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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란 ①] 이르게 온 미래, 최옥란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최옥란의 삶과 죽음 ①
등록일 [ 2019년10월31일 13시06분 ]

[편집자 주] 열사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말에 응답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열사의 말을 유서로써 손에 쥐고 체제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적 장애운동에는 여전히 그러한 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열사 추모제에서 열사의 생과 죽음, 열사가 남긴 말을 통해 자신을 조직하고 옆에 있는 자를 조직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열사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함에도,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해서는 파편적 정보만 있을 뿐 현재까지 정리된 이야기는 없다. 기억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함’을 상기한다면, 열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또한, 열사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승리자의 관점이 아닌, 억압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 하반기 비마이너는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를 기획 연재한다.

 

ⓞ [서문] 시대의 악령들을 애도하기
① 김순석(1952~1984.9.19) 장애인 이동권 등에 항의하며 유서 남기고 자결 _ 정창조
② 최정환(1958~1995.3.21) 극악한 노점단속에 항의해 서초구청에서 분신 _ 강혜민
③ 이덕인(1967~1995.11.28) 노점단속에 항의해 인천 아암도에서 망루 투쟁 중 의문사 _ 최예륜
④ 박흥수(1958~2001.7.2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정창조
⑤ 정태수(1968~2002.3.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_ 홍은전
⑥ 최옥란(1966~2002.3.26) 기초생활수급권, 이동권 투쟁 중 심장마비로 사망 _ 김윤영
⑦ 이현준(1965~2005.3.16) 장애운동 중 활동지원사가 없어 수면 중 사망 _ 여준민
⑧ 박기연(1959~2006.6.2)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중 철로에 뛰어내려 자결 _ 박희정
⑨ 우동민(1968~2011.1.2)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등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홍세미

 

* 글의 순서는 필자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옥란 열사. 연도 미상. 사진제공 빈곤사회연대
 

2001년 12월 3일,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단’이 농성에 돌입했다. 한겨울 명동 성당 앞에 깔개 하나를 놓고 시작된 이 농성의 계기는 바로 최옥란. 그녀는 기초생활수급자였고 중증의 뇌성마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1인가구 기초생활수급자의 현금급여 28만 6천 원(생계급여 26만 3천 원, 주거급여 2만 3천 원), 장애수당 4만 5천 원을 합해 33만 1천 원 정도의 급여가 한 달 소득의 전부였던 최옥란은 낮은 기초생활 수급비의 문제점을 폭로했다.

 

“정부에서 28만 원가지고 살라는 것 때문에 몇 번이고 아파트에서 많은 고민과 죽음을 생각했고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끝까지 호소했습니다. 국회의원님들이나 모든 분들에게 계속 대안을 마련해달라, 그런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고 제가 결국은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입니다.”
_ 2001년 12월 3일,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단 기자회견’ 발언 중

 

명동성당에서의 이 농성은 일주일로 마무리되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인 기초생활수급비를 복지부 장관에서 반납한 장애여성의 투쟁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다. 기초생활수급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최초의 싸움이었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을 가장 큰 성과로 자찬해 온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집에서 26만 원(생계급여)을 기다리면서 한 달 동안 누워있었어요. 사람이 누워있다 보니까 삶의 의지가 없어지고... 그래도 노점을 할 때는 내가 열심히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그런 힘이 있었는데.”
_ 2001년 12월 3일 최옥란 인터뷰, 장호경 감독의 ‘2002-2012 최옥란들’ 중

 

방 안에서 보내야 했던 하염없는 시간을 박차고 거리에서 투쟁했던 그녀는 이듬해 2002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저소득 빈곤계층 단 한 명의 최저생계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외침은 장애인이자 여성, 노점상이었던 그녀의 마지막 투쟁이 되었다.

 

최옥란의 삶과 투쟁의 시작, 울림터

 

1966년 7월 3일, 파주에서 태어난 최옥란은 열병을 앓은 뒤 뇌성마비를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학교 입학을 거절당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배움에 열정이 많았다고 한다. 어머니와 오빠, 동생들과 함께 파주에 살던 그녀는 배우고 스스로 살아가야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18세에 인천의 성린직업재활원에 입소하는 것으로 첫 번째 독립을 한다. 이후 박성구 신부가 운영하는 작은예수회에 살며 검정고시를 준비해 86년, 중입 검정고시에 합격한다. 87년에는 광명에 위치한 명휘원에 입소, 명혜학교 중학교 과정에 등록했다.

 

그 시기 한국사회는 요동치고 있었다. 80년대 불어 닥친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사회변화의 물결은 최옥란을 비껴가지 않았다. 명혜학교와 성당을 다니던 최옥란은 87년 청년 장애인운동 조직 ‘울림터’에 가입한다.

 

“당연히 장애인문제도 그 시기(80년대)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봐요.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던 것들을 사회문제로 자각하기 시작하는. (장애인운동도) 한국사회 일반 대중운동, 학생운동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조성남)

 

1988년 12월 29일 열린 ‘제1회 울림인의 밤’. 가운데 빨간 재킷을 입은 사람이 최옥란 열사. 사진제공 빈곤사회연대
 

80년대는 한국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열린 시기였다. 84년 김순석의 죽음과 이를 항의한 대학정립단 등 청년 학생들의 투쟁, 80년 광주 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이 ‘복지국가 구현’의 구호를 내걸고 제정한 81년 심신장애자복지법과, 88년 서울올림픽과 함께 열리게 된 ‘88 서울장애자올림픽’은 장애 문제를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특히 87년 6월 항쟁 이후 이뤄진 대통령 직선제를 앞두고 장애인계는 일자리와 복지를 위해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과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을 주요 요구로 걸었다. 88 서울장애자올림픽을 거부하는 움직임과 함께 시작된 양대법안 제·개정을 둘러싼 싸움은 장애인 대중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울림터 초기 사람들은 밀알(정립회관 고등부 동아리)이나 이런 곳을 통해서 왔지만 나중에는 대학생이나 일반 직장인들도 활동을 했죠. 그 당시에 도장을 파거나 편집을 하거나, 이런 친구들도 나중에 들어왔고, 다양한 경로로 많이 들어왔죠.” (김병태)

 

정립회관 출신이나 대학생 등 청년조직을 기반으로 한 장애인운동은 86년 울림터 창립 이후 대중 운동으로의 돋움을 꾀한다. 88년 4월, 명동성당 앞에서 열린 ‘장애인 권익촉진 생존권 범국민 결의대회’에 전국 장애 청년 단체들과 장애인들의 대중적 참여로 1000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당시 장애 운동은 장애가 사회적 차별로 인해 발생함을 지적함과 동시에 차별과 동정, 모두를 반대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실정은 어떠한가, 과연 손상 입은 자가 불편 없이 이 사회에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장애인들은 노동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취업하기가 어렵고 취업한다 해도 상대적인 저임금과 멸시에 시달린다. 각종 고등교육을 받는데도 많은 규제를 받으며 모든 공공시설은 장애자가 이용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게다가 사회의 인식은 낮아 어딜 가나 이상한 동물을 보듯 하는 따가운 눈초리와 배부른 자의 역겨운 동정들뿐,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_ 기만적인 장애자 올림픽 폭로 및 장애인 인권쟁취 결의대회, 88년 10월 9일, 서울지역 사회사업, 사회복지학과 대표자 협의회, 울림터 활동기록집 재인용

 

이러한 변화는 최옥란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87년 울림터에 가입한 최옥란은 88년 동생과 함께 연신내시장 인근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에 뛰어들었다. 88년 4월 명동성당 앞에서 열린 ‘장애인 권익촉진 생존권 범국민 결의대회’ 참여를 시작으로 장애인올림픽 거부투쟁과 양대법안 쟁취투쟁에 함께 했다.

 

“곧바로 학력고사(준비)를 시작하였다. 하루에 4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장애인 모임(울림터)에 나갔다. 그 모임은 이 땅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장애인을 위해 토론도 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을 했다. 이 모임에 나가면서 우리나라 복지가 열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_ 최옥란, 재판장님께, 1999, ‘최옥란 평전’ 119쪽 재인용

 

최옥란의 활동은 빠르게 넓고 깊어졌다. 88년 4월이 첫 집회 참여였지만, 7월 장애인올림픽조직위원회 점거농성 정리집회에서 최옥란은 대열 앞에서 구호를 선동했다. 장애인올림픽이 진행되던 10월 15일 명동성당에서 최옥란은 ‘기만적 올림픽 거부 및 생존권 쟁취를 위한 단식 농성’에 함께 했고 89년 10월 양대법안 쟁취를 위해 평민당 점거농성과 민주당, 공화당 점거농성에 함께 했다.

 

이후 11월 19일, 최옥란과 정태수 등 7인은 공화당사 강당을 점거하고 10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7인의 단식농성은 양대법안 쟁취를 공화당에 요구하기 위한 행동일 뿐 아니라 장애인 의무 고용률의 하향조정에 합의한 ‘양대법안 공대위’ 지도부에 대한 항의 행동이기도 했다. 최옥란은 울림터에서 빠르게 성장했고, 다양한 쟁점에 대한 입장을 확립해갔다.

 

1989년 11월, 최옥란 열사(왼쪽에서 세 번째)가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 회원들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 등 양대법안 제·개정을 촉구하며 신민주공화당사를 점거,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칠판에는 단식 2일째라고 적혀 있으며, 위에는 “이곳을 거쳐 가는 자여, 조국은 너를 믿노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사진제공 빈곤사회연대
 

“뇌성마비의 아픔을 어떻게 표현할까”1)

 

90년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시행되며 최옥란은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장애 문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자신의 장애인 뇌성마비에 대한 새로운 언어와 투쟁이 필요했다. 보이지 않는 만큼 존재도 희박해진다. 당시 장애여성을 위한 직업훈련은 수예가 일반적이었지만 최옥란의 떨리는 손은 수예에 적합하지 않았다. 전동휠체어와 엘리베이터가 드물던 시대, 뇌성마비 장애인의 언어장애가 지체장애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될 만큼 이해가 없던 사회에서 최옥란은 새로운 요구와 싸움이 필요했다. 장애 해방의 언어를 깨친 최옥란에게 뇌성마비 장애인의 문제는 새로운 산이 되었다.

 

“많은 약속들을 했다. 장애인 운동에 있어서 꼭 이루어져야 하고 바로 우리의 인권은 우리가 찾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지금보다 먼 예전보다는 조금은 나아졌다는 생각을 하지만 현실을 볼 땐 그래도 많은 장애인들은 고통받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뇌성인 여성으로서 주장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고민으로 그치기에는 억울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현재 (장애인)고용촉진법에서 특별히 뇌성인들이 바라볼만한 희망이 없다는 점이다.”
_ 최옥란의 일기2, 1990년 10월 14일, ‘최옥란 평전’ 146쪽 재인용

 

이러한 고민 속에서 최옥란은 장애인 의무고용률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에 맞서 민주당사 점거 투쟁에 함께 하는 등 장애인 노동권을 위한 싸움을 이어간다. 그리고 뇌성마비 장애인으로서 고민을 ‘뇌성마비연구회 바롬’으로 이어 간다. ‘바롬’의 창립에 함께한 최옥란은 정작 창립과 이후의 활동에는 간헐적으로만 결합하게 되는데, 결혼과 임신, 출산 등으로 이전처럼 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본인은 당장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갑갑했던 것 같은데. 본인이 느꼈던 문제를 운동사회가, 그러니까 육아나 여성의 문제들을 제기하는데 우리가 그걸 충분하게 논의했나? 싶을 때도 있고. (옥란이는) 항상 그래, 형 이건 아니잖아. 싸워야지..” (김병태)

 

‘장애인 청년 활동가’ 최옥란은 열심히 싸우는 사람이었다. 당면한 투쟁만을 과제로 삼지 않고 다양한 문제제기를 조직 내부에 던지고, 자기 삶의 질문을 단체로 가져와 ‘함께 싸워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때로는 조직적으로 다루기 어려웠고,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 이런 최옥란의 좌충우돌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장애 문제를 인식하고, 운동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알겠는데 니가 좀 정리를 해서 제의를 하고. 그래야지 네 문제가 받아들여지지. 이렇게 얘기를 했지. 근데 본인으로서는 정리가 안 되는데 (무리한 요구였겠지)” (김병태)

 

90년 이후 전동휠체어의 보급과 2001년 이동권 투쟁, 그리고 활동보조인 제도화 투쟁은 뇌성마비 장애인을 비롯한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이 직접적인 요구를 전면적으로 걸고 싸우는 조건이 되었다. 투쟁과 생존에 대한 최옥란의 막연한 갈망은 조금 이르게 온 미래였다.

 

 

*          *          *

1) 최옥란의 일기, 1990년 1월 11일, 최옥란 평전 135쪽 재인용 

 

▷ 2부에서 이어집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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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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