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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인 ①] 그날의 아암도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①
등록일 [ 2019년10월22일 19시13분 ]

[편집자 주] 열사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말에 응답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열사의 말을 유서로써 손에 쥐고 체제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적 장애운동에는 여전히 그러한 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열사 추모제에서 열사의 생과 죽음, 열사가 남긴 말을 통해 자신을 조직하고 옆에 있는 자를 조직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열사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함에도,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해서는 파편적 정보만 있을 뿐 현재까지 정리된 이야기는 없다. 기억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함’을 상기한다면, 열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또한, 열사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승리자의 관점이 아닌, 억압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 하반기 비마이너는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를 기획 연재한다.

 

ⓞ [서문] 시대의 악령들을 애도하기
① 김순석(1952~1984.9.19) 장애인 이동권 등에 항의하며 유서 남기고 자결 _ 정창조
② 최정환(1958~1995.3.21) 극악한 노점단속에 항의해 서초구청에서 분신 _ 강혜민
③ 이덕인(1967~1995.11.28) 노점단속에 항의해 인천 아암도에서 망루 투쟁 중 의문사 _ 최예륜
④ 박흥수(1958~2001.7.2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정창조
⑤ 정태수(1968~2002.3.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_ 홍은전
⑥ 최옥란(1966~2002.3.26) 기초생활수급권, 이동권 투쟁 중 심장마비로 사망 _ 김윤영
⑦ 이현준(1965~2005.3.16) 장애운동 중 활동지원사가 없어 수면 중 사망 _ 여준민
⑧ 박기연(1959~2006.6.2)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중 철로에 뛰어내려 자결 _ 박희정
⑨ 우동민(1968~2011.1.2)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등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홍세미

 

* 글의 순서는 필자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아암도 가주세요”

 

거기 아무것도 없는데
...
송도 여기는 없는 데였어요
갯벌이고 바다였지
부모님이 조개 캐던 데였는데
한 이십 오륙 년 전인가
대기업들이 다 사들여서 개발한다고
오십 평 보상받았는데
사천만 원 준다고 얼른 팔아버렸지
안 팔고 갖고 있던 사람들도 있어요
그 사람들은 아파트 육십 평짜리 분양받았잖아
팔억쯤 할 거야
상가 개발도 이제서야 한다는데 이십 년 만에
남동공단만 해도 팔팔 올림픽 때는 없었어요
연안부두? 연안부두야 더 오래됐지
여기저기 많이 생겼죠

 

연안부두를 오가는 화물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변에 택시는 멈춰 섰다. 정말로 아암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를 내면서 훼손된 것인지 차도 방향의 바위는 군데군데 시멘트 바른 가짜 돌로 메워져 있었다. 아암도는 황량했다. 하지만 물 빠진 갯벌에는 무수한 숨구멍이 송송 뚫려있었다. 해초들이 자라난 갯벌에 작은 게와 벌레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바다가 육지가 되고 삶터가 갈아엎어진 창해상전(滄海桑田)의 역사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갯벌과 뭇 생명들은 어쩌면 그날의 목격자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날의 일을 물을 길은 없었다.

 

당시 아암도 망루. 사진제공 장애해방열사 ‘단’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1995년 3월 8일 서초구청 앞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그의 이름은 최정환. 방배역 부근에서 노점상을 하던 그는 국가가 공인한 1급 지체장애인이었다. 친자임을 부정하나 호적상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로 10년 전에 생활보호 신청을 거부당하고 그는 노점상이 되었다. 1994년 6월 구청의 단속으로 심각한 다리 골절을 입은 그는 이듬해 3월 다시 노점 장사에 나섰다가 또 단속을 당했다. 단속 과정에서 압수당한 노점 물품을 찾으러 구청에 갔던 그는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4백만 장애인을 위해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3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최정환의 죽음을 계기로 장애인운동, 노점상운동은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를 구성했다. 장자추는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 전국노점상연합회(아래 전노련)가 “돈 없고 힘없는 이 땅의 장애인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생계대책을 마련”하는 것을 취지로 장애인과 도시빈민의 노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당시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률로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있었다. ‘장애인복지법’은 ‘심신장애자복지법’을 1989년 개정하면서 장애인 등록제도를 도입한 것이었으며 ‘장애인고용촉진법’은 1990년에 제정, 당시 장애인의무고용률 2%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4년 세계화 시대를 강조하는 정부여당의 기업활동 규제완화를 위한 움직임 속에 의무고용률을 1%로 하향 조정하려는 시도에 장애계는 거세게 저항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1995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전장협은 민주노총 준비위원회, 산재노동자협회와 함께 ‘장애인 고용 촉진을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1996년에는 ‘장애인노동권리 확보를 위한 장애인 고용 촉진 걷기대회’라는 13박 14일간의 전국적 걷기대회를 여는 등 장애인 노동권 실현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개정된 장애인복지법 또한 장애인에 대한 소득지원을 보장하지 않았으며, 생활보호법에 의해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복지 수급의 가능성이었다. 최정환의 사례처럼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생활보호 대상자가 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장애인이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할 권리개념이 미약하던 당시, 장애인이라는 말은 곧 빈민이라는 뜻이었다. 차별과 멸시가 만연한 사회에서 장애인은 먹고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가난한 장애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생계노동 중 하나는 노점이었다. 장자추는 서울 청계천, 강남, 그리고 인천 아암도 등지에서 노점 조직 사업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오가고 머무는 곳, 변화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도시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갔던 것이다. 스물여덟의 이덕인은 아암도에서 장자추와 함께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날의 아암도

 

1995년 7월 인천지역 아암도지부 장자추가 발족해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하자, 인천시와 연수구는 강제 철거 계획을 추진한다. 9월 인천시의회 2억2천만 원 예산 결의를 바탕으로 연수구청은 용역회사 ‘무창’을 철거업체로 선정했다. 무창은 도시재개발지역 철거에 깡패,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참여한 바 있으며 폭력 철거, 철거민 상대 사기, 유령 인부 명단 제출로 용역비 횡령 등 이미 악명 높은 곳이었다. 연수구청은 인천광역시, 연수구, 남부경찰서, 103여단, 남동공단소방서 등과 대책회의를 개최했고, 용역반의 철거 과정에서 인권침해 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이에 대한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1995년 11월 24일 아침 7시 아암도에서 수천의 군, 경, 소방, 용역이 동원된 강제철거가 기습적으로 시작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연수구청 357명, 무창 200명, 경찰관 96명, 기동대 약 600명 등 총 1,253명이 동원되었다. 주변 교통을 통제하고 진입을 원천봉쇄한 경찰력과 포클레인을 동원해 포장마차 노점을 철거하는 용역반원들을 피해 노점상들은 망루에 올랐다. 인천 장자추 아암도 지부 회원들이었다. 포장마차와 노점 물품들은 정오경에 모두 부서졌다. 지붕도 외벽도 없이 아시바 철골로 지어 합판을 올린 망루 위 30여 명의 노점상들은 망루 지지대를 찍어대는 포클레인의 충격과 경찰과 용역반원의 위협, 수차례 거듭된 소방 살수를 맞으며 버텼다. 망루에 오른 노점상들은 화염병과 인분 등을 던지며 저항했지만 이는 금세 소진되었다. 경찰과 용역은 식품은 물론 지병을 앓는 환자의 의약품 반입마저 통제했고 경찰은 망루 농성자들을 향해 ‘모두 구속한다’는 경고를 계속했다. 생필품과 의약품을 전달하고자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진입하려던 노점상과 장애인은 대거 연행되었다.

 

추위와 공포 속에서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인 25일 저녁 농성자 11명이 망루 아래로 내려가 연행되었다. 직후 밤 8시경 이덕인은 망루 아래로 내려갔다. 망루 위 동료는 이덕인이 해변의 축대를 따라 걸어가다 500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어통소(경운기 통로)를 통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고 증언했다. 그 시각 바닷물의 수위는 139㎜ 이상이었으나, 방파제의 해발고도를 고려하면 수위는 더 낮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덕인이 망루 2층에서 뛰어내렸을 때 물은 가슴께 높이였다. 이덕인은 걸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뒤따라가던 동료는 아암도 입구 쪽에서 전경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발각되었다는 생각에 탈출을 포기했다. 동료를 향해 먼저 가겠다는 손짓을 하고 이덕인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흘 뒤인 28일 오전, 그는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이덕인은 상의와 신발이 벗겨진 채 두 손목이 밧줄에 묶여 있었고 얼굴과 뒷머리, 어깨와 팔 등에는 상처와 피멍이 있었다. 이덕인의 시신은 인천 세광병원 그리고 거기서 다시 길병원으로 옮겨졌다. 29일 새벽 4시 45분경, 경찰 1500여 명이 길병원 영안실 콘크리트벽과 유리창을 뚫고 난입해 이덕인의 시신을 탈취하고 그의 형을 납치해 강제 입회시킨 가운데 부검을 실시했다. 이후 경찰은 서둘러 사인을 익사로 발표했다.

 

폭력의 증언

 

경찰의 시신 탈취 과정에서 노점상 회원과 인천지역 대학생 등 20여 명이 연행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는데 그중 한 명은 실명의 위기에 처했다. 이덕인의 죽음의 진상은 끝내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등장한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그해 3월 경찰은 최정환의 시신을 탈취한 바 있었다. 24일 장례를 위해 강남병원에서 연세대학교로 장례를 모시려던 최정환의 시신을 탈취한 경찰은 노점상, 장애인의 철야농성 끝에 다음날 오전 시신을 돌려주었으나 결국 장례식으로 가는 길을 끝까지 막아섰다.

 

95년 12월 16일, 이덕인 열사 장례투쟁. 사진제공 장애해방열사 ‘단’
 

이덕인의 시신 탈취는 1991년 박창수의 시신 탈취 사건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그는 전국노동자협의회 탈퇴를 종용하는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고문 조사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백골단(경찰)은 영안실 벽을 뚫고 난입, 시신을 탈취해 강제부검하고, 사인을 단순자살로 발표했다. 2009년 망루농성 당시 사망한 용산참사 철거민에 대한 강제부검, 2014년 삼성전자서비스노조 활동 도중 사망한 염호석의 시신 탈취, 2015년 경찰 물대포를 맞고 이듬해 사망한 백남기 농민 시신 탈취 시도 등 국가폭력 피해자의 죽음의 진상을 가리고 투쟁을 잠재우려는 시도는 정권의 성격을 막론하고 계속되어 왔다.

 

“세광병원에서 길병원으로 이전을 하려는데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지. 백골단이. 앰뷸런스 차에서 시신을 내리려고 하는데 뺏으려고 하는 거야. 시신을 안고 뛰었대니까. 이덕인 열사 시신을 안고 뛰어 들어간 거지. 안치하니까 고립을 시키고. 비대위 딱 꾸리고 나니까 침탈 소식 들려오고. 그러니까 쭉 빠져나가고 인하대 학생들 한 80명 정도 하고 가족들하고. 뭐 없더라고. 근데 뭐 사방에서 뚫고 들어오고, 전쟁이지 뭐. 피 퍽퍽 날아댕기고. 저쪽에서 벽 뚫고 있고. 안에서는 계속 뭐 던지고, 한 시간 넘게 싸웠을 거야. 전경애들이 앞에서 쓰러지면 얘네들을 막 밀어. 전경 애 하나가 자빠져서 들어오는데 피가 선지처럼 흘렀어. 
...
시신을 탈취해갔어. 형까지 두들겨 패서 시체에다 엎어놓고 갔어. 국과수에 가서 하루 만에 와서 새벽에 내던졌어. 내던졌는데 멍 자국들을 다 찢어놨어요. 조직 검사할 데는 다 쪼개놓은 거야. 내장도 다 꺼냈어. 껍데기만 던져놓은 거야. 그 새끼들 정말 인간 아니었어. 그게 무슨 문민정부야, 그게. 말도 안 되는 거지. 이런 정말 악랄한....” (조덕휘, 당시 비대위 활동, 전노련 소속)

 

“얼마나 무섭게 들어오는지. 벽을 뚫고 저 높은 데서 유리가 깨지면 저기서 사다리 타고 들어오고. 경찰들이. 그리고 들어오면서 막 피가 팍팍 튀겨가지고, 그때 실명된 학생도 있는데 아직까지 연락을 못하고 못 찾어. 피가 막 이렇게 좌아악 솟구치고 쏟아지는데 막 응급실에 데려가고. 영안실의 상주들이 바지에다 막 오줌을 싸고 막... 근데 거기서 집행부 찾는다고 사람들 확 잡아서 얼굴 확인하고. 얼마나 무서웠으면, 남부경찰서인가, 거기 항의하러 가서 거기를 가서 다 누워가지고 시신 내놔라, 이덕인 내놔라. 이러고 누웠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누워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인 거야. 다 도망가고.” (유희, 당시 비대위 활동, 전노련 소속)

 

1995년 망루가 세워졌던 아암도는 주변 교통이 모두 통제된 가운데, 경찰과 용역의 경계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물품 전달과 연대를 위해 진입을 시도하다 연행되었던 사람들은 조사과정에서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용역들하고도 계속 다툼이 있었지만 우리를 연행한 건 경찰이었어요. 한 20명 정도가 연행됐는데, 복도에 좍 앉혀놓고 한 명씩 한 명씩 불러들여서 조서를 쓰는 거죠. 다른 사람이 이야기했던 것을 가지고 강압수사를 한 거지. 저 사람이 그러는데 그 말 맞아? 주동자가 누구야? 그러면서. 난 말 못해, 변호사 올 때까지 말 못 해. 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그러니까.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다 넘어뜨렸어. 소리를 질러도 소리가 안 나오는 상태로 진짜 옴팡 두들겨 맞고 어마무시하게 발로 밟고. 내가 못 보게 머리채를 잡고 집단폭행을 하더라고. 그러고 나서 얘네들이 하는 말이, 야 이 새끼야 니가 나라 구하는 독립투사야? 말 하나 안 하나 보자 그러면서 막 밟더라고. 진짜 악 소리가 안 나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나는 말을 안 하고.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 그때부터 진짜 입을 닫아버렸어요. 물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고 그냥 모든 것을 다 거부. 그러니까 바로 유치장 들어갔는데, 나는 진짜 공권력이 이런 식으로 사람 죽일 수도 있겠다...” (조성남, 당시 장자추 활동, 청계천에서 노점)

 

이덕인의 죽음, 투쟁과 기억

 

‘장애인 노점상 故 이덕인 열사 사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빈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구성되어 5개월여를 싸웠고 이덕인의 장례는 1996년 4월 24일에 치러졌다. 기나긴 싸움의 시간 동안 이덕인의 부모는 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물론 인천시, 경찰 관계자 등은 이덕인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 표명조차 하지 않았다. 1996년 4월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139석의 국회의원을 만들었고 1998년 지방선거에서 최기선 인천시장은 재선되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였으나,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배‧보상심의신청은 모두 기각되었다. 기각의 사유는 이는 “노점상 행위를 단속한 지방자치단체의 고유 사무에 대한 일반적 법 집행”과정에서 발생한 일로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한 것으로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한 사망인지에 대한 조사는 일부 미진하므로 이 부분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며 조사개시결정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조사는 진행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르고 있다. 아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온 이덕인의 부모는 속이 타들어 간다.

 

“오죽하면은 이소선 어머니가 나보고 그래. 진짜로 평생 싸운 사람보다 더 용감하게 싸웠다는 사람이야 내가. 그런디, 가만히 보니까, 용감하게 싸우든, 용감하게 안 싸우든, 백날 해봤자 정치권들한테는 못 해보겄더라고. 아하, 세상이 이러구나. 정치 허는 놈들은 어느 누구도 못 해보겄구나, 우리 서민들은. 느그들은 해라, 백날 해봤자 소용없다 그러는 거고. 으이씨. 어떤 놈들이 대통령 되면 뭣 허냐. 이런 생각이 들어버려 이제는.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어떤 놈들이 되면 뭣 허냐고. 그렇게 내가 싸움을 하고 댕겼어도 이 모냥인데. 그래서 아, 인자 이것이 자꾸 물 넘어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물 넘어가는 것 같애도 일단은 싸움은 하고 댕겨봐야죠. 그래서 아버지가 싸움을 하고 댕기는데, 나는 인자 지쳐버렸어요. 지쳐버렸어. 자기 일, 자기 집안일 아니기 때문에 느그는 해라, 나는 모른다. 정치권들도 이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렇게 세월을 삐대고 왔어요. 주위에서도 아무리 노력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지금 그런 것을, 국민들을 억울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쳐다본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왔을 거여.” (어머니 김정자)

 

“이번 정부 들어와서도, 우리 초청해가지고 우리 집사람이 갔지. 내가 안 가고. 거기서 우리 집사람이 전부 얘기를 다 했대. 그래가지고는, 그것을 해결을 해준다고까지 말을 듣고 나왔어. 그랬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시계도 하나씩 줘서, 나 시계 차고 다니는 게 그거여. 초청해가지고 시계까지 다 줬는데 답이 없어. 근디 그 시계를 끌러서 놔뒀더니 시계가 안 돌아가, 밥을 줘도.” (아버지 이기주)

 

이덕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늙고 지쳤다. 그들의 아들은 24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죽은 채다.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 보상심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1995년 그 시절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장애인 노점상의 삶과 저항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지금껏 유보되고 기각되어 왔다. 그 시절에도 추진 중이던 ‘민주화’와 ‘개발’은 현재진행형이다. 새롭게 생겨나는 땅과 도시는 미래를 향한 진보를 약속하지만 거기서 밀려나는 사람, 그 틈을 비집고 함께 살아보고자 기를 쓰는 가난한 사람들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삶과 죽음은 ‘불법’으로 규정되거나 없는 사람인 양 아예 다뤄지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빈민의 이리저리 떠밀리는 삶이 불법 혹은 유령처럼 여겨지는 동안,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의 가난한 부모는 거리를 헤매며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에게 이덕인의 죽음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이덕인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내가 그러고라도 싸워서 우리 아들, 그나마 그렇게 훌륭하게 출상 했응게, 어떨 땐 그래, 둘둘 몰아서 나간 것보다 그래도 내가 여기저기 댕기면서 싸워서 이 정도라도 나갈 수 있게 한 게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근디 오죽해서 해결하다 하다 못하면 이렇게 지쳐갖고. 지쳐갖고, 인자는 모르겄다, 이런 생각을 하겠냐고. 내가 그놈 잊어보려고 얼마나 한이 맺힌 사람인데..... 지금도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내가, 마석을 가봐야 되는디 지금 못 가고 명절 쇠고나 갈거나 어쩔 거냐 그러고 있는디. 너무너무 보고 싶고 너무너무 이쁘게 생긴 내 아들을 갖다가 그렇게... 두드려 맞아갖고 얼굴이 그렇게 생겨가지고... 내가 내가 진짜... 내가 죽어야 잊어뿔지. 가슴에 묻고 가지. 안 그러면 묻고 가질 못해.” (어머니 김정자)

 

2015년 11월 4일 아암도를 찾은 이덕인의 어머니 김정자 씨. 사진제공 최인기
 

▷ ②부 : 그날의 아암도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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