했다.

 

그러나 이 행사에 ‘잡음’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다. 행사장 바깥 한구석에 순석의 모조관이 들어섰던 것이다. 곁에 세워진 제단에는 향불이 피어올랐다. 제단 곁에 선 십여 명의 장애인들이 지나는 이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장애자를 위하는 척 이런 겉치레용 행사만 열지 말고, 장애자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것을 촉구했다.

 

“체육대회를 해봤자 아픈 다리만 더욱 아플 뿐 우리의 상황이 나아질 건 없다!”

 

장애자 복지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었다면, 장애자들이 맘 놓고 도시 곳곳을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면, 장애자들이 제가 일한 만큼 받아 갈 수 있는 사회였다면, 순석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이 위령제를 주도한 건 ‘대학정립단’ 소속 회원들이었다. 이 단체는 중고등학교 체육시간에 비장애인들과 통합수업에 참여하는 대신 정립회관 내 수영 등의 체육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장애 학생들(주로 소아마비 장애인)이 타교생들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며 장애자들의 삶과 처지에 관해 관심을 기울여 오긴 했지만, 딱히 처음부터 운동성을 가진 단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순석의 죽음은 이들을 행동으로 이끌었다. 작긴 했지만 장애자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삶의 개선을 요구하고 나선 최초의 조직화된 움직임이었다.

 

전국지체부자유 학생체전 개회식의 마지막 행사는 동국대부고 장애 학생들과 서울고 장애 학생들 간에 벌어진 축구시범경기였다. 휘슬이 울리고 얼마 후, 대학정립단의 한 학생이 내빈석으로 향했다. 그는 권이혁 장관에게 외쳤다.

 

“분향을 해 주십시오!”

 

권 장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최 측 직원들이 황급히 뛰어왔다. 그리고 이내 학생은 바깥으로 끌려나갔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자 확실히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장관은 국회의원들과 끊임없이 무언가를 속삭였고, 행사장 곳곳이 술렁거렸다.

 

이내 장관은 주최 측 간부를 불러 조용히 뭔가를 지시했다. 간부는 곧바로 사회자에게 다급하게 뛰어가 말했다.

 

“그쳐, 그쳐!”

 

돌연 축구경기가 중단되었다. 15분 예정되어 있던 경기가 단 10분 만에 끝났고, 선수들은 영문도 모른 채, 멍하니 경기장에 서 있었다.

내빈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들 중 아무도 순석에게 향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순석의 장례는 이후에도 반복된다. 매년 9월 19일을 즈음하여, 그의 이름이 곳곳에서 호명된다. 거리의 턱에 삶이 가로막힌 이들, 애초에 ‘노동할 수 없는 자’로 규정되어 착취당할 자격조차 없는 이들, 온갖 차별과 제도 덕에 매 순간 생명을 위협받는 이들은 이날, 또 다른 순석이 되지 않기 위하여 잠시 순석이 된다.

 

김순석 열사 기일을 하루 앞둔 2018년 9월 18일, 서울역에서 열린 김순석 열사 34주기 추모제. 과거 한 언론사에 실린 김순석 열사 흑백 사진이 영정 사진으로 놓여있으며 그 앞에 국화가 있다. 사진 최한별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올려 0 내려 0
정창조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msophist1@gmail.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84년 서울, ‘불구자’의 유서 (2019-10-04 17:33:01)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더보기
신간소개기사보기 도서 구매하기
기고 칼럼 기자칼럼

기고 작은이미지
길을 잃고 헤매다 보니, 길을 찾았어요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은 2019 사회복지의 날...

“나의 괴물 장애아들, 게르하르트 크레...
두 살에 와서 서른아홉까지 시설에서 살...
“시설에서 제일 좋았던 기억? 없어요”
Beminor SNS 비마이너 페이스북비마이너 트위터비마이너 텔레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